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크대 성경학과의 캐럴 마이어스 교수는 “밀턴이
‘실락원’에서 그렇게 말했고 일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림에 사과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그것이 사과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마이어스는
“창세기에는 사과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아담의 미혹’, ‘유혹’, ‘이브의 저주’, ‘인간의 타락’, ‘죄’ 혹은 ‘원죄’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전통적으로 천지창조 이야기는 죄에 대한 책임은 여성에게 있으며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의 보조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왔다.
이런 오류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억압해 왔다. 주종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웨이크 포레스트대 성경학과의 필리스 트리블 교수는 말했다. 트리블은 오랫동안 많은 여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온 성경 구절들을 좀더
평등한 내용으로 재번역한다. 하나님이 이브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한 구절을 두고 트리블은 일반적 묘사가
명령형으로 바뀐 가부장적 측면이라고 지적했다. 히브리 원전을 보면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남편이 너를
다스린다고 나와 있을 뿐이다. 그것은 현상을 그대로 묘사한 말일 뿐”이라고 트리블은 주장했다.
성경이 만들어진 고대 문화에서
실제로 남자는 여자를 다스렸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했고 종종 노예처럼 팔기도 했다. 특히 하갈이라는 노예는 현대 미국의 히스패닉·흑인 여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여성의 관점이 남성과 다를 수 있듯이 소수계 여성의 관점도 백인 여성과 다를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수많은 자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나이도 많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집트인 하녀
하갈과 동침해 아들을 낳을 것을 권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하갈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라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사라는
아브라함을 부추겨 하갈을 멀리 쫓아버린다. 결국 하나님은 하갈에게 직접 말을 걸어(그런 영광을 입은 것은 이브 다음으로는 하갈이 최초였다)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어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후 사라도 임신하고 90세에 이삭을 낳는다. 유대인들은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과
정신적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하갈의 목소리가 전면에 부각된 적은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밴더빌트
신학대학 히브리 성경학과의 레니타 윔스 부교수는 “아프리카인이자 노예였던 하갈이라는 인물은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우리는 노예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성경 속의 여성을 소재로 책을 몇권 쓴 메건 매케나는 캘리포니아 모텔의 성경낭독 모임에서 하갈이라는 인물이
히스패닉 여성 잡역부들에게 강하게 와닿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엘살바도르 출신의 한 불법 여성 이민자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이제 사라는 항상
찬밥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알았을 것”이라고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본받을 인물을 찾는 현대 여성들에게는 그동안 간과돼
왔던 성경 속의 용기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역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성은 창녀인데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집에 숨겨줌으로써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도록 도왔다. 그런 용기 덕분에 라합과 그녀의 자녀들만이 이스라엘의 여리고성 함락 당시
목숨을 건졌다.
사사기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전사는 드보라라는 여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간 지휘관이자 판사였다. 그녀가
모시는 장군이 그녀 없이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드보라는 여자만이 적장(敵將) 시스라를 붙잡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여성이
바로 야엘인데 시스라는 도망치다가 하필이면 그녀의 천막으로 숨어든다. 야엘은 시스라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를 봐준 다음 잠든 사이에 천막용
말뚝을 그의 머리에 대고 방망이로 때려박았다.
정경과 외경을 포함한 기독교 성서를 통틀어 페미니스트의 원형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것은
유딧서인데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한 여장부를 다룬 내용이다. 밴더빌트대의 러바인 교수는 유딧이 “말하자면 유대인 원더우먼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이웃 강대국으로부터 위협받게 되면서 유딧이 활약할 기회가 마련됐다. 이스라엘의 남성 지도자들은 항복할 준비를 하지만 아름답고
신앙심 깊은 과부 유딧은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딧은 가장 멋있는 옷을 골라 입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홀로페르네스 장군은
유딧의 미모에 넋이 나가 유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천막에 혼자 남게 되자 그의 목을 베어 음식 주머니에 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적군은 도망쳤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포함한 전 이스라엘이 화를 면했으며, 유딧(학자들은 그녀를 두고 이스라엘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새로운 경전 연구는 기독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모 마리아의 인간적 모습까지 들춰낸다.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 다음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많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단순히 성모상 정도로만 인식된다. 일부 신학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좀더 다각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성모 마리아를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로 취급하지
말자.
우리가 성모 마리아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은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윔스 교수는 말했다.
윔스는 마리아를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한 성모 마리아로서가 아닌 평범한 10대 소녀로 재해석한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던 그 운명적인 날 마리아는 모세·이사야·예레미아처럼 공포에 떨었다.
하나님이 사명을 내릴 때
이들 남성은 모두 자신이 너무 어리다거나 그 일을 하기에는 미천한 존재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로 인해 보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던 친구를 허락했는데 그가 바로 사촌언니 엘리사벳이었다. 오랫동안 불임이었던 엘리사벳 역시 갑자기
기적적으로 아기를 갖게 됐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세례 요한으로 알려진 예언자다.
이제서야 비로소 공개적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에는 현대 여성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제가 담겨 있다. 마리아는 아내는 남편에게 상속자가 될 아들을
낳아줘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약혼자 요셉의 체면을 떨어뜨렸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부분을 보면 마리아는 사촌의 집에서 석달 동안이나 지낸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한 친척집 방문이 아니었다. 엘리사벳을 통해 히브리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이 태어남으로써 구약성서의 역사는 끝나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의
삶·죽음·부활이 가능해짐으로써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지막 찬양 구절에서 마리아는 당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힘없는 자,
특히 여성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송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인 자신이 미천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만세대가 나를 복되게
여길 것’이라 예언했고 그 예언은 옳았다.
주님에게 의지하고 또 서로 의지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여자들 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성경 속의 일례로,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던 구약성서의 인물 다말과는 대조적이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다말은 첫 남편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자 당시 율법에 따라 시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시동생이 나중에 재산을 물려받을
자식을 낳기 싫어서 질외사정으로 피임하자 하나님이 그를 죽게 만든다.
율법에 따라 다말은 셋째 아들에게 시집을 가야 하지만
시아버지 유다는 아들들의 죽음에 다말이 관련된 것 아닌가 의심을 품는다. 그래서 다말을 당시 성년이 안된 셋째 아들과 결혼시키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과부로 선언해 주지도 않는다. 대신 친정아버지에게 보낸다. 그곳에서 다말은 시아버지가 자신을 셋째 아들과 결혼시켜 줄
때까지 정숙하게 지내야 했다. 나중에 다말은 유다를 속여 자신을 임신시키도록 만든다. 결국 유다가 다말을 받아들이고 그녀는 유다가 잃은 두
아들을 대신할 쌍둥이를 낳는 것으로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된다.
다말은 권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남성을
속여야 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각광받게 됐으며 이제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경
속의 여성들이 동시대의 남성들과 동등한 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약하거나 수동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돼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의 장정을 먹였다는, 주일학교 아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예로 보자.
성경에 나온 말씀의 실제 뜻은 “여성과 아이를 포함하지 않은 5천명”이라는 뜻이다. 결국 모든
남성에게 처와 적어도 2명의 자식이 있었다고 치면 예수는 실제로 2만명을 먹인 셈이다. 도대체 왜 이 이야기를 기록한 남성은 예수의 기적을 더
대단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지 않은 것일까? 당시에는 여성이나 아이들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제너럴 신학대
신약 연구과의 데이더 굿 교수는 “고대 문서에서는 여성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성경 속의 여성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렇게 경시됐던 여성들이 승리를 거두거나 복음 전도사로 활동하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브로부터 미리암과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의 여성은 우리들 신앙 생활의 주역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With
PAT WINGERT and KAREN SPRIN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