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8
1월2일[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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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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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waA4UTtc9o (강인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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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나는 찰라의 순간 동안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가는 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솔직한 증언은 읽을 때 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당시 그는 전국민적으로 선풍적인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전국구 인물이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시작된 그의 세례 운동, 신앙 갱신 운동은 전 국민적인 이슈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쾌한 촌철살인의 말씀은 유다인들의 마음에 회개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세례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종래 다른 예언자들이나 교사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었던 신선한 것이어서, 군중은 크게 환호했고, 너나할 것 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다 당국자들 역시 세례자 요한의 존재감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혹시 이 사람이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1장 19절)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시원시원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복음 1장 20절)
세례자 요한의 단호한 대답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르켜 에고 에이미(jEgw eijmi, 나는 ~이다. 나는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반해, 요한은 에고 우크 에이미(jEgw oujk eijmi, 나는 ~아니다, 나는 없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에고 에이미’라는 이 표현은 체포하러 온 적대자들 앞에 서신 예수님 입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옵니다. 수난 직전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고 외치십니다. “에고 에이미.”(나다. 내가 바로 그니라)
반면에 베드로는 체포된 스승님께서 큰 수모와 고초를 겪고 계실 때, 누군가“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라고 물었을때, 세번씩이나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아니오)라고 거듭 대답하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대답은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조금도 부풀리거나 과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어떠한 유형의 메시아적 인물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메시아적인 모든 역할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배제시킵니다. 그러한 기대는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져야 할 것임을 외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은 유한한 것이라는 것, 자신의 역할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극히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거듭되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종지부를 찍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 역시 멋집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복음 1장 23절)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찰라의 순간 동안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가는 소리에 불과하답니다. 해가 떠오르는 즉시 증발하고 말 풀잎 끝에 맺혀 있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존재와 같답니다.
작은 직무 하나 맡았다고 뭐라도 되는 양, 무소불위, 안하무인이 되고 마는 우리에게 ‘에고 우크 에이미’‘나는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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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솔직함에 겸손의 덕까지 더한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이 등장으로 인해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바짝 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설교와 함께, 구름 군중을 불러 모으며 유명세를 떨쳤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찬밥 신세인데, 다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가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심기가 엄청 불편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설왕설래도 많았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분명해!” “입고 다니는 옷을 봐.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봐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신선하고 거침없는 언변에, 강력한 카리스마에, 메시아가 맞을지 몰라.”
고민 끝에 그들은 사제들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그의 정체를 파악하라는 미션을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례자 요한은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본론만 말하는데, 그야말로 솔직담백함의 극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복음 1장 19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복음 1장 23절)
그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솔직함에 겸손까지 더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복음 1장 26~27절)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 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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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하는 일에 주저함 없이 오래 지속하려면>
제가 이번에 쓴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란 책은 저의 네 번째 책입니다. 제가 책을 계속 내니까 주위 사제들은 ‘나는 언제 책을 한 번 내보나?’라며 한탄 섞인 말을 합니다.
정말 책을 낸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이 벌거벗겨져 심판을 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도 인터넷에 강론은 썼지만 책을 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구청에 들어가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 교구장 주교님께서 저를 볼 때마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 많으니까 모아서 빨리 강론집 하나 내라고 독촉하셨습니다.
사실 이미 써 놓은 것들을 모아서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한 권 꾸며서 인쇄되어 나오기까지는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만약 주교님이 그렇게 독촉하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더 완벽한 첫 책을 내기 위해 고민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번 책이 나왔을 때 한 권을 들고 주교님께 갔을 때 주교님께서는 “첫 책을 내니까, 그 다음부터는 쉽지?”라며 웃으셨습니다. 주저하는 저에게 갈 길을 알려주셔서 계속 열매들이 맺게 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누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고 명령을 하면 간섭하는 소리처럼 들리고 자유를 빼앗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애당초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내 안의 그 본성이 에덴동산의 뱀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나, 안 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오가며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명령은 그 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해방의 계명이 됩니다.
어떤 명령이 주님의 명령으로 여겨진다면 그다음부터는 주저함이 없어지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내 뜻일 때는 확고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주저함이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보낸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어떤 권한으로 세례를 주느냐고 따집니다. 그들에겐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또 유다인들에겐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나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요한은 역시 그런 예언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명확히 알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니 그들의 방해공작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성소에 대한 확신은 바로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는 ‘겸손’에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교만이기에, 주님의 뜻에 대해 확신을 하려면 겸손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묻습니다. 내 생각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주교님이 책을 내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전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요.”라고 말했다면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함이 책 한 권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겸손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 몇 권이라도 열매를 맺게 된 데는 제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이라 믿어지는 목소리를 따랐던 작은 겸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첫 세 권의 주일복음 묵상집을 내면서 강의 다닐 때마다 보따리장수처럼 책들을 팔기 위해 들고 다녔습니다.
이전에 강의하며 책을 파시는 신부님들에 대해 다른 신부님들이나 신자분들이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익히 들었던 터라 제 차에 책을 싣고 다니며 판매까지 하는 것은 스스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원교구 하상 출판사는 판매를 위한 통로가 부족한 작은 회사이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며 직접 팔아야 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팔려야 다른 큰 출판사의 인터넷 서점 등에서 올려놓고 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책은 아예 인터넷 서점이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에 대한 확신을 더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처지가 어쩔 수 없이 되니 ‘이게 주님의 뜻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 대림특강 중 책을 사인하여 열심히 들고 다니며 팔았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상한 시선을 보이기도 하고, 저 또한 ‘왜 책을 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잠시 들 때도 있지만 이전처럼 창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가 창피를 무릅쓰고 장사하는 느낌을 받으며 저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뿌듯했습니다.
아예 강의 중 더 떳떳하게 책 팔러 왔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보따리장수를 하는 것이 이전처럼 지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당신들이 가시는 길에 대한 매우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끈기가 있어야 오래갈 수 있고 작은 열매라도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더 큰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항상 기도 안에서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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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자칫 길을 놓쳐서 다른 길로 갈지라도 내비게이션은 곧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인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나라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올바른 식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왕은 자신의 포도밭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았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였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바로 ‘식별’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식별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할 때는 식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식별의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넷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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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 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 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몫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이 이러하였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백성들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살아갔던 분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그분을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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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로고스 찬가’라고 부르는 서문(요한 1,1-18 참조)을 제외하면 요한 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너희가 모르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뒤에 오시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인지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독특하게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구약의 예언자입니다.(2열왕 2,1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를 종말의 때에 앞서 백성들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라 3,23 참조) 다시 한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예언자인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 예언자”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후손들 가운데에서 일으켜 세울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 18,18 참조)
오늘 복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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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은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곧 동방교회의 대성인들이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커다란 두 물줄기가 있다고 하면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형제들을 포함하여 서방 라틴 교회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신학자 이브 콩가르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묵시 22,1)이 동방과 서방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동방정교회가 미미하여 그 전례의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을 접할 수 없어 아쉬움이 많다. 서방교회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모되는 성변화의 순간을 주님의 성찬제정 말씀인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로 믿는 데 비해, 동방정교회는 성찬기도문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Epiclesis)을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 서방교회는 이 성령의 오심을 미사성제 안에 받아들여 성찬제정 말씀 이전에 성령청원(축성기원)을 드리고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이콘 성화를 바라보노라면 바로 동방교회의 신앙세계, 은둔과 신비와 관상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런 교회의 심원한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들, 특별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신비스러움은 어쩌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세계,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자 하는 당신의 내적 생명의 온갖 풍요로움(에페 1,3-14)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세례자 요한은 오늘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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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 할 길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겉옷을 직접 밟은 어린 당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로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데에만 자기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춤으로써 주님을 높인 인물,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 모습 속에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요한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요한1,21) "그러면 그 예언자요?"(요한1,21)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요한1,22)
계속 다그쳐 묻는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그제야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1,23-27)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 오로지 오실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높이기 위하여 이웃을 깎아내리지요. 나의 잘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남을 좋지 않게 평가하여 자기를 돋보이려는 행동들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높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중심을 잃기가 쉽고 평화가 깨지며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수시로 흔들리지요.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살면 쉽게 상처를 받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참 기쁨과 고요 속에 편안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내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으셔야 합니다.
이는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힘들어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고 꾸미는 세상일에 흔들리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빚어지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은근히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보다도 나를 더 앞세우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만을 높이기 위하여 일생을 낮추며 절제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높일 때 나도 높아지는 지혜도 함께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높여드리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나를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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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거짓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한테 사람들을 보내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질문 속에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시대적 바람이 들어 있다. 그의 예언자적 삶과 거침없는 선포, 큰 무리의 추종자 등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꺾어버리고 만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포장된 모습,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그토록 책망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그랬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틀 속에서 남에게 경건한 이로 비춰지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모진 질책은 ‘거짓’을 깨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남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마저 속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짓의 사람들’이다.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절규’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이비종교의 실상을 보도한 것이다.
일흔이 넘은 고령의 목사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도들을 집단 농장에서 부려먹으며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목사는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으며 머지않아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설교했다. 목사 개인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는 이는 전형적인 ‘거짓의 사람들’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세례자 요한의 솔직한 대답은 끊임없이 ‘거짓’으로 포장하려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그런데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씌우려 하니 삶의 진지한 성찰과 변화가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사제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신자들 앞에서 점점 익숙해 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나도 어느덧 ‘거짓의 사람들’ 무리에 속해 살아가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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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나>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분과 나>
나 비록
그분은 아니지만
그분의 사람이기에
그분처럼 믿고
그분처럼 바라며
그분처럼 사랑하네
나 결코
그분일 수 없지만
그분의 사람이고자
그분처럼 믿고
그분처럼 바라며
그분처럼 사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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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부각시켰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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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화장실도 너무 청결하다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쇼핑몰 같다고, 지하철도 너무 편안하다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의 인심도 너무 좋다는 식의 칭찬 일색입니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건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부위가 생겨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핍을 체험해야 감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결핍을 체험하기 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힘차게 그리고 현재의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당신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 맞소.”라고 말만 해도 사람들의 엄청난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변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답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몫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고,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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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안에 머문다며 안주하지는 않는지>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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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발광체(發光體), 성인들은 반사체(反射體)>
- 이단에 대한 답은 성인들뿐이다 -
동방교회의 4대 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오늘 축일은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분은 절친이었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주교직까지 수행한 분들입니다. 330년 같은 해에 오늘날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의 카파토키아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안 이단과 격렬히 싸우며 끝까지 정통 교리를 수호했던 분들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교회 역사상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할머니 마크리나, 부친 바실리우스, 모친 에멜리야, 큰 누이 마크리나, 두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동방수도생활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수도생활에 대한 업적도 지대합니다. 성인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이는 세바스테의 주교, 에우스타시아였으며 다음과 같이 바실리오는 회심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며, 헛된 일에 나의 젊음을 거의 소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리석게 만든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복음서의 진리가 내포한 경이로운 빛을 목도했으며, 이 세계의 왕자들의 지혜는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복음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회심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정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성인보다 10년 정도 오래 살았던 절친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역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생애 후반은 수도원에 은거하여 저술활동과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인 성인들은 이단에 대한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읽은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는지 ‘공부전에 바쳤던 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오, 형언할 수 없으신 창조주 그리스도님, 당신은 당신 지혜의 보고로부터 천사들의 세 품계를 가려, 저 높은 하늘 위에 배치하시고, 광대한 우주 질서를 참으로 아름답게 안배하셨나이다. 당신은 참빛과 참지혜의 원천이요, 최고 원리이시니, 제 아둔한 정신을 당신의 투명한 빛살로 환히 비추시어, 제 안에 타고난 뿌리깊은 두가지 어두움, 곧 죄악과 무지의 어두움을 말끔히 거두어 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의 혀를 달변으로 키워내는 분이시니, 날카로운 통찰력과 오래오래 간직하는 기억력, 유순하게 배울 줄 아는 겸손과 철저하게 파헤치는 해석력, 그리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슬기를 허락하소서.
진리탐구를 시작하는 저의 정신을 밝게 비추어 주시고, 힘차게 정진할 수 있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시며, 모자람 없이 완성할 힘과 지혜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겸손한 기도문인지요! 말 그대로 모든 이단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기도문이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교회의 사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지난 12.31일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 역시 여기에 그대로 해당되는 성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요한1서는 당시 요한계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치열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적’과 대결중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 역시 다음의 간곡한 말씀을 통해 정통 교리의 수호자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참으로 그분 안에 머무를 때 무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알고 주님이신 그분을 앎으로 저절로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니 결코 이단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면 알수록 참 자기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적그리스도의 이단자들은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교만에 눈먼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다.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정말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빛이신 주님의 증언자, 참으로 겸손한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인 세례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참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발광체發光體라면 겸손한 성인들은 예외없이 시종여일,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며 모두가 참빛인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이자 증언자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머물러 발광체이신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겸손한 진리의 증언자, 협력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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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참되게 믿자!>
오늘 복음(요한1,19-28)은 로고스 찬가에 이어서 전해지는 말씀인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고 있었던 유다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루카3,15 참조) 그래서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와,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묻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20)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다."(1,21)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1,23)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6-27)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며 반복해서 물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아리우스 이단 세력들을 물리치신, '성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정통 교리를 부인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1요한2,22)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의 적들이 있지 않을까?'
'우리 안에도 이단들이 있지 않을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만 믿고, 삶으로는 믿지 않는 이들,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적이요, 이단들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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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qZhNXzyu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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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흐르지 않고
고여있으면
수도 생활도
썩어 갑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마음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자존심과 고집
허세와 부정직의
그림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행복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반은
믿음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이겨내고
뛰어넘는
겸손입니다.
모든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감사와 은총이
될 것입니다.
현실에 충실한
삶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참된 자유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자기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가벼워지는
자유를 따릅니다.
우리의 삶을
깨우시는 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 하나씩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실천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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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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