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
평양의학강습소 수료, 조선총독부 의사검정시험 합격
1930~1935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조수
1936
일본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안과학)
경력사항
1938~1980
공안과의원 설립 및 운영
1949
세벌식 속도 한글타자기 발명
1958
국산 콘택트렌즈 개발
1960~1982
맹인부흥원(맹인재활센터) 설립 및 운영
1964
한글타자기 국산화
1968
한영 겸용 타자기 개발
1985
직결식 한글폰트(매킨토시용) 개발
1988
한글문화원 설립
포상
1958
대통령 표창
1968
문화공보부 장관상
1974
외솔문화상
1995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추서)
공병우 박사는 한글타자기의 실용화를 선도함으로써 한글기계화 시장을 개척하고, 컴퓨터 시대에는 한글 글꼴과 문서작성기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한글전산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한글운동가이자 발명가이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안과학 전공 의학박사이자 한국 최초의 개인 안과병원인 공안과의원 설립자로서 안과 진료를 대중화하고 시각장애인 재활운동에 헌신한 한국 안과학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공병우는 1907년 1월 24일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공정규와 김택규의 8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통 교육을 받다가 열세 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 의주농림학교를 거쳐 1924년 신설 평양의학강습소에 입학했다. 1926년에는 평양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조선총독부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만 19세에 의사 면허를 땀으로써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공병우는 더 높은 수준의 의학을 연구하고자 1930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조수(助手)로 근무하며 실험에 정진하였고, 이 연구 결과를 1936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 제출하여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안과학 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였다.
공병우는 박사학위 취득 후 서울에 공안과의원을 열고, 개업의로 활동하였다. 공안과의원은 최초의 개인 안과의원으로 안과 진료를 대중화하였고, 무료 진료 활동이나 시각장애인의 개안수술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국민 보건을 향상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공병우는 1960년 맹인부흥원(맹인재활원, 맹인재활센터 등으로 개칭)을 설립하여 시각장애인의 자활 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병우는 한글기계화 분야에서 더 크고 넓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49년 ‘세벌식’(초성, 중성, 종성이 한 벌씩의 글쇠를 가짐) 가로쓰기 한글타자기를 개발했는데, 이는 영문타자기를 최소한으로 개조하여 빠르고 능률적으로 한글을 찍을 수 있는 기계라는 점에서 사실상 최초의 실용성 있는 한글타자기였다. 한국전쟁 중 군의 타자기 수요가 증가하는 우연까지 겹쳐 공병우는 한글타자기를 시험 모델로 생산하는 데 머물지 않고 대량으로 생산하여 판매함으로써 한글기계화의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는 최초의 한글타자기는 아니었고 시장을 독점했던 것도 아니었으나,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잘 알려진 성공적인 한글타자기였고, 1980년대까지도 대중들에게 한글타자기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문을 공병우타자기로 작성했던 일화 등이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공병우는 1969년 정부가 ‘네벌식’ 자판을 새로 개발하여 표준으로 제정했지만 그에 맞서 자신의 세벌식 자판이 한글의 초-중-종성 원리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므로 우수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권위주의 정권과 마찰을 겪고 1980년대에는 미국에서 체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시 미국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개인용컴퓨터(PC)를 익히고 매킨토시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공병우는 1988년 귀국하여 한글문화원을 세우고, 컴퓨터 시대의 한글기계화는 세벌식 자판을 통한 입력과 조합형 한글코드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공명한 대학생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고, 공병우는 이들에게 연구 공간을 제공하고 함께 아이디어를 검토하는 등 후원자이자 동료로 활동하였다. 그 성과는 문서작성기로는 이찬진, 정래권 등이 1989년 개발한 ‘아래아한글(ᄒᆞᆫ글)’, 글꼴로는 한재준이 1990년 개발한 ‘공한체’ 등으로 현실화하였다.
이렇게 공병우가 후원 또는 참여하여 개발한 프로그램과 글꼴 등이 개인용컴퓨터 시대의 한글기계화를 주도함으로써, 기계식 타자기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공병우의 영향은 한글기계화의 역사에 깊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