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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오(朴奇悟) - 박술(朴述) - 박충숙(朴忠淑) - 박온유(朴溫裕) - 박형(朴衡) - 박영후(朴永侯)
박영후(朴永侯) - 1자 박정유(朴挺㽔) - 박육화(朴育和) - 박인석(朴仁碩) - 女 = 홍원중(洪元中) - 2자 박정혁(朴挺奕) - 박조개(朴肇開) - 박현구(朴玄球) - 女 = 이공린(李公璘) |
이 세계도에 바탕하여 고려 전기에 있어서의 죽산 박씨의 정치적 활동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먼저 시조인 박기오에 대하여는 박인석 묘지명에 삼한공신 태보 삼중대광(三韓功臣 太保 三重大匡)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박전지 묘지명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묘지명의 기록을 최대한 존중해 준다면,
박기오는 아마도 후삼국시대에 태조 왕건을 도와서 그 공로로 공신에 책봉된 듯하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박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박술은 별다른 관직을 갖지 못한 듯하다.[족보에는 개국공신이고, 樞密院事를 지냈다고 되어 있지만, 믿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박충숙 대에 오면 활발한 관직 생활을 보이기 시작한다.
현종 1년(1010) 10월 거란이 2차로 침입을 하였을 때,
박충숙은 예빈경(禮賓卿)으로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 임명받아서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의 지휘를 받아 거란과 전투를 벌였다.[고려사 권 4, 顯宗 10년 10월]
그때 세운 공로 때문인지 현종 2년 8월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나갔다가,
다음해 2월에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다.
그 뒤 한동안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현종 13년 2월에 참지정사(叅知政事, 종 2품)로 국자사업(國子司業) 이경(李瓊)과 함께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 2품)로 치사하였다가,
정종 3년(1037) 2월에 죽으니, 조정에서 정신(貞愼)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고려사 권 6, 靖宗 3년 2월]
박충숙 이후 다시 죽산 박씨 가문은 별다른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박충숙의 아들 박온유와 손자 박형, 그리고 증손자 박영후에 이르기까지 기록상 관직을 지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다소 부침이 심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당시 3대에 걸친 기간 동안에 그 가문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박형 때에 그의 집안이 죽산에 있던 모든 기반을 잃어 버리고, 용산(龍山)의 청계동(淸溪洞)에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류창규, 1989, 「高麗 武人政權 時代의 문인 朴仁碩 - 고문 존중․계승과 관련하여 - 」 東亞硏究 17 p.175. 참조.]
그 주장은 청학집(靑鶴集)이라는 책에 근거한 것인데,[靑鶴集은 조선 宣祖에서 仁祖 년간 仙家였던 趙汝籍이 지은 책이라고 한다. 위의 논문 주) 14 참조.]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간다.
그 책에서는 박형을 고려 인종(仁宗) 때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박형의 손자인 박정유(朴挺蕤)는 뒤에 서술하겠지만, 예종(睿宗) 때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청학집에서 고려 인조 때 사람으로 묘사한 박형을 박정유의 조부와 동일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인종 때 인물로 묘사된 박형의 손자인 박정유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 때 과거에 합격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동안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지 못하였던 죽산 박씨 가문은 박영후의 아들 대에 들어와서 다시 번영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다. 박영후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동생인 박정혁(朴挺奕)에 대해서는 관직 등은 물론이고 여타의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형인 박정유(朴挺蕤)는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되어 있을만큼 활발한 관료 생활을 하였다.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은 이후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고 활동하였고, 주로 활동한 시기도 다르다. 또한 현재 죽산 박씨 집안의 거의 모든 족보에서도 박정유와 박정혁 대에 최초로 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그들을 각각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로 나누어 보겠다.
박정혁 계열은 그의 증손자까지는 고려사와 같은 정사(正史)에는 관료 활동의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박정유 계열을 먼저 살펴 보겠다. 먼저 박정유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예종(睿宗)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 뒤 경원군 판관(慶源郡判官)을 지내고, 인종(仁宗) 초에 좌정언(左正言, 문하부 종 6품)이 되었다. 10년 8월에 정책 수행과 관련하여 왕에게 간언하다가[고려사 권 16, 인종 10년 8월 己酉條.] 왕의 뜻을 거슬려 잠깐 인주(仁州)의 수령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주(仁州)는 곧 경원군(慶源郡)인데, 이렇게 다시 경원군의 수령으로 보낸 까닭이 있을 것도 같지만, 그에 따른 설명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의 업무 수행에 대한 평가가 최상위 등급을 얻어서 다시 중앙으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 6품)를 지냈다. 인종 13년 ‘묘청(妙淸)의 난(亂)’이 일어났었고, 그것은 김부식(金富軾)이 총책임자가 된 토벌군에 진압되었다. 이때 토벌군에 참여하였던 인물 중 추밀사(樞密使) 진숙(陳淑)이 남의 노예와 뇌물 등을 받은 것이 드러나자, 박정유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종 4품) 최관(崔灌)과 시어사(侍御史, 종 5품) 인의(印儀)와 최술중(崔述中)․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그를 탄핵하기를 3일 동안이나 하였다. 그럼에도 왕이 그것을 조처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자, 물러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인종이 불러 달래어 일을 보게 하였는데도 박정유와 최술중은 굳이 일을 보러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안숙은 면직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박정유는 우부승선(右副承宣, 정 3품)으로 옮겼는데 진퇴(進退)가 단아하고 응대(應對)가 명민하였기 때문에 왕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어서 인종 22년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 3품) 겸(兼) 태자빈객(太子賓客, 정 3품)이 되었다.[고려사 권 17, 인종 22년 12월 戊戌條.] 다음해에 죽으니 나이 57세였다.[위의 책, 인종 23년 2월 丁亥條.] 조정에서 충질(忠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박정유가 이렇게 출세한 것에는 아버지인 박영후가 충효의 도를 가르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일체의 관련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이상 박정유에 대한 설명은, 고려사, 열전, 권 11, 朴挺蕤傳을 참조.]
박정유의 아들 박육화는 과거 급제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종 11년(1157) 11월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정6품)으로 금(金)에 횡사사(橫賜使)로 파견되었음이 확인된다.[고려사 권 18, 의종 11년 11월 癸亥條. 이때 工部郞中 李光縉도 生辰을 축하하는 임무를 맡고 같이 갔다.] 의종 17년에는 급사중(給事中, 문하부 종4품)으로 재직 중에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에 임명되었다.[위의 책, 의종 17년 甲寅條.] 그 뒤 출세의 과정이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승진을 계속하여 명종 3년(1173) 윤 1월에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 정 2품)에 올랐다.
그런데 국왕의 잘못된 행동을 간언(諫言)해야 하는 간관(諫官)인 급사중으로 재직할 때의 두 가지 사건에서 박육화가 처신한 바를 보면, 그는 다분히 권력에 순응하는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사건을 살펴보면, 당시 국왕인 의종은 궁인(宮人) 무비(無比)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를 통하여 3남 9녀를 낳았는데, 최광균(崔光鈞)이 무비(無比)의 사위가 되자 단계를 뛰어넘어 8품을 내려주고 식목록사(式目錄事)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분노하여 이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고, 간관(諫官)들은 최광균의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16년 6월에 간의(諫議) 이지심(李知深)․급사중 박육화․기거주(起居注) 윤인첨(尹鱗瞻)․사간(司諫) 김효순(金孝純)․정언(正言) 양순정(梁純精)․정단우(鄭端遇)를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니, 낭사(郞舍)들이 두려워하고 위축하여 모두 예예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열전, 권 9 尹瓘附 尹鱗瞻傳과 고려사절요 권 11, 의종 16년 6월조 참조.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말하지 말라는 것이 司諫이요, 말없는 것이 正言이요, 말더듬는 것이 諫議다. 유유히 날을 보내고 무엇을 논하였던가”라고 말하면서 간관을 조롱하였다고 한다.]
17년 8월에는 좌정언(左正言) 문극겸(文克謙)이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과 궁인 무비, 그리고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이 국왕의 총애를 업고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과 지추밀사(知樞密事) 최유칭(崔褎偁)의 권력 남용을 지적하면서, 백선연․무비를 참하고 영의(榮儀)를 내쳐 목자(牧子, 소나 말을 먹이는 인부)에 충당시키고 최유칭은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 내용 중에 궁궐의 추문에 대하여도 언급하였기 때문에, 의종이 크게 노하여 그 상소를 불살랐다. 또한 최유칭이 궁궐에 나와 대질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문극겸을 불러 대질하게 하였는데, 문극겸의 말이 심히 간절하고 지극하였지만 드디어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당하였다. 그런데 처음 문극겸이 위의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 간의 이지심(李知深)․급사중 박육화․기거주(起居注) 윤인첨 등이 연서하기를 즐겨하지 않았고, 문극겸이 폄직된 후에도 또 태연자약하게 일을 보았다고 한다.[위의 책, 열전, 12 文克謙傳과 고려사절요 권 11, 17년 8월조 참조. 이런 박육화 등의 행동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송 나라 사람들의 “함께 놀던 英俊들은 무슨 낯이 그리도 두터우냐”라는 싯귀를 외면서 기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유칭의 관직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는 左常侍라고 되어 있어서 문극겸전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국왕과 권신의 잘못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판하지 않았던 박육화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국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종 24년 무신란(武臣亂)이 발생하고 무신정권(武臣政權)이 성립한 뒤,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난을 피하여 낙향하였는데, 박육화는 명종 3년에 오히려 수사공 좌복야라는 고위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Ⅲ. 고려 후기의 죽산 박씨
1. 朴挺蕤 계열
죽산 박씨 중 고려 후기의 인물로 제일 먼저 언급하여야 되는 인물은 박인석이다.
[이하 박인석의 행적과 인척관계는 주로 金龍善 編, 高麗墓誌銘集成, 158 朴仁碩 묘지명과 고려사 등을 참조하였다.] 그는 박육화의 아들로서 8세에 춘방학우(春坊學友)가 되었고, 문음으로 장례령동정(掌醴令同正)이 되었다가, 成州[평안남도 성천군.]의 수령이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업무를 잘 처리하여 치적의 평가가 1등을 받았기 때문에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 겸 우군녹사(右軍錄事)에 임명되었다. 명종 즉위년(1170)에 금 나라에서 선왕인 의종을 폐위한 곡절을 살피려고 선문사(宣問使)를 보냈다. 그때 박인석은 내시(內侍)로서 선배사(先排使)에 임명되어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사신의 행차가 서경(西京)에 이르러 의심을 하면서 개경으로 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림 2 : 무신정권기의 박정유(朴挺蕤) 계열 죽산박씨 세계도>
박인석(朴仁碩) - 박문성(朴文成) - 박홍(朴晎) 박서(朴犀)
박현구(朴玄球) - 박익정(朴益旌) - 박휘(朴煇 / 朴暉) 박훤(朴暄) 二女 = 기홍석(奇洪碩) 三女 = 김방경(金方慶) |
역시 족보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박인석 묘지명에는 그가 죽기 전에 박서를 제외한 다른 아들 6명은 모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박서의 형으로 朴文成과 그의 아들 朴晎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사 권 23, 세가 高宗 21년 정월 乙巳條에는 朴文成이 右散騎常侍에 임명된 기록 있지만, 박인석이 강종 1년에 67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생각한다면, 박인석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홍은 고려사 권 26, 세가 元宗 11년 5월 乙卯條에 同知樞密院事로 나오는데, 박인석의 손자인지의 여부 역시 확인 할 수 없다.
이에 그가 급하게 대궐로 나아가 밀지를 받들고 돌아와서 사신들을 달래어 오게 하였다. 사신들이 돌아가자 그 공로로 도교서령(都校署令, 종 8품)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볼 때 박인석은 그의 아버지 박육화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신정권에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한 것 같다.
다음해에는 궁궐이 불탔는데, 그는 국왕의 일록(日錄)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잘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시사재주부(詩司宰注簿, 종 7품)에 오르는 등 무신정권의 성립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관직생활을 계속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김보당(金甫當)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이 박인석에게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인척관계로 인하여 관료 생활에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보당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출신으로 문반이었지만, 의종대 이래의 문란한 정치에 불만을 품고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정치운영에도 불만을 품고, 자신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자, 의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켰다가 3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그 결과 다시 많은 문신들이 학살되었다.[黃秉晟, 1985, 「金甫當亂의 一性格」 韓國史硏究 49 참조.] 박인석은 김보당과 직접 관련은 없다. 다만 그의 장인인 김천(金闡)이 김보당의 친동생인 김지당(金至當)의 처남인 최관(崔寬)의 장인이었는데,[金龍善 編, 高麗墓誌銘集成, 103 崔允儀 묘지명 참조.] 김천은 무신난 직후 첫 번째 인사에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었고,[고려사절요 권 11, 明宗 즉위년 9월] 명종 2년에는 정중부(鄭仲夫) 등과 함께 병마사(兵馬使)에 임명되는[위의 책, 권 12, 明宗 2년 正月]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지만, ‘김보당의 반란’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아마도 김지당과의 관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박인석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류창규, 1989년 논문.]
박인석은 그 이후 원주(原州)에 유배되어[류창규는 앞 논문에서 박인석 묘지명의 “遂抛棄官爵 遠竄于南荒 聞北原民俗頗淳 古宜於人 迺往卜居”라는 내용 때문에 박인석이 스스로 낙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忽爲飛語所中 幾陷不測 朝有惜公者 得移延昌郡安置”라는 바로 뒤의 내용을 볼 때 그가 원주에 유배당하였다가, 연창군으로 옮겨 안치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김용선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김용선, 200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479에서 박인석이 연창군으로 귀양지를 옮긴 것으로 해석하였다.] 어사(御史)를 지낸 권불화(權不華)와[李佑成은 권불화를 權敦禮로 보았다. 李佑成, 1977, 「高麗 武臣執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 嶺南大學校 開校 30週年紀念 國際學術會議發表會論文集, 嶺南大 ; 1982, 韓國의 歷史像 p.189 참조.] 함께 교유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떠도는 소문에 연루되어 위험에 빠질 뻔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아끼는 사람이 힘을 써서 죽산으로 유배지를 옮겨 주는 것에 그쳐 큰 화는 면하게 된다.
모두 24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명종 26년 50이 넘은 나이에 최당(崔讜)의 천거로 동래현령(東萊縣令)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한 박인석은 이후 춘방통사사인(春坊通事舍人),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되었다. 이 시기에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가 주동이 난 민란이 일어나자 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파견되었지만,[고려사 권 129, 崔忠獻傳.]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토벌군이 조직되었을 때 중군초토판관(中軍招討判官)에 임명되어 공을 세워 전장에 있는 상태에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임명되었다[고려사 권 21, 신종 5년 閏 12월]가 곧바로 전중승(殿中丞)으로 승진되었다. 그곳에 남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임무로 다시 안찰사(按察使)에 제수되었는데,[고려사 권 100, 丁彦眞傳.] 주동자인 김순(金順)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들 박서(朴犀)에게 내시직(內侍職)을 수여하고, 그는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최씨 집권기에 금 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가문의 유지에 공헌하였다. 하정사(賀正使)로 금 나라에 갔다 왔으며, 금의 하절일사(夏節日使)를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벼슬은 대부소경(大府少卿) 겸 삼사부사(三司副使)를 거쳐, 남경유수(南京留守), 대부경(大府卿) 겸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호부상서(戶部尙書, 정 3품)로서 퇴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강종 1년(1212)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인석은 가문의 덕으로 강릉 김씨 출신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를 지낸 김천(金闡)의 딸과 혼인하여 7남 3녀를 낳았는데, 막내아들인 박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보다 먼저 죽었다. 외손 안효덕(安孝德)과 김식(金軾)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집안이 명문 문반 집안들과 계속적으로 혼인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최당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를 위한 글을 박인석이 지었다는 점은[拙藁千百 권 1, 海東後耆老會序와 金龍善, 1987, 「高麗 墓誌銘 二例」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참조.] 해동기로회에 참여한 인물들이 최충헌 정권 초에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김용선, 앞의 논문, p.369 참조.]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박인석이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한편 박인석은 유능한 문신들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교유하면서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 102, 兪升旦傳 참조.]
박인석의 막내아들 박서는 고종 18년(1231) 몽골의 1차 침입 때의 구주성(龜州城) 전투에서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과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살리타이(撒禮塔)이 이끄는 몽고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때의 전투에 참여한 몽고군의 장수 중 나이 거의 70세나 되는 자가 “내가 종군하여 천하의 성지 공전(城池攻戰)하는 상황을 두루 보았으나 일찍이 공격을 당함이 이와 같은데도 마침내 항복하지 아니한 자는 보지 못하였으니 성 안의 여러 장수들은 타일(他日)에 반드시 다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라고 감탄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국가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였지만, 몽고와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몽고의 사신이 박서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하자, 집정(執政) 최이(崔怡)는 박서에게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권유였을 것이고, 결국 박서는 향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고려사 박서전에는 몽고 1차 침입 이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정 2품)에 임명된 적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향리로 물러나기 전이 아닌가 생각된다.[이상 박서에 대한 설명은 고려사 권 103, 朴犀傳을 주로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이렇게 뛰어난 공로에도 불구하고 불운하게 관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인지 박서에 대한 고려사 등의 기록은 적은 편이다. 즉, 몽고군과의 전투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다른 기록은 없다. 그는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버지인 박인석이 경주에서 일어난 민란을 토벌하는데 세운 공로로 희종 즉위년 무렵 내시가 되었고,[熙宗 즉위년 5월에 박인석이 남은 金順 등을 사로잡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따라서 박서가 내시에 임명된 것은 이 직후일 것이다. 고려사절요 권 14, 희종 즉위년 5월.] 고종 18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3품)로서 귀주성을 방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비교적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약 27년여 동안의 관직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은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 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박서가 관직에서 타의로 물러난 이후 그의 후손들도 원 간섭기 동안에는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에서는 관료로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족보들만을 놓고 본다면, 박서의 후손들은 뒤에 본관을 고성固城[철성鐵城]으로 한 파[固城朴氏世譜(朴舜奎 編, 固城朴氏世譜所, 1919,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58-가29-24).]와 음성(陰城)으로 한 파[陰城朴氏世譜(朴濟殷 編, 1939,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58-가29-170).]로 갈라졌다. 이렇게 박서의 후손들에 대하여 기록을 전하는 것들 중에서 씨족원류(氏族源流)의 고성 박씨와 음성 박씨 항목[趙從耘(1607~1683) 편저, 1994, 保景文化社, p.168, p.171.]과 고성박씨세보(固城朴氏世譜), 음성박씨세보(陰城朴氏世譜), 그리고 죽산박씨 충질공파보(竹山朴氏忠質公派譜)[竹山朴氏忠質公派南海譜所 編, 1985,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99.11-박619충-1-2).] 등을 참고하여 박서 후손에 대한 세계도를 만든 것이 <그림 3>이다.
그런데 위에서 참고한 자료들 사이에는 같은 사람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고, 아예 세계의 흐름이 다른 것도 있어서 자료의 신빙성을 확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현재 가장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고성 박씨의 시조를 박빈(朴彬)으로, 음성 박씨의 시조를 박현계(朴玄桂)로 기록하고 있고, 그들의 선대는 나타내고 있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위의 그림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이름이 실려 있는 인물들을 추적해 본 결과, 박순(朴淳), 박보로(朴普老), 박수경(朴修敬), 안우(安祐) 등 모두 4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박순은 우왕 14년 5월에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의 직책을 띠고 있는 기록이 단 한 번 보이는데,[고려사 권 137, 우왕 14년 5월 丙戌條.] 촌수 관계를 고려하면 동명이인으로 생각된다.
朴犀 - 朴寀(榟) - 朴玄桂 - 朴文吉(文瑞) - 朴淳(濟) - 朴謇 - 朴寬 - 朴實 - 朴自安 - 朴彬 - 朴奕連 - 朴璡 朴玢 - 朴奕忠 - 朴普老 朴元武 朴修敬 朴普生 女 = 安祐 |
< 그림 3 : 박서 후손 세계도 >
박보로(朴普老)는 우왕 1년 8월 밀직부사(密直副使, 종 2품)로서 서해도부원수(西海道副元帥) 겸(兼)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며,[위의 책, 권 133, 우왕 1년 8월] 이후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우왕 6년 2월 문하평리(門下評理, 종 2품)로 사망하였다.[위의 책, 권 134, 우왕 6년 2월. 이때 敬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박수경(朴修敬)은 공민왕 12년 11월에 기해격주홍적공신(己亥擊走紅賊功臣) 2등에 책록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위의 책, 권 40, 공민왕 12년 11월] 역시 왜구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창왕 1년 9월 왜적과 싸워 패사하였다.[위의 책, 권 137, 창왕 1년 9월 庚申條.] 안우(安祐)는 공민왕 대의 유명한 무장으로서 홍건적(紅巾賊)의 격퇴에 큰 공을 세웠지만, 공민왕 11년 2월 김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위의 책, 권 40, 공민왕 11년 2월 乙巳條.] 이들 중 박수경과 안우가 박혁충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씨족원류(氏族源流)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박보로와의 활동 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맞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려사와 태조실록(太祖實錄) 등에서는 그들의 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특히 박혁충과 박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사에서 확인한 길은 없다는 점은 미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광철도 박보로를 죽산 박씨로 분류하였지만, 정확하게 어떤 자료를 참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金光哲, 1987, 高麗後期 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硏究, 東亞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한편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박빈(朴彬)이 명문 귀족가문인 경주 김태서(金台瑞)의 손자인 김혼(金琿)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경주 김씨편에도 김혼의 장녀와 박빈의 혼인관계를 기록하고 있지만,[氏族源流, p.185.] 이것 역시 고려사 등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2. 박정혁(朴挺奕) 계열
박정혁 계열은 아들인 박조개(朴肇開)와 손자인 박현구(朴玄球)까지는 족보 이외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박정혁의 증손자인 박익정(朴益旌)부터는 관직을 지낸 것이 확인된다. 박익정의 사위인 김방경의 묘지명에서 박익정의 이름이 확인되는데, 그는 기거랑(起居郞, 종 5품)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였다고 한다.[金龍善 編, 1993, 「201, 金方慶 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김방경은 원 간섭기에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고려사 권 104, 金方慶傳.] 선후가 어찌 되었건 박익정의 집안은 뒷날 사위인 김방경의 덕을 보았을 것이다.
박익정의 아들 박휘(朴煇 또는 暉)[朴全之의 아버지인 박휘는 고려사에는 朴暉로, 박전지의 묘지명에는 朴煇로 나온다.]는 충렬왕 즉위년(1274)에 원이 일본을 공격할 때, 대부경(大府卿)으로서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그의 누이의 남편인 김방경이 일본 정벌에서 중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방경의 추천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후 별다른 기록을 보이지 않았지만, 전법판서(典法判書, 정 3품)까지 올랐다.
<그림 4 : 원(元) 간섭기 박정혁(朴挺奕) 계열 죽산 박씨 세계도>
朴肇開 - 朴玄球 - 朴益旌 - 朴煇(暉) - 朴全之 女 = 李公璘 朴暄 朴宜之 女 = 奇洪碩 女 = 奇琯 女 = 金方慶 女 = 王烈 洪子藩 孫女 ∥ 朴全之 朴遠 朴仁龍 ∥ 朴文珤 ∥ 女 = 鄭倬 朴德龍 ∥ 朴壽龍 ∥ 女 = 李稷 朴天龍 ∥ 朴文柱(門壽) 崔恬 女 女 = 王璉 (崔冲 10세) 女 = 許齡 女 = 尹珍 |
氏族源流와 주)11의 족보들을 이용하여 작성하였고, 고려사 등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인물들도 일단 기록은 하였다.
박정혁 계열의 위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박전지(朴全之)에 의해서이다. 박전지가 크게 두각을 드러낸 것은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이하 충선왕대의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다. 李起男, 1971,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歷史學報 52.]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자 사림원(詞林院)을 두고, 박전지(朴全之)․최원(崔圓)․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으로 학사(學士)를 삼아 전주(銓注)를 맡게 하였다. 박전지 등에게 명령하여 즉위 교서를 짓게 하고, 능견(綾絹)․주(紬)․저포(苧布) 각 15필과 상승(尙乘)의 안마(鞍馬)를 하사하였으며, 뒤에 또 박전지․오한경․이진․권영(權永)에게 홍정(紅鞓)을 하사하였다. 왕이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박전지 등과 더불어 정사(政事)를 모의(謀議)하고 손수 술과 음식을 하사한 후에 조용히 하루 종일 지내다가 혹 밤에 이르면 궁촉(宮燭)을 주어 보내어 그 집에 이르게 하니, 총애함이 비할 바가 없었다(고려사 권 109, 朴全之傳).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자,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문한서(文翰署)에서 인사를 담당하게 하였다가 곧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고치고, 박전지(朴全之)․최원(崔圓)․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 등 4명을 사림원학사로 임명하여, 인사는 물론 왕명 출납의 업무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충선왕대 정치는 사림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핵심에 박전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박전지가 충선왕 즉위와 함께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원 간섭기 최고의 실세 중 한 명인 김방경이 박익정의 사위 곧, 박전지의 고모부였다. 또한 나아가 무신정권 말기부터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이장용(李藏用)은 그의 외조부였다.[金龍善, 앞의 책, 「223, 朴全之 墓誌銘」. 이하 박전지에 대한 서술은 그의 묘지명을 중심으로 하고, 고려사 등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이런 가문적 배경[李起男은 주) 1논문에서 박전지를 신진세력으로 파악하였는데, 이는 그의 가문적 배경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 그의 학문적 능력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그의 재능을 외조부인 이장용은 일찍부터 발견하고 아들처럼 양육하였는데, 그 덕분인지 박전지의 학문에 대해서는 “及長博通三墳百家 兼貫陰陽秘訣 至於□□方藥之書 無不精核 善屬文 而樂章最尤”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런 집안의 뒷받침과 자신의 자질에 힘입어 박전지는 18세인 원종 8년(1267)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國朝文科榜目, 太學社, 1984 참조.] 바로 내시(內侍)가 되었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모두 한림원을 겸하였다.
박전지가 한 단계 더 뛰어오를 수 있는 사건이 충열왕(忠烈王) 5년(1279)에 일어났다. 당시 원 세조(元世祖)가 조를 내려서 의관자제(衣冠子弟)를 뽑아 입시(入侍)하게 하였을 때, 거기에 참여하여 원에 가서 원의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어 학문으로 이름을 떨침으로써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충렬왕 12년에 원 조정에서 정동행중서성조마(征東行中書省照磨) 겸 유학교수 동제거(儒學敎授同提擧)를 임명받아 고려로 돌아왔다. 이때 충렬왕이 중하게 여겨 이부와 병부의 시랑(侍郞)에 임명하였지만, 나이가 적은데 벼슬이 너무 높다고 글을 올려 사양하고, 충렬왕 15년 외직인 안동부사(安東府使)를 맡아 나갔다. 그렇지만, 곧 충렬왕이 불러서 전중윤 지제교(殿中尹 知製敎)에 임명하였다. 즉, 그는 이미 원종 때부터 자질이 검증된 인물이었고, 나아가 그는 김방경의 조카이고, 이장용의 손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충선왕과도 이미 왕이 세자일 때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충선왕이 세자가 되었을 때 박전지는 시강학사(侍講學士)에 임명되었고,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에 숙위하러 갈 때에는 시종 신료로서 따라가 충선왕이 왕이 되기 전까지 가까이에서 보필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충선왕이 박전지를 믿고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문적 배경, 개인적 능력, 그리고 충선왕과의 밀접한 관계가 삼위일체가 되어 박전지는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실시할 때 제일 선봉에 설 수 있었고, 충선왕 재위 중에 그의 권위는 “범연혁관호대작여탈(凡沿革官號大爵與奪) 개출공지일수(皆出公之一手)”라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자 그는 제일 먼저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이 다시 복위한 뒤에는 또다시 승승장구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한 뒤에는 나이가 들어 원로로서 대접받다가, 충숙왕 4년 9월 고시관(考試官)으로서 동고시관(同考試官) 총부전서(摠部典書) 백원항(白元恒)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홍의손(洪義孫), 정오(鄭䫨), 김광로(金光輅). 허백(許伯) 등을 뽑았다.[고려사 권 73, 選擧 科目 選場, 忠肅王 4년, 문생들의 이름은 國朝文科榜目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충숙왕 6년(1319)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 예문관대제(藝文館大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연흥군(延興君)이 되었고, 다시 왕 12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 종 1품)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을 더하여 치사하게 하였는데,[고려사 권 35, 세가, 忠肅王 8년 10월 庚戌條에는 박전지가 이때 許有全․尹珤 등과 함께 치사한 것으로 되어 있고, 고려사절요 권 24, 충숙왕 11년 2월 기사에는 그때 僉議政丞을 제수하고 치사하게 하고, 推誠贊化功臣의 칭호도 같이 하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묘지명에는 泰定 乙丑年 곧, 충숙왕 12년에 치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포상할 일이 있을 때마다 관직을 올려주면서 다시 치사를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흥군과 공신호는 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박전지는 그해 7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만큼이나 그가 죽산 박씨 가문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확한 시기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박전지의 인물됨과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어느날 충선왕이 불러 궐내에 들어갔을 때 광평군(廣平君)과 강릉군(江陵君)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각각 이름을 쓰게 하여 박전지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누가 나라를 맡을 자인가?” 하고 물어보니, 박전지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굳이 요구하므로 한참 뒤에 자리를 피하여 아뢰기를, “양군(兩君)의 필적을 살펴보니 둘째 왕자(江陵君)께서 당벽(當璧)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서 광평군(廣平君)이 돌아가시고, 강릉군(江陵君)이 다음 왕(충숙왕)이 된 것이다.[고려사 朴全之傳과 고려사절요 권 24, 충숙왕 12년 7월 기사.] 또 하나는 충숙왕 10년 왕이 원의 수도인 연경(燕京)에 있을 때, 심왕파(瀋王派)가 입성(立省) 책동을 벌이면서 왕을 무고하는 글을 원의 중서성에 올리려고 할 때, 박전지에게도 서명할 것을 협박하였는데, 박전지는 “개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더럽히려고 하느냐.” 하면서, 오히려 아들인 박원(朴遠)을 왕의 처소에 보내어 그 일을 알린 일이 있었다.[고려사절요 권 24, 忠肅王 11년 2월] 두 사건은 모두 그의 시세 판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모두 충숙왕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고, 그 덕분에 충숙왕대에 박전지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박원까지도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박휘의 사위로는 기관(奇琯)과 왕렬(王烈)이 확인되는데, 왕렬은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며, 기관은 충렬왕(忠烈王) 13년(1287) 11월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원나라에 신년 축하사신으로 간 기록이 나오는데, 동일인물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려사 권 30, 세가, 忠烈王 13년 11월 壬子條.]
박전지는 76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죽었지만, 최충(崔冲)의 9세손이며 위위경(衛尉卿)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를 지낸 최염(崔恬)의 딸과 사이에서 1남과 2녀만을 두었다.[金龍善, 1988, 「新資料 高麗 墓誌銘 十七點」 歷史學報 117 참조.] 박전지의 사위로는 정탁(鄭倬)과 이직(李稷)이 묘지명에서 확인되는데, 정탁은 충렬왕대의 명망있는 관료이고 첨의중찬(僉議中贊, 종 1품)까지 올랐으며, 충선왕묘에 배향된 정가신(鄭可臣)의 아들이고,[고려사 권 105, 鄭可臣傳.] 이직은 언부전서(讞部典書, 정 3품)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까지 올랐다. 이직의 조카딸이 기자오(奇子敖)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이 뒤에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이다.[고려사 권 106, 李湊傳 附 李行儉.]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서 볼 때도 이 시기의 죽산 박씨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박전지의 유일한 아들인 박원(朴遠)도 집안의 성세를 이어나가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초명은 원(瑗)이었는데, 그 뒤 박전지가 죽은 뒤 이름을 원(遠)으로 고쳤다.[박전지의 묘지명에서는 이름이 瑗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뒤에 고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 門蔭으로 관도에 들어선 것 같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에 합격하였고,[고려사 朴全之傳과, 朴龍雲, 1990,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硏究, 一志社, p.465 참조.] 충숙왕 13년에는 권준(權準)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최원우(崔元遇), 이인복(李仁復), 정포(鄭誧), 이달충(李達衷) 등 후일의 인재들을 선발하였다.[고려사 권 73, 選擧 科目 選場, 忠肅王 13년, 문생들의 이름은 國朝文科榜目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그의 학문적 재능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불과 9년 전에 그의 아버지 박전지도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이렇게 10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자가 과거를 주관하였다는 것은 충숙왕이 박전지와 박원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이며, 아울러 죽산 박씨 가문의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박원의 관직 생활에는 아버지인 박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충숙왕 11년 우부대언(右副代言, 정 3품)에 임명된 것도 앞서 박전지와 함께 심왕파(瀋王派)의 책동을 막아내는데 노력한 공 때문이며,[고려사절요 권 24, 충숙왕 11년 2월] 충숙왕 14년 추충익대(推忠翊戴) 2등공신에 책록된 것도 그 공으로 인한 것이었다.[고려사 권 35, 충숙왕 14년 11월 戊子條에서 瀋王派의 책동을 저 지한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金龍善 編, 「255, 朴遠 墓誌銘」에서는 ‘推忠翊戴’라는 공신 칭호를 알 수 있다.] 그는 고부군사(古阜郡事), 사복사승(司僕寺丞), 권정동행성좌우사낭중(權征東行省左右司郎中), 군부판서(軍簿判書, 정 3품) 등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 2품)까지 지냈다.[이상의 설명은, 박원 묘지명과 고려사 朴全之傳 등을 주로 참조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박전지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은 반면, 그는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서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박원은 찬성사(贊成事, 정 2품)를 지낸 홍경(洪敬)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홍경의 아버지는 무인집권기부터 고위관직을 역임하여 첨의중찬(僉議中贊, 종 1품)을 15년 동안 지낸 홍자번(洪子藩)이다. 이런 박원의 혼인을 통해서도 당시 죽산 박씨의 가세를 확인할 수 있겠다. 홍씨 부인은 5남 2녀를 낳고 죽었는데, 이로부터 집안이 더욱 번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부인의 묘지명을 지어준 것이 당대의 최고문장가 중 한 명인 최해(崔瀣)라는 것에서 폭넓었던 죽산 박씨 가문의 교류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박원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낸 유식(柳湜)의 딸인 문화 유씨(文化 柳氏)다. 족보 등을 통해서 볼 때, 그 사이에서 아들 1명과 딸 1명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그림 4>에서 보이는 것처럼 족보 등에서는 박원에게 6남 3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홍씨 부인은 5남 2녀를 낳았으므로 나머지가 유씨 부인의 소생일 것이다.] 박원의 아들 6명 이후에 대한 세계도를 따로 <그림 5>와 같이 작성하였다.
박원까지는 주로 생활한 시대가 원 간섭기이지만, 박원의 아들 세대들은 원 간섭기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공민왕 5년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 이후 원의 간섭을 극복한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고 생각되고, 또한 원 간섭기에 3대를 계속하여 3품 이상 관직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귀족 가문이 된다.
<그림 5 : 공민왕(恭愍王) 이후 박정혁(朴挺奕) 계열 죽산 박씨 세계도>
朴仁龍 - 朴禧 朴德龍 朴形 ----------- 朴仲容 女 = 李元林 朴雍 朴日昇 女 = 金台權 女 = 楊天祿 女 = 薛孝生 女 = 權壎 朴純 朴仲宣 朴文珤 朴永忠 朴翊 女= 禹玄寶 朴仲游 朴翶 女= 石抹時用 朴仲實 朴華 女= 柳源 朴仲遇 女= 河澄 女= 柳濆 女= 禹希烈 女= 尹思修 女= 郭居仁 女= 洪彦 女= 柳昶 女= 朴詳 女= 閔植 朴壽龍 朴頤 朴云愼 朴天龍 - 朴季以 ------ 朴承秀 女= 權緖 女= 李俶捧 朴文柱(門壽) 朴䕺 朴子良 朴苞 |
[氏族源流와 주)11의 족보들을 이용하여 작성하였고, 고려사 등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인물들도 일단 기록은 하였다.]
죽산 박씨가 원의 간섭을 벗어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시기를 구분하여 따로 살펴 보았다.
장자인 박인룡(朴仁龍)은 어머니 홍씨 부인이 49세로 세상을 떠난 충숙왕 복위 5년(1336) 이전에 젊은 나이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金龍善 편, 「239, 朴遠 妻 洪氏 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의 아들 박희(朴禧)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박인룡의 사위로 기록된 이원림(李元林), 김태권(金台權), 설효생(薛孝生) 중 설효생은 고려사 등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원림은 김제안(金齊顔) 등이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신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고,[고려사 권 132, 辛旽傳.] 김태권은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의 난(亂)’을 일으켰을 때 김용에 당부하여 공민왕을 죽이려고 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고려사 권 131, 金鏞傳.] 두 사람 모두 고려사에서 단 한 건의 기록에만 나타나므로 별다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원림이 참여하였던 신돈 제거 모의의 주동인물들이 주로 세족(世族)들이었다고 밝혀져 있고, ‘흥왕사의 난’에 참여한 인물들은 원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들로서 역시 세족적(世族的) 기반이 강하였다고 생각되므로 박인룡의 사위들은 대체로 당대의 세족 출신이었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가 있다고 보인다.
2자인 박문보(朴文珤)는 장자인 박인룡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그의 몫을 대신하였다. 어머니인 홍씨가 죽었을 때에 아버지의 문생(門生)인 정포(鄭誧)에게 홍씨의 행장(行狀) 작성을 부탁하는 등 집안의 대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런 측면 때문인지 본인 스스로는 출세를 하지 못한 듯 고려사 등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박영충(朴永忠)은 주로 우왕대(禑王代)에 활동하였는데, 학문적 능력 보다는 군사적 능력으로 출세한 것 같다. 우왕 6년에 우상시(右常侍, 정 3품)로서 공주도병마사(公州道兵馬使)에 임명된 적이 있고,[고려사 권 134, 禑王 6년 正月 癸巳朔條.] 우왕 14년 요동 정벌군이 편성되었을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편성되어 출정하였다가,[고려사 권 137, 禑王 14년 4월 丁未條.] 이성계를 따라 회군하였고, 그 공로로 공양왕 2년(1390) 4월에 회군공신(回軍功臣) 책봉 때 거기에 포함되었다.[고려사 권 45, 恭讓王 2년 4월 壬寅條.] 그렇게 이성계와 위험을 함께 한 덕택으로 박영충은 조선 건국 뒤에도 태조 이성계의 총신(寵臣)으로 계속 활약하였고, 그의 아들 박고(朴翶)가 조선 세종 때 현의 수령을 능욕하는 등의 죄를 지었을 때 박영충이 태조 원종공신이므로 용서하여 준다는 기록도[世宗實錄 권 11, 3년 1월 丙子條.] 있을만큼 조선 태조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박문보의 2자 박이(朴頤)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박원의 3자인 박덕룡(朴德龍)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단 한 건의 기록만 보인다. 공민왕 3년(1354) 7월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삼았는데, 박새안불화(朴賽顔不花)의 형이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고려사 권 38, 공민왕 3년 7월 丙戌條.] 그런데 이 기사에 보이는 박덕룡이 박원의 아들이라면, 박새안불화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는 바로 전 달에 원에서 보낸 사신으로 나오며,[위의 책, 6월 丙午條.] 그때 관직은 공부시승(工部寺丞)이었는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위의 책, 7월 癸酉條.] 그런데 죽산 박씨 족보 등과 씨족원류(氏族源流), 그리고 태조실록(太祖實錄) 등에서도 박덕룡의 동생으로 박새안불화라는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위 기사에 보이는 박덕룡이 박원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만약 맞다면 죽산 박씨 집안은 박원을 전후한 시기에 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박덕룡의 아들 박형(朴形)의 졸기에는 그가 전리판서(典理判書, 정 3품) 박덕룡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太祖實錄, 권 13, 7년 1월 壬戌條.] 그것을 통해서 볼 때 박덕룡은 전리판서까지 오른 것은 확실하다. 다만 과거 합격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박형과 박형의 아들 박중용(朴仲容)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위의 졸기에서도 확인된다.] 만약 박덕룡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박전지부터 5대가 계속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박형은 충목왕(忠穆王) 3년(1347) 4월 정사도(鄭思度)가 주관한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하였으며,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과거에 합격하였다. 우왕 원년(1375)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도하는 외교정책에 반발하여 정치적으로 도전할 때, 그 일원이었다. 즉, 그는 신진사대부들이 추구하는 개혁 노선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그 사건 이후 유배당하였다.[고려사 권 126, 李仁任傳.] 관직에 복귀한 시기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왕 6년 5월에는 원년에 같이 유배당하였던 염흥방(廉興邦)이 지공거(知貢擧), 박형은 밀직사(密直使)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리문화(李文和) 등을 선발하는 영예를 누리는 것으로 보아[고려사 권 73, 選擧 科目 選場 禑王 6년 5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관직에 복귀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염흥방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덕에 힘입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박형은 개혁보다는 현실정치에 뜻을 두어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贊成事(贊成事, 정 2품)를 역임하였다. 그런 정치 행보 때문인지 우왕 14년 1월 임견미(林堅味)․염흥방 등이 우왕과 최영(崔瑩) 등에게 숙청당하였을 때, 당시 밀직제학(密直提學, 정 3품)으로 재직 중이던 박형의 아들 박중용(朴仲容)은 죽임을 당하였고, 박형 본인은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당하여 수자리를 살았다.[고려사 권 126, 林堅味傳.]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로 치사하였고, 태조 7년(1398) 1월 죽은 뒤에는 정강(靖康)이라는 시호도 받았다.[太祖實錄, 권 13, 7년 1월 壬戌條.]
박덕룡은 박형 이외에 족보에는 2자인 박옹(朴雍)과 3자인 박순(朴純), 그리고 5명의 딸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박옹과 박순에 대해서는 고려사 등에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가 없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첫째 사위는 우현보(禹玄寶)로 나오는데, 씨족원류(氏族源流) 단양 우씨(丹陽禹氏)편에서도 혼인관계를 기록하고 있다.[氏族源流 p.679.] 우현보는 공민왕 4년 과거 급제한 이후 우왕, 공양왕대(恭讓王代)를 거쳐 조선 건국 이후까지 활약한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거물급 정치가이다. 둘째 사위는 석말시용(石抹時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민왕 2년(1353) 2월 원에서 왕에게 옷과 술을 하사할 때 그것을 가져온 사신으로 그때 관직은 전 정동생 조마(前征東省照磨)였다.[고려사 권 38, 공민왕 2년 2월 乙卯條.] 그런데 다음해 4월에는 전리판서(典理判書)로, 6월에는 개성윤(開城尹)으로, 11월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고 있다.[위의 책, 4월 己酉條, 6월 丁酉條, 11월 壬午條.] 혼인이 그 무렵에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셋째 사위인 유원(柳源)은 감찰지평(監察持平)[고려사 권 41, 공민왕 14년 6월 庚寅條.] 등 공민왕대에 주로 司憲府 관직을 갖고 있었고,[ 고려사 권 43, 공민왕 21년 2월 丙戌條.]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고려사 권 135, 우왕 10년 甲午條.] 창왕(昌王) 원년(1389) 9월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종학(李種學)과 함께 김여지(金汝知) 등을 선발하였고,[고려사 권 73, 選擧 科目 選場 昌王 元年 9월] 공양왕 4년(1392) 4월 죽었다.[고려사 권 46, 恭讓王 4년 4월 癸丑條.] 넷째 사위인 유분(柳濆)과 다섯째 사위인 곽거인(郭居仁)에 대한 기록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확인되는 3명의 사위만으로도 박덕룡이 얼마나 폭넓게 혼인관계를 맺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박원의 4자 박수룡(朴壽龍)과 5자 박천룡(朴天龍), 그리고 6자 박문주(朴文柱 또는 門壽)[족보류와 氏族源流에서 이름이 서로 다르게 나온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박원에게는 홍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딸과 유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한 딸이 있었던 것 같다. 홍씨 부인 소생 딸 중 첫째는 왕련(王璉)과 혼인하였는데, 그는 신종(神宗)의 5대손으로 익흥군(益興君)에 봉하여졌다는 기록[고려사 권 91, 宗室 神宗] 외에는 다른 기록은 없다. 둘째 딸은 허령(許齡)과 혼인하였는데, 그는 충목왕(忠穆王) 즉위년(1344) 서연(書筵)을 열고, 시독(侍讀)하는 신하들을 정할 때 사예(司藝)로서 거기에 포함되었다.[고려사 권 37, 忠穆王 卽位年 6월 乙卯條.] 한편 「홍씨 묘지명」에는 그가 사족(士族)이며, 홍씨 부인이 죽을 때의 벼슬은 산원(散員)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셋째 사위인 윤진(尹珍)은 해평 윤씨(海平尹氏)인데,[氏族源流 439쪽, 海平 尹氏 항목에서는 윤진의 두 번째 부인이 朴遠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왕 8년(1382) 5월에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순흥군(順興君) 안종원(安宗源)과 함께 류량(柳亮) 등을 선발하였고,[고려사 권 73, 選擧 科目 選場 禑王 8년 5월] 12년 8월에는 찬성사(贊成事, 정 2품)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이희번(李希蕃)과 함께 명(明)에 세공(歲貢)을 감면해준 것을 감사하는 사신으로 갔으며,[고려사 권 136, 우왕 12년 8월 丙午條.] 14년 정월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을 숙청한 뒤 단행한 인사에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되었다.[고려사 권 137, 우왕 14년 正月 庚寅條.] 박원의 사위 3명을 살펴 보면, 역시 왕실과 귀족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박전지 계열은 원 간섭기를 벗어난 이후에도 귀족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죽산 박씨는 태조 때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이었던 박기오(朴奇悟)가 시조이다.
그의 아들인 박술(朴述)은 고려사에 기록이 없지만, 손자인 박충숙(朴忠淑)은 참지정사(叅知政事)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하였다.
그러나 박충숙의 아들인 박온유(朴溫裕)와 손자인 박형(朴衡), 그리고 증손인 박영후(朴永侯)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기록이 없다.
그러다가 박영후의 아들 대에 다시 가문이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박영후는 박정유(朴挺蕤)과 박정혁(朴挺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박정유가 출세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순탄한 벼슬길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까지 지냈다.
그의 아들 박육화(朴育和)는 급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고위관직인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까지 올랐다.
그런데 박육화는 무신란(武臣亂)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승진하였다는 점에서 죽산 박씨 가문이
무신들과 사이가 원만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 후기의 죽산 박씨는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로 구분해서 살펴 보았다.
그 중 박정유 계열은 전기의 박육화에 이어 그의 아들인 박인석(朴仁碩)도 호부상서(戶部尙書)까지 올라,
귀족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인석은 오랜 기간 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다가 최충헌(崔忠獻) 집권 말년에 50이 넘은 나이로 조정에 복귀한 뒤 최충헌 정권 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런 영향 아래 그의 아들인 박서(朴犀)는 몽고와의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우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올랐지만, 몽고의 압력으로 벼슬을 잃었다. 그 뒤 元 간섭기 동안 박정유 계열은 쇠퇴하였다가 공민왕대 이후 박보로(朴普老)가 무장(武將)으로 활약하면서 문하평리(門下評理)까지 올라, 가문을 부흥시키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박정혁 계열은 박정유 계열과 달리 원 간섭기에 가문이 번창하였다.
박정혁의 4대손인 박휘(朴暉)는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기초를 닦았다면, 그의 아들인 박전지(朴全之)는 20세 이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의 총애를 얻어서 ‘개혁정치(改革政治)’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연흥군(延興君)에 봉군되고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까지 올라 가문을 반석의 지위에 올렸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박전지의 아들 박원(朴遠)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에 힘입어 홍자번(洪子藩)의 손녀와 혼인하는 등 당대의 귀족 가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스스로는 정당문학(政堂文學)까지 지냈다.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대부분은 고려 공민왕대 이후 조정에서 중요 관직을 지내는 등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귀족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죽산 박씨 가문은 고려 초기에는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인종대(仁宗代) 이후에는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비록 계열을 달리 하였지만, 고려 멸망 때까지 집안의 성세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대한 협조, 元과의 적극적인 관계 유지 노력,
다른 귀족가문과의 적극적인 혼인관계 등을 통하여 가문의 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 전기의 죽산 박씨
고려 전기의 죽산 박씨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전에 먼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산 박씨와의 구별 문제이다.
고려사 권 95, 박인량(朴寅亮)전에 “박인량의 자는 대천이며 죽주인이고
혹은 평주인이라고도 한다(朴寅亮 字代天 竹州人 或云平州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만을 놓고 본다면, 박인량이 활동하던 문종대와 숙종대까지는
죽산 박씨와 평산 박씨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한편 박인량의 선조인 朴守卿에 대해서는 고려사에서 평주인으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박인량의 본관에 대하여 혼란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이수건은 光宗初까지 활약을 보이던 박수경이 광종 15년 (964) 광종에 의하여 단행된 호족억압책으로 인하여
그의 3아들이 감옥에 들어가자 그 충격으로 죽었고,
그 뒤 가세가 기울어져 그의 손자대부터 평산에서 이탈하여 개경으로 가서 지내다가
다시 전 본관지인 죽산으로 옮긴 까닭에 박수경의 현손인 박인량은 다시
고려사에 죽산 또는 평산인이라고 기록되게 되었고,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박수경을 平山都護府 인물조에, 박인량과 그의 아들인 朴景仁, 朴景伯, 朴景山은
죽산현 인물조에 각각 기재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수건의 견해는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판단을 하여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즉, 보다 일차적인 자료라고 할수 있는 박경인과 박경산의 묘지명에서
그의 견해와는 달리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박경인의 묘지명에는 그의 선조에 대하여,
“其先北京都尉朴赤烏 自新羅入竹州爲察山侯 又入平州置十谷城等 十三城 歸于弓裔王 厥後子孫蕃昌”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박경산의 묘지명에는
“朴氏之先鷄林人也 盖新羅始祖赫居世之裔也 新羅之季 其孫察山侯積古之子 直㣧大毛達徙居平州 管八心戶爲邑長 故自直㣧而下爲平州人”이라고 되어 있어서
박경인과 박경산의 묘지명을 작성한 시기에는 그들 후손들이 자신들의 본관을 평주[평산]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묘지명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박경인과 박경산을 죽산 박씨로 볼 것인지, 아니면 평산 박씨로 볼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묘지명이 가장 우선하는 자료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것은 그 후손들이 갖추어서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이 글에서는 박경인과 박경산 가계는
평산 박씨로 간주하여,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또한 현재 죽산 박씨 가문에서 만들어진 족보들에서도
박경인 가계는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일차 자료인 묘지명들과 고려사 등에는 죽산 박씨의 자세한 세계가 전하지 않는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은 박인석 묘지명이다.
그에 따르면, 박인석은 시조인 朴奇悟의 9세손이고,
曾祖는 永侯, 祖는 挺蕤, 父는 育和, 母는 司宰少卿 李稹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박인석은 고려사에 따로 立傳되어 있지 않은데, 祖인 박정유는 입전되어 있고,
거기에 그의 아버지 박영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박영후가 일찍이 충효의 도로써 경계하였고
박정유 또한 스스로 힘썼다”라는 내용뿐이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언급한 족보들과 氏族源流를 이용하여
시조인 박기오부터 박인석까지의 세계를 아래에 나타냈다.
<그림 1 : 고려 전기 죽산 박씨 세계도>
朴奇悟 - 朴述 - 朴忠淑 - 朴溫裕 - 朴衡 - 朴永侯 - 朴永侯 1자 朴挺㽔 - 朴育和 朴仁碩 女 = 洪元中 2자 朴挺奕 - 朴肇開 朴玄球 女 = 李公璘 |
이 세계도에 바탕하여 고려 전기에 있어서의 죽산 박씨의 정치적 활동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먼저 시조인 박기오에 대하여는 박인석 묘지명에 三韓功臣 太保 三重大匡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박전지 묘지명에 三韓壁上功臣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묘지명의 기록을 최대한 존중해 준다면, 박기오는 아마도 후삼국시대에 태조 왕건을 도와서
그 공로로 공신에 책봉된 듯하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박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박술은 별다른 관직을 갖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가 박충숙 대에 오면 활발한 관직 생활을 보이기 시작한다.
현종 1년(1010) 10월 거란이 2차로 침입을 하였을 때, 박충숙은 禮賓卿으로 中軍兵馬使에 임명받아서
行營都統使 康兆의 지휘를 받아 거란과 전투를 벌였다.
그때 세운 공로 때문인지 현종 2년 8월 西京副留守로 나갔다가, 다음해 2월에는 尙書左僕射에 올랐다.
그 뒤 한동안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현종 13년 2월에 叅知政事(종 2품)로 國子司業 李瓊과 함께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門下侍郞平章事(정 2품)로 치사하였다가,
정종 3년(1037) 2월에 죽으니, 조정에서 貞愼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박충숙 이후 다시 죽산 박씨 가문은 별다른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박충숙의 아들 박온유와 손자 박형, 그리고 증손자 박영후에 이르기까지 기록상 관직을 지낸 근거는 찾을수 없다.
다소 부침이 심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당시 3대에 걸친 기간 동안에 그 가문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박형 때에 그의 집안이 죽산에 있던 모든 기반을 잃어 버리고,
龍山의 淸溪洞에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 주장은 靑鶴集이라는 책에 근거한 것인데,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간다.
그 책에서는 박형을 고려 仁宗 때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박형의 손자인 朴挺蕤는 뒤에 서술하겠지만, 睿宗 때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청학집에서 고려 인조 때 사람으로 묘사한 박형을
박정유의 조부와 동일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인종 때 인물로 묘사된 박형의 손자인 박정유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때
과거에 합격할 수가 있단 말인가.
첫댓글 우리선조들이 죽주에 머물렀다해서 죽산박씨들이 우리선조들을 자기들 문중으로 보는 것 같네요~~더 고찰해야 할 숙제인듯 합니다~^^
윗 글에 언급되어 있는것과 족보 상계도로 정확히 정리가 되었다 봅니다..
(이렇게 일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묘지명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박경인과 박경산을 죽산 박씨로 볼 것인지, 아니면 평산 박씨로 볼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묘지명이 가장 우선하는 자료라고 볼수 있고,
또한 그것은 그 후손들이 갖추어서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이 글에서는 박경인과 박경산 가계는 평산 박씨로 간주하여,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또한 현재 죽산 박씨 가문에서 만들어진 족보들에서도 박경인 가계는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취급하지 않는다.)라고 되어있고
죽산 박씨는 경명왕 세계이고 우리평산은 경명왕 위에.위대인 28세대에 분파 되어
죽산 박씨와는 전혀 세계가 다른 잘못된 역사로 위 본문이 쓰여있어
역사가와 기자들의 잘못 오해된 역사글을 되집어 보고
할아버지 세대는 그것에 연연할 필요없고 박씨 전체와 죽산 박씨 종친에서도
증명하고 있는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이 역사를 혼동하고 있는것 아닌가 생각듭니다.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에 이르기 까지 모든 역사 자료를 왜곡하는 이런 행동은
자기 가문을 욕보이고 미천한 행동이며 한 가문의 혼을 도둑질해가는 몰지각한
행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더이상은 이런한 행동으로
박씨 가문을 욕먹이는 박씨 일가가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