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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21일 김 유 신
1. 들어가는 말
과학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때, 과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적 인식의 틀(framework)에 들어맞으면 새로운 자료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결과를 인식하려 한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철학적 인식의 틀과 맞지 않을 때, 처음에는 매우 진지하게 보이는 학자들도, 새 자료를 인식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당대의 지배적인 철학적 원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나왔을 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를 알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이의 한 중요한 예이다. 과학이 진전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식의 틀을 확장시키고 사고 과정의 바로 그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할 때 비로소 경험적 자료의 새로운 범위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과학담론이 형성될 때, 비로소 그전에는 마치 형이상학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겨졌던 과학이 당대의 형이상학에 얼마나 깊이 침잠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시대의 형이상학을 벗어나서 새로운 과학의 지평을 열려할 때, 그리고 새로운 과학이 그 위치를 정착시킬 때는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 물리적 실재, 자연의 본성, 과학의 철학적 의미, 사고 방식 등등이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을 담기 위하여 새로운 철학적 틀, 새로운 사고 방식, 실재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형성된다. 역사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아리스토텔레스 운동 개념에서 뉴턴 운동개념으로 변천,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으로 변천이 일어날 때 일어났던 변화들이 그것이다.
이처럼 과학이론의 근본적 변천기에는 새로운 이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물리적 실재의 개념, 자연의 본성, 과학적 사유의 본성 등에 관한 것들이 다루어지는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담론이다. 양자역학 형성기에 일어난 보어-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이러한 과학이론의 근본적 변화에 직면하여 일어난 과학적이면서 철학적 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논문은 과학담론의 형성의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연구 대상으로 양자역학의 출현과 더불어 일어난 아인슈타인(A. Einstein)-보어(N. Bohr) 논쟁을 택했다. 아인슈타인 보어 논쟁은 뉴턴 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쟁 중 하나다. 이 논쟁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기를 상보성을 주장한 보어의 반실재론이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대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파인(Fine)은 그의 유명한 저서 불확실한 게임(Shaky Game)이라는 책에서 보어와의 논쟁에서 보이는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적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과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모두를 공격하면서, 자연적 존재론적 태도(natural ontological attitude, NOA)라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물리학자들의 경우, 대다수가 보어의 상보성 이론으로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 되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논의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역사적으로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논쟁을 보어의 반 실재론이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는 일반적 이해가 잘못임을 보이려 한다. 오히려 필자는 그 논쟁은 실재론 논쟁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보어는 반 실재론자로 보기보다는 실재론자로 분류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보어의 상보성은 양자공준이라는 기괴한 현상에 직면해서 여전히 실재론을 유지하기 위해 제안된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어의 상보성을 상보적 실재론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논문의 구조는 서론을 포함하여 6장으로 구성된다. 둘째 장에서는 EPR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을 다룬다. 셋째 장에서는 보어의 EPR에 대한 반론을 다루고, 넷째 장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EPR과는 다른 아인슈타인 자신의 반론을 다룬다. 다섯째 장에서 보어와 실재론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보어의 상보성을 상보적 실재론으로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는 상보적 실재론을 완벽하게 증명하기 보다는 보어의 여러 저작들을 살펴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마지막 장은 결론이다.
2. EPR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
양자역학의 출현 후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양자역학이 지니고 있는 비고전적 성격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1927년 솔베이 학회(Sovey Conference)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미 아래와 같은 5가지 노선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Max Jammer, 1979)
(1) 양자역학의 방정식은 상대론적으로 불변이 아니다.
(2) 거시 대상의 고전적 행태에 좋은 근사치를 주지 못한다.
(3) 접촉작용(action by contact) 원리를 위반하는 상관관계가 서로 떨어진 대상들
사이에 존재한다.
(4) 본질적으로 통계적 이론으로 개별 시스템의 행태에 대해 기술 불가능하다.
(5) 교환 관계(commutation relations)의 범위는 이론이 가정하는 것처럼 실제로
넓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여러 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5)번 비판은 포기하게 되나 여전히 위의4가지 부분에 대한 비판은 견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뭉뚱거려서 1935년 3월 25일 Physical Review지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B.Podolsky), 로젠(N.Rosen) 이름으로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제목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되는 글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EPR 이라는 이름이 슬로건으로 부쳐지면서 엄청난 양의 논문이 논평으로써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양자역학 이론의 표면적 결함이나, 형식적 모순성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적절한 해명을 하기에는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따라서 비록 수학적이고 형식적인 기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성격을 띈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면, 그 논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보어의 반론도 그 깊이를 놓치게 되고, 그 논쟁이 함축하는 많은 내용을 놓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EPR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EPR이 가정하는 철학적 가정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PR 논문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EPR은 양자역학에 대한 개별적 비판을 하지 않고 이론이 성공적이기 위하여서는 갖추어야 할 기준을 제시한다. 양자역학은 그 기준의 한 부분인 완전성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고 실험을 통해서 보인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EPR에 의하면 물리이론이 만족할 만한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2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그 이론은 옳은가(correct)? 둘째 그 이론에 의해 주어진 기술은 완전한가(Complete)? 여기서 이론의 옳음은 이론의 결론과 인간의 경험 사이의 일치의 정도에 의해서 판정된다. 이 단계에서는 이론이 세계에 대한 '참(truth)'을 제시하는가에 대한 주장이라기보다 넓게 최소한 이론이 실용적으로 적합하게 해명, 예측할 수 있는가를 만족하면 옳다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에 나오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이 이론이 실재에 대한 기술로서 세계를 반영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전한'(complete)이란 용어에는 비록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EPR에 의하면 완전한 이론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완전성 조건: 물리적 실재의 모든 요소들은 각각 물리 이론 속에 대응 부분(counterpart)을 가져야 한다.
EPR에 의하면 물리적 실재의 요소는 선험적인(a priori) 철학적 고려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고, 실험과 측정의 결과에 호소함으로써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논의의 목적을 위해서는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는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아래와 같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물리적 실재의 조건(condition of physical reality): 어떤 물리적 양(physical quantity)의 값이 그 시스템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란시키지 않고 정확하게(확률 1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다면, 이 물리적 양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의 요소가 존재한다.
EPR에 의하면 이러한 물리적 실재의 조건은 완전성 조건과는 달리 필요조건이 아니고 단순히 충분 조건으로써 이 기준은 실재에 대한 고전역학 및 양자역학적 사상에 모두 적용된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이론 속에서 유도되어진 결과가 아니고 물리적 실재에 대해 그들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 가정이다.
이제 더 나아가기 전에 두 조건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시작해 보자. 완전성 조건이라는 첫 번째 가정은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명시적으로 진술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묵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소위 고전적 실재론이라는 가정이다. 실재는 이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이론의 목적은 실재와 대응관계를 통해서 실재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만약 실재가 이론에 의해 구성된다는 구성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면, 첫 번째 가정은 잘못이다. 이론이 갖고 있는 개념과 논리구조 등을 통해서, 실재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면, 참인 이론 속에 있는 진술들의 요소는 그것에 대응되는 실재의 특징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이다. 만약 이론이 완전한 이론이라면, 실재의 요소에 대응하는 것을 반드시 이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가정을 살펴보자. 일단 세계는 이론 독립적이고 이론은 이 독립적인 세계를 반영하고, 완전한 이론은 독립적인 물리적 실재의 요소에 대응되는 부분을 이론 속에 담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어떤 물리량에 대해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떤 물리량에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할 때, 완전한 이론이라면 그 물리적 실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물리량에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가 존재하는지, 않는지 이론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 두 번째 가정이다. 그런데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 세계가 이론 독립적인데, 이론이 특정 물리량에 대해 예측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 물리량에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의 존재에 대한 주장까지 한다는 것은 비약이 아닐까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곧 두 번째 가정은 불충분하다는 비판이다. 물리적 실재의 존재에 관한 주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리량에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의 존재의 존재는 오직 이론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기본 입장이며,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갖는 주장이다. 세계와 우리는 직접 대면할 수 없다. 반드시 이론이 매개가 된다. 따라서 이론을 이용하여 측정 대상이 되는 시스템을 교란하지 않고(교란하더라도 측정 과정이 완전히 이론에 의해 예측되는 경우에는 비록 교란이 있더라도 문제시되지 않는다), 특정한 물리량의 값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면, 그 물리량에 대응되는 물리적 실재는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 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정확한 예측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대로 할 수 있다. EPR은 이것을 사고실험이라는 적절한 문맥 속에서 가정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분명하여, 예측에서 존재로의 비약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이 가정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두 가정을 가지고, EPR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보이기 위해 두 단계로 논증한다.
EPR은 한 개의 자유도를 갖는 입자의 행태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를 이용한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이 파동함수는 입자의 상태(state)를 완전히 기술해내고 이 상태를 가지고 입자의 행태를 알 수 있다. EPR은 한 입자가 어떤 파동함수에 의해 주어지는 상태에 있다고 하고, 그 입자의 운동량을 그 파동함수를 통해서 그 값을 정확하게 구할 수 있도록 간단한 파동함수를 가정한다. 이 때 그 파동함수에 의해 주어지는 입자의 운동량은 정확하게 예측되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입자의 위치를 알려고 할 때는 운동량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그 파동함수로서 입자의 위치는 모든 좌표에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유도된다는 것을 보인다. EPR은 이리하여 운동량을 정확히 예측하는 파동함수에 의해 기술되는 상태에 입자가 있을 때, 입자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값은 예측할 수 없으나, 단지 직접 측정함으로서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측정은 입자에 영향을 주어서 그것의 상태를 변경시켜 버린다.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나면 운동량은 이미 위에서 제시한 파동함수에 의해 기술되는 상태에 있지 않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한 입자의 운동량을 알 때, 그것의 위치는 물리적 실재를 갖지 못한다는 일반적 결론을 내린다.(EPR, 1935, 125) 이것을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 물리적 양들 A와 B에 비 교환적(non-commute)인 연산자에 각각 대응되는 두 물리적 양에 대응되는 연산자 즉 A와 B가 서로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들 중의 하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다른 쪽의 그러한 지식을 배제한다. 그리고 실험적으로 후자를 측정하려 하면 시스템의 상태를 변경시켜 전자의 지식을 파괴해 버린다. 여기서 EPR은 첫 번째 단계로서
S: 파동함수에 의해 주어지는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지 않다.
R: 두 물리적 양에 대응되는 연산자(operator)들이 서로 교환되지 않을 때
그 두 물리적 양은 물리적 실재를 가질 수 없다.
라고 할 때 S or R을 끌어낸다.(ibid., 126)
둘째 단계로 EPR은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수행하여, 양자역학의 가정인 -S가 모순임을 끌어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R을 끌어낸다.
".... 우리가 두 시스템 1 과 2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시간 t=0 에서 t=T 사이에 두 시스템을 서로 상호 작용시킨 후 두 부분을 서로 더 이상 상호 작용을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나아가서 t=0 일 때 두 시스템의 상태를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우리는 쉬뢰딩거(Schrodinger )방정식을 이용해서 결합된 시스템 I+II의 상태를 계산할 수 있다; 특히 어떤 t>T에 대해서. 대응되는 파동함수 파동함수를?라고 하자. 그러나 상호작용 후에 그 시스템들의 어느 하나가 처해 있는 상태를 계산할 수 없다. 이것은 양자역학에 의하면 집속파동의 환원으로 알려진 과정에 의한 측정의 도움으로서만 알려질 수 있다. 이 과정의 본질적 것을 생각해보자." (ibid, 126)
이때 시스템 I의 물리적 양 A를 측정하면, 집속파동(wave packet)의 환원을 이용해서 시스템 II의 파동함수를 알게되고 그것을 이용해서 시스템 II의 물리적 양 A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시스템 I, II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질 수 없도록 멀리 떨어져 있도록 했기 때문에 시스템 I을 측정해도 시스템 II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시스템 II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것의 물리적 양 A를 정확하게 예측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스템 II의 물리적 양 A는 실재성 (Reality)을 가진다. 그 다음에 시스템 I의 물리적 양 B를 측정한다면 마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시스템 II의 파동함수를 계산해낼 수 있고, 이것을 이용해서 시스템 II의 물리적 양 B를 계산할 수 있다. 곧 시스템 II에 영향을 주지 않고 시스템II의 물리적 양 B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시스템 II의 물리적인 양 B는 실재성을 가진다. 첫 번째 시스템에 대한 두개의 측정의 결과로서 두번째 시스템은 두개의 다른 파동함수를 가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측정하는 시각에는 두 시스템은 더 이상 상호작용 하지 않기 때문에 첫 번째 시스템에 일어나는 결과에 의해 두 번째 시스템에는 일어나는 실재적 변화는 전혀 없다. 이리하여 똑같은 실재(reality)에 두개의 다른 파동함수의 부여가 가능하다. 곧 이 두개의 다른 파동함수는 동일한 실재에 귀속된다. EPR은 물리량 A, B를 운동량과 위치로 했을 때, 그 각각에 대응되는 연산자들이 서로 교환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고, 첫 번째 시스템의 A 또는 B 중 어느 하나를 측정함으로써 두 번째 시스템에 전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운동량 또는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EPR의 실재성의 기준에 의하면 운동량과 위치는 동시적 실재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EPR은 "파동 함수는 물리적 실재에 대해 완전한 기술을 제공한다는 가정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 교환되지 않는 두개의 연산자에 대응되는 두개의 물리적 양이 동시에 실재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EPR, 1935, 129) 이리하여 EPR은 -S -> -R을 끌어낸다. EPR 논증의 구조를 형식 논리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S or R / -S -> -R ... S
그런데 EPR은 한 시스템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운동량과 위치의 동시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PR은 이러한 반론을 예견하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P와 Q(시스템 II의 운동량과 위치에 대응되는 연산자) 양 중의 하나 또는 다른 것 그러나 동시에 둘 다가 아닌 하나가 예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동시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P와 Q의 실재성이 첫 번째 시스템에 수행한 측정 과정에 의존하게 만드는 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두 번째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재성에 대한 어떠한 이성적인(reasonable) 정의도 이것을 허용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ibid, 130)
EPR은 실재성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이것을(첫 번째 시스템에 수행하는 측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두 번째 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한다. 사실상 EPR의 논문에서는 입자 1과 입자 2는 일단 처음에는 서로 상호 작용한 후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상황을 설정한다. 이 때 입자 1에 측정하는 행위는 입자 2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직관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입자 2의 물리적 성질은 입자 1의 측정과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가정한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운동량과 위치는 동시적 실재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양자역학은 이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은 물리적 실재의 기술로 불완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EPR 주장의 요지이다. EPR의 논증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개념과 이론의 완전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보이려 한 것이다. 원격작용의 거부라는 국소성 문제와 분리성 등에 관한 문제의 중요성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그 논증 속에는 묻혀져 있다. 이것은 나중에 벨의 정리와 아스펙의 실험 등으로 발전되어 그 논점이 더 분명하게 된다. 그렇다면 EPR에 대해 보어의 반론은 어떠한가?
3. 보어의 EPR에 대한 반론
보어는 1935년 EPR과 동일한 제목의 논문에서 EPR에 대해 반론을 편다. 보어는 먼저 자신이 이해한 불완전성에 대한 EPR 논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뒤이어 질문과 비판을 수행한다. 보어의 반론의 핵심은 국소성, 비국소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EPR의 "물리적 실재"의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이 기준에 의해 시스템에 운동량과 위치에 동시적인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 그의 논문에서 명백히 보여주려 했다. 먼저 보어의 EPR 논증에 대한 요약을 살펴보자.
물론 EPR에 의해 정식화된 '물리적 실재의 기준(criterion of physical reality)'은 양자현상에 적용했을 때는 본질적인 애매성을 가진다. . . . . "물리적 실재"와 같은 표현에 분명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범위는 물론 선험적인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으며, 실험과 측정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 위에 세워져야 한다."(Bohr, 1935, 130 -131)
EPR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따라, 물리적 실재를 선험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시스템에 교란없이 물리량의 값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면, 이러한 물리량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하여 측정이란 조작적 단어와 연결시켜 물리적 실재의 기준을 정의한다.
"우리가 아래에서 돌아갈 흥미 있는 예를 이용하여, 그들은 다음으로 고전역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도 적절한 조건 아래 탐구하려는 시스템과 이전에 상호 작용한 전적으로 다른 시스템들에 수행되었던 측정으로부터 그 역학적 시스템의 기술에 속하는 어떤 주어진 변수 의 값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나아간다. 그들의 기준에 의하여 그러므로 저자들은 그러한 변수들에 의해 표상되는 각각의 양들에 물리적 실재의 요소를 부여한다. 게다가 역학적 상태의 기술에서 두 개의 공액적 변수 모두에게 명확한 값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양자역학의 현재의 형식체계의 잘 알려진 특징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형식체계는 불완전하고 더 많은 만족스러운 이론이 개발될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다."(Bohr, 1935, 131)
보어는 상호 작용한 두 시스템의 한 편에 공액인 두 변수를 동시에 측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쪽에 교란하지 않고 두 공액 변수의 값을 동시에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EPR 논증의 약점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보어는 여기에 대해, 이러한 논증은 수학적으로 정합적인 형식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건전함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EPR이 지적한 외면적인 모순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관심 두는 종류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고전 물리학적 관점이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답변을 시작한다. 이상의 요약에서 보면, 보어의 EPR에 대한 반론의 핵심은 EPR의 물리적 실재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보어는 그의 실험적 장치가 단순히 어떤 물리량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물리량을 애매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체가 불가능함을 다루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 . . 적절한 양자현상의 연구를 위해 적합한 각각의 실험 장치에서는 단순히 어떤 물리량의 값에 대한 무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러한 양의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룬다."
보어는 위의 인용문의 마지막 진술을 EPR 실험에 적용하여 EPR의 물리적 실재의 기준이 애매한 이유를 보인다. 두 개의 자유 입자의 특정한 양자역학적 상태가 두 개의 평행하는 슬릿을 가진 고정된 격막을 포함하는 하나의 실험장치에 의해 재생될 수 있다. 슬릿의 폭은 두 슬릿 사이의 간격보다 훨씬 적고, 각 슬릿으로 초기 운동량을 가진 한 입자는 다른 입자와는 독립적으로 통과할 수 있다.
"만약 이 격막의 운동량이 입자의 통과 후는 물론 통과 전에 정확하게 측정된다면, 우리는 동일한 방향으로 그들의 초기 위치의 좌표들의 차이는 물론 두 달아나는 입자의 운동량의 슬릿에 수직인 성분의 합을 사실상 알 것이다; 반면에 물론 두 개의 공액량 즉 그들의 운동량의 성분의 차이와 그들의 위치의 좌표의 합은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이러한 배열에서는, 그러므로 잇따른 입자들 중 한 개의 위치 혹은 운동량의 어느 하나의 측정은 자동적으로 다른 입자의 위치 혹은 운동량을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각 입자의 자유 운동에 대응되는 파장이 슬릿의 폭에 비해서 충분히 짧다면. 위의 저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이 된 입자와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은 과정에 의해서 후자의 양 중에서 어느 것을 우리가 결정하기를 원하든지 간에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가진 단계에 직면한다"
격막의 한 슬릿을 통과한 입자의 위치 혹은 운동량의 예측에 적합한 실험적 과정들 사이에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보어에 의하면, 이 선택의 자유에 의해 운동량과 위치의 동시적 실재를 인정해서는 안되고, 상보적 고전적 개념의 모호하지 않은 사용을 허용하는 서로 다른 실험적 과정들 사이의 합리적 차별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고 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입자들 중의 어느 하나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그것의 행태와 공간적 틀을 정의하는 받침대에 고정적으로 정착되어 있는 어떤 실험도구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한 측정은 기술된 실험적 조건 아래에서 그러므로 입자가 슬릿을 통과할 때, 이러한 공간적 틀에 관하여,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알려지지 않을 격막의 위치에 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정말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나머지 장치 상대적으로 다른 입자의 초기 위치에 관한 결론을 위한 기초를 획득한다. 첫 번째 입자로부터 언급한 받침대로 전해지는 본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운동량을 허용함으로서, 우리는 이 과정에 의해서 어떤 미래의 가능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차단시킨다."
마찬가지로 운동량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격막과 두 입자들로 구성되는 시스템에 적용함으로서, 그러므로 우리의 기초 두 번째 입자의 행태에 관해 예측에서 운동량의 관념의 모호하지 않은 적용을 위한 기초를 잃어버린다. 역으로 만약 우리가 입자들 중 하나의 운동량을 측정할 것을 선택하면, 우리는 그러한 측정에서 통제 불가능한 불가피한 변위를 통해서 이 입자의 행태로부터 나머지 장치에 상대적으로 격막의 위치를 연역하는 어떠한 가능성도 잃어버리고, 이리하여 다른 입자의 위치에 관하여 예측을 위한 무엇이든지 그 기초를 갖지 못한다."
EPR은 시스템이 정확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가진다는 것을 추론하기 위하여 이론과 관찰을 사용할 수 있는 실험적 상황을 생각해냄으로서 양자 역학의 불완전성을 보이려 하는데 반해, 보어는 실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장치를 전제하지 않으면, 애매하지 않게 물리량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위치의 측정을 위한 실험장치로서는 위치만 측정하지 거기서는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는 어떠한 연역적 기초를 마련하지 못하고, 따라서 위치를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운동량은 애매하지 않게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운동량의 측정을 수행하는 장치로서는 위치의 측정이 불가능함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위치를 애매하지 않게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두 실험 장치는 서로 배타적이지만, 상보적이다.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는 관찰 장치의 구성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러한 물리량을 정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보어의 주장은 얼핏보기에는 정말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보어의 주장이 갖고 있는 이러한 점을 EPR은 적절하게 지적한다.
"만약 두 개의 혹은 더 많은 물리량이 그들이 측정되거나 혹은 예측될 수 있을 때 그 때에만, 그 물리량들이 실재의 동시적인 요소가 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물리량 운동량과 위치 중에서 하나 혹은 다른 하나 그러나 둘 다 동시적으로는 아니게 예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동시적으로 실재적일 수 없다. 이것은 위치와 운동량의 실재를 첫 번째 시스템에 수행했던 측정과정에 의존하게 만들며, 그 측정과정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두 번째 시스템을 교란시키지 않는다. 어떠한 합리적인 실재의 정의도 이것을 허용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EPR, 1935, 780)
보어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는가? 우리는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예측할 수 있고 이론적 예측을 확증하는 데 있어, 어떤 변수를 측정해야 하는 가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위치를 선택하면 우리는 운동량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배제해버리는 실험적 배열을 구성함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운동량을 선택하면 마찬가지로 역으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보어는 상호작용 속에서 관찰되는 그대로의 물리적 시스템이 실재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보어의 요지는 양자 공준으로 인해 우리는 한 시스템의 상태를 정의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고전물리학적 개념을 그와 상호 작용하는 관찰하는 시스템의 상태로부터 분리하여 정의하거나, 경험적 지시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어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이론은 도구적이고 실재는 물 자체로 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과학 이론이 실재를 반영하고 재현한다는 실재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렇다고 보어는 도구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편 것이 결코 아니다. 보어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이해는 선험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경험에 기초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점은 과학적 실재론과 견해를 같이 한다. 따라서 물리적 실재에 대한 그의 원초적 태도 변경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도구주의자로서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1939년 논문, "원자 물리학에서 인과의 문제"에서 보어는
"사실상 (EPR) 역설은 양자역학의 형식에서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양자역학의 형식에 의하면 이러한 (상태)개념의 정의에 포함된 외부조건들이 보조 시스템의 더 이상의 적합한 통제에 의해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고정될 때까지, "상태"의 개념의 어떠한 잘 정의된 사용도 대상이 접촉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된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만들어질 수 없다."
여기에서 보어의 주장은 명백하다. 고전 역학에서는 시스템의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 시스템과 접촉하는 외부조건에서 분리된 상태를 가정할 수 있다고 보고 그 때의 상태를 구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외부조건과 즉 관찰 조건과 분리된 시스템의 "상태"란 관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보어는 양자 공준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관찰 대상은 관찰자와 분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인 속성을 가질 수 없다. 그에 비해 관찰자와 상호작용 속에서만 관찰 대상의 물리적 속성 개념 자체가 정의된다. 예를 들면 대상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라고 했을 때, 파동이라는 말은 관찰 시스템과 파동-상호작용이 가능할 때 부르고 입자란 말은 관찰 시스템과 입자-상호작용 할 때 부른다. 관찰 시스템과 상호작용을 떠나서 전자는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두 상호작용은 배타적이다. 그런데 보어는 이 두 방식의 상호작용 방식의 관계를 상보적이라고 한다. 관찰 시스템과 독립적인 대상의 물리적 "상태"란 관념의 잘 정의된 사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찰 독립적인 실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찰 시스템에 대해 독립적인 대상의 "상태"는 경험적 지시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추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 물리학적인 상태변수, 예를 들어 운동량이나 위치는 당연히 관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의 속성들을 지시한다는 가정은 선험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고전 물리학적 틀에서는 경험적으로는 물론 정당화되어왔기 때문에, 자연히 선험적으로 당연하게 여겼을 따름이다. 그러나 원자 현상에서는 그 두 변수는 관찰 상황에 상대적으로, 또는 관찰장치를 고려한 경우에만 값을 가진다고 정의될 수 있다. 양자역학은 여기에 경험적 보증을 준다. 불확정성 원리가 이것을 보증해준다. "위치"는 위치 측정장치와 관련 속에서만 경험적 대상을 지시하고, "운동량"은 운동량 측정 장치와 관련하여, 경험적 대상을 지시한다. 그 두 측정 장치는 동시에 두 변수를 측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양립 불가능하고, 상보적이다. 원자 영역에서는 시스템이 파동 측정 장치와 관련해서 파동이지 파동 측정 장치를 떠나서 파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추상이다. 마찬가지로 입자도 그렇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상보적이다. 그렇다면 보어의 상보성은 조작주의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이 점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EPR의 실험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시스템에 가해지는 두 가능한 측정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지 선택의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 물리학적 측정과 지시 개념에 의하면, 물리적 시스템의 상태에 관한 지식은 그 시스템의 측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위치"나 "운동량" 같은 용어에 경험적 의미를 주기 위하여, "시스템"은 두 변수 중 어느 것이 관찰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보어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위치나 운동량의 측정을 위한 실험적 장치의 배열들은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관찰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폴스(Folse)는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어떤 "현상적" 대상들의 속성들을 지시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폴스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개의 구별되는 "현상적" 대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있는 어떤 동일한 대상을 가정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의 운동량 또는 그 시스템의 위치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입자 1(시스템 1)의 운동량이거나, 입자 1(시스템 1)의 위치이거나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두 변수는 측정장치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가? 이것은 마치 내가 관찰하지 않으면 그 입자는 그 위치에 있지 않는가? 내가 보아야만 그 위치에 있는가? 이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는가? 필자의 관점에서는 보어는 답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측정 대상은 외부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독립된 시스템이란 것 자체는 추상이고 그 추상적인 것에 경험적 값을 부여하는 것은 양자 이론에 의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운동량이란 변수에 경험적 값을 주기 위해서는 측정 장치를 고려해야 하고 그 장치와 독립적인 대상의 위치란 개념은 추상이고 양자이론에 의하면, 위치의 측정은 운동량을 통제 불가능하고 분석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운동량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러한 생각을 공격하기 위해 이 변화는 측정에 의한 "교란"이기 때문에 EPR은 교란 없이 측정한다는 개념을 이용한 것이다.
보어는 위치의 측정은 고립된 시스템의 운동량의 정의 자체가 잘못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 . . "상태"의 개념의 어떠한 잘 정의된 사용도 대상이 접촉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된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만들어질 수 없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보어는 시스템을 전체로 보기 때문에 "교란없이" 시스템의 한 부분의 운동량을 측정한다는 것은 애매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호 작용하는 다른 시스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향이란 것의 본성에 대해서는 보어는 더 이상 분석하지 않은 것 같다. EPR 사고 실험은 벨 정리의 발견과 더불어 EPR-Bohm-Bell 사고 실험으로 정식화되고 아스펙 등에 의해 실제 실험으로 구현되었다. 여기에는 EPR의 결론과 달리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여기서 국소성, 분리성, 결정론, 실재론 등의 철학적 문제들이 나오게 된다.
4.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
아인슈타인은 EPR 논문은 현학적인 구조로 인해 자신의 의도인 인과적 국소성이 묻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아인슈타인은 1948년 3월의 편지에서 막스 보른(Max Born)과 주고 받은 편지에서 이 점을 잘 이야기한다. "b지역에 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a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측정이 행해지느냐에 의해, 또 a 지역에서 측정이 행해졌는지 여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누구든지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면, 양자역학이 실체를 완전히 묘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a 지역에서의 측정의 결과로서 b 지역에 존재하는 실체가 갑자기 변화함을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점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물리적인 직관과 상충한다."
아인슈타인의 반론은 EPR과는 매우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적 실재의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동시에 이론의 완전성 조건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자신의 관점은 1936년에 Journal of the Franklin Institute에 발표된 논문 "물리학과 실재"에서 제시되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적 기술은 단순히 수많은 원자들의 평균적 행태를 해명하는 수단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논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별 현상에 관한 완전한 기술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태도는 다음의 구절에 표현되어 있다: 믿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없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과학적 본능과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의 완전한 개념을 위한 탐구를 보류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반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EPR 사고 실험에서처럼 대상 A와 B가 상호 작용한 후에 멀리 떨어졌을 때, 대상 A의 물리적 상태는 멀리 떨어진 대상 B에 어떤 측정을 하느냐에 의존하는 상태벡터 ? 또는 phi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
2) 두 대상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 대상에 행한 측정은 다른 대상의 물리적 상태에 광속 이상의 속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분리의 원리와 특수상대성 이론)
3)그러므로 EPR 사고 실험에서 대상 A는 ?로 기술되거나 ? phi로 기술되거나에 관계없이 동일한 물리적 상태에 있다.
4) 상태벡터는 대상의 물리적 상태를 유일하게 기술하기만 하면 물리적 상태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 된다.
5) EPR 사고 실험에서 대상 A의 물리적 상태는 ? 함수나 ? 함수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 기술될 수 있다.
6) ?나 ?는 대상 A의 물리적 상태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 될 수 없다.( 4)에 의해서)
7) 따라서 상태벡터는 대상의 물리적 상태를 완전한 기술이 될 수 없다.
8) 양자역학은 상태벡터를 대상의 물리적 상태를 완전히 기술한다고 주장한다.
9)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한 이론이다.
가정 1)은 보존의 원리로서, EPR, 보어 모두 받아들인다. 가정 2)는 분리성 원리와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한 국소성 원리로서 아인슈타인은 분리성 원리는 그의 선험적인 고전적 실재론적 직관에 의해 그리고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한 경험적 이론에 의해서 타당한 가정으로 받아들인다. 아인슈타인은 1948년 3월의 편지에서 막스 보른(Max Born)과 주고 받은 편지에서 국소적 인과 즉 분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 .b지역에 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a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측정이 행해지느냐에 의해, 또 a 지역에서 측정이 행해졌는지 여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이 가정 2)는 아스펙 등에 의해 실험되어 부정된다. 보어는 3절 EPR에 대한 반론에서 지적했듯이, 보어는 가정 2)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정 3)은 가정 1), 2)에서 유도된다. 가정 4)는 완전성 원리로서 양자역학의 중요한 주장이다. 이 완전성 조건은 물리적 상태에 대한 오직 하나의 기술만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가정 5)는 가정 1), 2), 3)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리고 가정 4)와 5)로부터 6), 7), 8)의 추론을 거쳐서 9)번에 도달한다.
그런데 가정 4)와 5)는 모순이다. 가정 5)는 가정 1), 2), 3)에서 나오는데,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2)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지만, 보어는 2)를 거부한다. 아인슈타인은 2)와 4)의 모순으로 2)를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4)를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쉬뢰딩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원할 것이다: ?는 실재 시스템의 실재 상태와 1대 1 대응 관계에 있다. . .만약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이론에 의한 완전한 기술에 의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으면, 나는 이론적 기술을 '불완전'하다고 부른다(Howard, 1985, 179)
그런데 이 완전성 조건은 관찰에 관계없이 물리적 대상은 어떤 물리적 상태를 이미 가지고 있음을 함축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과 실재" (Einstein, 1948)와 "자전적 단상들' (Einstein, 1949a, 83-87)에서 만약 상태벡터가 개별대상의 물리적 상태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간주된다면, 어떤 경우에 측정은 측정된 양의 값을 드러내기보다는 창조하는 것이다(Einstein, 1948) 주어진 완전성 논제에서 만약 대상이 어떤 물리량의 고유벡터가 아닌 상태벡터에 기술되는 물리적 상태에 있으면, 그 양은 그 상태에서 명확한 값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양의 측정은 그 양의 이미 존재한 값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일으키는 것이다(bring about)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완전하다는 완전성 논제는 물리적 실재가 측정의 과정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는 물리적 실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찰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의 관점과 상충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적 이론의 목적은 우리의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 가능한 완전하게 기술하는 것이다.(Einstein, 1949b, 667)
아인슈타인에게는 EPR 사고 실험에서는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대안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에 직면해 있고 가정 4)완전성 논제를 유지할 것인가 또는 논제 2), 분리의 원리를 유지할 것인가에 2) 번을 유지하고 4) 완전성 논제를 버린 것이다. 보어는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완전성 논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리의 원리를 버린 것이다.
5. 보어와 실재론: 상보적 실재론
지금까지 논의에서 보면, 보어를 반실재론자로 분류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실재론자로 보고, 보어의 상보성을 반 실재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보어를 물리학에서 물리적 실재라는 객관적 기술을 추방하고 물리학의 목표는 현상을 구제하는 것이라는 도구적 메시지를 가르치는 현상주의자로서 바라보는가 하면, 최근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상보성을 반인식론을 주창하는 해체주의와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보어는 원자적 대상을 포함해서 외부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보어가 반 실재론자로 분류될만한 여러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는 실재론이란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적 가설이기 때문에, 보어의 그러한 주장들은 반실재론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미시-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기초가 되어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실재론, 상보적 실재론으로 해석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여기서는 상보성을 실재론으로 해석하기 위한 논증을 완벽히 하려하기 보다는 보어의 글에서 보이는 여러 주장을 살펴서 비록 그 실재론은 전통적 실재론과는 다르지만, 보어는 실재론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것을 상보적 실재론으로 제안하려 한다.
보어는 원자의 실재와 외부세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굳게 믿고있다. "물리학에서 우리의 문제는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의 조정에 있다."(Bohr, 1934, 1) "원자의 실재에 관한 모든 의심은 제거되어왔고 원자들의 내적 구조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획득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지각 형식의 자연적 한계가 교훈적인 방식으로 생각나게 한다"(Bohr, 1934, 103) 보어는 또한 원자에 관한 지식은 객관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원자적 대상에 관한 모든 애매하지 않은 정보는 실험적 조건들을 정의하는 물체에 남아 있는 영구적인 작업들로부터 유도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 전자의 충돌에 의해 야기된 포그래픽 플레이트의 점 같은. . . 원자현상에 대한 기술은 이러한 점에서 어떠한 명시적 지시도 어떤 개별 관찰자를 향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완벽하게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Bohr, 1968, 3)
그러나 보어의 원자에 대한 이러한 객관성 주장과는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주장도 있다. 1939년 논문, "원자 물리학에서 인과의 문제"에서 보이는 보어의 주장을 보자.
"사실상 (EPR) 역설은 양자역학의 형식에서 완전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양자역학의 형식에 의하면 이러한 (상태)개념의 정의에 포함된 외부조건들이 보조 시스템의 더 이상의 적합한 통제에 의해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고정될 때까지, "상태"의 개념의 어떠한 잘 정의된 사용도 대상이 접촉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된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만들어질 수 없다."
과연 이 주장이 반 실재론적인가를 과학적 실재론의 기본 입장과 연결하여 논의 해보자.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은 대략 다음의 2가지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세계는 정신과 개별관찰자의 언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2) 성숙한 이론은 이 세계를 전형적으로 지시하며
물론 이 주장은 철학적 주장이고, 과학이론의 산물이 아닌 것 같지만, 과학적 실재론이 경험적 가설이기 때문에 1)과 2)의 내용은 새로운 과학적 경험과 정합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독립성의 의미를 새로운 경험적 현상에 직면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잠정적으로 이 독립성을 기계론적 표상을 가지고 이해하는 방식이 있고, 상보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전역학이 가지는 기계론적 표상에서는 시스템의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 시스템과 접촉하는 외부조건에서 분리된 상태를 가정할 수 있다고 보고 그 때의 상태를 탐구한다. 즉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는 독립 개념의 필수적 기초다. 그러나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세계 속에 있고 이들이 분리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리가 독립의 기초이고 독립이 실재론의 최소 주장이 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는 관찰의 객관성 유지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바로 독립성 개념을 자동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외부조건과 즉 관찰 조건과 분리된 시스템의 "상태"란 관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보어는 원자가 지니는 속성에 관해서는 관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찰 상대적으로 그 속성 자체가 정의된다고 주장하는 데, 그 이유는 양자 공준으로 인해 "양자역학에는 대상 자체의 행태와 측정장치와 대상과의 상호작용 사이에 명확한 구별은 이루어질 수 없다."(Bohr, 1958, 61)고 보기 때문이다. 보어의 이 주장은 관찰 독립적인 실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미가 없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찰 시스템에 대해 독립적인 대상의 "상태"는 경험적 지시체를 갖는 것이 아닌 추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관찰조건과 관찰대상은 서로 연결되어 실재적 분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원자의 객관성의 부정이 아니라, 양자 공준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관찰 대상은 관찰자와 분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인 속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찰 대상과 관찰자의 분리 불가능성은 실재론의 최소한 주장인 관찰자 독립성을 위반하기 때문에, 반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 대상과 관찰자의 분리불가능성이 바로 개별 관찰자의 특정한 성질, 특정한 주관성이 개입되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관찰의 객관성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독립성에 대한 고전적 이해, 또는 기계론적 표상을 통한 이해는 잘못이다. 그러면 고전적 독립성의 부정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양자이론에서는 고전역학과 달리 같은 실험 장치를 가지고 대상의 모든 속성을 원리적으로 다 측정할 수 없다. 서로 공액인 물리적 변수는 다른 실험 장치를 사용하여 측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한 변수의 측정 장치로 다른 변수를 측정할 경우 이전의 변수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다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양자 공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보어에 의하면 서로 다른 실험 장치에 의해 얻어진 원자적 대상에 대한 증거들은 단일한 그림으로 결합시키려고 시도할 때,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멋진 종류의 상보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한 증거는 대상에 관해 받아들일만한 모든 지식을 드러내어 준다.(Bohr, 1958, 4) 예를 들어, 기계적 표상에 의하면, 원자 현상을 기술하는 기술방식은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되지만, 양자역학에 의하면, 원자현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실험적으로 얻어진 증거들은 한 가지 그림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공간 기술에 의해 표현되는 증거가 있는가 하면, 에너지-운동량 기술에 의한 증거도 존재한다. 또한 파동이라는 기술에 의해 표현되는 증거도 있고 입자적 기술에 의해 표현되는 증거도 있다. 그러나 이들 두 방식의 기술들은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기술 방식에 의해 얻어지는 속성은 한 실험 장치로 측정할 수 없고 동시에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이 둘의 기술에 의해 얻어진 증거들은 원자 현상을 완전히 기술해내고, 그 관계는 상호모순이 아니라, 상보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거짓으로 간주하지 않고 공존이 가능하다. 보어는 두 기술의 대상은 원자이고, 보어는 그러한 원자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원자를 기술할 때, 양자 공준 때문에, 관찰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이 완벽히 기술되지 않는다는 것은 원자의 존재가 우리에게 의존하거나 규약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어의 주장처럼 원자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되, 고전적 실재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기괴하게 보이지만, 원자 세계는 상보적 기술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의 세계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실재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 실재론이라 부를 수 있는 형이상학에 이 세계가 들어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로서의 독립은 사실상 기계론적 표상에 기초하는 고전 물리학적 경험에 들어맞는 경험적 개념인데, 마치 자명한 것처럼 오해되어, 양자이론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독립개념을 사용하려 하는 것 같다. 상보적 실재론은 원자의 세계에 대해 경험에 충실하려는 자연주의 정신을 따른 것이다. 보어가 상보성을 주장할 때, 원자의 실재성을 부정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기술(이바와 파동의 기술)의 존재는 이론이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모든 속성은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된다는 믿음은(기계적 표상에 의해 가정된 것이다)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닌, 선험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상보성은 실재의 모든 속성은 우리가 시각화 할 수 없고, 서로 배타적인 기술(記述)에 의해 상보적으로 통합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상보적 실재론 역시 과학적 실재론에 속한다. 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적 정의를 구체화시켜서 정의해 볼 수 있다.
1) 세계는 정신과 개별관찰자의 언어에 상보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2) 성숙한 이론은 이 세계를 전형적으로 지시한다.
이 상보적 독립성에 관해 살펴보자. 실재론은 경험적 가설이기 때문에, 실재론의 관찰 독립이란 것은 분명히 경험에 의해 그 의미를 지녀야 하지 규약적이거나,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미시세계에 대한 경험적 증거에 의하면 실재론의 핵심이 되는 관찰 독립이란 것의 의미는 고전물리학의 관찰 독립이라는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관찰 독립의 의미는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에 기초한다. 이 때 구별의 의미를 살펴보자. 우리가 공간-시간 기술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측정하려는 대상과 측정하는 시계와 자와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상의 바깥에 대상과 독립적인 시계와 막대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전역학에 의하면 측정대상과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은 이론에 의해 설명되어 보상할 수 있기 때문은 상호작용을 결국 무시하고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자가 관찰을 수행할 때, 관찰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하더라도, 상호작용을 분석하여 관찰자의 영향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서로 분리되며,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고전 역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서로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관찰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은 고전물리학의 기본 세계관인 개체주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적인 상태변수, 예를 들어 운동량이나 위치가 관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의 속성들을 지시한다는 가정은 선험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상, 경험적으로도 오랫동안 정당화되어왔다. 따라서 일상적 경험에서 운동량이나 위치가 관찰 독립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치 그것을 언제든지 부정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경험적 결과라기보다 선험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미시세계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 시에 일어나는 행동의 양자로 인해 그 상호작용은 양자이론에 의해 통제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 즉 시간-공간의 관점을 적용하여 위치를 알면, 측정장치와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측정장치를 통과하는 운동량을 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피할 수 없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양자 이론에 의하면, 그 한계는 공간과 시간의 정의 과정 속에 절대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관찰 대상과 관찰자의 구별은 양자역학에서는 불가능하다.
"고전 역학에서는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실험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경우에 이미 우리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다른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여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도 어떤 사건의 시간에 관한 정보는 독립적인 시간 스케일과의 관계 속에 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이 사건의 시간과 다른 사건의 시간을 비교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없다. 거기에서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 관념은 그것을 지적하는 시간이 교란없이 두 번 읽혀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개념이 한계 배경에 놓여있는 지를 분석하는 데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출현 이후에 실재론에서 주장하는 외부세계의 관찰 독립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양자역학이 주장하는 관찰 대상과 측정장치와의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2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관찰대상의 속성이 측정 행위에 의해 창조되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찰대상과 측정장치는 전체로서 보아야한다는 전체론이고, 만약 첫 번째 의미라면 이것은 분명히 반실재론이다. 그러나 보어는 첫번째를 부정한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전체론적이라면, 우리가 관찰 대상과 관찰장치와의 명확한 구분을 지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모든 관찰대상은 모든 형태의 관찰장치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즉 개별 관찰 대상은 개별 관찰 장치와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형식에 따라, 양자물리량의 값은 관찰장치와 물리계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이 정의는 우리가 구성하는 그러한 것이거나, 규약적이거나, 개별 관찰자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체론적인 세계를 관찰하려 할 때,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구별은 우리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이론이 밝혀준 방식에 따라 구별이 이루어질 따름이다. "플랑크에 의해, 기초적인 행동의 양자의 발견은 물질의 제한된 가분성이라는 고대의 생각을 넘어 멀리 간 원자 현상에서 내재하는 전체성(wholeness)이라는 특징을 들어내었다." 우리가 세계에 내재하는 전체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외부세계와의 독립적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독립은 양자현상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인식의 구조상 대상과 독립적인 관찰 주체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때 독립의 의미 역시 선험적이거나 우리가 규약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경험에 의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독립'이라는 의미가 세계의 모습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지 우리의 구성은 아니라는 것으로서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독립'의 의미의 일반화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상보적 독립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실재론의 최소 규정이라 할 수 있는 관찰자 독립적으로 대상이 존재한다는, 그 "독립"의 의미를 일반화시키고 동시에 그러한 일반화된 의미에서 실재론의 최소 조건을 만족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보어가 관찰 대상의 속성은 관찰장치 상대적이고 관찰 장치와 관찰 대상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더라도, 보어는 대상과 주체 사이의 구별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대상과 측정 기구 사이의 객체-주체 분리를 고정시키는 자연의 기계론적 개념에 반대하고, 단지 그러한 구별의 다른 방식을 주장할 뿐이다.
"자연의 기계적 개념에서, 주체-객체 구별은 고정되지만, 우리의 개념의 결과적 사용은 그러한 구별의 다른 방식을 요구한다는 인식을 통해서 더 넓은 기술을 위한 공간이 제공된다"(Bohr, 1958, 91-92) 이것이 보어의 상보성이 의도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고에 대한 자연에 대한 기계적 개념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상보성의 관념에서 과학적 기술의 객관성과 양립하지 않은 주관적인 관찰자에 대한 언급을 보아왔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경험의 모든 분야에서 관찰자와 관찰 내용 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지탱해야 한다. . . 양자 물리학에서, 우리가 보아왔듯이, 측정도구의 기능에 대한 해명은 현상의 정의에 필수적이고 소위 우리가 각각의 한 경우가 기술에서 초보적인 물리적인 개념들 애매하기 않은 적용을 안정시키는 방식으로 주체와 대상을 구별해야 된다. 과학의 정신에 낯설은 어떤 신비주의를 포함하기보다는 상보성의 관념은 원자 물리학에서 경험의 기술과 이해를 위한 논리적 조건들을 가리킨다."(Bohr, 1958, 90-91)
보어는 원자적 대상자체와 그들의 측정장치와 상호작용 사이에 명확한 구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측정과는 독립적인 존재의 속성을 추상이라고 했듯이, "상보성의 관념은 결코 분리된 자연의 관찰자로서 우리의 위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으나, 경험의 이 분야에서 객관적 기술에 관하여 우리의 상황에 대한 논리적 표현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Bohr, 1958, 74)
관찰 대상과 관찰자와의 독립관계는 상호작용이 있을 때, 그 상호 작용의 성격에 의해 정해진다. 그 독립관계는 분리적 독립과 상보적 독립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분리적 독립(또는 기계론적 독립):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은 기계론적 표상에 의해 모든 속성은 하나의 기술 방식에 의해 정합적으로 기술된다.
상보적 독립: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은 하나의 기술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기술 방식에 의해 기술되는데, 그 기술 방식은 정합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상보적이다.
보어는 파울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객관적 기술이라는 구절과 연결하여 사용된 분리된 관찰자와 같은 구절 .. .매우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모든 애매하지 않은 설명에서 관찰하는 주체와 의사소통의 대상내용(즉 기술되는 현상) 사이의 분리는 분명하게 정의되고 동의된다. . .이러한 조건은 모든 과학적 지식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일차적 요구이다. . . 우리가 물리학에서 실제로 배운 것은 경험의 해명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어떻게 제거하는가인 것처럼 나타나고, 과학의 다른 분야에서 객관적 기술에 관하여 인도를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인식이다. 내 마음에는 이러한 상황은 '분리된 관찰자'라는 구절에 의해 잘 기술되어 있다."(Bohr 1955, 215, Folse, 1998에서 재인용)
여기서 분리된 관찰자라는 관념을 보면, 보어는 분명하게 원자현상은 측정장치와 관찰 조건에 의존하는 것을 인지하면서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증주의나 현상주의의 경향은 없다. 다만 보어가 반대하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의 주체-객체 분리를 원자현상으로 확장시키려는 자연에 관한 기계론적 개념이다. 즉 양자역학에서는 주체와 객체와의 분리란 어디까지나 상보적 독립이다.
보어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전체로 보면서 그리고 그 구별을 명확히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객관성은 인정한다. 보어의 객관성의 정의에 의하면, 과학자의 목표는 애매하지 않게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개발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관찰자가 대상의 존재나 속성에 관찰자의 주관적 성질에 의한 영향을 주지 않고 그 속성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 때, 그 지식은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객관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객관성 확보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가? 고전역학에 의하면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이다. 아는 주체와 알려지는 대상과의 분리이다. 알려지는 대상의 지식은 철저히 주체의 관여를 배제하면서 얻는 지식이다. 그것이 객관적 지식이고 그 조건이 객관적 지식의 획득 가능성이다. "교란 없이 측정할 수 있을 때"란 그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EPR은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어는 아인슈타인과 달리 객관성이란 반드시 대상으로부터 주관의 제거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객관성은 결코 규약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의 모습에 맞추어서 객관성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관찰주체와 관찰대상을 분리 불가능하다면, 객관성은 주체와 더불어 얻어질 수 있다는 셈이다. 객관성에 대한 최소 조건은 적어도 관찰 대상이 개별 관찰자의 개별적 특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분리성이 아니다.
"양자 행동의 개별성은 어떠한 측정의 개별적 결과도 고전적 개념으로 해석되어질 때, 대상과 관찰 수단 사이에 상호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거래 속에 어떤 특정한 양의 자유의 범위가 허용된다는 것을 요구한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사실들은 측정에 의해 얻어지는 정보의 범위에 제한을 가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정보에 부여하는 의미에 역시 제한을 가하고 있다."(Bohr, Atomic Theory and the Description of Nature 18, 5, 11을 참조)
보어가 물리적 상태라는 개념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측정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증주의나 조작주의와는 다르다. 보어의 주장은 의미론적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측정대상과 측정장치와의 분리불가능이란 전체론적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약 관찰장치와 관찰대상이 분리 불가능하다면,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값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찰은 측정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값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니면 "관찰을 통해 물리량이 창조되는가?"라는 질문에서 보어는 전자를, 즉 대상에 이미 존재하던 값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드러난 이미 존재하던 값은 대상의 절대적인 속성이 아니라 실험장치에 대한 상대적인 속성이다. 그렇다면, 객관성은 관찰 장치 상대적인가? 그것을 어떻게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과학은 측정을 통해서, 이론을 증명하고, 측정을 통해서 객관성을 획득한다.
측정은 곧 관찰대상과 관찰 장치의 상호작용이다. 이것을 살펴보자. 측정에 대해서 크게 3 종류의 관점이 가능하다. 첫째 측정은 측정 이전에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측정값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관찰장치와 관찰 대상은 분리되어 있어 관찰 값은 관찰장치 독립적으로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 역학의 관점, 기계론적 표상이 제시하는 관점과 같으며, 아인슈타인 역시 이 관점을 취한다.
둘째 측정은 이전에 존재적으로 미결정적이던 속성을 존재적으로 결정적인 속성으로 만드는 즉 획득된 측정값을 물리적으로 창조해내는 과정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측정은 잠재적인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이 두 관점 가운데 놓일 수 있는 관점으로 양자역학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은 관찰에 독립적인 실재를 취급하지 않고, 그것은 관찰의 수단과 관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 사이의 상호작용을 취급한다. 양자역학은 정신 독립적인 실재에 관한 완전한 기술이 아니라, 정신 독립적인 실재와 우리의 상호작용에 관한 기술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실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측정은 관찰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값을 드러내는데, 관찰장치 독립적인 절대적인 값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 장치에 대한 상대적인 값이다. 이 상대성의 정도에 따라 놓이는 위치가 달라질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보어의 관점에서 측정은 양극단의 가운데 놓이는 이 세 번째의 관점이다. 이 때 관찰장치 상대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개별적 관찰장치 상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객관성이 부정된다. 이것은 관찰 대상을 관찰 장치에서부터 고립시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물리량은 그러한 고립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러한 물리량은 어디까지나 추상이다. 관찰장치와의 관찰 대상을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로 볼 때, 물리량은 관찰 장치 상대적인 것으로 일종의 전체에서의 대상의 위치에 의해 얻어지는 관계적인 값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란 양자역학 이론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고전역학에서는 하나의 장치로서 대상의 모든 물리적 변수 값은 모두 측정될 수 있는 반면에, 양자역학에 의하면 공액 변수들 값 중에서 한 변수를 측정하는 실험장치로서는 다른 변수를 측정할 수 없다. 그 때 그 변수 값이 관찰장치에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별 관찰자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에서 상대적이 아니라,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관찰 장치와 대상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전체론적으로 보아, 공액 변수의 값은 관찰대상과 관련 속에서 정의되기 때문에 관찰 상대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대상의 두 공액 변수 값을 구하기 위한 관찰장치에 의한 관찰이라 부르는 두 상호작용은 서로 상보적이다. 따라서 보어의 상보성은 실재론에 가깝지 상대주의적이 아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자. 고전역학은 이론에 있는 변수 값을 측정하려 할 때, 그 값은 대응원리에 의해 규제를 받는다. 그 때 대응 원리는 이론의 변수 값은 관찰장치와 관계없는 절대값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실재와 대응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 대응 원리조차도 어떤 선험적인 전제 아래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호소하여 일반화해야 하지 않을까? 고전역학은 거시 세계에서 추출된 경험을 일반화시킨 것인데 반해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도록 고전역학의 대응원리를 일반화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 관점, 즉 필자가 생각하기에 보어의 양자역학적 측정 개념은 대응원리에 의해 규제되는 고전 역학의 측정개념을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측정과 고전역학의 측정의 차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이론의 변수를 실재와 대응시키는 측정에는 어떤 형태의 제한이 있는데, 고전 역학적 측정에서는 한 실험 장치에 의해 원리적으로 모든 변수의 값을 얻을 수 있어 그 제한은 관찰 장치 독립적으로 이론의 변수가 정의된다고 보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 제한이 없는 반면에 양자역학에 의하면, 양자 공준으로 말미암아 이론의 변수 값에 대한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측정에는 어떤 제한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관찰장치 상대적으로 이론의 변수 값이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 상대적이라는 제한 때문에 공액 변수 값은 서로 다른 배타적인 두 실험 장치를 이용하여 측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타적인 측정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측정은 상보적이면서 대상의 모든 속성을 다 기술할 수 있다.
보어처럼 관찰대상과 관찰장치의 분리 불가능성을 주장하더라도, 대상의 관찰이 개별적 관찰자에 의해 임의적으로 영향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관찰 결과는 개별관찰자의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을 통한 결과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통계적인 반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객관적 미결정이라는 세계의 성질로 보아야 하지 그것을 개별 관찰자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지는 객관성의 파괴로 보아서는 안되고 객관성은 유지된다.
보어는 상보성을 주장하여 조작주의나, 검증주의 같은 반실재론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어는 양자 공준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반 직관적이지만, 그것을 합리적으로 일반화시켜 양자역학이 이성적으로 납득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우리의 인식의 전통적 틀을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상보성이다. 그렇다면 보어의 상보성은 철저히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물리학은 세계가 어떠한가를 재현해야 하는데 그 재현의 결과가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은 이유는, 고전 물리학에 기초한 고전적 실재론이 잘못이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한 탓이라고 보어는 주장한다. 양자 공준의 발생을 경험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실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보어는 상보성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보어의 상보성은 경험에 기초하여, 실재에 충실하려는 실재론적인 주장이다. 보어의 실재론은 고전적인 실재론 보다 더 경험에 충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종래의 실재론의 관념을 보다 경험에 충실하게 일반화시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을 우리는 상보적 실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측정에 관한 세 번째 관점을 채용하면 보어의 상보성은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이 주장하듯이 세계를 주체와 대상이 공동으로 형성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퍼트남과는 다른 의미에서지만. 이 점을 자세히 논의하는 것은 이 논문을 넘어선다.
6. 결론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와 로젠과 더불어 EPR 사고 실험으로 알려진 천재적인 사고 실험을 통해서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그 사고 실험은 이론은 비록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시한다. 곧 이론의 완전성 조건과 물리적 실재의 조건이다. 완전한 이론은 물리적 실재의 모든 요소들은 각각 물리 이론 속에 대응 부분(counterpart)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어떤 물리적 양(physical quantity)의 값이 그 시스템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란시키지 않고 정확하게(확률 1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다면, 이 물리적 양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의 요소가 존재한다라고 물리적 실재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고 실험을 통하여 운동량과 위치는 동시에 물리적 실재를 가질 수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의하면, 운동량과 위치는 동시에 실재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보어의 답변은 EPR의 물리적 실재의 조건이 애매성을 비판한다. 보어는 원자현상에서 공액인 두 변수는 결코 동시에 측정될 수 없음을 여러 사고 실험을 통해 보이고, 물리량은 측정장치 상대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주장하여 EPR의 물리적 실재의 정의가 모호함을 비판한다. EPR에 대한 보어의 답변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이 EPR의 현학성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B 지역에 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A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측정이 행해지느냐에 의해, 또 A 지역에서 측정이 행해졌는지 여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결국 국소적 인과 즉 상호작용한 두 시스템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 그 둘은 분리되어 있다는 분리성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분리성 논제(즉 국소적 인과)와 이론의 완전성 논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보어는 분리성 논제를 버리고 완전성 논제를 택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분리성 논제를 택하고 이론의 완전성 논제를 버린다. 이상과 같은 논쟁에서는 보어를 반드시 반실재론자라고 볼 충분한 증거는 없다.
보어의 주장 속에서 보이는 관찰 대상과 관찰자를 명확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보어를 반실재론자고 본다는 것은 잘못이다. 보어의 여러 논문과 강연들을 추적하면서, 보어는 실재론자로 분류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인다. 보어는 원자의 존재를 믿었고, 양자 공준에 의해서 관찰 대상과 측정장치를 전체로 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즉 보어는 분리된 관찰자라는 관념은 분명하게 원자현상은 측정장치와 관찰 조건에 의존하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증주의나 현상주의의 경향은 없다. 다만 보어가 반대하는 것은 그는 단지 대상과 측정 기구 사이의 객체-주체 분리를 고정시키는 자연의 기계론적 개념에 반대하고, 단지 그러한 구별의 다른 방식을 주장할 뿐이다.
관찰 장치와의 관찰 대상을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로 볼 때, 물리량은 관찰 장치 상대적인 것으로 전체론적 입장에서 관찰 대상이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보어는 전체론에서 보듯이 관찰 대상을 관찰 장치에서부터 고립시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물리량은 그러한 고립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러한 물리량은 추상이다. 따라서 관찰 대상의 속성이 관찰 장치 의존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찰이 대상의 속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개별 주관에 의존하는 상대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보어의 양자역학적 측정 개념은 대응원리에 의해 규제되는 고전 역학의 측정개념을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측정과 고전역학의 측정의 차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물리적 과정이 아니다. 이론의 변수를 실재와 대응시키는 측정에는 어떤 형태의 제한이 있는데, 그 제한의 본성은 전체로서의 세계의 본성에서 온다. 측정이 측정대상의 속성의 창조가 되는 방식으로 세계가 존재할 수가 있는가 하면, 고전역학처럼 관찰 장치 독립적으로 이론의 변수가 정의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그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양 극단의 가운데에 양자역학적 측정 개념이 놓인다. 양자역학은 양자 공준에 의해 관찰 대상과 측정장치를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양자 공준으로 말미암아 이론의 변수 값에 대한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측정에는 어떤 제한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관찰장치 상대적으로 이론의 변수 값이 정의된다는 것이다. 공액 변수 값은 이러한 제한으로 인해 서로 다른 배타적인 두 실험 장치를 이용하여 측정되고, 그 두 방식으로 측정하거나 대상의 속성의 기술들은 상보적이면서 대상의 모든 속성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이 양자역학이 밝혀주는 세계의 모습이다. 따라서 보어의 상보성 개념은 철저히 세계에 존재하는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실재론의 최소 조건인 관찰 독립적인 대상의 존재인데 보어는 이 '관찰 독립'이란 의미도 규약적이거나 어떤 선험적이 아닌 세계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보어의 실재론은 고전적 실재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실재론이 아니라, "상보적 실재론"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해야할 과제는 이 상보적 실재론을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것, 그리고 다른 형태의 실재론과 어떻게 다르며, 상보성에 대한 반실재론적, 해체론적 해석에 대한 적절한 비판 등이다. 그리고 이 상보적 실재론은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과 비교될 수 있다. 이것 모두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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