(제83信...訪歐記)
(이성춘 前高大 석좌교수) -핀란드 外勢强占 90년후 시베리우스‘핀란디아'로 愛國鼓吹 安益泰, 愛國歌이어 ‘코리아 판타지’作曲 불구 親日貶下 틸지트 條約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808년봄 이베리아 半島를 점령했다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국민적인 抗戰-게릴라 戰에 부닥쳐 5~6년간 뜻밖에 진땀나는 苦戰을 하게된다. 이시기에 北方의 러시아쪽 사정은 어떠한가. 알렉산데르 1세 황제는 나폴레옹이 隱密하게 同意 해준대로 1808~9년사이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 그들의 植民地 였던 핀란드를 뺏아서 屬領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의 好意로 한나라와 疆土를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오래전부터 핀란드를 스웨덴과의 緩衝地帶로서 점령을 노려 왔던터에 나폴레옹의 聲援으로 橫財를(?) 한 것이다. 러시아는 핀랜드를 强占한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스웨덴에게 압력을 넣어 ‘大陸 封鎖令’을 遵守 하도록 했다. 대체로 單一 민족의 나라인 핀란드는 13~19세기동안 스웨덴의 支配하에 自治權을 행사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公國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상당수를 農奴로 만들어 숨막힐 정도의 絶對皇權 체제를 유지해 오던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후에는 점차 자치권을 剝奪 당하고 자유도 抑壓받기 시작했다. 훗날 브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의 共産革命으로 일거에 皇帝체제가 붕괴되고 一族이 沒死당한 니콜라이 2세 황제 (1868~1918, 在位 1894~1917)는 卽位후 핀란드에 대한 자치권을 全面 不許하고 强壓 통치를 실시했다. 이후 핀란드 민족은 正體性을 지키며 언젠가는 壓制로부터 해방되어 獨立 국가를 세운다는 念願과 목표아래 러시아에 대해 결연한 저항운동을 펼친다. 19세기 후반기에 핀란드에는 스웨덴系 이나 엄연한 핀란드人인 시베리우스 (1865~1957)라는 卓越한 음악인-作曲家이자 愛國者가 있었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지 꼭 90년후인 1899년 34세의 시베리우스는 '交響詩 핀란디아' (Finlandia , Op.26)를 작곡한다. 당시 한 신문사의 行事에서 발표한 7개의 創作曲 중에서 맨 마지막 曲이 ‘핀란디아’ 이다. 시베리우스는 6개의 曲에는 핀란드의 傳說, 역사, 문화, 자연, 민족성을 담았고 마지막으로 ‘핀란디아’에는 러시아에 대한 抵抗과 자유 해방 독립의 念願을 含蓄했다. * * * 演奏시간이 7분30초에서 9분간으로 曲의 전반부에는 거센 파도와 같이 자유와 독립을 爭取하기 위한 激烈한 저항을 하듯 가슴을 울리는 격정을 드러낸후 점차 평화를 나타내는 고요한 音律이 지속된다. 한마디로 핀란드 국민을 覺醒케하고 愛國心을 고취시키는 曲이다. 이 때문에 작곡가는 러시아 당국의 엄격한 檢閱을 피하기 위해 핀란디아의 曲名을 엉뚱하게 ‘핀란드의 봄을 일깨우는 행복한 기분’이라고 붙여 통과되었다. 이 曲이 핀란드인 들에게 널리 膾炙되자 시베리우스는 후에 독립된 曲으로 다시 손질해서 발표한다. 필란디아는 1941년 詩人 베이코 안테로 코스케미에미가 歌詞를 씀으로서 자연스럽게 핀란드의 國歌가 됐다. 현재 시베리우스는 핀란드 국민들에게 祖國을 너무나 사랑하는 애국자요 위대한 英雄으로 추앙돼고 있다. 시베리우스의 불휴의 名曲 ‘핀란디디아’를 듣노라면 愛國歌를 작곡한 安益泰선생 (1906~1965)을 떠올리게 된다. 暗鬱했던 日帝의 총칼 밑에서 음악 수업을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간 선생은 30세때인 1936년 日帝에 强奪당한 조국의 독립을 애타게 기원 하면서 管絃樂과 合唱曲이 어우러진 ‘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를 작곡했다. 1938년 아일랜드 首都인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며 初演한 이 曲에는 苦難 桎梏 波瀾 激動의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歷程을 표현하는 동안 간간히 애국가를 주축으로 우리의 노래가 어울어진다. 한국전챙 休戰 2년뒤인 1955년 3월 스페인의 마요르카에 住居를 두고 유럽 樂壇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조국을 떠난지 25년만에 처음으로 귀국, 서울 昌慶苑의 뜰에서 국내 유일한 교향악단을 지휘해 연주를 선보였다. 安 선생은 3년간의 戰亂으로 疲弊해진, 예술과 음악을 잊었던 서울시민들에게 그동안 西歐를 돌며 자주 演奏했던 정식 교향악이 아닌 몇 曲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朴正熙 군사정부는 1962년 ~1964년까지 매년 5월 국제적인 名聲을 쌓은 安益泰 선생을 초청해서 3차례의 國際 音樂祭를 열었다. 이 기간동안 安 선생은 웃물안의 개구리 식으로, 국내에서만 소위 著名 하다는 여러 음악인들의 한심한 시샘 嫉視 惡評에 시달려야 했고 적지않게 마음의 傷處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安 선생은 1965년 9월 16일 스페인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별세했고 1977년 7월 遺骸가 祖國으로 奉還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現 현충원)내 독립유공자 墓域에 안장됐다.
* * * 그런데 말이다. ‘핀란디아’를 作曲한 시베리우스는 핀란드의 最高의 애국자이자 國民英雄으로 推仰되고 있다. 반면 애국가를 작곡한 安 선생은 生前에는 국내 음악계의 實力도 한참 모자란 낡고 고루한 일부 旣得權者들 에게서 어이없는 謀陷과 冷待를 받았는가 하면 死後에는 일부 집단 으로부터 親日派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이 어인 일인가. 全 국민이 愛唱하는 國歌를 작곡한 안 선생의 진정한 愛國心을 감히 이렇게 貶下 할수 있는가. 그토록 嚴酷한 日帝 强權통치 하에서 어쩔수 없이 행한 ‘한줌의 協力’을 꼬투리 삼아 親日 云云하는 비뚤어진 視覺과 拙見 妄見은 과연 언제쯤 사라지게 될것인가. 다시 나폴레옹 시대의 얘기로 돌아가자. 나폴레옹이 느긋해 하던 1810년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정세는 달라져 그의 大프랑스 帝國의 꿈을 흔드는 조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러시아, 스웨덴, 프로이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등이 大陸 封鎖令을 어기고 몰래 영국과 무역 거래를 한 것. 당시 유럽은 農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영국은 산업혁명이 차츰 活氣를 띄어 각종 工産品외에도 紡績機의 발명으로 綿織物을 大量 생산하고 있었다. 우선 러시아등 유럽의 주요국들은 穀物등 농산품과 鑛物등을 수출하고 영국으로부터 綿織物과 工産品들을 수입해온 터에 봉쇄령으로 交易이 일체 禁止되자 民生과 國家經濟가 서서히 沈滯, 痲痺, 破綻에 직면해 어쩔수 없이 密貿易을 ?認하거나 勸?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래 나폴레옹이 영국을 겨냥해 대륙봉쇄령을 선언한 것은 정치적 안보적인 목적외에도 영국을 제치고 프랑스가 유럽의 經濟를 主導하려는 뜻이 담겨있었으나 프랑스는 여전한 農耕체제여서 영국의 役割을 대신 할 수가 없었다. 密貿易으로 나폴레옹 체제는 뿌리채 흔들리고 權威는 서서히 墜落했다. 나폴레옹이 여러나라들에게 밀무역을 당장 중단하고 봉쇄령을 지키라고 간곡히 권고했고 이들이 외면하자 은근히 협박이 담긴 엄중경고를 보냈지만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거듭된 엄포와 警告에 아랑곳없이 이런사정으로 각국은 영국과 밀무역을 뛰어넘어 아예 정상 교역을 공공연하게 실시했다. * * * 나폴레옹은 틸지트 條約에 署名을 하고 實利만 챙긴채 封鎖令을 先導的으로 違反해 자신을 바보로 만든 알렉산드르 1세 황제에게 깊은 背信感과 함께 憤怒로 가슴을 끓었다. 러시아를 위시한 유럽 국가들이 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의 밀무역, 공식적인 교역을 2년이상 계속하자 1812년초 나폴레옹은 봉쇄령을 멋대로 어긴 여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맏형격인 러시아를 示範的으로 斷乎하게 손을 보기로, 膺懲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렇게 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실로 무리하게 斷行한 것이 1812년 6월 24일 發進한 러시아 遠征인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해서 바르샤바 大公國, 독일지역의 일부 公國들, 이태리의 公國들 에게서 出兵케한 총 60~63만여명의 兵力 가운데 40여만명을 거느리고 러시아에 큰 소리만 준비한채 진군했던 것, 하지만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나폴레옹의 지나친 自慢心외에 自國의 廣割한 國土, 氣候(겨울), 風土病, 遠征軍의 허술하기 짝이없는 食糧등의 補給 대책등을 미리 철저히 읽고 예상한뒤 對備에 나섰다. 크게 보아 대책은 4가지. 첫째는 焦土化 작전이다. 나폴레옹군이 物資나 施設을 이용하지 못하게 불을 질러 回進케 한뒤 民.官.軍은 疏開 후퇴한다. 둘째 敵軍을 철저히 무시해서 저들이 지치고 氣盡脈盡해 질때까지 어떠한 협상도 不應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가급적 敵軍과 大小의 충돌이나 전투를 피하되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1~2차례 전투에 임한다. 끝으로 敵軍이 철수-후퇴할 때에는 최대의 병력을 動員해서 단호하게 追擊, 無慈悲하게 擊破 시킨다는 것이댜. 러시아는 겁 없이 進擊해 오는 원정군의 行脚을 忍耐心을 갖고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120km인근의 보르디노에서 러시아군과의 大戰鬪로 막심한 被害를 입고도 겨우 모스크바에 入城했으나 러시아 인들은 눈을 씻고도 볼수가 없었다. 2주간 기다리다가 추위를 豫告하는 降雪에 겁을 먹고 撤軍한다. 후퇴의 길은 ‘超 苦難의 行軍길’이었다. 饑餓 추위 疾病 및 러시아軍의 집요한 추격속에 수많은 餓死 凍死 病死 戰死자를 내고 나폴레옹은 전례없는 大遠征에 失敗한 황제, 敗戰 사령관이 되어 歸還한다. 러시아에 進軍한 43만여 병력중 生還者는 10%도 못미치는 겨우 3만 5천여명에 불과했다. 遠征狂인 나폴레옹으로서는 최대의 실패-패배로서 이는 沒落의 自招하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계속) <끝>
River Blues (추억의 강가) |
출처: 宇宙feel의 블로그에 오신것 환영합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우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