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하고 살자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 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마음 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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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을 기리며 -
이은상 선생하면 먼저 가곡 '가고파'와 '사우(동무생각)'가 떠오릅니다.
나는 한국 가곡 중에 특별히 "사우"(동무생각) 와 "가고파" 를 좋아합니다.
친구를 그리워 하는 절절 마음을 그린 두 노래 모두 우리시대 (1960년 고등학교 졸업)의 음악 교과서에 실렸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은상의 작시 입니다.
멜로디도 좋지 만, 고향과 동무들을 그리위 하는 그 마음 절절한 가사가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중에 "가고파"는 젊은 시절, 제주 바닷가에서 발성 연습겸 자주 부르던 노래 였습니다.
↪️가고파
(1) 내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2)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3)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가 돌아가.
(4)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 지고.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갈까 찾아가.
사우(思友)는, 이은상이 22세 때 그리고 가고파는, 29세 때 만든 시라고 합니다.
옛날 친구가 누구보다도 더 그리울 나이인 80이된 지금도 그렇게 절절한 그리움의 표현을 할 수가 없는데 20대에 그런 시를 발표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순수하고 따뜻하기에 가능했겠지만 그의 천재성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가고파 시를 읽으면서 또 노래를 하면서 우리글 한 글자가 이렇게 중요한 역활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에서 이은상은 '그'라는 글자 한자를 사용하므로 노래를 부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어릴적 고향, 그리고 친구를 더욱 그리워 하게 만듭니다.
파란물 대신에 '그' 파란물 입니다.
잔잔한 대신에 '그' 잔잔한 입니다.
물새들이 아니라 '그' 물새들 입니다.
동무들은 '그' 동무들이고
눈물 없던 때가 '그' 눈물 없던 때입니다.
'그' 자를 빼고 읽으면 감정이 반감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해서 황해도 수재라 불리던 양주동과 마산 수재로 불리던 이은상과의 기억력 시합 일화를 본인의 수필 <양주동과 우수 마발> 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그는 마산의 천재로 불리우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고파 시비는 마산의 돝섬 해상유원지, 마산여객선 터미널, 양덕동 수훈공원, 자산동 통일동산 그리고 창신대학등에 서 있다고 합니다.
노산은 시 2,000여편, 열사들의 비문(碑文) 200여편, 그리고 50여 권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문인(시인)으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은상이 대한민국의 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한 애국자라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많은 문인들과는 달리 노산은 체제내에서 정부를 도와 정부시책(문화적 측면)을 이끌어 가면서, 때로는 비판도 하면서 적극적 활동을 하는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하였습니다.
재야에서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아무말로 애국하는 길보다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체제내에서의 애국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결정입니다.
이것이 내가 노산한테 마음이 끌린 이유중 하나입니다.
그는 1945년 광주에서 호남신문을 창간하여 1945년 겨울 <이충무공 일대기>를 연재 했으며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로 가로쓰기를 체택했고 1946년 8월에는 미 군정을 비판하는 기사로 신문은 2개월간 정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호남신문사 사장시 발간한 그의 수필 '대도론(大道論)'에서 '북에는 소병(蘇兵)이, 남에는 미국이 제각기 딴전을 피우고 있다'라고 밝힌바 처럼 해방 직후의 노산은 김구 계열의 민족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를 반공 운동에 헌신하도록 한 것이 6. 25 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민족적 아픔이 었습니다.
그는 1962년 6월 25일을 전후하여 휴전이 길어 지면서 휴전선이 아닌 국경선으로 굳어져가는 동서 155마일(약240km,) 을 10일간의 일정으로 답사하였습니다.
서쪽 끝 강화 교동도에서 동쪽 끝 강원도 명호리 까지 약600리를 답사하면서 국토의 분단에서 비롯된 상실과 아픔, 민족이 처해있는 비극에 대한 울분을 글로써 표현하여 '피어린 600리'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9세때 일입니다.
휴전선을 다녀온 후 노산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으로 반공 청년 애국운동에 압장섰습니다.
그는 제2대 청우회 회장이 된 후 1965년부터 죽을 때 까지 17년간 계속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그는 청우회야말로 휴전선을 걷어내고 통일 조국의 미래를 건설하는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60세에 과감하게 반공 운동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1967년 거행된 민족 문화협회 창립 2주년에서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노산은 죽기 2년 전인 1980년, 그의 나이 77세 때 두번째 휴전선 종주를 했습니다.
기원이란 시집의 서시(序詩)에서
"지금 내가 왜 굳이 험하고 어려운 이길을 가나/
역사를 넝마 조각처럼 찢어놓은 분계선 가시철망/
구름도 거기 찔리면 피가 흐르는 길인데/
그래도 나는 가야지 가시철망 내앞길 가로막으면/
나는 거기서 시를 읊고 노래가 끝나면 통곡하고/
하늘 끝 땅끝까지 슬픈 소원을 외치련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단 고착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소원을 외친 것 입니다.
그는 청우회 운동과 함께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우는 사회 개혁운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다.
5,16혁명을 일으킨 후 국가재건 최고위원회 의장에 취임후 국민 정서 통합을 위해 고심하던 박정희에게 노산은 박정희의 정치 이념의 상징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을 강력히 추천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애국 애족 정신을 높이 평가하던 박정희는 이를 적극 수용하여 천안 현충사 성역화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에 더하여 노산은 박정희 와 함께 세종대왕, 신사임당 등의 유적지와 경주지역을 성역화 하는등 우리 문화의 창달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우리 문화 창달에 의기가 투합한 박정희 대통령과 노산은 헬리 콥터를 동승하고 다닐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당시 문화예술인 중에 청와대를 무시로 드나들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노산 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동학혁명 기념 사업회 이사,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장,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 회장, 독립동지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82년 향년 79세로 노산이 타계 했을때 장례위원장이 백낙준 이었으며 박순천, 윤보선, 최규하등 장례위원만도 2,549 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동작동 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룩한 훌륭한 업적과 그의 애국정신은 길이 길이 남을 것이며 그의 시 "가고파"도 영원히 사랑 받고 기억될 것입니다
2024.11.16.토욜
마산을 싸랑하는^♡
마산토백이
학산 김 태 환
정성 꽈~~악.~
모아 옮겨보냅니다
🎶가고파/박인수
https://youtu.be/RVMO7R6RVSU?si=R7TpJpicXbS30F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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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편지◑
◀김용택:시인▶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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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한 주말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