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3월 24일 [4]
1980년 처음 미국에 이민 왔을 땡에도 할머니는 이미 나이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일본의 조선 침략, 산업화, 이념 갈등으로 인한 남북 분단 전인 1900년에 태어났다. 할머니는 긴 백발을 나무 비녀로 꽂은 올림 머리를 하고 한복에 고무신 차림이었다. 평생 머리에 짐을 이고 아이들을 업느라 등이 굽어버린 할머니는 147세티미터의 키 작은 노파였다.
할머니는 현대화된 한국의 세태를 따라가지 못했고, 현대화된 미국식 생활 방식을 배우는 데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설탕을 듬뿍 친 하프앤하프 크림에 콘플레이크를 곁들여 먹는 것을 좋아했고, 볼거리가 넘치는 레슬링 경기도 즐겨 보셨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는 테레비전 앞에 앉아 나를 부르곤 했다. "그레야!" 레스링 봐라!" 할머니는 방석 가장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올리며 등성듬성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짜 피가 쏟아지는 순간,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이구 얄구지다!"
일요일 아침이 되고 엄마와 셔헤일리스로 돌아갈 준비를 할때면,나는 할머니와 함께 우리 가족의 음식 교환 의식을 지켜 보곤 했다. 엄마는 블랙베리파이며 잼이며 직접 따온 신선한 채소 한 꾸러미를 가져왔고, 진호와 선은 아이스 박스 한가득 생선이 가득 담긴 아이스박스를 엄마에게 가져가라고 권했다. 이들은 서로 사양을 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다 마지막에야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아이구 진오야!" 드가라!" 엄마는 대치 상황을 끝내며 우리 가족의 고향 사투리로 소리쳤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주말에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일이 내게 얼마나 가족의 일원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는지. 하물며 엄마에게는 얼마나 더 그런 일이었을지 깨달았다.
할머니 장사는 할머니와 사촌들이 다니던 포틀랜드 한인 교회에서 지냈다. 장례장에는 실물보다 더 큰 할머니 영정 사진이 올라가 있었는데, 검버섯이 핀 까무잡잡한 피부에 85년이라는 고된 세월의 무게로 입술과 눈꺼풀이 처진 모습이었다.
영전 앞에는 자개상 위로 과일, 떡, 만두, 파전을 비롯해 엄마와 선이 준비한 각종 음식이 차려졌다. 향을 피우는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거기 모인 다른 조문객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는데, 한명씩 앞으로 나와 할머니 영정 앞에 절을 했다. 엄마는 장례를 지내는 내내 울었다. 깊고 그르렁거리는 엄마의 곡소리가 교회 구석구석 울려 퍼졌고, 망인이 떼로 있어도 애도할 수 있을 만큼 쩌렁쩌렁한 울음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하루는 밤에 잠들 무렵, 방 안에서 기이한 기척을 느꼈다. 눈을 뜨자 침대 발치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게 보였다. '이 집에 악귀가 있어", 그가 말했다. 겁이 났지만 눈을 똑바로 뜨자 그 모습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하얀 한복을 입고 그 위에 샛노란 색으로 뜬 조끼를 덧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밝은 기운을 뿜어내며, 할머니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마미가 아파, 나 대신 엄마를 잘 돌봐줘. 알았지,"그레야?" 할머니는 그레야라고 내 이름을 부르며 주름진 작은 손으로 내 발을 쓰다듬었다.대답을 하려 했지만,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할머니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튿날 아침 엄마한테 말했다. "어젯밤 침대 앞에서 할매야 봤어,근데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랬어? 아, 나도 보고 싶다"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답답으라, 할머니가 너 정말 많이 사랑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