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5001]서예(書藝)개념
서예란 문자를 중심으로 종이와 붓, 먹 등을 이용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예술을 말한다.
문자가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서 발전하였으나, 보통 '서예"라고 말하면 한자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붓글씨 예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새는 캘리그래피란 말을 쓰기도 한다.
2. 한자문화권의 서예
위 사진은 왕희지의 난정서로 행서 작품의 대표라 할 만하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제일로 꼽힌다.
한자나 그와 겸용되어 사용되었던 문자들을 사용한 서예. 한자는
중국 대륙에서 현대까지 수천 년간 쓰인 문자로,
서예의 역사도 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사람은
4세기 동진(東晉)의 왕희지이다.
왕희지는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까지 다섯 가지 서체를
두루 섭렵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행서가 뛰어났다. 물론 객관적으로 왕희지가 고금의 모든 서예가보다 뛰어나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그가 후대의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어 큰 영향을 끼쳤기에 서성(書聖)이라고 부른다
왕희지 이후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유명한 서예가 4명이 나타났으니
구양순, 안진경, 우세남, 저수량이다. 이들은 대부분 해서에 능통했다.
구양순의 대표작에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안진경은 안근례비(顔勤禮碑), 우세남은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저수량은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한자만이 아니라 한글, 가나, 심지어 꾸옥응으도 종종 서예의 대상이 된다.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자문화권인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과거 사대부들의 필수 소양이던 시서화 중 서가 서예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書藝(서예), 중국과 베트남은 書法(서법).
일본에서는 書道(서도)라고 쓴다.
서예라는 단어는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손재형이 만들었다.
서예를 하는 데 쓰이는 4가지 도구인 종이(화선지 같은 한지나 갱지),
붓(筆), 먹(墨), 벼루(硯)를 지필묵연, 또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한다.
기타 필요한 도구로는 종이를 누르는 데 쓰이는 서진(書鎭) 물을
담아 두는 연적(硯滴) 들이 있다.
작은 글자는 붓펜 하나만으로 해결된다.
점과 선, 획의 굵거나 가는 정도, 붓누름의 강하거나 약함
또는 가볍거나 무거움, 붓놀림의 빠르거나 느림,
먹의 짙거나 묽음, 문자의 비례 균형 등이 서예의 주요 요소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서예를 장려한다.
학생뿐 아니라 성인들의 취미로도 인지도가 있다.
연하장이나 혼례 예물 봉투, 전별금 등 봉투 같은 데에는
되도록 붓으로 써야 예의라 생각한다.
일회성 행사나 안내판에도 붓글씨는 여전히 유효하다.
가게, 전통 음식점이나 뭔가 전통 있는 가게의 이름 따위도
대부분 붓글씨로 쓴다. 천에다 가게 이름을 쓴 것을 가게의 상징으로 삼고 수제자에게만 쓸 수 있게 할 정도. 물론 젊은 세대는 그런 거 없고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나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프린트 해서 쓴다.
베트남에서도 원래 한자문화권이었던 만큼 투 팝(thư pháp)이라 불리는
동아시아권 전통적인 서예를 한다.
대한민국에서 한자서예 이외에도 한글서예를 하듯이,
베트남에서도 한자서예를 가끔 하기도 하지만
현재 사용하는 문자인 로마자로 서예를 한다.
같은 로마자로 쓰는 서양의 캘리그래피와는 다르게
베트남의 서예는 멀리서 얼핏 보면 한자서예같이 보이기도 하는,
한자 필체의 영향이 남은 로마자 서예라는 것이 특징이다.
좀 멋들어지게 써놓은 투팝 작품은 분명히 로마자인데 부적같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미술의 한 단원으로 다룬다.
주로 차분함과 집중력을 기르거나, 예술적인 이유로,
아니면 악필을 교정하기 위하여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서예에는 인품이 드러난다거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서예의 수준은 인성에 비례한다고 보는 이 기준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쓴 사람의 인성을 크게 따져
값을 매기는 경향이 크다.
순수 예술의 시선에서 볼 땐 큰 의의나 독창성이 없더라도
안중근이나 김구의 글씨가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은 이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의 정치인들을 보면,
전후세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친필 휘호의 수준은
이전 역임자들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과거에는 김구가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를 쓰는 등,
민족운동가 또는 정치인 중에 달필(達筆)들이 많았고
서예가 교양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명필로 소문 났고
심지어는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들도 집권 후 뒤늦게라도
애써 서예를 배웠는데, 이것은 붓글씨를 잘 쓰는 것이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서예라는 말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에서 실시하는 미술전람회가 처음 열려
글씨 부문이 다른 미술품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부르는 대로 ‘서도(書道)’라고 하였다가
우리의 독자적인 명칭을 붙이기 위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서예·서도라는 말은 모두 글씨라는 뜻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한자 자체가 표음문자가 아닌 상형문자의 원형을 그대로 지녀 왔고,
또 붓·먹·종이를 통하여서 나타나는 글씨는 그 자체가 벌써
조형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한자를 예술적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우리나라에도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있으나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으며,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의 대상으로는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라고 하면 먼저 한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고조선시대이므로
우리나라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였다.
현전하는 글씨의 유적은 금석(金石)·목판전적(木版典籍)·법첩(法帖)·진적(眞蹟) 등으로 구분되는데, 진적은 본인이 직접 쓴 친필이므로
가장 귀중하다.
중국에는 3,000년 전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을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 및 한(漢)·진(晉) 이래의 진적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당·송 이후 종이에 쓴 문자도 남아 있어서 당시의 필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씨의 형태와 우열이 다르고, 작품의 대소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하여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를 논할 때 그의 소품 한두 점을 보고
그 작가의 전모를 비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서예를 역사적으로 정리함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이라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이전까지는 금석문에서 그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기까지만 하여도 상당한 수의
비갈(碑碣)과 금문(金文)이 남아 있고, 고려시대는 비문 외에도 많은 묘지(墓誌)가 남아 있어 풍부한 자료를 전하여 준다.
조선시대는 전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또 글씨들을 모은 법첩이 다수 전하여지고 있다.
법첩이란 역대명인의 글씨를 모아서 돌이나 나무판에 새겨 인쇄한 것으로,
송나라 때의 『순화각첩(淳化閣帖)』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의 명가 80여 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첩으로는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이 편각(編刻)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이 고첩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를 새긴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조선 중종 때
신공제(申公濟)가 편집한 『해동명적(海東名迹)』이 전하고 있다.
이 법첩은 앞에는 조선 역대 국왕의 글씨를 싣고,
뒤에는 신라의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명가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밖에도 이우(李俁)가 편집한 『관란정첩(觀瀾亭帖)』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지정(李志定)의 『대동서법(大東書法)』,
일제강점기 때 박문회(朴文會)가 편집한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백두용(白斗鏞)의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등의 법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