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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해리스,『양들의 침묵』, 이윤기 옮김, 고려원, 1991.
*조나단 데미 감독,『양들의 침묵』, 1992.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혹은 '삐딱하게 본' 정신분석의 이야기
1. 정신분석과 서사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기원이 될 만한 책은『히스테리 연구』다. 프로이트의 동료인 브로이어 박사가 치료한 히스테리 환자인 안나. O는 그때까지의 치료술인 최면술을 통해 환자인 자신이 연상하는 것을 의사 앞에서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대화 치료(talking cure)"로 일컫는데, 이것을 이어받아 프로이트는 나중에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채택한다. "언어가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 즉, 언어의 도움만으로 행동과 거의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감정을 <소산Abreagieren>시킬 수 있다."(프로이트·브로이어,「히스테리 현상의 심리기전에 대하여」,『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1997, 21쪽) 즉, 나중에 그 용어가 정신분석으로 바뀌는 자유연상을 통한 대화치료는 바로 정신분석이 일종의 서사학(narratology)임을 말해준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치료한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은 유년기나 청년기의 어느 시점에서 받은 외상적 충격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전환 히스테리), 이때 그녀들의 기억이란 실제로는 육체에 씌어 있는 셈이 된다. 그때부터 정신분석, 혹은 대화치료는 여성의 육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해석하는 육체에 관한 담론이 된다. 한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탐구과정과 유사한 작업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예로, 프로이트는 과거의 지층에 묻혀진 인류의 오래된 기록을 캐는 고고학을 정신분석에 비유하기도 하며, 또한 그 자신이 당대 소설의 독자이면서 소설과 정신분석이 모두 이야기라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고학과 소설. 프로이트는「빌헬름 옌젠의『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이라는 글에서 "작가들은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누구보다도 귀한 원군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의 증언은 매우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빌헬름 옌젠의『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과 꿈」,『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184쪽) 옌젠의『그라디바』라는 소설은 신경증환자이자 고고학자인 하놀드라는 인물이 폼페이 유적을 답사하던 중에 환생한 폼페이 여인인 조우 베르트강을 만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여기서 고고학이란 묻혀진 유년의 기억을 발굴해내는 은유적 장치이고 억압된 것의 귀환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 타임머신이다. 이 소설을 독해하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현재의 증상 속에서 과거의 묻혀진 기억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탐구인 동시에 그러한 발굴과정을 이야기하는 서사학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정신분석을 다른 여타의 예술이나 학문과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신분석적 탐구의 유효성을 주장하려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처럼 그의 학문의 여정 속에서 내내 지속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적 탐구과정과 유사한 고고학과 소설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만한 학문이나 예술은 없을까. 오래 전에 묻혀졌거나 숨겨진 유사-고고학적 비밀을 찾아내어 마침내 비밀의 베일을 들추어내는 이야기, 탐정소설은 이런 이야기의 전형적인 판본이 아닐까. 프로이트가 탐정소설의 독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임상사례를 서술하는 방식도 탐정소설의 서술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 일례를 보도록 하자.
1892년 말에 내가 아는 동료가 자신이 치료하던 젊은 여성을 나에게 의뢰하였다. 만성적으로 재발하는 화농성 비염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문제가 고질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던 이유는 사골(篩骨)에 생긴 염증 탓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근간에 그녀가 새로운 증상을 호소하였는데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그 의사조차 그 증상들을 일으킬 만한 국부적인 질환을 찾지 못했다. 환자는 완전히 후각을 잃어 버렸는데 한두 가지 자기만이 맡는 냄새에 거의 항상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냄새들을 맡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피곤해 했으며 머리가 무겁고 식욕이 부진하다고, 또한 능률이 떨어졌다고 호소하였다.(프로이트,「사례 연구/루시 양」, 프로이트·브로이어, 앞의 책, 146쪽)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환자인 '루시 양'을 대면하는 장면은 마치 사건의 비밀을 간직한 당사자를 그 사건의 미스테리를 풀어야 할 탐정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탐정소설의 전형적인 도입부와 흡사하다.
1827년 가을, 버지니아주 샬로트빌 근방에 머무는 동안 나는 우연히 아우구스투스 베들로를 알게 되었다. 이 젊은 신사는 모든 면에서 눈에 두드러져,
나의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생략)그를 젊은 신사라고 칭했지만, 그의 나이에도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분명 젊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젊음에 대해 말하곤
했지만, 그를 백 살쯤 된 노인이라고 상상한다 해도 별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른 특이한 점도 많았지만 그의 외양보다 더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그는 몹시 구부정했다. 사지는 지나치게 길고 여위었다. 이마는 넓고 좁았다. 안색에는 핏기라곤 없었다. 입은 크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으며, 치아는 이제껏 인간에게서는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들쭉날쭉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가 짓는 미소는 생각과는
달리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웃는 모습은 항상 똑같았다. 그것은
늘 한결같은 끝없이 깊은 감정을 내비치는 듯했다.(에드가 앨런 포,「누더기 산 이야기」,『뒤팽의 미소』, 홍성영 옮김, 하늘연못, 1999, 219-220쪽)
하지만 정신분석과 탐정 소설의 유사점은 이처럼 서술의 유사성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핵심을 쥐고 있는 자와 사건을 담당하고 해석하는 자 사이의 관계의 층위에도 있다. 탐정 소설에서 그 관계가 전형적으로 의뢰인과 탐정(형사)이라면, 정신분석에서는 환자와 분석가가 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고전적인 탐정소설에서 의뢰인이 탐정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보수는 환자가 분석가에게 지불해야 할 급료의 상징적 기능과 유사하다. 또한 탐정과 분석가는 의뢰인과 환자에겐 모두 사건이나 증상의 비밀을 파헤치고 타당한 해석을 제공하는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le sujet suppose savoir)'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탐정과 분석가, 범죄자와 분석주체인 환자, 탐정소설과 정신분석간의 결정적인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가 말했던 것처럼, 탐정소설은 한 사회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희생양(파르마코스)을 찾아 나서서 그/그녀의 죄를 묻고 처벌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탐정소설은 근대 이전의 안정적인 공동체에서 쉽사리 그 공동체를 위협할 만한 적과 이방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시공간, 즉 익명의 대중의 탄생과 더불어 누가 사회의 적이고 누가 사회의 규범을 수호하는 자인지 더 이상 분명치 않은 근대적 시공간에서 탄생한 새로운 이야기이다. 이때 사회의 적은 범죄자, 혹은 그와 유사한 혐의를 띤 자에게 집중되고, 이런 처벌을 담당하는 자는 바로 사회의 규범을 수호하는 법률의 집행자인 경찰과 탐정의 역할로 압축된다. 이때 범죄자란 실제론 그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비밀스런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처단되어야 할 희생양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전통과 관습을 이제 막 유지하려는 한 사회의 역사(history)란 그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희생양(범죄자)을 찾아 처벌하고 이런 과정은 다시 사회의 공동체 전체로부터 동의를 이끌어내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것이 탐정 이야기(story)를 구성하는 서사 이데올로기의 기본축인데, 이때 탐정 소설은 우리가 만일 희생양이 되었다면 마땅히 사회적 공동체에게 위협이 되었을 법한 비밀스런 욕망을 그 희생양에게 '투사'(projection)시킬 만한 이데올로기적 서사체다. 탐정 소설의 독자는 희생자=범죄인이 욕망 했을 법한 살인, 도둑질, 강간 등의 범죄적 욕망을 공모하다가 최종적으론 의뢰인과 탐정의 편에 서서 그때까지 희생자와 동일시된 자신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부 투사한다. 탐정 소설의 독자인 우리들은 희생자가 자신의 욕망의 대가로 마땅히 치러야 할 상징적 부채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희생자가 짊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와 공동체를 거스르는 욕망의 죄를 상상적으로 면제받는 것이 탐정 소설의 리비도 역학이라면, 정신분석은 환자=분석주체가 분석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유일한 죄, 즉 욕망을 거스른 죄에 대한 부채를 마땅히 치러야 함을 알려준다. 정신분석은 환자가 "상징적 거세"를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분석의 최종과정인 "환상의 횡단"을 통해 환자가 자신의 욕망을 내·외적으로 투사한 음산한 범죄의 이야기를 스스로 뒤집어야 하는 반(反)서사이기도 하다. 아래에서 잠깐 살펴볼 소설·영화인『양들의 침묵』은 정신분석과 서사학의 긴밀한 관계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2. 삐딱하게 보기 :『양들의 침묵』
1) 클라리스 스탈링 : '소외의 소외'와 동일시
토마스 해리스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양들의 침묵』(1992; 소설, 1991)은 사건을 해결하는 탐색의 과정이 정신분석 치료의 종결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뚱뚱한 여성만을 골라 살해한 다음 죽은 그녀들의 피부로 새로운 피부를 만들어 입으려는 연쇄 살인범인 '버팔로 빌'을 잡는 과정에서 FBI 수사관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정신분석가이자 자신의 환자들을 살해해 요리해먹은 식인종 한니발(클라리스의 말장난에 따르면, Cannibal Hannibal) 렉터에게 도움을 청한다. 렉터 박사가 범죄심리학의 분야에서 남긴 탁월한 업적에서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클라리스에게 렉터 박사는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이다. 렉터 박사와 클라리스는 범죄자와 수사관의 관계로 대면했다. 그러나 렉터 박사는 이 관계를 분석가와 환자간의 관계로 대치시킨다. 사건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인 렉터가 원한 것은 클라리스라는 '현존재'였다. 클라리스는 렉터의 "응분의 대상"으로 자신을 이 초자연적인 정신분석가에게 바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환자들의 현존재를 음식의 대상이 아닌, 분석가와 환자와의 순수한 관계가 정립된다. 렉터는 아버지의 죽음과 고아원에서 자라온 불행한 이력을 지닌 클라리스를 첫눈에 알아챈 후, 그녀의 삶의 내력 속으로 잠입한다. 클라리스가 렉터와 대면하면서 사건의 단서를 얻는 과정은 동시에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잠긴 핵심적인 외상적 사건이자 본환상(fundamental fantasy)인 '양들의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렉터에게 들려주는 클라리스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살게 된 그녀는 한밤중에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것이 곧 양들을 도살하는 행위의 신호임을 알아챈다. 그녀는 그 중 한 마리의 양을 안고 뛰다가 발각되고, 이것이 도둑질로 오해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구해 주려했던 양은 도살되고 만다. 이때 희생된 양은 클라리스의 동일시의 대상물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불우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곧 도살될 양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편 버팔로 빌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살해된 여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살해당해 가죽이 벗겨진 희생자 여성들이야말로 클라리스가 일차적으로 동일시할 만한 대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희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클라리스의 태도는 수사과정 도중 그녀의 상관인 크로포드와 남자들의 세계로 이루어진 FBI 내부에서 그녀를 대하는 차별적인 태도를 접하면서 더욱 확고해진다. 백인 중년 남성으로 백인 여성만을 골라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버팔로 빌에 의해 납치된 상원 의원의 딸 캐더린은 클라리스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면 상황은 분명해진다. 렉터가 암시한 것처럼, 캐더린은 클라리스가 이번에는 반드시 구해야 할 이전의 동일시의 대상물인 양의 대체물이다. 따라서 클라리스의 임무는 막중해진다. 그녀는 자신의 범죄의 이력 때문에 대학 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거부당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버팔로 빌의 또 다른 희생자가 될 여성을 구해야 하며, 동시에 공식적 기관에서 차지하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에게 부과된 불평등한 위치를 탈피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그녀는 남성의 소외에 의해 구조화된 여성의 소외와 함께 남성의 지배적 시선에 의해 차별화되고 불평등하게 주어진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극복해야 한다. 클라리스의 이런 '소외의 소외'의 체험은 최종적으로 범법의 희생자들과의 동일시과정을 통해서 명확히 자각되며, 스스로 살인 사건의 단서와 실마리를 찾아가는 한편 렉터의 말처럼 "백인 쓰레기"로 살아온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극복된다.
2) 버팔로 빌 : 변태하는 앙띠-오이디푸스
영화와 원작 소설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상징은 바로 희생자들의 입 속에서 발견된 유충의 의미이다. 소설에서 렉터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충은 고치를 만들면서 번데기가 된다. 그런 다음에 이 변태(變態)의 밀실에서 아름다운 이마고가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번데기의 상징적 의미는 변화야. 유충에서 나비, 혹은 나방으로의 변화이지. 빌리(버팔로 빌-인용자)는 변화하고 싶어해. 적어도 변화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빌리는 여자가 아니면서도 여자 차림을 하고 싶어해. 희생자의 몸집이 커. 빌리에게는 이와 관련된 뭔가가 있어. 희생자의 숫자에 빌리는 일련의 탈피(脫皮)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몰라."(토마스 해리스,『양들의 침묵』, 이윤기 옮김, 고려원, 1991, 185-186쪽) 소설에서 실제로 렉터 박사의 환자였던 벤자민 라스페일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버팔로 빌, 본명이 제임 검브(원래 이름은 제임스 검브였지만, 직원의 실수로 제임 검브가 된다. 버팔로 빌은 출생신고와 이름짓기에서부터 상흔이 있다)인 이 남자는 원래 골동품상 직원이었는데, 쫓겨나는 과정에서 동방에서 온 화물을 훔친다. 그 화물엔 "죽은 나비"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곧 희한한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묘사되는 라스페일의 설명은 제임 검이 유충과 번데기를 통해 태어나는 나비에 애착을 갖게된 내력을 이야기해준다. 제임 검브에게 나방의 유충은 비밀스런 숭배의 토템이 된다.
이 친구는 발리 섬 같은 데서 죽은 나비에 섞어 보석 같은 거라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고 손을 넣어 마구 뒤졌답니다. 보석이 있을 리 있어요? 손만 나비 비늘투성이가 되었죠. 손과 얼굴은 나비 비늘투성이가 된 채 이 친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뚜껑이 열린 나비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죽은 나비가 들어있던 그 가방에 번데기가 하나 들어 있었나 봐요. 그 소리는,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오면서 서툴게 하는 날갯짓 소리였죠. 이 친구는 나비의 날개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초록색이었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가 문을 열어 주자 나비는 밖으로 날아가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나비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이 친구는 한 가지 결심을 했죠.(194쪽)
슬로베니아 정신분석 학파의 철학자인 미란 보조비치(Miran Bozovic)에 따르면,『양들의 침묵』의 유충의 은유는 곤충에 대한 서양철학의 오랜 호기심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곤충에 관한 짧은 역사 A Brief History Of Insects」라는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철학자들이 곤충에 대한 유별난 호기심을 보인 이유를 시선과 응시의 분열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동물학』에서 고치가 나비가 된다는 사실에 내재한 흥미를 검토하는데, 그것은 마치 고치처럼 움직이지 않고 죽어있는 듯한 육체가 어느 날 갑자기 나비가 되어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사실에 담긴 경이로움에 있다. 마치, 죽은 육체에서 영혼이 부활하는 것처럼. 프시케(나비-영혼, psyche)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렇게 설명된다. 서양에서는 죽은 자의 입을 통해 수많은 나비 떼가 빠져나가는 그림의 전통이 있다. 고치의 은유는, 데카르트주의 신학자인 니콜라스 말브랑슈에 와서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무덤에 삼일동안 있다가 자신의 몸을 부패시키지 않은 채, 지상에 다시 나타났다가 하늘로 승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상징하는 은유로 뒤바뀐다(은유=metaphor의 어원은 변태=변형metamorphosis이다). 이러한 은유의 형성에는 또한 말브랑슈 특유의 기회 원인론이 한 몫 거들고 있다. 하나님이 곤충을 창조한 이유는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몸짓에 내재한 충격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며, 또 곤충은, 말브랑슈 시대에는 아직 경이롭기만 한 현미경을 통해 관찰되듯, 인간의 시선만으로는 감히 포착하지 못하는 수많은 눈들과 경이로운 조직과 섬세한 수학적 구조물을 만드는, 신의 창조의 놀라움과 위대함의 증거물, 즉 창조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감히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 곤충인 것이다.(Miran Bozovic, "A Brief History of Insects", An Utterly Dark Spot : Gaze and Body in Early Modern Philosophy, Ann Arbor :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00, pp.17-18) 말브랑슈를 거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오면, 곤충의 특성은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d)'이라는 실체의 표상으로, 그 의미가 바뀐다. 스피노자나 그를 이어받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단 하나의 신체에 대응하는 단 하나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다. 이를 소급해서 말하면, 하나님은 수많은 육체와 거기에 대응하는 수많은 영혼이 아니라, 오직 영원히 죽어있거나 영원히 살아있는 단 하나의 신체와 단 하나의 영혼을 만들었고, 종과 세대를 통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육체란 바로 단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고, 수많은 인간의 영혼 또한 단 하나의 영혼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죽음, 이것은 스피노자의『에티카』를 빌어 말하면, 그 자신의 원인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실체이며 이것은 나중에 들뢰즈·가타리에 와서 '기관들 없는 신체'로 바뀐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구더기가 파리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자연의 유기체들은 결코 카오스나 부패의 산물이 아니라 언제나 씨앗들로부터" 오는데, 이 씨앗들 안에는 "어떤 전성(前成)"이 있었다고 말한다. 수태 이전에 이미 유기체와 영혼이 존재해왔으며 수태를 통해서 한 "동물은 다른 종류의 동물이 되기 위한 큰 변형을 준비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전적인 탄생이나 완전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들은 영혼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탄생이라 부르는 것은 발생/펼쳐짐이자 생장일 뿐이며,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접힘이자 쇠퇴일 뿐이다.(A.W. 라이프니츠,「모나드론」, 이정우 옮김,『주름, 갈래, 울림-라이프니츠와 철학』, 거름, 2001,§73, 315쪽)
이것은 결국 무한에 대한 증명에 다름 아니다. 곤충은, 결국,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적 무한을 설명하기 위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보조비치의 설명은 여기에서 멈춘다. 생각하면,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적 '살아있는 죽음'은 공포소설이나 헐리우드의 공포영화의 유명한 주인공들, 즉 다른 사람들의 피=생명을 통해 영원히 살지만, 그 자신은 이미 살아있는 죽음의 양태들인 독신기계-드라큘라나 다른 사람들의 시체의 합성물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는 것 같다('살아있는 죽음'의 최초의 구현자는 누구일까. 그는 골고다 언덕에 가는 도중 물을 달라고 부탁한 예수에게 돌을 던져 예수에 의해 영원한 저주를 받고 지상을 헤맨다는, 성서의 외경에 등장하는 '아하스페르츠'가 아닐까). 하지만『양들의 침묵』의 버팔로 빌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반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말브랑슈의 은유를 채택한다. 렉터 박사의 옛 우울증 환자 라스페일의 연인이자 그를 살해한, 대학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거부당한 버팔로 빌은 그 자신이 직접 뚱뚱한 여자의 피부를 도려내 자신의 육체에 맞게 재단한다. 그리고 살갗이 벗겨져 죽은 여자의 입엔 고치를 넣는다. 그것은 버팔로 빌에겐 매우 성스러운 의식인데, 죽은 여자, 즉 유충은 그녀의 입안에 있는 고치가 언젠가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비로 날아오르듯, 자신의 벗겨진 육체를 통해 결국 영혼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변태 그 자체로, 죽은 여자를 도려내어 얻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살아갈 것이다. 또한 유충에서 성충으로 자라나는 나방에 새겨진 해골무늬는 버팔로 빌에게는 매혹적인 응시의 대상이다. 아마 유충의 해골무늬를 보면서 버팔로 빌은 다음과 같이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는 그녀의 영혼으로서, 등에 해골이 표시되어 있는 나방으로서 살아나갈 것이고 반면(...) [나는-인용자 첨가] 자신의 육체를 포기하고 그 때부터 그녀의 육체에 움직임을 부여할 것이다."(미란 보조비치,「그 자신의 망막 뒤의 남자」, 슬라보이 지젝 편집,『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김소연 옮김, 새물결, 2001, 253쪽) 버팔로 빌, 혹시 그는 망상적인 책을 통해 스스로 여성으로 변태하고 싶어했던 슈레버 박사의 영혼이 연쇄살인자의 성전환자의 육체로 다시 부활한 현대판 앙띠-오이디푸스가 아닐까. 그는 임상적으로 볼 때, 여성으로 변태하는 도착증환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태하고 싶은 정신병자로 볼 수 있다. 렉터가 말한 것처럼 도착증자는 사회 앞에서 얌전하게 순응하는 자들이 많지만, 버팔로 빌, "그는 병리적으로 볼 때, 수천 배로 위험한 인물이다." 한편, 이처럼 클라리스는 범죄자의 꿈과 환상 속에 한 걸음씩 접근해 들어간다. 타인의 범죄적 욕망의 근간이 되는 무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것만큼 그녀 역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간다.
3) 욕망의 탄생과 무의식의 자리
렉터 박사와 처음으로 대면하고 미그스에게 치욕스런 일을 당한 정신병자
감호소의 지하실이 그녀가 자신의 내면과 원하지 않게 맞닥뜨린 첫 번째 장소라면 그녀가 죽은 성도착자 라스페일의 머리를 발견하게 되는 곳, 라스페일이 살던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라는 이름을 단 주거지의 어두운 창고는 그녀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두렵고도 매혹적인 사물과 직접 마주친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짙은 어둠 속에 부엉이의 박제물과 골동품, 의상 마네킹으로 가득 찬 그 곳은 클라리스 자신의 비밀스런 내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녀는 렉터 박사에게 병 속에 든 죽은 자의 머리를 보자 "흥분되었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적어도 수사관과 범죄자의 욕망은 상당부분
접근한다. 또한 그녀가 희생자의 입에서 꺼낸 유충에 대해 더욱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해 찾아간 박물관은 화석과 공룡의 뼈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리스가 버팔로 빌과 대면하는 곳인 지하실은 사건이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장소이자 그녀가 양들의 울음소리라는 본환상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무의식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클라리스는 어떻게
이 지하실까지 오게 되었을까. 이 과정에서 욕망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렉터 박사가 두 명의 수사관을 살해하고 빠져 나오기 전에 그와 대면한 클라리스는 렉터 박사로부터 중요한 암시하나를 얻게 된다. 클라리스는 사건의 열쇠를 렉터에게 자꾸 묻지만, 렉터는 이미 넘겨준 사건보고서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클라리스는 희생자들이 납치된 곳과 시체로 발견된 곳을 연결하는 패턴과 의미망을 묻고 탐색하지만, 렉터는 엉뚱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명상록』을 인용한다. 이 스토아 학파 황제 철학자의 저서와
버팔로 빌의 최초의 살해동기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클라리스는 "분노, 사회적 적응, 성적 욕구 불만"등으로 설명하자, 렉터는 손을 내저으며 "단순함(simplicity)"이 연쇄살인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경우를 만나면 이렇게 물어 보라고 했어......이것이 이 자체로는 무엇인가, 이 모양대로는 무엇인가......이것의 본질은 무엇인가....."(246쪽). 말하자면, 사건의 이면에 어떤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진실인 것이다. 의미는 사물의 어떤 이면, 심층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표층, 의미 형성의 메카니즘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여성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자신의 몸에 맞게 재단하여 입고자하는 버팔로 빌은 궁극적으로 여성이 되고 싶어한다. 남성에서 탈피하여 여성이 되는 합법적 절차를 거절당한 버팔로 빌은 한마디로 여성을 강제적으로 '소유'할 수밖에 없다. 소유와 욕망이 그의 본질이다. 렉터는 이것을 탐욕이라고 바꿔 부른다.
그렇다면 탐욕은 어떻게 생기는가? "매일 보는 걸 탐내"는 것이 인간의 욕망의 본질이다. 욕망은 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눈으로 탐하면서 생겨난다. 또한 헤겔과 라캉이 말하듯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서 생겨날 것이다. 버팔로 빌이라면,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여성을 욕망하면서 여성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이다. 희생자들이 사라진 곳과 죽어 발견된 곳의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첫 번째 희생자가 세 번째로 발견되었던 것일까. 처음 살인을 시작할 당시의 "애송이 살인자"였던 버팔로 빌은 살인을 자신의 주변의 여성을 고르는데서 시작했고, 그것은 철저하게 숨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르러서야 더욱 대담하고도 정교하게 살인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범죄의 욕망에 대한 렉터의 설교장면이 시종 클라리스=관객에 대한 렉터의 전면적인 응시로 이루어지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응시의 장면은 타인의 응시와 마주치자 들키고 위협받으며 드러나는 욕망의
본질을 포착하는데 일조한다. 이렇게 타인의 욕망의 본질을 깨닫고 난 후에야 클라리스는 버팔로 빌의 최초의 욕망의 장소, 그의 욕망의 무대가 공연되는 장소인 그의 집 지하실로 이동하게 된다.
소설에서 지하실은 "방에서 방으로......제임 검브의 지하실은 꿈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미로 같다."(225쪽)고 묘사된다. 지하실은 마치 어느 곳에서
미노타우르스가 갑자기 나타나 희생자를 습격할지 알 수 없는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의 미로처럼 그곳을 지나는 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선사한다. 미로에서 미로로 이어진 그 지하실에 있는 방들은 열기가 무섭게 원래
집주인이었던 여자의 썩은 시체가 욕조 속에 누워 있는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고, 사람과 닮아 더욱 오싹하게 보이는 온갖 마네킹들과 공포스런 초록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하실에서 버팔로 빌과 대면하는 장면의 절반은 버팔로 빌이 쓴 적외선 고글의 시선에서 보여진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위험에 처한 클라리스의 시선이 아닌 버팔로 빌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게 되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인 우리 자신의 욕망의 심연을 잠깐 드러낸다. 물론 버팔로 빌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장면은 클라리스의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에 끝나며 동시에 버팔로 빌 자신의 욕망도 산산조각 나고 말지만. 하지만, 클라리스의 총구에서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 소멸되어 버리는
그의 욕망은 우리의 어두운 욕망의 궁극적인 면죄부가 되어 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클라리스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4) 한니발 렉터 : 정신분석가의 욕망
한니발 렉터는 헐리우드 대중문화가 창조한 매우 매혹적인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정신과의사이자 법의학 전문가이며 문학이나 철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며 또 고전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인육을 먹기 좋아하는 미친 살인자다. 그는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서 두 명의 경찰관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희생자를 물어 뜯어먹으면서도 그의 맥박은 85도를 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클라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렉터에겐 그를 지칭할 "맞는 단어가" 없다. 렉터는, 칸트에 따르면 '숭고'한 존재나 '근본 악(radical evil)'의 존재, 헤겔에 따르면 '초감성적 존재'라고 부를 법한 신비스러운 인물이다.『양들의 침묵』, 그리고 속편인『한니발』은 이 숭고한 정신분석가 한니발 렉터와 클라리스와의 정신분석적 전이관계에서 비롯될 위험성을 어느 정도 제거한다(『양들의 침묵』의 속편의 애초의 구상이 렉터와 클라리스를 결합시키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연히『한니발』은 애초의 구상을 무시하고 그 둘의 상호적 결합을 냉정한 계약관계로 바꾸어놓는다). 그들 사이에 놓인 것은 일종의 "계약"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결코 계약, quid pro quo, 즉, 주고받는 행위(give and take)가 아니다. 한편『본 콜렉터』는 프로이트-라캉적 정신분석학의 실패과정을 보여준다. 전신불수인 법의학자와 트라우마를 지닌 여자 경찰은 마지막 장면에서
"동거", 즉 성적 결합을 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렉터는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와 사건 해결의 핵심을 쥐고 있는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플롯은 형성되며, 스탈링과 관객은 그 앞에서 끊임없이 사건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지는 히스테리적 주체가 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엔 일종의 원죄가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자신에
대한 분석이 없이 타인의 분석을 시도한 정신분석가이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피할 수 없는 원죄로 규정하고, 이후 모든 분석과정에서 "통과"라고 부르는 자기분석의 점검과정을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수련의 최종과정으로
설정하였다. 이 과정이 온전히 끝나야 정신분석가의 환자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치료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환자의
저항과 분석가 자신의 감정전이, 그리고 최후엔 "거세의 암초"를 "횡단" 또는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에게 걸려오는 한니발 렉터의 전화에서 들려나오는 "양들이 조용해졌나"라는 질문은, 프로이트가『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에서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가야 할지어다)"라고 불렀던 정신분석의 마지막 행위=양들의 울음소리라는 본환상을
클라리스가 횡단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지하실에서의 연쇄살인범의 총구가 겨누어지는 위기의 순간, 즉 "거세의 암초"를 "돌파"한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분석이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렉터가 말한 것처럼 클라리스의 "지하 감옥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그대는 지하
감옥의 그 축복 받은 침묵을 경험할 것이네. 왜냐? 그대가 좇는 것은 곤경일 터이므로. 곤경은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371쪽). 그러나
이 말을 하는 한니발 렉터 자신은 어떤가. 그는 결국 정신분석학의 원죄,
즉 최종적으론 자기분석에 실패하고 그것을 자신의 환자들과 박해자들을 잡아먹는 행위로 대체하는 살인자가 아닌가. 그는 '너의 현존재Dasein를 먹어라'라는 라캉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정신분석의 원죄를 짊어진 정신분석의 아담, 즉 다시 말해 자기자신을 잡아먹어야 하는 과정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한 분석가로 볼 수 있다. 인육을 먹는 그의 토템의식은 마치 정신분석의 시원적 아버지를 살해하고 먹은 후, 토템의식을 통해 시원적 아버지를
달래려고 욕망의 면죄부를 끊임없이 작성해야 하는 정신분석의 후예들이 걸려드는 리비도적 악순환이 아닌가. 정신분석가의 욕망이란 역전이적 욕망,
즉 렉터처럼 분석에 실패하자 환자를 잡아먹는 욕망이 아니라, 분석주체가
자신의 증상, 꿈, 무의식의 연상된 의미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게끔 하는 순수한 욕망이다. 정신분석은 계약, 또는 주고받는 과정이 아니라, 즉 분석가와 환자가 감정전이라는 리비도적 순환에 말려들기를 거부하고 분석가든 분석주체든 간에 각각의 분석주체가 되어야 함을 지시한다. 렉터의 유혹어린
말처럼, 자신은 클라리스와 같은 별자리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클라리스가 받아치는 것처럼, 렉터는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잡아먹었다. 그는 법의 층위에선 정신병자로 무죄였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유죄선고를 받았다. 한니발 렉터, 그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라캉적인 분석가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잔인하진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