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인의 만족과 현대 한국인의 욕구
순환적 세계관의 핵심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의 욕망을 절제하고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삶, 즉 중용적 삶은 이 사고 관념에 따른 행동양식이다. 반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관념의 색채가 점차 희미해지고, 발전주의적 사고관이 이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먼저, 기술적 발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고대인의 순환적 세계관은 그들의 농업적 생활양식에서 비롯되었다. 농업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삶의 기반이 농업에 의해 지탱된다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자연의 순환 원리는 그들에게 거스를 수 없는 힘이었고, 이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이와 반대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기술적 발전이 이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행 기술을 통해, 중력을 거스르고 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날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자연법칙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해, 죽음과 같은, 생명 원리를 뒤흔들고 있다. 심지어, 자연 원리를 전면적으로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낮과 밤의 순환 원리를 조명 기술로 초월하고, 사계절의 순환 원리를 발열 기술과 냉각 기술로 초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대 중국인들처럼 우리가 순환적 원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아직 자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초월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기술이 아직 완전히 자연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자연 원리를 초월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무한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발전주의적 사고관의 동력이 된다. 하지만 욕구는 또 다른 욕구를 낳는다. 기술은 욕구에 반응하여 나오는 산물일 뿐, 근본적으로 욕구를 해소할 수 없다.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지금, 우리의 삶은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오히려 욕망의 해소를 위해 계속해서 기술에 의존한다면, 결국 우리 자신은 그 결핍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다.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삶이 되려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중국 고대인의 순환적 세계관의 핵심은 ‘타협’이다. 자신들이 자연 원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것이 절대적인 이치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욕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타협’은 ‘순응’이 아닌, ‘만족’이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맹목적인 기술 발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성찰하고, 욕망과 만족 사이의 괴리를 중국 고대인들의 삶을 통해 매워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서양의 기술발전과 동양의 순환적 원리 중심의 사유 및 체제를 대립되는 구조로 파악하고 있는 듯해요. 우선 서양의 기술발전을 서양 전통으로 볼 수 있는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서양에서도 기술 발전에 대한 논의는 근대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전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요. 세계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의 시간관은 단선적이고 유일회적이기는 하지요.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관은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신화적 세계관에서는 퇴보를, 문명 및 문화의 관점에서는 진화 발전한다고 보기 때문이랍니다. 신화적 세계관에서는 과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으로, 문화적 세계관에서는 발전을 앞당겨야 한다는 것으로 방향성이 달라지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과학기술문명과 연결되면서 발전을 재촉하는 논리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서구의 이원화된 세계관 가운데서 특정한 부분만 보고,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데 있습니다. 동양적 세계관을 순환적 세계관으로 본다고 할 때, 이것에도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답니다. 따라서 서양의 문제점을 동양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