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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2003년에 제작된 Luther라는 영화 속에는 루터가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의 문제를 갖고 씨름하는 장면이 나온다. 루터는 그의 멘토였던 선배 수사에게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고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 물들어 태어나게 했고, 그리고는 우리의 모든 과오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분노하고, 우리를 저주하고, 지옥의 불로 위협하는 정의로운 재판관입니까?”
“루터, 그대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고 연로한 수사가 물었다.
“자비로운 하나님! 제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 저를 사랑하는 하나님.”
누가복음에만 있는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루터의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공의의 본질이 무엇인가? 오늘의 이야기는 또한 속죄론 및 기독론과 관련된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나.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자칭 예언자인가, 아니면 오랜 세대에 걸쳐 기다려왔던 <구원을 개시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한 분>인가? 누가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그의 이야기 속에 담고 있다.
저녁 자리에서 시몬은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여자는 자신의 표현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서 시몬과 달리 예수에게 환대를 베풀 수 있었다. 시몬은 예수에게 씻을 물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의 눈“물”을 바쳤다. 시몬은 인사의 입맞춤을 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예수의 발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시몬은 예수에게 바를 향유를 주지 않았지만, 여자는 예수의 발을 향유로 흥건하게 발랐다.(44-46)
우리는 이 여자가 어떤 성격의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한다. “동네 여자”(“a woman in the city”)라는 표현을 통해 누가가 이 여자가 창녀였다고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가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여자의 죄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회적인 죄였다는 것이다. 또한 발에 향유를 바르는 이 여자의 행동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특이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될 수 있었다.
시몬에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참지 못하시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정결예식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 이를 통해 세상의 죄인과 선택받은 자가 구별된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레 5:2-3; 6:18, 27; 7:20; 22:4-9) 시몬은 이 여자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이 여자와 구별되며 더 우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몬은 이 여자와 거리를 두었다. 시몬은 그렇게 함으로 즉각적으로 예수와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예수가 예언자라면 이런 부정한 여자와 접촉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레15:19-32) 예수가 다른 예언자들처럼 이 여자의 영혼을 꿰뚫어보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39절; 요4:19 참고)
예수의 반응은 의의 본질, 속죄론, 기독론에 관한 질문에 답을 준다. 시몬의 경멸적인 거절에 대응하여 예수는 신이 부여한 능력과 권위를 드러내신다. 예수는 이 여자의 영혼을 꿰뚫어 볼 뿐 아니라, 시몬의 생각도 읽으심으로 시몬이 적용한 자격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 예언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예수는 더 나아가 당신이 종말론적 예언자(the eschatological prophet), 즉 <죄를 사하는 야훼의 권위(48-50)>와 <생명을 치유하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죄인을 용서하는 야훼의 너그러운 뜻>을 갖고 있는 위대한 예언자라는 것을 드러낸다.(5:17-26)
비유를 듦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시몬의 잘못된 이해를 반박한다. 충격적이게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관대한 자비이다.(6:36). 이 자비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돈놀이꾼이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빚을 없애줌,1) 예수가 시몬에게 관점을 바꿔서 구원에 이르도록 설득함, 예수가 여자의 사랑과 감사의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음. 예수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를 대조시킨다.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죄에서 나온 불의는 자신과 타인과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은혜와 감사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런 불의는 자신도 신적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시몬의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정결예식이나 율법준수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사랑이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아니면 적어도 사랑이 구원을 준비시켜 주는가? 47a는 종교개혁 이후 많은 주석적 논란을 야기해 왔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때문이다”(because, hoti)라는 표현을 근거로 인간적 사랑이 하나님의 용서에 선행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NRSV는 hoti를 “hence”라고 번역함으로 (KJV, RSV, NIV는 “for”로 번역) 하나님의 관대한 용서가 여자의 사랑에 선행하고, 여자의 사랑은 용서의 결과라는 입장을 보인다. 이런 해석은 47b와 조화되고 이 비유 전체의 주제와도 통한다. 그러나 누가는 은총과 감사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인간 중 누가 믿음을 먼저 촉발시켰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는 인간과 하나님 모두가 화해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본문의 핵심은 채권자가 아무 대가 없이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준다는 예수의 선언이다. <예수의 십자가, 부활,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조건 없는 용서>가 누가복음의 일차적이고 중심적인 주제이다.(행 5:31; 13:38; 26:18) 예수는 그의 사역 중에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행동으로 구현하셨고 (눅 5:20; 7:48), 하나님과 화해된 관계가 시작됨을 수난 받기 전에 이미 선포하셨다.
이것은 관계와 연관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성은 논리적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의 결단, 즉 회개와 세례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결단을 필요로 한다.(행 2:38) 사랑과 감사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 은총,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고, 여자는 이 관련성을 모범적으로 (시몬은 부정적으로) 예시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은총에 대한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믿음도 조건 없는 빚의 탕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논리적이나 시간적 순서에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50; 5:20; 8:48; 17:19; 18:42; 행 15:11)
주석적 관점
- 눅 7:36-50의 이야기는 시몬의 대접과 무명의 죄인이었던 여인의 특별한 행동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용서의 본질과 적절한 자기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8:1-3에서 선지자로서의 예수의 정체성에서 갈릴리에서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이야기로 전환된다.
- 7:18-35에서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누가는 여기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종교엘리트들은 그렇치 않음을(29-30)을 설명하고 있다. 그 본문은 세례요한은 너무 금욕적이여서 사림들이 거부하고, 자신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는 예수의 선언으로 끝난다. 두 언급 모두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때로는 생명의 유지와 자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7:36-50의 이야기는 이러한 대조를 잘 보여준다.
- 본문은 막14:3-9, 마26:6-13,요12:1-8의 기름 부은 이야기와 비슷한데, 그 본문들과의 차이점은 편집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좀 더 창조적으로 구성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의 문학적 창조성은 모범적인 이야기(36-40), 비유(41-42), 그리고 선언(36-40)을 하나님의 용서와 그것을 가져오는 사랑의 행동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는데, 비록 누가가 그녀의 죄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이라고 알려진 한 여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를 창녀로 추측하지만, 이야기에서는 단지 죄가 중하다고만 암시한다. 그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그 병이 설화석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누가는 그 여인에게 엄청 비싼 물것임을 암시했는데, 비유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는 그녀의 행동에 대한 어떤 이유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나 세례요한을 그 전에 만났거나 그들의 용서의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 여인은 누운 예수 뒤에 서있었기에 그의 머리보다는 발쪽에 가까이 있었다. 감정에 북받쳐 그녀는 울었다. 그녀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기는 이유도 물론 알 수 없다.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고, 거기에 입을 맞추고 기름을 발랐다. 예수는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였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12;17;15:17;16:3의 다른 내적대화와 비교해보라), 시몬은 예수와 그 여인에 대한 판단을 보여준다. 시몬은 기름을 부은 여인이 죄인인지를 모르는 예수가 예언자일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 역설적으로 예수가 바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요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예수는 시몬의 말하지 않는 생각을 아는 것을 통해서 예언자임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시몬의 자신과 여인에 대한 판단에 대해, 두 빚진 자에 대한 탕감의 비유를 사용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둘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고, 둘 다 탕감 받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열배 까까운 액수를 탕감 받은 것이다. 요지는 감사의 깊이는 한 사람의 용서의 필요성에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시몬이 예수께 반응한 것을 보면(43) 나중에 이것을 이해했다. 이를 통해 시몬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여인의 행동과 시몬의 응답을 비교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시몬은 물도, 입맞춤도, 기름도 제공하지 않았다. 여인은 눈물을 적시었고, 예수의 발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고, 그리고 기름을 부었다. 시몬의 행동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그의 행동은 예수를 공경하기 보다는 피상적인 예절로 대한 것이다. 예수는 손님이지 환영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인은 자신의 감사를 보여주는 깊은 겸손과 은혜로 행동했다. 그 여인은 예절을 초월하여 참된 환대를 보여준 것이다.
- 예수는 여인이 용서받은 상태에 대해(47)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설명했다. 문법이 모호하지만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데 “네가 사랑했기에, 너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 그런데 이것은 비유와 이야기의 논리와 모순된다. NRSV의 번역이 더 나은데(그녀가 많은 죄가 용서되었기에, 여인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여인의 행동은 예수의 용서와 자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깊이 감사했기에, 예수가 그녀에게 공적 가치를 부여한 것이고, 이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게 해준다(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는9:20,22,35과 비교해보라).
- 눅8:1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어 천국의 기쁜소식을 선포하게 했다고 말한 4:43-44의 예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열둘”에 대한 언급은 제자들을 부르심(6:12-16)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9:1-6)으로 이어지게 한다. 예수를 따르는 여인에 대한 언급은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1)여인들은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여자들”(2)로 누가가 7장에서 말한 기적적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2) 여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던”(3) 사람들이었다. 누가와 사도행전(4:39;10:40;12:37;17:8;22:26-27;행6:2)에서 “섬겼다”는 단어는 식탁봉사와 음식 제공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들의 단체여행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필요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은 누가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진 소유물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포함하여 한 사람이 가진 가치를 가리킨다. 누가복음 후반부에서 그 여인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23:49, 55-56) 깊이있는 헌신을 보여준다. 3) 이 여인들은 기름부은 여인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것과 대조적으로 이름이 밝혀져 있다. 이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24:10)는 예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알린 여인들이다. 요안나는 헤롯의 신하의 아내로 밝혀졌는데, 이는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것과 헤롯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9:7-9)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고대 지중해 지역의 여성의 역할이 봉사의 역할로 예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 가운데 누가 위대한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22:26-27)자신을 봉사자/종으로 언급함으로써 새롭게 제시되었다. 그러기에 이 여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할 공동체적 겸손의 표상들이다.
목회적 관점
수치심은 종종 중독이나 폭력과 같이 사회의 거대한 비극들의 기초를 이루는 요소이다. 공개적인 망신의 희생자는 종종 조롱과 기피의 대상이 되어서 무시당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다. 지속적인 수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숨거나, 화를 내면서 비난을 퍼부을 수 있다. 수치심과 싸우는 사람들은 “가치없음”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는 그들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다. 그래서 수치심의 무거운 짐을 벗기시고 스스로를 용서하게 하시고, 사랑과 감사로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자유를 주신다.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왔다. 이것은 극진한 환대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 초대가 예수와 시몬 사이의 따뜻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독자는 언제나 예수를 따라다니는 긴장의 징후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분위기는 예수를 따라온 군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군중들은 출입문을 보고서 특별한 손님이 있는 것을 알고는 긴장했던 것이다.
약간 혼란스러운 가운데, 한 여인이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그녀는 예수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눅 8:43-48), 이 여인은 예수를 만지기 위해 조용히 앞으로 나와서 생길 무서운 결과를 각오했다. 그리고 이 이름 없는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두려워 떠는 대신,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몸을 굽혀서 눈물로 예수의 먼지투성이 더러운 발을 적신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입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조심스럽게 바른다. 이 여인은 자기 치마의 천이나 단을 사용하지 않고, 깊은 사랑의 친밀한 몸짓으로, 그녀의 머리를 풀어서 선생의 발을 닦았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녀에 대한 평판이 그녀 자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몬이 그녀의 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무슨 잘못된 행동을 했든 간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낮게 숙인 내향적인 몸짓은 그녀가 오랫동안 공동체 모임에서 쫓겨나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치심은 그녀를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냈고 그녀를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올려다보게 했다. 그녀가 예수를 만졌을 때 비로소 시몬은 그녀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 시몬은 “만약 예수가 진짜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에 관하여 알았을 터인데”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평소에 가르칠만한 순간을 파악하는데 탁월했던 예수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비유를 통해,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가지는 감사의 깊이를 시몬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예수는 시몬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그 여인이, 시몬이 주인으로 제공했어야만 하는 환대의 선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시몬을 점잖게 나무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수치로 돌린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이 경험한 공개적 망신이나, 개인적인 지속적인 수치 모두 그 희생자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의 문화는 수치심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되는 중독, 가정 폭력과 성적인 폭력, 거식증과 같은 사회적인 비극에 시달린다. 수치심 자체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적정한 선을 넘어섰을 때 우리에게 경고하는 건강하고 유익한 내부 계측기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사회적 실수를 기억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속이 불편해진다. 때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거나 다른 사람, 특별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부끄러워한다.
다른 차원에서,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은 부끄러웠던 순간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지고 수십 년 동안 되살아나는 피해를 겪어야 할 수도 있다. 성인 폭력이라고 해서 어린이보다 덜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수치심과 불명예가 가장 나쁜 형태로 사용되는 것은 폭력과 학대와 고문을 할 때 강압과 조작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수치는 자신을 정죄하고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끼는 감정에 압도되게 한다. 아이나 어른이나 거절이나 실패나 무력함을 경험하면 지속적인 수치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자부심이 이미 누더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실패를 하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쉽게 자신을 죄 많고 부정하다고 느끼게 된다. 결국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계속 두려워하게 되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수치스러워하면서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신을 닫아걸게 된다. 종종 마약, 술, 음식이나 다른 파괴적인 행동을 해서 상습적인 수치심으로 사는 사람의 낮은 자존심을 마비시키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이 여인이 마지막으로 하기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녀를 예수에게 오게 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받게 되는 위협보다 강해야만 한다. 사람을 깔보는 시몬의 중얼거림조차 그녀를 단념시킬 수 없다. 예수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조롱의 한 복판으로 걸어들어가게 한 용기를 상상해 보라. 예수가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하기 전에, 그녀의 눈물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녀는 이미 예수의 사랑과 용납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감사와 자유가 압도하는 순간이다.
예수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평안히 가거라”(48, 50절)고 말씀하신다. 그는 단지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용서 이상을 제공하고 있다. 예수의 용서는 수치의 짐을 벗겨서, 그녀가 자신을 너무나 가치 없게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고귀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이런 용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우리 가족에게, 우리 하나님에게 잘못했다고 느낄 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지속적인 수치에 대해, 용서는 우리가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실제로 사람은 너무나 귀하다. 이것이 자유이다. 예수는 이 자유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죄와 수치에 매인 마음은 시들고 죽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위대한 꿈보다 더 높은 곳에 올리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설교적 관점
-수도쿠 게임에 [1~9 숫자를 빈 자리에 넣는 퍼즐맞추기]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침에 첫 번째 하는 일이 신문을 펼치고 프렌치향의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퍼즐을 푼다. 왜 이 퍼즐에 그토록 열심이냐고 물으면 이 퍼즐이 지닌 일정한 패턴과 그것을 풀어내는 일관된 전략이 좋아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 날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이들은 퍼즐을 맞춘 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그 아침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드러난 자비로운 하나님의 이야기 역시 신문에 인쇄된 수도쿠의 예상되는 패턴보다 더 많은 숨겨진 그림퍼즐을 기억나게 한다.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이 감추어진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찬 이야기들을 보게된다.
-누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상세한 묘사는 마을로 들어갈 때 군중들의 모습, 길가의 먼지, 노점상들의 냄새까지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장면에는 랍비 예수의 말을 듣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제자들이 있다. 예수는 각 장면마다 우리가 처음에는 보지 못하던 감추어진 사람들에게 응답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누가복음 7장 처음에는 외부인 (outsider) 백부장의 종을 원격으로 치유함으로 응답하였다. 그 다음에 예수는 장례식에서 관에 손을 대는 율법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들을 일으켜서 한 과부의 슬픔에 응답하였다. 여기서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 권세있는 로마군인과 그의 종 그리고 고통받는 과부와 그의 회복된 아들-기쁜 소식 (good news)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현존 속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던 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본다. 그녀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칭찬을 받고 용서받은 사람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기 위한 매우 넓은 그물을 던진다. 그렇게 하여 그는 게임의 룰을 바꾼다. 누가의 탄생설화에서 천사는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눅 2:10)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 좋은 소식을 실현하기 위한 삶을 산다. 예수는 이전에 주변부에 머물러있던 사람들 주위에 한 원을 그리고 그들을 그 안에 들어오게 한다. 전에는 사회의 주변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은 새로운 경계선 안으로 들어온다. 이 바뀐 게임의 룰에 모두가 긍정적으로 응답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식사하러 들어간 한 바리새인의 거실을 상상해보라. 그 바리새인은 오래 걸어 피곤한 예수의 발을 씻을 대야나 그의 발을 닦을 수건을 마련해두지 않아서 환대(hospitality)라는 일반적인 관습을 무례하게 무시한다. 이런 주인의 태도는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나를 만나기 위해 들른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유감입니다”
-복음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선택하여 그 원 안으로 넣은 사람들을 보면 우리도 처음에 놀라기도 한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옥합을 들고 온 여인에 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이 이야기가 실제로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 (discrepancy)를 발견할 때 우리는 놀란다. 대다수 사람들은 값비싼 향유를 깨트린 이 여인을 창녀라고 생각한다. 본문 어디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그의 다가올 고난을 향한 그녀의 슬픔이 그녀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자신의 머리로 그 발을 말리는 자애로운 연민의 행동을 통하여 그녀는 넘쳐나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지(sign)이다. 우리는 그녀의 당황스러워 보이는 이 사랑을 거리를 두고 보려고 하나 예수는 그렇지 않다. 예수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 여인을 묘사하는 단어는 헬라어 hamartolos에서 왔는데 그 뜻은 “죄인”(sinner)혹은 “죄가 있는” (sinful)이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이 되었다면 우리는 “죄인”을 도덕적 타락 혹은 성적인 죄와 연관시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똑같은 단어 hamartolos는 누가복음에서 초기에 베드로를 지칭할 때 쓰고 있다. 눅 5:8에서 예수는 첫 번째 제자를 불렀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많은 고기를 보았을 때,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나를 떠나소서, 주님,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시몬 베드로의 죄는 언급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옥합을 깬 여인의 죄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질문의 초점은 베드로와 여인이 무슨 죄를 범했을까를 찾으려는 데서 죄인된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섬기려 하였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예수를 섬기기 원하는 우리 모두의 대열에 합류한다. 베드로처럼 깨어지고 흠이 많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은혜의 도구가 된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계속되는 이야기에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위대한 희망을 준다.
-마침내 이 여행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선언하면서 이 믿음의 여인을 통하여 예수의 사역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내부자들은 (insiders, 외부자였다가 예수께서 그은 원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이제 예수와 함께 여행을 하고, 그를 지지하는 열두 제자들과 여성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이전에 거명되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이제 막달라라고 불리우는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대열에 합류한다.
예수는 전에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냈다. 마리아는 일곱귀신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악한 영이나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다. 이들은 신앙이 깊은 백부장, 치유된 그의 종, 삶이 회복된 과부(나인성), 그리고 오늘 용서받은 여인처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영광스러운 무리의 일부가 되었다. 여기서 누가는 한 가지 더 큰 놀라움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의 복음 (good news)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예수의 철저한 포괄성 (inclusivity)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룰을 바꾸었고 그것은 진실로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음이다.
VERLEE A. COPELAND The Union Church of Hinsdale, United Church of Christ, Hinsdale, Illinois
1) 42절의 Charizomai라는 단어가 쓰임. 7:21과 갈 3:18에서도 사용됨; 채권자가 채무자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관대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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