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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원, 나의 죽음!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 해 전 조용기 목사님이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장과 조장들에게 찰스 프란시스 헌터 부부가 쓴 『신유의 방법』이라는 책을 한 권씩 선물한 일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광진교회 민경설 목사님이 양수리 수양관을 빌려서 초청한 일이 있습니다. 저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거기에 갔다 온 후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어떤 사람들은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뒤로 넘어집니다(단10:8, 요18:6). 그래서 성령을 받고 영안이 열려 환상을 보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여러 시간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입신에 들어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오기도 합니다.
한편, 이렇게 넘어지는 것을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서양에서는 오래전에 "성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령의 권능에 의해 넘어지기만 하고 자아가 죽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물론 안수 기도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넘어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름부음을 받아도 내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기름부음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영성 집회가 있으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제가 성령의 권능이나 은사, 그리고 기적과 부흥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죽음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것을 원하며, 지금보다 만 배나 더 간절히 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 하나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나의 자아를 죽여 주소서!"
이것이 오늘날 저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이것의 중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은사, 능력, 기적, 축복, 국제적인 사역 등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집은 위로 높이 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사역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나는 죽었는가?
여러분 모두 캐더린 쿨만에 대해서 들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캐더린 쿨만은 엄청난 기름부음과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기름부음은 바로 죽음에서 왔습니다. 캐더린 쿨만은 종종 "나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기름부음을 받으려면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캐더린 쿨만은 언제 어떻게 죽었을까요?
1937년의 일입니다. 덴버 부흥 장막에 강사로 초청된 부흥사들 가운데 텍사스 출신 부흥사, 버로우즈 월트립(Burroughs A. Waltrip)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멋쟁이 신사였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덴버를 방문한 지 18개월 후에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캐더린 쿨만은 그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더린은 월트립의 아내가 그를 떠나버렸기에 자유로이 결혼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아내를 버렸는지 아니면 그녀가 그를 떠났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1938년 10월 18일, 캐더린은 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헌신적으로 쌓아올렸던 일들이 무너졌습니다. 양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 후 8년 동안 캐더린 쿨만은 세상 사람들의 망각 속에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캐더린은 월트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948년 정식으로 이혼을 했습니다. 캐더린은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한번은 이렇게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와 함께 살면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 삶보다 그를 더욱 사랑하였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나는 하나님보다 그를 더 사랑한 때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떠나야겠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부르심에서 나를 놓아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와 살면서 내 양심과도 살아가야만 했으며, 성령님의 설득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나는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캐더린은 자신이 죽던 날 즉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남은 삶을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완전히 헌신하기로 한 가슴이 터질 듯한 결정을 내렸던 때를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책에서 캐더린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늘도 내가 영, 육, 혼 모두를 예수님께 바친 바로 그곳, 그 도시의 막다른 길로 여러분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내가 그 거리를 걸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주님만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완전하게 항복하였을 때, 성령님께서 그 빈 그릇을 취하셨으며, 그분께서 요구하셨던 것은 바로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날은 내 생애에 위대한 날들이 밝아오는 새벽이었습니다. 그 막다른 길을 걸어 내려갈 때까지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항복할 때까지 나에게는 진정한 주님의 사역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캐더린 쿨만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불의한 결혼 생활을 청산할 때 자아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마치 이와 같이 우리도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자아와 함께 죽여야 할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교만이 죽어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하신 대로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집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성경을 잘 안다고 높아지지 않고, 은사가 많다고 높아지지 않고, 큰 교회를 목회 한다고 높아지지 않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높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겸손이 없으면 모두 가치가 없습니다. 교만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2) 혈기가 죽어야 합니다.
모세는 혈기를 죽이지 못해서 살인을 했고, 같은 이유로 그는 큰 일을 하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혈기는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하게 합니다. 혈기를 죽이지 못하면 살리는 일과 세워주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반드시 혈기를 죽여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혀가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정욕이 죽어야 합니다.
삼손은 정욕을 죽이지 못해 자신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밥 베킷은 『지역을 바꾸는 기도』라는 책에서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행위가 귀신에게 들어오는 문을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속력이 강하고 귀신 들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성적인 죄"라고 말했습니다.
또 에드머피는 『영적 전쟁에 대한 핸드북』에서 "성적 학대와 성도착의 귀신은 공중에 떠다닌다. 말하자면 어느 곳에나 있다. 그들은 모든 귀신들 중에 가장 활발하고 교활하며 제일 악랄하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노아의 때나 롯의 때처럼 심히 악하고 음란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4) 탐심이 죽어야 합니다.
발람은 욕심을 죽이지 못해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탐심 때문에 사도의 영예를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마10:1)을 주신 후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마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런데 요즘 신유 성회나 예언 성회에서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하고,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주님께 쓰임받고 버림받지 않으려면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5) 미움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미움, 증오나 원한, 용서치 못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영적으로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효력을 없애며 사탄에게 합법적인 권한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지식이 많거나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의 동기로 그리고 바울처럼 사랑의 강권을 받아야 합니다.
(6) 비판이 죽어야 합니다.
사단은 참소자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일을 하시고 사단은 죄를 드러내고 참소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참소할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7) 야망이 죽어야 합니다.
주의 은혜로 야망이 죽어야 합니다. 큰일을 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자 하는 욕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걸핏하면 남들과 비교하고 시샘하고 빈정되고 남을 깎아 내리려 하는 것도 사라져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사람은 세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아무 꿈도 없이 그저 놀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저질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땀 흘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성공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진 꿈은 사실은 꿈이 아닙니다. 야망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오직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목회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라고 모두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야망이 죽은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동안 읽은 책 중, 자아의 죽음의 실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릭 조이너가 쓴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입니다. 거기에 보면 "전쟁과 영광"이라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매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충격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충격을 받아야 깨어질 수 있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충격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93년 8월에 나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표현되어 있는 교회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많은 서로 다른 유형의 건물들이 이 섬 전체에 세워져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교단들과 운동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단히 오래된 건물들이 대단히 현대적인 건물들과 나란히 있으면서 서로 부딪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건물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 배들이 도착하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곧장 주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분은 각자의 눈을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약 나를 신뢰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 그들이 '나는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분은 즉시 자신의 칼로 그들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칼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더 심했습니다. 긴장을 풀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
나는 누군가가 그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올라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죽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뒤돌아서 가버렸습니다. ... 죽기를 거부한 사람들 중 적은 수의 사람들은 섬에 머물렀고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의 집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빛을 쬐는 것을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 역시 영광으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들 내부에 영광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이들로부터 오는 것을 반사할 뿐이었습니다. ...
나는 ... 즉시 주님께 그분의 칼로 나의 악한 마음을 파괴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주님이 내 심장을 찌르실 때 나는 고통이 그렇게 적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이 아주 커 보였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구하는 자들은 쉽게 죽는다.' ...
나는 공동묘지로 옮겨진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치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곳으로부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때 내가 본 모든 것들의 영광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바위를 보고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나무들과 하늘, 구름들을 보고 그것들이 얼마나 멋진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내가 그때까지 보았던 그 어떤 새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보였습니다. 나는 이 작은 새가 얼마나 위대한 보배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는 그 이전에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분노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들 모두가 내 심장을 다시 찌르도록 만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내가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정말로 그들이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고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분노하려는 유혹을 받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새보다 훨씬 더 위대한 보배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내 옆에 계셨습니다. ... 그분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웠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백성의 죽음이 내게 왜 그토록 귀중한가 하는 이유이다.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항상 그것을 잃는다. 그러나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는 자들은 참된 생명을 발견한다. 이제 너는 참된 생명을 안다. 왜냐하면 너는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집과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들과 모든 이들은 사랑의 위대한 느낌을 휘저어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내가 전에 느껴 본 그 어떤 것보다 더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 하나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가 훨씬 더 강력하게 나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 모든 축복을 즐기며 심지어 자신들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세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나는 사실 그들은 세워진 것의 한 부분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전 내가 그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즐김이 그 이후의 완전한 즐김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은 점차로 그 실체가 희미해져 가더니 결국에는 내가 이전에 있던 도시에서 보았던 허깨비들처럼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공동묘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건물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을 때마다 이미 건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던 자들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영광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행하면 주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영광은 더욱 증가되었고, 그분은 자신들의 영광을 다른 이들에게 준 자들에게 더욱더 많은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 영광을 나누는 일에 가장 헌신된 자들은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는 집의 다음 층을 만들기 시작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이전에도 도시에 널리 퍼져 있던 질투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
갑자기 나는 바다에서 계속해서 커지고 있던 폭풍에 관심이 갔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주님의 집보다 더 크고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 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나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었고 결코 내게서 빼앗길 수 없는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섬이 경이롭게 되면 될수록 나는 육체적으로 죽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유롭게 주님의 영광을 우주의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혹은 그곳을 떠나야 할지 선택하기가 정말로 어려웠습니다."
이 환상은 굉장히 내용이 깁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요약을 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책을 사서 그 내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릭 조이너가 본 이 환상에는 자아가 죽은 자들의 몇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첫째, 그들은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자기 왕국을 세우는 데 관심이 없다).
둘째, 그들은 다름 사람들을 치료하고 세워주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넷째, 그들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다섯째, 그들은 주님 앞에 홀로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섯째,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샘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나누어주기를 기뻐합니다.
일곱째,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빨리 주님께로 가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이 일곱 가지를 거울로 삼아 그 속에 자기를 비춰보십시오. 그러면 자기가 죽은 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살아 있는 자인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다면 릭 조이너처럼 주님께 나를 죽여달라고 구하십시오. 다른 제목으로 기도하지 말고 이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