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상실된 인간성,
그리고 희생자 -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전정은 미술 칼럼가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석사.
누구나 흥미를 가지고 어렵지 않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을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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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했던 학살의 고발
과거에도 지금도, 세계는 항상 전쟁 중이다. 이념과 종교로 인한 갈등은 언제나 차이와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정당화 시켰다.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민간인 학살이 아닐까.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 - 1828)는 1808년 5월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 현장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대표작 <1808년 5월 3일>이다.
뉴스 속보 현장사진같이 생생한 그림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cm,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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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5월 3일 새벽. 이곳은 마드리드의 외곽에 있는 프린시페 피오의 언덕이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시체가 산을 이루며 쌓여간다. 이것은 하루 전 5월 2일에 있었던 마드리드 시민 봉기에 대한 프랑스 점령군의 보복이었다. 그날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작업용 가위나 칼만 들고 있었다 해도 그 자리에서 사살 당하거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포로로 끌려갔다.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이들은 마드리드에 있던 부대로 보내졌으며 그날 밤 모두 처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체들은 8일 동안 썩도록 방치되었다가 한꺼번에 묻혔다고 한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이 사건을 기록한 일종의 고발장 같은 그림이다. 그림은 총살하는 군인들이 빠르고 확실한 처형을 위해 끌려온 사람들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순간을 포착 하고 있다. 함께 잡혀온 사람들이 눈앞에서 처형당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절망에 빠진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늘어서 있다. 닥쳐올 죽음을 공포어린 눈동자로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과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된 군인들 사이에 긴장이 느껴진다.
그림의 왼쪽 앞에는 이미 처형당한 사람들의 피가 낭자하다. 죽음을 맞이할 차례가 된 하얀 옷의 남자는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반면, 얼굴이 보이지 않아 마치 쳐다보지도 않고 총을 발사 하는 기계같이 표현된 군인들의 대비가 선명하다. 이 그림은 고야의 시대에 그려진 역사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시에는 지도자나 정부를 찬양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영웅적으로 묘사된 백마를 탄 나폴레옹의 초상 같은 작품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야는 이사건의 증인으로서 전쟁의 희생자를 중심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고야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바닥에 놓인 랜턴의 조명을 집중시키고, 남자의 손바닥에 예수의 십자가 성흔을 그려 넣어 숭고한 순교자의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고야는 이 남자의 모습을 통해 조국을 위해 항거한 사람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념하는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징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1808년 5월 3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는데, 그림의 혁신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야의 애국심에 대한 의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야는 프랑스와 사이가 좋았고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결국 <1808년 5월 3일>은 프라도 미술관 구석에서 점차 잊혀 지게 된다. 그러나 점차 화가들은 고야 그림들의 진보성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모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은 <1808년 5월 3일>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8, 캔버스에 유채, 252*305cm 독일, 바덴 국립 미술관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패널에 유채, 110*210cm, 파리 피카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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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가 <1808년 5월 3일>에서 보여준 죽음의 순간은 그림속의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죽음의 순간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는 두 팔을 벌리고 두려워하며 한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죽음의 순간에 직면해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 남자가 곧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의 증인이 되어 200여년을 살아오며 우리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단지 1808년 5월의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사건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모든 무고한 희생을 항변하면서 말이다. <1808년 5월 3일>은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단면이다.
그 후 이야기
고야라는 화가를 서양미술사의 계보를 이어가는 어떠한 유파에 속해 정의하긴 어렵다. 고야의 작품 양식은 로코코에서 낭만주의까지 변화하고 있어 초기작품과 후기 작품을 같이 놓고 보면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고야, <파라솔>, 1777, 캔버스에 유채, 104*152cm, 프라도 미술관
고야,<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연작>,
1819-1823,캔버스에 유채, 83*146cm,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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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어쩌다 이렇게 끔찍한 그림을 그리게 된 걸까? 젊은 시절에는 주로 종교화를 그리던 고야는, 1774년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1789년엔 스페인 화가의 최고영예인 궁정화가가 된다. 그러나 고야는 전통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들을 신처럼 미화시켜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여느 궁정화가들과는 달랐다.
고야,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336*280cm, 프라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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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자신의 후원자인 왕과 그의 가족들을 이렇게 그려낸 궁정화가는 고야가 유일할 것이다. 한 미술비평가가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 점원의 가족들”이라고 평한바 있는 이 작품 속의 사람들은 기품보다는 천박함이 더 어울리게 그려져 있다. 궁정업무에 시달리던 고야는 1793년 휴가차 세비야로 행하던 중 이름을 알 수 없는 심한 병에 걸려 그만 청력을 잃게 되고 남은 인생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이 사건은 고야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점차 어두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스스로 ‘킨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라고 이름붙인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집에서 은둔하며 섬뜩할 정도로 기괴하고 음습한 《검은그림 연작》을 그렸다. 말년의 고야는 파리와 보르도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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