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외드 사제 ( 성 요한 에우데스)/8월 19일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아르장탕(Argentan) 근교 리(Ri)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외과의사인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는데, 그의 부모는 동정녀 마리아께 봉헌하고 살아가는 신심이 두터운 분들이었다. 그는 캉(Caen)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14세가 되던 해에 정결서원을 하는데, 그의 부모는 그가 결혼을 하여 세상에서 잘 살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그는 예수회 학교를 떠나 성직자들의 성화와 교회의 가르침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하던 오라토리오회(The Congregation of Oratory)에 입회한다.
그는 파리와 오벨빌리엘에서 공부한 후, 24세가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된다. 그는 사제로서 노르망디 지역의 본당에서 사목에 전념하는데, 특별히 고해성사 등의 성무활동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당시의 교회의 악한 표양 등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1625년과 1631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퍼진 전염병의 희생자들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는데, 이즈음에 그는 또한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얀세니즘(Jansenism : 초대교회의 엄격한 윤리로 되돌아가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로 하느님의 은혜를 강조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듯한 학설을 전개)의 강한 반대자로서의 이름을 가지기도 한다.
사목자로서의 그는 특별히 성직자 교육에 마음을 기울이는데, 사제가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하면 본당에서의 사목활동은 일시적인 성공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타락한 생활을 하던 여성들에게도 사목적인 마음을 기울였는데, 1641년에는 평신도들인 장 드 베르니에르(Jean de Bernieres)와 가스통 드 렌티(Gaston de Renty)와 함께 성체회, 성모방문수녀회의 도움으로 캉에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세운다. 1666년에 이 보호소는 ‘착한 목자회’라는 수녀회로 교황청 인가를 받는다.
그는 성직자들의 성화를 위한 활동이 주요한 일이던 오라토리오회가 점차로 그 본래의 일들로부터 멀어지자 그 회를 떠나서, 1643년에 캉에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 사제회는 재속 사제회로서 교구신학교에서의 성직자 양성, 본당에서의 선교활동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제회는 오라토리오회와 얀세니즘을 추종하는 자들의 불화와 반대로 교회의 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1851년에 이르러 교황청의 인가를 받는다. 이 사제회는 ‘예수마리아수도회’(The Society of Jesus and Mary)로 공식명칭을 정했고 에우데스트(the Eudists)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리지외(1653년), 루앙(1659년), 에브뢰(1670년), 렌(1670년) 등에 여러 개의 신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그가 널리 교회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예수님과 마리아 공경과 신심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69세가 되던 해(1670년)에 그는 ‘흠숭하올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2012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 클레멘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