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춘(早春)
-위당 정인보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쏜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위당 정인보의 시 조춘(早春)이다.
당대 최고의 한학자 정인보의 시어(詩語)는 쉽다.
어려운 한자가 없다.순수한 우리 말로 이어진 읽기 쉬운 시다.
'산골에 남은 눈'은 바로 잔설을 말한다.
'다산 듯이 보이고녀'는 따뜻한 듯이 보이는구나라는 뜻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라고 했다.
조선에 봄이 오면 즉 해방이 되면 그 어려웠던 시절도
따뜻한 정경으로 보일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귀절이다.
또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쏜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라라고 노래한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인다.새싹이 돋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땅속에서 일어나나는 일이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위해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위당 정인보는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반드시 온다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 엉기올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말고 해쳐본들 어떠리'라고 했다.
자기의 생각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서 형체가 생길 때
다시말해 결심이 생길 때는 '가던 구름도 머문다'는 뜻이다.
위당 정인보는 이 연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하늘에서도 범상치 않게 보고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있지말고 든 붓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세상에 나와
헤쳐본들 어떠하리'라고 우리 민족을 고무시키고 있다.
그의 시 조춘은 시골의 겨울풍경을 노래하는 것 같다.
그러나그 속에는 강한 민족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겉만 보면 지금의 3월은 겨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땅 속에서는 봄을 준비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비록 일제 치하에 있지만
독립을 향한 움직임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나라를 찾고자 하는 조바심을 나비가 어찌알겠느냐, 왜 이라 더디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의 " 든 붓대 무능하다 말고 헤쳐 본들 어떠리 "는 독립을 향한 염원을 속에만 넣고 있지 말고
표현(표출)을 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일어서자, 봉기하자는 뜻을 담고 있는 시(詩)라고 할 수 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위당 정인보를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위당에 관하여 아는 사실들은 대부분 나의 은사 백낙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1948년 여름 연희대학의 노천극장에 전교생이 다 모인 자리에서 위당으로부터
국학에 대한 강의를 들은 때였다. 위당의 국사관이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얼'이라는 독특한 낱말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이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런 강의 중에서도 웃기는 말도 가끔 섞어 모든 학생을 폭소하게도 하였다.
강의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때 들은 퇴계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난다.
젊은 선비 퇴계가 종로에서 길을 가다가 발을 멈추고 기생들이 여럿 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관기들이 하도 예뻐서 근엄한 유생 퇴계도 넋을 잃고 기생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정신이 들어
퇴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렇게 한마디 하였다.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지정한 정부는 정인보에게 4대 국경일의 노랫말을 의뢰했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훼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켜온 청절한 지조, 줄기차게 '조선의 얼'을 탐구해온 폭넓은 학식, 식민사관에
맞선 조선사연구, 민족의 정한을 고아한 문체로 표현한 시조문학, 청빈한 사생활과 지사적인 인품이 조야를 움직인 것이다.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의 변절을 지켜보았던 해방 정국의 지도자들은
국경일의 노랫말을 누구에게 맡길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뜻을 모아 정인보가 추천되었다.
정인보는 한 점 흠결이 없었고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이 유려했으며 지행합일의 양명학자로서 국경일 노랫말의 작사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어떤 이념이나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은 당당하고 올곧은 처신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정인보에게는 영광임과
동시에 무거운 부채였다. 백만 년 두고두고 불릴 조국의 4대 국경일의 작사자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명예로우며
더불어 무거운 짐이었겠는가.
무릇 뜻있는 한국인으로서 위당 정인보의 <순국선열추념문>을 읽고도 눈물을 훔치지 않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과거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이 글은 이 땅의 많은 청년학생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23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 추념대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순국선열 영령 앞에 아뢰나이다’로 시작된 추념사는 “시조 단군께서 다스림과 가르침으로
문명을 여신 뒤로 유구한 역사가 근 5000 년에 이르는 동안, 흥망의 역사가 어찌 한두 번이리오. 그러나 대개는 같은 민족이
이어받았고, 혹 외세의 침탈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에 그쳐, 단군의 후손이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은 언제나
뚜렷하였으니, 일제에게 당한 강제병합은 그야말로 역사상 보지 못하던 초유의 비극이라"며 시작된다.
그의 추념사는 비분강개하고 폐부를 찌르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장문의 글이다.
정인보는 1950년 3월 1일 신새벽 맑은 정신으로 '3·1절 노래'를 지었다.
당년 57세, 그러나 이 해 6·25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북한군에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3·1절 노래는 1951년 3·1절 행사 때부터 공식적으로 불리게 되어서, 정작 작사자는 행사장에서 이 노래를 한 번도
듣지 못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고 애달픈 일이었다.
3·1절 노래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 정씨 집안에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원용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이어 외가를 통해 양명학자인 이건방(李建芳)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그러나 나라 사정은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가만 두지 않았다. 1910년에 일제가 무력으로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것이다.
이에 18세의 위당은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가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은식·신규식·김규식·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고 정치 문화 계몽활동을 주도하는 광복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위당은 “어릿어릿한 사람은 얼빠진 사람이고 이는 꺼풀만 남은 사람”이라며 ‘얼’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얼’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줄기를 찾는 것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천추만대를 일관하는
‘얼’을 찾는 작업이며, 역사가는 낱낱의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여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뼈대인 ‘얼’의 큰 줄기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당은 국가와 같은 외형을 일제에게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얼’의 확립을 통해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당의 정신사적 ‘얼’사관은 1930년대의 상황에서 우리 역사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역사가의 사명감을 보여주었다. 이즈음 위당은 당대의 대강백이자 문장가로 선교 양면에 뛰어났던 석전 박한영 선사와
자별(自別)한 사이로 지냈다. 선사와 함께 금강산에 동행하기도 했고 여러 사찰에 현판을 써 남겼다. 여기서 광복을 맞고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고자 〈조선사 연구〉를 펴냈다.
엄밀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사실을 인식하고 민족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위당 사학의 성과였다.
위당은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다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기반한 사고를 강조했던 위당의 학문은 그래서 자연스레 실학과 맞닿았다.
조선 후기에 유형원·이익·정약용에 이르는 별도의 흐름을 지적하고 이러한 신학풍을 실학이라 규정지은 위당이다.
위당은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광개토비문’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삼국 중심으로 전개한
위당의 해석은 삼국과 왜의 역학관계를 통해 당시 절박한 현실과 대비를 도모하고자 했던 현실적인 역사인식의 소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