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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 : 5 때가 이르기 전
고전 4 : 5 때가 이르기 전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드러난 이단 사상이나 죄는 판단하고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과 충성의 정도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전혀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 자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죄 없는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주로부터 용서받아야만 구원을 받는 죄인들이다. 심판할 자격이 없는 우리끼리 서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듣고 좌절할 것도 없고 교만할 것도 없다.
1]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바레트(Barrett)는 '판단하다'를 뜻하는 '크리네테'(*)를 궁극적인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 행하는 '예비 심문' 또는 '예비 조사'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판단을 임시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이 최후의 심판에 어떠한 작용을 할 수 있는 예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위가 위임된 것으로써 혐의에 대한 조사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며 판결도 그분께서 행하신다. 때가 이르기 전, 그 마지막 판단의 때가 오기 전에 너무 서둘러 내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거나 이웃들의 판단을 마지막 판단처럼 수용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 오시는 그 때에 주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이다.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고 그리고 내 마음의 속 깊은 뜻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하게 했던 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모티브와 동기까지도 다 살피시는 바로 그분, 그분만이 나에 대한 마지막 판단자가 되실 것이다.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인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의 '판단'은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Calvin).
바울은 천사들을 판단할 수도 있는 인간의 권위가(6: 3)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는 최후의 날까지 유보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와 그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본 절의 '때'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일정한 기간(롬 3: 26)뿐만 아니라 한순간의 시각(마 24: 45)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약속된 시간'(an appointed time)으로서의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 롬 3: 26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마 24: 45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전장(前章)에 나오는 '그 날'(3: 13)과 동일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 최후 심판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심판하게 될 이날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도래하기 때문이다. (Harris).
* 마 25: 31-46 -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요 5: 24-30 -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두드러진 이단 사상이나 도덕적 오류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은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여기에 판단치 말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이다.
2]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본 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내용이다.
어두움 속에 숨겨진 악한 세력의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드러날 것이다.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모든 비밀조차도 밝히 드러날 것이다.
* 마 10: 26 -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어두움 속에 숨겨진 인간 행위의 무질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에 의하여 모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설픈 판단은 그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다.
* 요 12: 48 -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3]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춘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들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관해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받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다른 이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겨두면 된다.
4]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 때 그분이 그렇게 완벽하게 판단하시는 그날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했다.
'칭찬이 있으리라!' - 여기에 주님의 중요한 의도를 여러분이 읽으셔야 한다. 주님이 주님의 자녀들을 판단하실 때, 그 의도는 처벌에 있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분의 마지막 의도는 처벌이 아니다.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서, 내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대한 파괴적인 판단, 파괴적인 비판, 그 정죄,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이미 그 심판은 지나가는 것이다.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주의 백성들에게 3가지를 주고 싶어 하신다. "너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3가지 약속을 하셨다.
* 벧전 1: 7 –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고 싶어 하신다. 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싶어 하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의 삶 속에 (판단보다는) 칭찬할 거리를 찾고 계신다.
5] 충성과 판단 : 박 조준 목사 4: 1-5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와 그의 동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알려진 비밀이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지식이 없고, 권세가 없고, 돈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에게 이 비밀,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 그리스도를 보배에 비해서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배를 발견하고 집에 가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 보배를 소유하기 위해서 우리의 것을 모두 팔아야 합니다. 잠언에도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 말씀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충성’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충성이란 말의 성경적인 뜻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faithful’이란 말을 씁니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신의가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이란 말과 믿을 만한 사람이란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1장 45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미쁘시므로 그 백성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장 5절 이하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충성되십니다. 하나님이 믿을 만하신 것과 같이 그의 자녀 된 우리도 남이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간이 많다고 해도 이 충성의 요소가 결여되면 그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을 골라 기름을 붓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이 무엇입니까? 한문으로 중심(中心)은 ‘충(忠)’입니다. 어디서나 사람을 쓰려 할 때 흔히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그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이고, 둘째는 “그가 믿을 만합니까?” 다시 말하면 “그가 충성됩니까?”하는 것입니다.
첫째 조건은 그의 재능과 전문 지식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조건이 구비되었다 할지라도 둘째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채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주는 좀 부족해도 충성된 사람을 쓰는 것이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재능, 기술과 지식이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믿을만하고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충성된 남편, 충성된 아내, 충성된 아버지, 충성된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충성된 직원, 학교에서는 충성된 교사, 충성된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믿어줍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믿을만한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충성에는 흔히 세 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이가 큰 일에 충성합니다. 어디서 무슨 직분을 맡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하나님은 흔히 작은 일을 맡기십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요,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충성됨을 보고나서 장차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작은 의무가 있습니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혹은 음식을 받아놓고 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도 작은 일입니다. 매일 성경을 조금씩 읽는 것도 작은 일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작은 일 중에 하나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이 큰 일을 맡을 때 충성합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으로 일하면서 충성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애굽의 총리대신의 직분을 맡기게 되었고 그 또한 그 자리를 충성되게 잘 감당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충성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웠고 그는 그 왕의 자리에서 충성되게 자기의 책임을 감당한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 큰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일을 맡기십니다.
둘째는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충성하기는 쉽습니다. 며칠 동안 충성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혹 몇 해 동안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충성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서 제자로서 봉사하는데 신용을 얻어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가 한 2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하다가 죽었다면 아마 우리는 유다를 충성스러운 제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년만에 그만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도와 주던 젊은 사람 중에 데마 같은 사람은 아마 바울을 돕다가 몇 해 후에 죽었다면 좋은 사람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배반하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동양의 역사를 읽어보면 전한, 후한이 나옵니다. 그 한나라가 왜 전한, 후한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사이에 왕명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30년 동안 충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30년 후에 역적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셋째는 환경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녹음 방초가 성한 여름에는 송죽의 절개를 모릅니다. 소나무, 대나무가 푸른 것을 잘 몰라요. 다 푸르니까요. 그러나 겨울이 되어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게 되면 송죽의 절개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집이 가난할 때 어진 아내를 알고,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을 안다고 했습니다. 고려조가 다 무너져서 넘어지게 될 때 정 포은 선생 같은 충신이 나타난 것입니다. 왜적이 침노해서 팔도 강산이 그야말로 풍전 등화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이 충무공 같은 이가 나타났습니다. 교회도 큰 일을 하려고 할 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직분이든지 맡기실 때에는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기대에 대해서 어떤 보답을 합니까? 사실 교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은 이런 충성스런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3절 이하 4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여기 ‘판단’이라고 하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면 보는 사람, 듣는 사람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 후보들을 판단합니다. 후보들은 국민들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할 때도 있고 판단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판단을 받습니다. 이렇게 판단에는 세 가지 종류의 판단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판단, 내가 나를 판단하는 판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판단입니다.
대개의 나라에 삼심(三審) 제도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방법원이 있고 그 위에 고등법원이 대법원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판단하는 법정도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법정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의 법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먼저 인간의 판단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누구나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습니다. 잘한다, 못한다 하는 칭찬과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가? 아니면 비난을 받는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받게 되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그래서 사람들에게 좋은 판단을 받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소위 인기인들은 인기 관리를 위해서 얼마나 힘쓰는지 모릅니다.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일을 자랑하기도 하고 선전까지 합니다. “나 아무개는 이런 사람이올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판단이란 것은 세 가지 판단 중에 가장 정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외모로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열 길 물 속은 볼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속기가 쉽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심을 속에 품고 인심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만날 때에 아주 겸손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하고 모든 송사를 그저 유리하게만 판결해 주고 해서 거짓으로 자기를 나타낼 때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년들이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잘 하는 줄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반역이 일어났고, 사필귀정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내릴 때 압살롬과 같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판단이란 것은 편견과 당파심과 여러 가지 잘못된 길에 빠져서 그 판단이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옛날 헬라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같이 유명하고 귀한 철학자에게 독배를 내리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살인 강도는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 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판단은 언제나 변합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란 말도 있지만 판단이 이렇게 달라집니다. 사람의 코가 몇 번씩 변한다는 말도 그것입니다. 어떤 때는 칭찬하고 어떤 때는 비난합니다. 언제 그 마음이 변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이란 매우 작은 일입니다. 칭찬받는다고 과히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너무 여기에 마음을 쓰면 여러 가지 외식과 아첨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물론 주위에서 오는 여러 가지 좋은 의견은 배울 것이고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지적할 때는 그것을 고칠 것입니다.
다음으로 양심의 판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판단보다는 정확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이 양심이 있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의 판단에 대해서도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판단이 항상 정확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귀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양심이 타락되고 왜곡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침반은 언제나 남과 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옆에 큰 쇠뭉치가 오게 되면 쇠뭉치가 있는 데로 그 바늘이 기울어집니다. 우리의 양심의 바늘도 본래 옳은 것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지만 강한 물질의 욕심, 권력의 욕심, 정욕이 가까이 오게 되면 그 영향을 받아서 왜곡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를 가만히 보아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이렇게 귀하지만 그 명령을 무시하고 거역하면 양심이 둔해지고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면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부결(否決)을 내려서 하지 말라고 할 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양심이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안할 때가 있는데 이런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양심의 판단을 기다리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위의 판단, 주님의 판단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판단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공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습니다. 이 판단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겉만 보지 않고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하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행동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동기까지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조용한 눈이 언제든지 우리를 감시하시고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판단만을 듣고 살다가는 잘못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의 충복이며,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최일선에 내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결국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태연하게 있었던 것을 보니 다윗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점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된 모양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요?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이 세상에도 내리고 개인 개인에게도 내리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에게 내려 주십니다. 내 양심이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을 때 성경을 보면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불의는 불의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최후의 판단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 이하를 보세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 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날에는 세상 사람에게 판단받은 것, 무슨 훈장, 신문이나 방송에 굉장히 난 것, 다른 사람이 기념비나 동상을 세운 것 등이 다 쓸데없어집니다. 마지막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의 판단도 없어집니다. 오직 최후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일로 네게 맡기리라. 들어와 너를 위하여 준비한 상을 받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는 일,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감시하는 것을 깨닫고 바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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