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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문을 소개하는 글을 적을 때 한글파일에서 작성 후에 복사하기로 카페 글쓰기로 넘깁니다.
스코틀랜드 가문 분량이 정말 많군요... 첫 번째가 A4 6장, 두 번째가 5장이 나왔군요. 세번째는 6장...
잡지사에 기고 할 때도 5장을 넘기지 않았는데... 장당 얼마인데...
카페에 쓰는 글이 5~6장을 넘으니... 제가 이 카페를 너무 사랑한다는 느낌이... ♥
자~ 이제 영화 한 편 찍으러 갑니다. 시대는 13세기 초... 여전히 크루세이더 시대입니다.
주연은 세 명으로 압축합니다. 윌리엄 월리스, 로버트 브루스, 에드워드 1세입니다.
물론 다수의 조연도 출연합니다. 존 베일럴이 주연급 조연이군요...
전번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며 노르웨이 공주인 마가렛의 최후에서 끝났습니다.
여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장 당황한건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아니라 잉글랜드 궁전에서 미래의 계획을 짜고 있던 에드워드 1세였죠. 결혼 한 방에 왕관 꿀꺽이 진리인데...
한편 던켈드 가문으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봅니다. 자 이제 누가 나서지?
문제는 누가 왕이 되든 에드워드 1세와 한판 붙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서양사에서 공식은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지배자의 가문에서 지배자가 나와야지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역성혁명은 존재하질 않았다는 겁니다. 동양의 역사에서 특히 중국사의 경우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천자는 하늘이 내려준다’라는 모토로 천하의 인심을 얻는 자가 군주가 됩니다. 물론... 평민에서 천자가 된 경우는 딱 2번인데 한나라의 고조 유방과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 뿐이긴 하지만... 일반 귀족이나 중산층 가문에서 천자가 배출되는 사례는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사에서는 로마제국 정도 밖에... 게르만의 침략 이후 이런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는 거죠. 게르만족의 습성상 철저한 신분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봉건제도가 게르만의 풍습에서 전달되었듯이 원래 로마의 유산은 아니에요. ‘미국의 독립’ 이전에는 절대 평민이 최고 권력을 잡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월리스도 공식적인 스코틀랜드의 섭정이었기에 그는 평민 출신은 아닙니다... 그냥 영지를 얻지 못한 귀족의 후손일 뿐이죠. 울나라도 마찬가지죠... 벼슬 못하면 바로 평민...
공식적으로 첫 번째 공위 시대에 권력자는 이들입니다. 두 번에 걸쳐 여러 명의 귀족들이 권력을 나누어 잡죠. 1290-1292년 소위 Guardians of Scotland은 다음과 같습니다.
1. William Fraser, Bishop of St Andrews
2. Robert Wishart, Bishop of Glasgow
3. John II Comyn, Lord of Badenoch
4. James Stewart, 5th High Steward of Scotland
5. Alexander Comyn, Earl of Buchan
6. Donnchadh III, Earl of Fife
딱 보시면 주교들이랑 궁의 재무관, 지방의 권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죠. 이들 중 제임스 스튜어드는 훗날 스튜어드 왕조의 조상입니다. 이때부터 재무관이 권력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마치 궁재였던 카를링거가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때 혈통을 매개로 존 베일럴(John Balliol, 1249-1314)이 등장합니다. House of Balliol (1292–1296)은 실질적으로 4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지만 존의 장남 에드워드(Edward Balliol)까지 그 권리를 주장합니다. 한 번 왕가는 영원한 왕가?!
그가 속한 House of Balliol은 원래 앵글로-노르만 계통으로 가문의 시조인 가이(Guy I de Balliol)가 잉글랜드왕 윌리엄 2세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귀족 반열로 들어섭니다. 이후 5대째 이르러 존(John, 5th Baron de Balliol)이 데르보길라(Dervorguilla of Galloway, d. 1290)와 결혼 하면서 왕위계승권을 갖게 되죠. 이 두 사람의 아들이 왕이 되는 존 베일럴입니다. 즉 그는 어머니로부터 계승권에 다가갑니다. 그렇지만 존 베일럴이 왕이 되는 것은 그의 할아버지 알란의 공이 더 크죠. 할아버지가 손자를 왕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거든요. 자신에게는 없지만 손자는 있으니까요...
여기서 갤러웨이 가문을 잠깐 소개합니다. 베일러 가문이 켈트족의 지지를 엄청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거든요. 이 가문은 스코틀랜드의 명문인데 알란(Alan, Lord of Galloway, d. 1234)이 잉글랜드의 모빌 가문의 외손이 되면서 노르만 계통 귀족과 연결되죠. 그리고 알란은 헨리 1세의 서녀와 결혼한 퍼거스(Fergus, Lord of Galloway)의 증손자였고 고모할머니가 암라입(Amlaíb, King of the Isles)과 결혼한 덕분에 고종사촌들이 다 왕입니다. 아무튼 갤러웨이 가문은 켈트족의 명문입니다.
그리고 알란은 갤러웨이 가문에 최고의 결혼을 하게 되는데 헌팅던백작 데이비드의 딸 마가렛(Margaret of Huntingdon)과 결혼해서 던켈드 가문의 사위가 됩니다. 그리고 딸 데르보길라(Dervorguilla of Galloway, 1210-1290)을 낳아서 존(John, 5th Baron de Balliol)에게 시집을 보내 존 베일럴이 스코틀랜드 왕이 되도록 레드카펫을 깔아줍니다.
스코틀랜드왕 역사를 보면 마가렛1세, 존1세, 로버트1세가 보이시죠?
역사의 전환에 선 가문들의 이야기입니다. 문장도 차이가 있고요...
존1세라고 적힌 왕이 바로 존 베일럴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조선시대 인조 같은 군주...
잉글랜드도 스코틀랜드도 '존' 이란 이름의 왕이 문제군요.
자~ 여기서 베일럴 가문과 훗날 브루스 가문에게 왕관을 주게 되는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가문을 살펴보죠.
전에 언급했듯이 그는 던켈드 가문의 막내라서...
1. 마가렛(Margaret of Huntingdon, 1194- 1233) 알란(Alan, Lord of Galloway)과 결혼해서 두 딸 크리스티나와 데르보길라를 얻습니다. 장녀는 자식이 없고 차녀 데르보길라(Dervorguilla of Galloway)가 시집가서 베일러 가문의 자손을 낳습니다. 베일럴 가문의 계승권 원천이죠.
2. 로버트(Robert of Huntingdon) 유아사망
3. 아다(Ada of Huntingdon) 헤이스팅스 경 헨리(Sir Henry de Hastings)와 결혼합니다. 그녀의 아들로 헨리(Henry de Hastings, 1st Baron Hastings)가 있어요.
4. 마틸다(Matilda Maud of Huntingdon)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죽어요.
5. 이사벨(Isobel of Huntingdon, 1199–1251)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4th Lord of Annandale)랑 결혼합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Robert de Brus, 5th Lord of Annandale)이고 차남이 존(John of Scotland, Earl of Huntingdon)입니다. 브루스 가문의 계승권 원천이죠.
6. 헨리(Henry of Huntingdon) 유아사망
결국 데이비드의 후손은 딸들로만 연결되기 때문에... 외손자들의 싸움이로 귀착되는군요.
데이비드의 장녀 마가렛 그리고 그녀의 차녀 데르보길라의 결혼으로 베일럴 가문이 왕위오구에 가장 우선 순위를 가지게 됩니다. 존(John I de Balliol)과 데르보길라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 존 베일럴은 4남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형들은 자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형만 3명이 있었죠... 유아사망의 위엄!
공위 시대는 존 베일럴의 즉위로 잠시 단절되었다가 열리게 되는데 솔까 존의 참칭극으로 막을 내렸다고 봐도 무방할듯합니다. 존은 그의 어머니를 통해 ‘great-great-great-grandson of King David I’이라는 명분으로 즉위를 했지만...
단지 그는 혈통에 근접했을 뿐... 당시엔 힘의 논리가 더 지배적이었죠. 그의 즉위는 에드워드 1세의 침공을 불러옵니다. 6명의 별볼일 없는 귀족놈들이 통치한다고 할 때 에드워드 1세는 공식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내 혈통이 얼마나 고귀한데... 알지? 나는 마틸다의 후손이라네... 이런식입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에게 스코틀랜드 왕관을 바치는 것은 매국노 짓이죠... 분명 귀족들간에 분쟁이 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1세의 권리를 인정하여 지속적인 귀족 노릇을 하겠다는 파와 분명 독립을 유지해야겠지만 존 따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파 간의 대립...
그러나 국내 대립 속에서 1296년 존 베일럴은 에드워드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The Stone of Scone’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러니... 자동 폐위당했죠. 왕이 스콘의 돌을 잃다니... 넌 자격 없어!
결국 존은 폐위 당하고 에드워드 1세는 수도로 진격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귀족들은 모여 에드워드의 권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섭정을 선택합니다.
처음 지명된 섭정은 앤드류(Sir Andrew Moray)였지만 재차 에드워드의 침공에 두려움을 느껴 주저하자, 결국 로버트(Robert de Bruce)와 존 베일럴의 조카였던 존(John III Comyn, Lord of Badenoch)은 윌리엄(Sir Willam Wallace)을 섭정으로 인준합니다.
1296년-1306년까지 Guardians of Scotland은 다음과 같습니다.
1. Sir Andrew Moray (1297)
2. Sir William Wallace (1297–1298)
3. Robert de Bruce, Earl of Carrick (1298–1300)
4. John Comyn (1298–1300, 1302–1304)
5. William Lamberton, Bishop of St Andrews (1299–1301)
6. Sir Ingram de Umfraville (1300–1301)
7. John de Soules (1301–1304)
8. John of Brittany, Earl of Richmond (1305–1307) - 처음 에드워드 1세가 지명해서 에드워드 2세에 의해 인준 받은 잉글랜드 귀족임
여기서 스콘의 돌(The Stone of Scone)을 먼저 언급하고 가야될 것 같네요. 어쩌면 스코틀랜드의 왕관은 여기서 그 빛이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잉글랜드의 당당함이 여기서 발하는 것일지도...
이야기는 잠시 현대로 돌아가겠습니다.
1950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새벽에 4명의 스코틀랜드 출신 대학생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숨어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레이트 브리튼 국왕이 대관식 때마다 의자 밑에 깔고 앉는 ‘The Stone of Scone’을 훔쳐내어 곧바로 스코틀랜드로 귀환합니다. 이 귀환은 열렬한 환호를 받지만... 다시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갑니다. 감히 어딜... 그러나 무척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얼마 전 스코틀랜드 독립투표도 노친네들 연금 땜에 부결되었다는...
구약성서에서 야곱이 베델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베개로 삼았다는 이 바윗돌은 이듬해 4월 스코틀랜드 아르브로스 사원에서 발견돼 런던으로 돌아갔지만 두 나라의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됩니다.
가로 66㎝ 세로 41㎝ 두께 27㎝에 불과한 이 돌이 왜 이리도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것인지...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선... 물론 전설입니다. 우리처럼 단군 왕검이 천제의 손자이며 천국의 왕자 환웅의 아들이 나라를 건국했다는 전설처럼...
스코틀랜드도 자신들의 선조는 그리스 왕자 가텔로스이며 그가 이집트에서 가져와서 그의 후손들이 1000년 후 스코틀랜드에다 왕국을 세운 뒤부터 이 바윗돌 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맥알핀 가문의 케네스 1세가 에딘버러로 이동하여 즉위할 때 대관식 의자에 깔아 두어서 이후 스코틀랜드 왕실의 상징이 됩니다.
하지만, 이 돌은 1296년 존이 박살나고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했을 때...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약탈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죠. 그때부터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 의자로 사용된 이 돌은 그 후 수백 년간 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임스 1세 부터는 조용했겠죠... 원래 우리 꺼니까...
그러면 이 돌은 현재 어떤 상태냐고요? 1996년에 ‘대관식 때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돌아와야 한다.’라는 단서만 붙혀 다시 돌을 스코틀랜드로 반환해 줍니다. 아마 찰스나 윌리엄이 즉위 할 때 이 돌이 다시 등장하겠죠...
스콘의 돌이 않힌 대관식 의자입니다.
의자 사이에 끼워져 있는 돌 보이시죠?
이러한 신성한 돌을 존이 빼앗겼으니... 말도 안되는 이런 수모...
결국 정복을 벗어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1차 독립전쟁인 Battle of Stirling Bridge...
1297년 9월 11일 섭정인 앤드류(Andrew de Moray)와 윌리엄(William Wallace)은 에드워드 1세의 명령을 받고 침공한 존 드 워렌(John de Warenne, 6th Earl of Surrey)과 휴(Hugh de Cressingham)와 격전을 벌리죠. 군대 숫자는 아마 스코틀랜드군이 6천여 명 정도였고 잉글랜드군이 9천여 명(기사가 2천명, 보병이 7천명) 정도 였다고 추산하더군요.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보병 5천여 명과 기사 100여명이 전사합니다. 결과는 잉글랜드 패배...
이때 윌리엄의 군사적 재능과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죠...
윌리엄(William Wallace, 1270-1305)은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현재 그가 남긴 문서들 일부를 통해 가계를 유추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의 부친 이름은 알란(Alan Wallace)이었고 맬컴과 존이라는 동생이 확인됩니다. 이 가문이 헌팅턴 근처에 약간의 토지를 보유했다는 토지 문서가 남아 있어서 소지주 출신으로 파악하더군요. 아무튼 가문의 성이 남서부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웨일즈 사람’을 뜻하므로 조상이 웨일즈에서 건너왔다고 보는 것이 유력할 듯 합니다. 그의 등장은 명문 출신의 귀족 윌리엄 더글러스(Sir William Douglas)와 함께 강탈해 잉글랜드로 스콘의 돌을 수송해 가던 윌리엄 드 허셀링(William de Heselrig)을 공격하면서 부터입니다.
1298년 4월 에드워드는 다시 재침공을 했고 그 유명한 장궁병을 끌고 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두고 인접 프랑스는 윌리엄을 도와줘야 한다고 로마에 청원을 넣습니다. 이와 관련된 문서들이 현재 남아 있는데, 윌리엄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코틀랜드 내부에 있던 스파이가 보낸 문서로 보더군요. 아무튼 독립운동은 상당히 국내외적으로 전개되었고 잉글랜드는 빠른 압박만이 유효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군사활동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니까요.
어느 시기 어딜 가도 매국노는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독립한다고 다들 난리도 아닐 때...
1305년 존 드 멘테이스(John de Menteith)라는 에드워드를 추종하는 스코틀랜드 기사가 글래스고우를 통과하던 윌리엄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존 드 서그레이브(John de Segrave)에 의해 에드워드가 있는 곳까지 후송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왕 필립과 노르웨이왕 호콘 사이에 오고간 문서들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윌리엄을 누가 잡아서 누가 보냈는지에 대해 말입니다. 그만큼 국제적인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결국 반역죄로 런던탑에서 교살되었습니다. 죽은 후 머리는 타르에 넣어 보존, 효수되어 런던탑에, 그리고 사지는 잘려져 각 지방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의 동생인 존 그리고 윌리엄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시몬(Sir Simon Fraser)도 잡혀 와서 처형되어 독립운동동지와 형제간에 목이 함께 런던탑에 효수되는 비극이...
오늘날 스털링대학의 바로 남쪽 언덕에 1869년에 세워진 높이 67m, 246계단의 윌리엄 월레스 기녑 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월레스가 잉글랜드 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탑으로 월레스가 사용한 검과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런던탑에도 그가 죽은 장소가 표시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재판 때 결코 자신은 잉글랜드 왕의 신하가 된 적이 없기에 반역죄는 절대 적용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겼지만... 자칭 스코틀랜드왕인 에드워드 눈에는 저 건방진 넘... 나를 반역해... 뭐 이런 논리였다고 합니다.
18세기에 제작된 초상화이고 옆은 그가 살아생전 사용한 인장입니다.
후세 화가가 그린 스털링브리지의 전투장면 묘사입니다.
게임을 열어보면 로버트 1세의 아버지 로버트가 남작령을 소유하고 있더군요.
플레이를 못하니... 백작으로 승격시켜 플레이를 가능하게 해야됩니다.
얼마전 해 보았는데... 성장하질 못하겠더군요. 능력 되시는 분은 좀 성장시켜 주세요.
로버트 1세 아버지인로버트의 가계도입니다. 데이비드 던켈드가 보일껍니다.
스코틀랜드의 왕관은 여기서 부터...
윌리엄의 죽음 확실히 독립파에게 자극이 되었죠. 눈치만 보던 로버트 드 브루스는 드디어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이 독립 운동에 앞장서겠다고...
1906년 로버트(Robert I, 1274-1329)는 스스로 스코틀랜드 왕임을 선포하고 에드워드에게 반격을 가합니다. 이제 House of Bruce (1306–1371)의 시대가 열리는군요.
로버트 1세는 증조모 이사벨(Isobel of Huntingdon)로부터 왕관을 얻습니다.
그의 가계를 실펴 보면 어머니는 잉글랜드의 명문 귀족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 4th Earl of Hertford)의 손녀이자 스코틀랜드의 명문 귀족 캐릭백작(Donnchadh, Earl of Carrick)의 증손녀, 친조모는 잉글랜드의 명문 귀족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 1st Earl of Pembroke)의 손녀였죠. 제가 언급한 이런 가문들은 다 현재 영국에서도 명문으로 통하는 가문들입니다. 특히 클레어나 마샬 가문은 한 가문 내 작위를 여럿 가지는 가문원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는... 게임 내에서도 깨알같이 구현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북부를 열어보시면 이들 가문이 모두 등장합니다. 등장한다는 말은 진짜 명문들이란 소리죠... 비록 왕위는 차지 못하지만 다수의 귀족 가문을 배출합니다.
로버트의 즉위에 대노한 에드워드... 철저히 응징하여 박살내겠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다음 해 12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Edward II, 1284-1327)가 계승합니다.
2차 독립전쟁은 1314년 6월 24일 시작된 Battle of Bannockburn의 결과에 따라 이뤄집니다. 로버트는 1만 명도 안 되는 군대를 거느리고 나오고, 잉글랜드에선 2만 5천의 병력을 집결 에드워드 2세와 험프리 드 보훈(Humphrey de Bohun, 4th Earl of Hereford)이 지휘를 맡습니다. 이 전투의 배경에는 스코틀랜드가 이미 프랑스와 노르웨이의 후원을 업고 있는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졌는지라 일방적으로 잉글랜드의 우위 상태는 아니었죠.
2번의 전투 결과 잉글랜드는 700여명의 기사와 1만 1천명에 달하는 보병을 잃고 퇴각하게 됩니다. 전쟁사에서 이 전투는 상당히 긴 시간 치열하게 싸웠는데 중세의 전투는 몇 시간 내 결판나는 것이 보통인데 이틀 이상 싸우면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렸다고 합니다.
전투와 관련하여 상당히 연구가 진행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찾아보세요. 지형의 결과에 따라 승패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전쟁사에 관심이 없어서 잘 이해가 안 되더군요. 전쟁은 무기의 발달과 관계가 많아서 과학사랑 연동이 필수입니다. 거기가 건축물의 발달도 한몫을 하구요. 게임 할 때도 전투보단 내정 중심으로 합니다...
윌리엄이 승리한 스털링으로부터 3.2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배녹번(Bannockburn)에서의 승리는 브루스 가문의 왕관을 빛내 주었고 로버트의 완벽한 승리가 됩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국가 존립은 다시 한번 확인되었고 플랜타지네트 가문의 야욕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음을 기약해야 되는 입장...
이후 스코틀랜드는 House of Bruce (1306–1371)의 64년간의 통치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스코틀랜드입니다. 로버트의 아들 데이비드 부터더군요.
어려서 4년간이 살얼음판...
16세기 작성된 문서에서 로버트 1세 부부의 초상화입니다.
게임은 브루스 가문의 통치에서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더군요.
그래서 여기서 소개는 끝낼까 합니다.
만일 기회가 된다면 House of Stewart (1371-1567)와 House of Stuart (1567–1651)를 하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끌리지 않구요...
여담이지만 스털링은 특히 스튜어트 왕 시대에는 왕실이 애착을 보인 곳입니다. 엄청 정비를 잘해놓아요. 특히 전투와 관련한 자료도 많이 남겨놓습니다. 이 전투 덕분에 1603년 두 나라의 왕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스튜어드의 전성시대가 되니까요.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브루스 가문의 문장입니다.
로버트 1세 직계는 아니고...
방계 가문이 아직도 2개의 백작 작위를 소지하고 있어요.
Earl of Elgin 과 Earl of Kincardine
그리고 4개의 준남작(Baronet) 가문도 방계로 남아있습니다.
다음부터는 특집기획으로 소개할까합니다. 인기로 가문 찍기...
인기 투표로 소개 가문을 정할까... 생각중입죠... 연대기도 인기 투표 하시던데...
이 많은 크루세이더 시대의 가문들을 소개하려면 제 인생 다 투자해야 될 듯...
항상 부러운 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너무나도 정리 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생계유지를 위핸 함부로 역사에 발 담그면 곤란한 것이 현실입니다.
주절주절 하다... 배가 고파서 끝냅니다.
보잘 것 없는 스코틀랜드 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름 정리해서... 즐거웠습니다.
첫댓글 윌리엄 월레스도 대단하지만 좀 더 파고들면 브루스도 대단한 인물이지요. 교회에서 라이벌 코뮌을 살해해서 파문당한 일, 아내가 던젼에 갇히고 동생들이 처형되어도 세력을 모은 일, 거미보고 좌절 극복한 일(비록 후대에 기록된 이야기지만),베녹번 전투 전날 영국 기사 대갈통을 도끼로 찍어버린 일 등....
스코틀랜드도 정말 치열한 역사를 가졌군요. 한국에서는 그저 어느순간 영국에 병합당한 나라 1로만 여겨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ㅜㅜ 재밌게 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브레이브 하트에선 평야에서 싸우는 것만 본 듯 한데 다리가 나오는것 보면 지형적인 것을 잘 이용했나 보네요.
십자군을 넘어 페르시아나 유목민,인도명문가소개는 힘들시까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영어권에서도 소수인지라...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가 공부하고 적어야 되기 때문이죠. 이해하고 써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합니다.
부디 유럽으로 만족해 주세요...
오오 좋은 글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