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214
#벨기에신앙고백서 19.그리스도의 두 본성
We believe that by being thus conceived the person of the Son has been inseparably united and joined together with human nature, in such a way that there are not two Sons of God, nor two persons, but two natures united in a single person, with each nature retaining its own distinct properties.
우리가 믿는 바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처럼 처녀에게 잉태되심으로써 성자 하나님의 위격이 인간의 본성과 더불어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되시고 결합되셨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자 하나님이 두 분이신 것도 아니고, 두 인격이 있는 분도 아니시며, 단일한 인격에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되신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각각의 본성은 각자의 고유한 속성을 구별되게 유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오직 사도신경만을 제외하고 그 이후의 나머지 모든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때에 피조물로 조성된 본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고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셨으며 성령 하나님을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하게 거하게 하셨었다.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더불어 구원하실 성도들과 방법들을 논의하시고 결정하셨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셔서 동산에서 함께 거니셨었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선지자들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셨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인성은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시기 위해 성령께 의탁되어 태아세포 수준으로 한없이 낮아지셔서 이 땅의 사람과 같이 되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던 하나님이시라 하였던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하나님이시라 한 것은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늘의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이 땅의 비천한 사람들과 같이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Thus his divine nature has always remained uncreated, without beginning of days or end of life, filling heaven and earth.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은 창조됨도, 생명의 시작과 끝도 없이 언제나 하늘과 땅을 충만히 채우십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이신 성자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창조되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다.
His human nature has not lost its properties but continues to have those of a creature-- it has a beginning of days; it is of a finite nature and retains all that belongs to a real body. And even though he, by his resurrection, gave it immortality, that nonetheless did not change the reality of his human nature; for our salvation and resurrection depend also on the reality of his body.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시작된 날이 있는 피조물의 속성들을 잃지 않고 전부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인성은 유한하시며 실제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지니고 계십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불멸함을 얻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성의 실체는 바뀌지 않으셨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그리스도의 실제 육체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때에 비롯된 유한한 피조물이라고 오해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헬라철학의 유입으로 인해 영은 고상하고 육은 저열하다는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은 사람의 부패한 종교성에 부합하기 때문에 교부들을 비롯한 탁월한 성경교사들 조차도 그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그 덫에 걸린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리스도의 인성도 차마 영원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진리가 언제까지나 가리워진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고 반드시 조만간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밝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But these two natures are so united together in one person that they are not even separated by his death.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이 두 본성은 한 인격 안에서 함께 연합되셨으므로, 그분 자신의 죽으심으로도 나뉘지 않습니다.
So then, what he committed to his Father when he died was a real human spirit which left his body. But meanwhile his divine nature remained united with his human nature even when he was lying in the grave; and his deity never ceased to be in him, just as it was in him when he was a little child, though for a while it did not show itself as such.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 맡기신 것은 그분 자신의 몸과 분리된 자신의 실제 인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셔서 무덤에 육신이 누이신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여전히 자신의 인성과 연합되신 채로 남아 계셔서 절대 멈추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이 아주 어렸을 때에 신성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은 중에서도 여전히 연합해 계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었고 성령 하나님을 당신의 영으로 완전충만하게 품으셔왔기 때문에 태아 세포로 처녀에게 잉태되실 때에나 죽으셔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계신 때에라도 하나님의 세 위격과 분리되신 적은 단 한순간도 없으시다. 다만, 죽으셔서 영혼은 낙원에, 육체는 무덤에 분리되어 계셨던 3일 동안에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셔도 하실 수 없이 기다리실 수 밖에 없으셨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는 죽음보다 더 괴로운 기간이었을 것이므로 사도신경에서는 이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다.
These are the reasons why we confess him to be true God and true man-- true God in order to conquer death by his power, and true man that he might die for us in the weakness of his flesh.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시라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셨으며, 참 사람으로서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의 능력만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인성 자체의 능력으로도 사망을 정복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고난의 구속사역은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성께서 행하신 것이며,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을 비롯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신 것이다.
Heb. 7:3
히브리서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시라 증거하는 중에 멜기세덱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그가 설명한 바 멜기세덱의 영원성은 죄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속성으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창섹기와 시편 단 두 군데에서만 짧게 언급된 멜기세덱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설명한 정황과 문맥을 봤을 때,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인물이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으로 이 땅에 잠시 머무셔서 장차 예루살렘이 될 살렘을 왕으로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장차 이 땅에서 행하실 제사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만나러 오셔서 그에게서 예물을 받으시고 그를 축복하셨던 것이었다.
#20220214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4-17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責望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敎訓을 지키는 者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子孫 앞에 걸림돌을 놓아 偶像의 祭物을 먹게 하였고 또 行淫하게 하였느니라
Nevertheless, I have a few things against you: There are some among you who hold to the teaching of Balaam, who taught Balak to entice the Israelites to sin so that they ate food sacrificed to idols and committed sexual immorality.
Sed habeo aversus te pauca : quia habes illic tenentes doctrinam Balaam, qui docebat Balac mittere scandalum coram filiis Israël, edere, et fornicari :
ἀλλ’ ἔχω κατὰ σοῦ ὀλίγα, ὅτι ἔχεις ἐκεῖ κρατοῦντας τὴν διδαχὴν Βαλαάμ, ὃς ἐδίδασκεν τῷ Βαλὰκ βαλεῖν σκάνδαλον ἐνώπιον τῶν υἱῶν Ἰσραήλ, φαγεῖν εἰδωλόθυτα καὶ πορνεῦσαι.
다윗을 반역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모사인 아히도벨의 지략이 하나님께 여쭤 받은 것과 동일했듯이 발람은 단지 주술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복이나 저주는 여호와의 복과 화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능력자였다. 그는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달라는 의뢰를 받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로 하여금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도리어 발락이 세운 제단 앞에서 네 번이나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다. 이로 인해 술사 발람과 모압 왕 발락의 사이가 크게 틀어지게 되지만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발람은 저주 대신에 이스라엘을 죄악에 빠뜨릴 계책을 발락에게 몰래 제시하고 발락은 그의 지시를 따라 모압과 미디안의 아리따운 귀족 여인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수령들을 유혹해서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게 만들어서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 그리스도의 재앙을 당하게 만든다. 발람은 자기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않았고 그저 이스라엘에게는 이러저러한 약점이 있다고 언질을 준 것 뿐이니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키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자신했겠지만 그러한 변명은 그저 자기자신만의 정신승리일 뿐이었다. 얼마 후에 모세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이 모압과 미디안을 진멸할 때 술사 발람은 그 때의 바알브올을 획책한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게 되고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이세벨처럼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자주 언급된다. 술사 발람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과 저주를 행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과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이롭게 하기보다는 이 땅의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위해서 자기의 능력과 은사를 가장 악랄하게 사용하고 말았고 그런 자기의 죄악을 인지조차 못하고 스스로 떳떳해 했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黨의 敎訓을 지키는 者들이 있도다
Likewise, you also have those who hold to the teaching of the Nicolaitans.
ita habes et tu tenentes doctrinam Nicolaitarum.
οὕτως ἔχεις καὶ σὺ κρατοῦντας τὴν διδαχὴν τῶν Νικολαϊτῶν ὁμοίως.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리켜 발람의 교훈이라 하시는 것으로 봐서 그들의 가르침은 아마도 사람이 마음으로 복음을 믿기만 하면 절대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무슨 죄를 지어도 영원한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 예식이나 제사에 참여해도 되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고 그 순서 가운데 있는 음행에 동참해도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무죄하다고 여기게 했을 것이다. 또한 본의아니게 우상숭배나 음행을 저지르게 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신자에게 적절히 권징하지 않고 그의 심령을 실족시키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감으로써 그의 양심이 이러한 죄악에 무뎌지게 만들게 했을수도 있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교회 밖에서는 공공연히 일어나는 사회 전반에 걸친 풍토이므로 이런 것에 빠진 교인들을 너무 엄격하게 다뤄서는 안된다고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은 혹시 어느 연약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실족할 우려가 있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 교인은 단호히 출교할 것을 지시하였다. 목사나 교인이 성범죄나 음행이나 간음을 저지르고서도 죄의식을 갖지 않거나 사죄함 없는 입에 발린 회개만 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라 바알브올의 죄에 빠진 것이다. 목사나 교인이 점집이나 무당이나 사주나 타로나 오늘의 운세나 별자리 등을 보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것이다. 남들보다 특출난 재능과 은사를 가졌으면서도 교회와 신앙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악용하는 것은 스스로 발람과 니골라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육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교회와 목사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종용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가르치고 실천하게 할지를 고민하지 않고 재정과 교인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 세속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복음을 빙자하여 자꾸 이 땅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에 헌신할 수 있도록 이 땅의 부귀영화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교회에 오랜동안 열심으로 섬기고 봉사했으니 이 땅의 좋은 것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교회의 평판이 나빠질까 우려해서 교회에서 벌어진 성범죄나 자살사건을 은폐하려 하는 것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것이다.
16 그러므로 悔改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速히 가서 내 입의 劍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Repent therefore! Otherwise, I will soon come to you and will fight against them with the sword of my mouth.
Similiter pœnitentiam age : si quominus veniam tibi cito, et pugnabo cum illis in gladio oris mei.
μετανόησον οὖν· εἰ δὲ μή, ἔρχομαί σοι ταχύ καὶ πολεμήσω μετ’ αὐτῶν ἐν τῇ ῥομφαίᾳ τοῦ στόματός μου.
발람의 계략에 의해 바알브올의 범죄에 빠진 이스라엘은 적지 않은 백성들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70명의 수령들을 목매달아 죽여야 했으며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그리스도 앞에서 울며 애통해 하였다. 게다가 아론의 손자이고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는 미디안 방백의 딸 고스비를 데려와 장막에 들어가는 수령을 뒤쫓아가 그와 그녀를 둘다 한 창에 찔러죽이기까지 하였다. 주님께서 니골라 당의 가증한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해 버가모 교회에 요구하시는 회개는 과거 이스라엘이 했던 회개의 수준을 따르라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몇몇 교인들은 역병에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미 니골라 당의 교훈으로 돌아서 영영 떠나버렸을 것이므로 그렇게 떨어져나간 교인들에 대해 애통해 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 내에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70인의 수령들의 목을 매단 것처럼 그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해 엄중한 권징을 시행해야 했다. 또한 교회 내에서 공공연히 니골라 당의 교훈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가 있다면 비느하스가 고스비를 데려온 수령을 창으로 찔러 죽였듯이 그 악인을 교회에서 쫓아내야 했다. 버가모 교회가 이러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거짓 회개를 한다면 주님께서는 직접 니골라 당의 교훈을 전하는 자와 이를 지키는 자와 이를 묵인한 자들 전부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양날 검으로 처단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러한 자들을 천년의 결박에서 풀려난 붉은 용의 부름에 소환된 악한 군대 취급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붉은 용과 그의 군대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소멸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17 귀 있는 者는 聖靈이 敎會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記錄한 것이 있나니 받는 者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Whoever has ears, let them hear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To the one who is victorious, I will give some of the hidden manna. I will also give that person a white stone with a new name written on it, known only to the one who receives it.
Qui habet aurem, audiat quid Spiritus dicat ecclesiis : Vincenti dabo manna absconditum, et dabo illi calculum candidum : et in calculo nomen novum scriptum, quod nemo scit, nisi qui accipit.
Ὁ ἔχων οὖς ἀκουσάτω τί τὸ Πνεῦμα λέγει 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 Τῷ νικῶντι δώσω αὐτῷ τοῦ μάννα τοῦ κεκρυμμένου, καὶ δώσω αὐτῷ ψῆφον λευκήν, καὶ ἐπὶ τὴν ψῆφον ὄνομα καινὸν γεγραμμένον, ὃ οὐδεὶς οἶδεν εἰ μὴ ὁ λαμβάνων.
오늘날 교회에 퍼져있는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증한 교훈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고 그 교훈을 대적하며 거스르는 성도들은 성령께서 버가모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이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대적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의 음란한 본성을 거슬러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힘든 영적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대적하려 한다면 화합을 깨고 분란을 일으키며 교회를 괴롭게 하는 자라는 오명과 누명을 쓰고 따돌림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요구대로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거스르며 살다 죽은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 주어진다 하셨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40년 동안 내려진 만나는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보존시켰다. 주님의 율법과 복음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살리는 신령한 만나이다. 하늘의 성도들에게 주실 감추인 만나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하늘의 성도들은 진정한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로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하늘의 성도가 받게 될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은 이 땅에서의 육신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았는지를 나타내는 아주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일 것이다. 하늘의 새 이름은 주님께서 나에게 직접 일대일로 주시는 것이므로 다른 성도가 무슨 이름을 받았는지 비교할 이유도 필요도 없이 주님과만 관계된 이름인 것이다. 새 이름을 받는 성도 각자 외에 다른 성도들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도 각자에게 부여된 은사나 재능이나 사역에만 신경쓰고 다른 성도들의 것들을 탐내거나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10214
#신명기 #Deuteronomy 4:10-14
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호렙 산은 시내 산이라고도 하는데, 모세는 장인 아드로의 양떼를 치다가 이 산에서 가시나무 떨기에 붙은 불을 보고 여호와를 뵈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았고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을 시내 산이라 하는 이 호렙 산으로 인도해서 혼자서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머물면서 여호와께로부터 십계명 돌판을 받아가지고 내려왔다. 이 때 백성들은 이 산에서 여호와께서 불과 어둠과 구름과 흑암 등으로 임재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어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을 위협하여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하였다가 모세의 지시로 레위인에게 3천명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 40일 동안 머물면서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이 지나가는 것과 그분의 영광의 인성의 등을 보게 되었고 다시 돌판을 받아서 하산하였다. 이 때 모세의 얼굴에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스며들어 빛이 났는데 백성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모세는 자기 얼굴에 두건을 덮을 정도였다. 백성들이 호렙 산에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모세에게 대신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사실 모세도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그 광경이 매우 두렵고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와 백성들 사이를 중재할 의무가 있었고 여호와께서도 그를 아주 특별히 신실한 종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은혜를 부여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광경으로 백성에게 영광을 드러내시고 영원한 율법인 십계명을 반포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어린아이처럼 매우 어리고 유치해서 눈에 보이는 권세와 위암으로써 그들의 심령을 압도하실 필요가 있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나 교사가 엄한 꾸중과 질책으로써 정당한 권위를 세우면서 훈육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가르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사역을 이루신 지금은 하나님의 경륜상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와 같으므로 어린아이에게나 통하는 시내 산의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우리 마음이 자발적으로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장성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이신 성령으로써 두렵고 무서운 방식으로 드러내시지 않으셔도 성령으로써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알아 자원하는 심령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한국 교회들과 교인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방식을 악용해서 구원과 죄사함의 가치를 버러지처럼 하찮게 여기고 구원받은 자라 하면서 함부로 범죄하고 가볍게 회개함으로써 점점 더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의 한국 교회와 목사들과 교인들의 신앙은 광야의 이스라엘보다도 못한 저열한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시내 산에서의 두려운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일이 아니고서는 자력갱생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광야의 백성들은 호렙 산에서 산 꼭대기에 나타난 여러 신비한 현상들로만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었을 뿐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은 볼 수 없었으며 모세 조차도 그분의 인성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단지 등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의 인성의 찬란한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이 땅의 인간 수준으로 낮아지셨고 그중에서도 단지 공생애를 행하신 3년 정도만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성을 드러내셨다.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영원 전에 가지셨던 인성의 찬란한 영광을 회복하셨고 그대로 영원까지 계신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아무도 직접 본 자들이 없고 스데반이나 사도 요한이나 바울 사도처럼 아주 극소수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만이 환상 중에만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비록 광야 백성들처럼 호렙 산에서 두려운 광경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셔서 호렙 산 광경보다 더 확실한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은밀한 감동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눈에 보이는 환상이나 광경 등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미숙하거나 거짓된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그렇게 두려운 광경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위함이셨다. 즉 백성들은 호렙 산에서 목격했던 여호와의 영광이 죽을만큼 두렵고 떨렸듯이 십계명도 그렇게 두려움으로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단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주님께서 장차 오실 때까지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계명을 그저 지키면 좋고 안지켜도 회개하면 된다는 안일한 태도가 아니라 마치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 앞에서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극한의 공포와 두러룸을 가지고 어기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대하며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드시 죽을 죄를 반드시 살리시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악한 본성은 이러한 십계명의 엄중함을 가볍게 여기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이 높으신 죄사함을 낮추게 하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율법의 엄중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드높으심에 대한 인식을 점점 더 회복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20200214 #창세기 #Genesis 33장.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는 야곱과 함께한 일행들이 야곱의 아내들과 자녀들인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겠지만서도 야곱에게 일부러 물어봄으로써 그들을 소개시켜 달라는 의도를 전한 것 같다. 그제서야 야곱은 자기 형 에서에게 아내들과 자녀들을 소개하는데 진행한 순서대로 두 여종들과 그녀들의 자식들을 먼저 인사시키고 다음에는 레아와 그녀의 자녀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을 인사시킨다. 여기서도 아내들과 자녀들을 인사시키는 표현이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두 여종과 레아와 그녀의 자녀들은 그녀들이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는데 유독 라헬과 요셉만큼은 라헬이 요셉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자기 어미 라헬을 모시고 나오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런 표현의 차이가 어떤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찾아본다면 야곱에게는 여러 아내들과 많은 자녀들이 있더라도 참된 아내와 아들은 오직 라헬과 요셉뿐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또한 추후에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대흉년을 대비하는데 특별히 쓰임받을 것이라는 복선일 수도 있다.
당시 요셉의 나이를 열 살 전후로 전제한다면 야곱이 에서를 만난 때는 백 세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그들의 아버지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으므로 그들로서는 그나마 감사하게도 이삭이 살아있는 동안에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원래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고 풍족하여도 만족하지 못하고 할 수만 있다면 자의건 타의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런데 에서는 이미 자기 소유가 넉넉하기 때문에 야곱이 자기에게 주려는 예물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 수가 있다. 에서가 하나님께 미움 받는 자라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에서의 행위도 위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 같다. 세속인인 에서가 여기서 드러낸 덕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족함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용서이다. 하나님께서 세속인인 에서를 통해서 이러한 덕목을 우리에게 보이신 이유는 세속인 조차도 이 땅의 원리나 하나님의 보편 은총에 따라 자족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아는만큼,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라면 얼마나 더 그런 덕목을 추구해야 할 것임을 우회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의 선행이 모든 세속인의 덕행 보다 나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보다 못한 우리 수준에 부끄러움을 갖되 지속적으로 그 선행의 수준을 높이도록 정진함이 마땅하다.
그동안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직전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극심했는지를 본다면 그가 형 에서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에 비유한 것은 절대로 아첨하기 위한 교언영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야곱은 사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심정으로 에서에게 나아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동안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에서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마치 하나님께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과 같은 안도와 기쁨을 가지고 에서에게 지극히 감사했을 것이다. 에서를 다시 만나기까지 야곱의 생애는 어쩌면 성도들의 일생과도 너무나 비슷하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듯이 성도들 또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되었다. 야곱이 에서를 두 번이나 속인 것처럼 성도들 또한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속인들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고 살았다. 야곱이 아무런 소망 없이 도망쳐 나와 들판에서 돌을 베고 처량하게 잘 때 천사들과 그리스도를 보았듯이 성도들은 어느 특정한 어려운 시기에 몸과 마음이 낮아져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야곱이 라반의 객으로 머물면서 60여 년을 고생하면서 자기가 에서에게 했던 잘못을 절감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소망했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은 후에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고 점점 더 자기 죄에 민감해진다. 때가 되어 야곱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에서를 다시 만나 용서를 받고 지극히 기뻐하듯이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난 후 마지막 날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설 것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무죄가 선고되고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보잘 것 없는 선행에 대한 지극히 큰 상급을 받게 되어 지극히 즐거워 할 것이다. 야곱은 자기를 너그러이 용서한 에서를 하나님을 뵙는 것에 비유하듯이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에서가 동생 야곱과 동행하려 하고 자기 사람들을 남겨두고자 한 것은 야곱을 감시하거나 틈을 보아 해코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그의 무리들이 행여나 허허벌판에서 다른 종족에게 위험한 일을 당할까 염려되어서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었다. 야곱은 그런 에서의 선한 의도를 알고 있었으나 자기가 이끄는 무리의 상황을 고려해서 정중히 거절한다. 에서는 그런 야곱의 거절에 빈정 상함 없이 동생의 의견대로 다시 자기 일행을 이끌고 돌아가고 야곱은 천천히 에서의 지경으로 이동한다. 야곱이 거처한 숙곳은 사사 기드온 시대에 기드온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추격할 때 기드온을 돕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 방백들을 잡고 복귀하는 기드온에 의해 찔레와 엉겅퀴로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 야곱은 장막을 치기 위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그 땅을 구입하는데, 이후부터 야곱과 세겜의 악연이 이어진다. 하몰의 아들 중 하나가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고 아내를 삼으려다가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의 계략에 의해 몰살 당하게 되고, 먼 훗날에 사사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 족속과 결탁해서 야곱의 후예인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몰살시킨다.
야곱이 제단을 쌓고 명명한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엘로헤 이스라엘)'이란 뜻이다. 야곱은 모든 일이 기적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경험하자 하나님께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려 감사를 표한다. 신자들은 무릇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각자의 삶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사를 드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