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집에만 있기에 답답해 하시는 엄마는 자주 마실을 나가셨다. 가까운 아울렛 매장을 돌며 윈도우 쇼핑을 하거나, 남대문 시장을 방문해 갈치조림에 점심을 드시고 오기도 하고, 골라 떨이를 외치는 옷들을 뒤져서 가격대비 괜찮은 옷을 사오기도 하셨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득템한 날은 집에 와서 딸들에게 자랑하는 재미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간간한 나들이로 인한 콧바람은 엄마에게 젊음을 유지하는 콧바람이요 웃게만드는 즐거운 바람이였는데 코로나19가 터지고 난 후부터 엄마는 늙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엄마의 외출에 대한 제약은 건강과 웃음을 압수해 갔다.
코로나19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장막을 친 것 같다. 빨라진 퇴근,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서 주고 받는 술잔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길을 가며,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기침이라도 나오면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느 때는 지하철안에서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지면서 마스크를 벗고 싶은 충동에 중간에 내린 적도 있다. 사람이 드문 길가를 다닐때에는 마스크를 벗고 시원하게 숨을 쉬다가도 앞에서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면 바로 마스크를 쓰기를 반복한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며칠 전 설악산을 다녀 왔다. 하지만 산 아래쪽 평지만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다 보니 무언가 정해진 틀 안에서 행동하는 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마스크로 인한 편치 못한 행동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식당에서 대화를 하는 것 조차 눈치가 보여서 음식만 입에 와구와구 집어 넣고 나오니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답답한 것이 당연하다.
'페스트'를 읽으면서 지금의 상황과 비교가 되었다. 페스트가 발병하고 '오랑'이라는 도시는 폐쇄되어 사람들은 도시안에서만 생활을 해야 한다. 외부로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부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과 길이 차단된다. 사람들은 허용된 공간안에서만 지내야 한다. 코로나19로 심각한 상황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그런가 보다 하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제약을 받은 상황에 짜증과 답답함이 올라는 상황말이다.
페스트가 도시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도 하나 둘 씩 죽게 된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를 하며 절차를 거쳐서 시신을 안치하지만 시신의 수가 점차 많아져 처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시신을 태우는 장소로 곧장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든다. 죽은자에 대한 애도와 예의는 사라진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쌓이지 않도록 죽은 것이 확인 되면 화장터로 바로 옮기기 바쁘다.
안좋은 상황이 오래 갈 수록 더 힘들어 지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외부와의 차단으로 식음료도 부족하게 되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입는 것 조차 구하기 힘들어진다. 증세가 보이거나 병을 앍던 사람들의 가족은 보호소라는 이름의 수용소에서 생활을 한다. 말이 생활이지 영화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열악한 환경일 것이다.
생활속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그저 살아야 함을 느낀다. 정상적인 일상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일상의 소소함의 행복을 깨닫는다. 평소에 바라보지도 낳던 어머니의 안부를 묻게 된다. 옆에서 챙겨주던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언제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주위의 가족과 사람들의 소중함 아무렇지 않게 생각되었던 태양 , 공기, 바람의 소중함을 느낀다. 하지만 페스트가 사라지고 다시 평상의 시간이 계속되면 우리는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소중함을 잊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잊고 정신없이 살고 있을때 페스트는 다시 도시의 문을 두드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