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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3년 겨울호
【산울림 듣기 2】
산울림의 결성과 활동
일시 : 2023년 11월 22일(수요일)
장소 : 흑석동 커피니 및 뚜스뚜스
맹문재 :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장은성 어머님을 뵙고 가계(家系)는 물론이고 산울림의 구성원인 세 아들에 대한 소개를 들었어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한 말씀이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
이제부터는 산울림의 결성과 활동을 본격적으로 들어보려고 해요. 근래에 ‘산울림 50주년 기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어요. 1977년 공식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50년을 앞두고 4년 동안 진행하는 리메이크 프로젝트이지요. 50개의 후배 밴드들이 산울림의 명곡을 재조명해서 발표하는 것으로 의미가 참으로 큰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 대담도 기념 프로젝트에 넣을 수 있겠네요. 그렇지만 그 많은 활동을 짧은 시간에 모두 들을 수 없으니 이번에는 개괄적으로 듣고, 앞으로 활동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들으려고 해요.
산울림이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세 분이 어떻게 음악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김창훈 : 삼 형제가 음악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형(창완)이 대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면서였어요. 어느 날 형이 통기타를 한 대 사와 기타 교본을 보면서 연습을 하는 것이에요. 형이 독학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호기심이 생겨 몇 달 뒤 기타 한 대를 500원 주고 샀어요. 그러니까 막내(창익)가 옆에서 책이나 공책 같은 거 놓고, 때로는 수저통을 치면서 음악 놀이를 한 것이에요. 학교 끝나고 또는 주말에 이렇게 음악 놀이를 한 것이 산울림 음악의 시초가 된 것이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일주일에 음악 시간이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이었는데, 그때 음악 선생님께서 클래식을 전공한 성악가이셨어요. 그분이 제 음악의 은인이시죠. 음악 시간에 성악가들이 배우는 코르위붕겐(Chorübungen)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성악가들이 음악을 연습하는 건가 봐요. 그걸 통해서 청음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그전에는 음악을 들으면 그게 계명으로 떠오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음악 수업 시간을 통해서 음악을 들으면 계명이 어떻게 되는구나 하는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에요. 예를 들면 동요 같은 것을 들으면 흥얼거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도인지 솔인지 잘 모르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죠. 그런데 음악 시간을 통해서 청음을 배우게 되어 노래를 들으면 계명이 들리는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 제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에요. 그것이 작곡의 기본이 되었지요. 또 기타 코드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한 3년 음악 놀이를 했었는데, 결정적으로 밴드 음악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5년이에요. 1975년은 실제로 산울림이 밴드로서의 모양을 갖춘 원년이라고 볼 수 있죠. 제가 대학교에 입학하자 입학 선물로 밴드 악기를 구입한 것이에요. 부모님으로부터 30만 원을 빌려서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앰프를 구입한 것이에요. 3인조 밴드 악기를 갖춘 것이지요. 그 당시 30만 원이면 거금이었지요. 빌린 돈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았어요. 그런데 그때 흑석동 집의 방이 작아서 사실 밴드 음악을 할 수 없었죠. 옆집 설거지 소리도 들릴 정도의 동네여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말마다 동네에서 시끄럽다고 난리가 났어요. 동네의 악동들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무마하시느라 애쓰셨어요. 그런데 또 지지하는 동네 주민들도 더러 있었어요. 왜냐하면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하니 예쁘게 봐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음악을 연습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어요. 사실 아주 시끄러운 음악이었을 텐데 동네 분들이 참으로 고맙지요. 그렇게 그 달동네에서 밴드 음악이 나온 것이에요.
맹문재 :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것 이상을 깨우쳐 작곡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달동네에서 밴드 음악이 나왔다는 사실도 그러하네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산울림은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무이(無異)라는 밴드로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삼 형제로 구성했고요. ‘무이’의 뜻이 무엇인지요? 그리고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하지 못했고, 김창훈이 작곡해서 샌드페블즈(sand pebbles)에게 건네준 <나 어떡해>가 대상을 받았지요. 이 상황을 좀 더 들려주세요.
김창훈 : 우리 삼 형제의 음악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 것은 1977년이지요. 우리가 기존 가요와 다른 음악을 놀이로 하고 있었지만, 검증이 안 되었잖아요. 그래서 형제 팀으로 구성해서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것이에요. 대학생이면 학교 대표가 아니더라도 출전할 자격이 있었지요. 우리는 ‘무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예선에 나갔는데, 형이 대학 졸업생이어서 자격이 안 되어 탈락하고 말았어요. ‘무이’라는 뜻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에요.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했는데, 형의 의중이 반영되었어요. 우리의 음악이 서양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고, 즉 못하지 않다는 자부심이 포함된 것이에요.
그리고 제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 학생으로 구성된 샌드페블즈의 5대였어요. 샌드페블즈는 2학년만 활동하고 3학년이 되면 2학년한테 물려줘야 해요. 그래서 제가 자의 반 타의 반 6대 후배들을 돌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작곡한 <나 어떡해>를 주었어요. 샌드페블즈도 무슨 야망을 갖고 출전했다기보다는 한 번 출전해 보자는 데 의미를 두었지요. 운이 좋으면 장려상이라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맹문재 : 샌드페블즈에 대해 좀 더 듣고 싶고, 대학가요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네요.
김창훈 : 샌드페블즈는 1대 선배들이 지었지요. 이름을 지을 때 후보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인데, 당시 어떤 영화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영화에서 따왔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샌드페블즈는 우리말로 모래와 자갈이니 단과대학의 이미지와도 맞았지요.
대학가요제 현장에는 삼 형제 중에서 저만 가서 보았어요. 공연이 다 끝나 상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우리는 장려상이나 기대했는데, 이름을 안 불러 틀렸구나 생각했어요. 차츰 등수가 올라가는데도 우리가 호명되지 않아 출구로 나가려고 하는데, 마지막 대상을 호명하려는 순간 이수만 사회자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잠시 뜸을 들이더라구요. 뭔가 혹시 하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대상, 샌드페블즈!” 하고 흥분해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에요. 이수만 씨와 명현숙 씨가 공동사회자로 진행했어요.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지요. 그때의 놀라움과 감격과 희열은 평생 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악을 좋아서 했지만 대중에게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대학가요제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것도 큰 의미가 있어요.
맹문재 : 샌드페블즈 40주년 기념 공연에 출연한 1대 드러머 분이 밴드 이름의 연유에 대해 구성 멤버가 6명이었는데, 3명은 키가 크고 3명은 키가 작아 지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어쩌면 농담인 것도 같네요. 밴드 산울림의 제1집 <아니 벌써>가 1977년 12월 15일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네요. 제작 과정이 궁금하네요.
김창훈 : 형이 군(방위병) 제대에 맞춰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저 또한 4학년이 되었으니 대학원 진학이나 군입대를 해야 했지요. 참고로 형은 중학생 때 친구들과 놀다가 눈을 다쳐서 시력이 좋지 않아 군대를 현역으로 갈 수 없어 보충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어요. 이런 여러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 음악 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우리의 음악 놀이의 결과물을 기념으로 남겨두자는 생각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어요. 형이 그것을 서라벌레코드사에 갖다주었어요. 10월인가 11월인가였어요. 학교에 다녀야 하는 저와 동생에 비해 형은 다행히 졸업했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어요. 그때 대부분의 레코드사가 경기도에 있었는데, 서라벌레코드사는 서울 종로에 있었어요.
한 열흘 뒤에 레코드사에서 녹음하자고 전화가 왔어요. 우리는 녹음할 비용이 준비가 안 되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녹음해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게 무슨 횡재인가, 꿈같은 일이 일어났구나 생각하고 녹음에 참여했어요. 당시에 제일 수준 높은 이촌동 서울 리코딩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스튜디오에 처음 가본 것이지요.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당시 이흥주 사장께서 우리의 가치를 알아보고 크게 투자한 것이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셨어요. 우리는 평소에 늘 하던 것이었으니까 연습도 없이 그냥 잡은 날짜에 집에 있던 기타를 들고 가서 녹음했어요.
이때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어요. 녹음하는 방식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연주를 하는 것인데, 누가 중간에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되었어요. 그러니 굉장히 어려웠어요. 보컬은 나중에 하는 거였어요. 우리는 열심히 녹음했는데, 엔지니어가 사운드가 이상하다고 했어요. 엔지니어는 우리가 연주하는 것이 계속 불협화음으로만 들리니 자신이 잘못한 것인가 하고 씨름하다가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악기를 가져와 보라고 한 것이지요. 엔지니어가 우리의 악기를 보더니 튜닝이 안 되었다고 했어요. 우리는 완전 중고 악기로 연습을 해왔으니, 악기가 튜닝이 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고 그냥 한 것이에요. 그래서 3시간 30분 정도 녹음한 것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그 당시 녹음실 사용료가 엄청나게 비싸서 제 기억으로 1초에 100원이라고 했어요.
그때 방기남 부장이라고 불린 프로듀서가 우리의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흥주 사장께서 방 부장에게 녹음실 사용료가 비싸니까 좀 아껴 써달라는 얘기를 하면서도 우리의 음악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해요. 삼 형제가 하는 대로 놔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지요. 어쨌건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악기를 빌려 다시 녹음했어요.
악기는 샌드페블즈의 3대 김영민 선배께서 리코딩과 시엠송을 만드는 이백천 선생님 회사에 주선해주셔서 큰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펜더 기타를 빌려 녹음을 했어요. 아주 좋고 비싼 기타이지요.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어요. 이렇듯 산울림의 첫 음반 녹음은 다 악기를 빌려서 한 것이에요. 연주를 마치고 나서 형 위주로 보컬을 하고 제가 백보컬을 했어요. 보컬을 마친 뒤에는 마지막으로 애드리브(ad lib)을 넣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11월 말인가에 녹음이 끝났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어보니 제작 과정에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김창훈 : 녹음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더 큰 일이 일어났어요. 그때는 문화공보부가 노래 가사를 심의했는데, 우리의 것이 모두 불합격이 된 것이에요. 우리가 볼 때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가사가 그렇게 불경스러운 것이 아닌데도 퇴짜를 맞았어요. 이런 가사는 불량, 이런 가사는 너무 애상, 이런 가사는 퇴폐 등으로 다 체크가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1주일인가, 2주일인가에 개사를 했어요. 부분적으로 조금 바꾼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많이 바꾼 노래도 꽤 있어요. <아니 벌써> 같은 노래가 대표적이에요. 원래 가사에는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이 친구 벌써 취했나” 등의 가사가 있었는데, 퇴폐적인 가사라고 퇴짜를 맞아 새로 쓴 것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어떡해>도 심의를 받았으면 걸렸을 거예요. 다행히 대학가요제에서 생방송으로 나와버렸기 때문에 구제된 것이지요. 엄혹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 어떡해”라고 외치는 것이 허용될 수 없었지요. 가사를 새롭게 쓴 다음에는 재킷(jacket)의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대부분 가수의 얼굴을 내보이거나, 밴드 같은 경우는 단체 사진을 찍어 재킷의 디자인으로 사용했지요. 그런데 우리 삼 형제는 그런 디자인을 너무 싫어했어요. 그랬더니 레코드사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해봐라,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삼 형제가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그림을 직접 그렸어요. 도화지에다 삼 형제가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크레파스로 그린 것이에요. 오른손으로 그리면 너무 정교하니까 왼손으로 그리기도 했어요. 주제에 맞는 시계 등을 그려 넣고 디자인을 해 레코드 회사에 보냈어요. 삼 형제의 사진은 조그맣게 해서 뒤에 넣었어요. 우리는 다음 앨범에 계속 쓸 수 있는 디자인도 생각했어요. 부분만 바꾸거나 색깔만 바꾸면 되는 식으로 만든 것이지요. 우리는 기존의 틀이 마음에 안 들어 깨려고 했고, 팬들에게 우리의 앨범을 딱 보면 알 수 있도록 특색을 이루려고 했고, 그리고 디자인 요소의 능률을 고려했던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우연과 기적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맹문재 : 정말 그러하네요. 그렇게 해서 음반으로 제작된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요?
김창훈 : 엘피(LP)판이 시중에 발매되기 전에 집에서 삼 형제가 들었어요. 당시에 저의 집에 고급은 아니지만 전축이 있었어요.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어요. 신비로움 자체를 경험한 것이지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들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들으신 것 같아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우리의 노래가 들리는 것이에요. 라디오에서도 나오고, 다방에서 나오고, 레코드 가게나 문방구에서도 나오고 했어요. 집에서 전축을 틀어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예고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니까요. 집에서 들을 때보다 훨씬 감동했어요. 그럴 때마다 우리의 노래가 맞나,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하는 경험을 했어요. 그러면서도 약간 부끄러움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노래가 나오면 슬그머니 피해 다니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음반이 발매되자마자 인기를 끌게 되니 공연 초청이나 방송 출연 섭외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요.
김창훈 : 음반이 나온 다음 해 1월에 티비시(TBC)에서, 즉 동양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우리는 판이 얼마나 팔리고 안 팔리고 등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때였잖아요. 또 우리는 음악을 전업으로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출연 요청을 하니 놀랐어요. 그래서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 양복점에 가서 급조로 양복을 맞추었어요. 급하니까 양복점 주인에게 통사정했어요. 아무리 옷이 없다고 하더라도 티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옷에 대한 디자인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고동색 양복과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하나씩 골랐어요. 삼 형제가 처음으로 양복을 마련한 것이지요.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때 처음으로 방송에 데뷔한 것이지요. 저는 그때 4학년이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계속 출연 섭외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학교에도 다녀야 했기 때문에 무척 바빴어요.
맹문재 : 재학생 신분으로 방송 출연을 하셨기 때문에 학교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겠네요?
김창훈 :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났겠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텔레비전 보급률도 낮았고 라디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만 알았지 대부분 몰랐어요.
맹문재 : 1집 음반은 2집과 더불어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100대 명음반에서 수위를 다툴 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판매도 많이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느 정도였는지요?
김창훈 : 우리는 음반이 얼마나 팔렸는지 전혀 몰랐어요. 지금 같으면 계약서도 쓰고, 그에 따라 레코드 회사가 정산도 하고 그랬겠지요. 우리 삼 형제는 음반이 나온 것 자체에 감격했을 뿐 판매 쪽에는 전혀 생각과 관심이 없었어요. 이재에 어두운 문외한이어서 몰랐던 것이지요. 그 대신 우리도 음악을 할 수 있는 활로가 생겼구나, 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구나 하는 것에 기쁨이 있었던 것이지요. 한 10년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1집이 40만 장 정도 팔렸다고 해요. 도매상들이 현금을 싸 들고 와서 음반을 사려고 줄을 섰을 정도였대요. 엄청난 판매를 기록한 것이지요. 그때 레코드 회사 사장이 립서비스를 했는데, 저한테 식품 공장을 차려 주겠다고 했어요. 저의 전공이 식품공학이니 그런 걸로 달래주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걸 믿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허상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산울림의 매력과 생명력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과 별개로 창작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었고, 팬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는 거 아닐까 생각해요.
맹문재 : 산울림의 제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1978년 5월 10일 발매되어요. 아주 빠른 기간에 만들어지는데, 인기가 높았기 때문으로 여겨지네요. 제3집 <내 마음은>은 1978년 11월 1일 발매되어요. 역시 매우 빠른 기간에 제작되었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김창훈 : 우리는 바로바로 새 음반 녹음에 들어갔어요. 당시 가수들이 음반을 한 장 내려면 3년 정도는 걸려야 했는데, 우리는 매우 빠르게 만들었어요. 만들어진 곡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몇 년에 하나씩 낼 이유가 없었어요. 우리는 창작력에 충만해 있기도 했지만, 음악을 전업으로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작곡한 곡들을 얼른 음반으로 내고 싶었던 것이에요. 우리가 녹음하자고 하니 레코드 회사가 좋아했어요. 우리의 음반이 많이 팔리고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우리는 맹목적인 창의력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음악의 생명력과 힘을 얻게 된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3집이 만들어진 상황은 2집과 비슷해요. 음악에 몰입해서 단기간 내에 음반을 낼 수 있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주옥같은 곡을 많이 발표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네요. 산울림 제1집~제3집까지의 음악이 대중에게는 물론 음악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그 요인은 아무래도 독창적인 작곡 때문이라고 여겨져요. 물론 연주력이 뛰어난 면도 있지요.
김창훈 : 삼 형제가 완전체로 활동한 지 2년 동안 몰입해서 여러 음반을 내었어요. 산울림은 동요 앨범도 냈어요. 또한 라디오 드라마 연속극인 <빨간 풍선>의 오에스티(OST) 노래도 만들었어요. 그 연속극이 공전의 히트를 쳤어요. 조중환 작가가 가사를 썼고 작곡은 제가 했는데, 저작권협회에는 오류로 형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연말에는 산울림 캐럴송도 만들었어요. 기존의 캐럴송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해서 리메이크한 것이지요. 우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레코드 회사에서 서대문 쪽에 연습실을 하나 마련해주었어요. 1978년은 산울림의 전성기였어요.
맹문재 : 제가 자료를 조사해보니 1979년에 동요 제1집 <개구쟁이>가 발매되네요. 그리고 제4집 음반 <특급열차>가 1979년 4월 15일 발매되어요. 녹음 기간이 1978년 12월부터 1979년 3월까지라고 음반에 밝히고 있어요. 이러한 정황을 보면 산울림의 활동에 변화가 있다고 여겨지네요. 군입대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김창훈 : 1978년을 보내고 새해가 되었어요. 1979년 2월에 제가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때는 졸업하면 대학원을 진학하든가 아니면 군대 가야 했어요. 저는 대학원에 갈 형편도 안 되었고 또 장래가 불투명하니까 입대를 결정했어요. 1979년 4월에 입대 날짜를 잡아놓고 산울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제대 후의 컴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차를 동생과 맞추자고 해서 동생은 재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동생과 같이 입대했어요. 그리고 입대 전에 4집과 5집 음반의 노래를 녹음해 놓았어요. 군대 기간에 산울림의 공백을 최소화하자고, 형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도 앨범은 계속 나오게 하자고 생각한 것이지요. 동요집 <개구쟁이>까지 녹음을 한 것이지요. <내일 또 내일>이라는 영화의 음악도 했어요. 제6집 음반인 <조금만 기다려요>는 형이 단독으로 제작한 것이에요.
맹문재 : 두 분이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 김창완만 활동하게 되는 것이 이해되네요. 1979년 9월 20일 제5집 <한낮의 모래시계>와 1980년 5월 5일 제6집 <조금만 기다려요>의 발매 상황도 알게 되었네요. 군대 가기 전에 한 공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려요.
김창훈 : 군입대 전에 큰 콘서트를 했어요. 1979년 2월 28일부터인가 3일간 했어요. 문화체육관에서 공연했는데 처음 한 것이에요. 그 당시 대부분의 가수들이 리사이틀이라는 명칭으로 했는데, 우리는 산울림 콘서트라고 했어요. 우리는 게스트 없이 단독으로 공연했어요. 문화체육관을 마치 권투 경기장처럼 개조해서 사면에서 관객이 다 볼 수 있었어요. 하루에 2회씩 총 6회를 공연했어요. 1회에 관객이 3천 명 정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전부 매진되었어요. 덕수궁까지 줄을 서서 기다렸고, 지방에서 새벽에 올라와 텐트를 치고 그랬어요. 그때 형이 파란색, 내가 노란색, 동생이 빨간색 양복을 입었어요. 콘서트 전에 여러 대학에도 초청받아 공연하러 간 적이 있었지요. 그때 서라벌레코드 회사에서 주영철이라는 분을 우리의 전담 매니저로 붙여주었어요. 주영철 선생님은 방송계에서 아주 베테랑이었는데, 산울림만 맡았을 정도인 것으로 보면 회사에서 엄청 신경을 쓴 것이었지요.
맹문재 : 군대 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군악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창훈 : 저와 동생은 군악대를 지원했어요. 음악에 대한 열망도 있었고, 실력도 좀 더 체계적으로 쌓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원에 가서 색소폰을 배우고, 막내는 드럼으로 지원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색소폰을 좀 불었어요. 그래서 육군본부 군악대에 배치되었어요. 국립현충원에서 군대 생활을 한 것이지요. 복무 기간이 30개월인데 교련 시간을 공제받아 27개월 복무했어요. 전두환 군부가 들어선 역사적 분기점 시기여서 군대 생활이 힘들었어요. 무슨 전역식, 퇴임식, 취임식 등 행사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차출당해서 연주했어요. 국군의 날 행사에는 당연히 참석했지요. 매일 아침 성남비행장에 가서 사열하고, 유격 훈련받고, 불침번 보초 서고, 악기 닦고 등등 아주 혹독한 군대 생활을 했어요. 그런 군대 생활을 마치고 1981년 7월에 제대했어요.
맹문재 : 두 분이 군대에 다녀온 뒤 제7집 <가지 마오>(1981년 8월 1일), 제2동요집 <산할아버지>(1981년 10월 1일), 제8집 <새야 날아>(1982년 3월 25일), 제3동요집 <운동회>(1982년 4월 20일), 제9집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1983년 1월 10일), 제10집 <너의 의미>(1984년 7월 20일), 제4동요집 <동심의 노래>(1984년 12월 25일)를 발매해요. 그야말로 전성기의 활동이지요. 이때의 음악 활동이 입대하기 전과 다른 점이 있는지요?
김창훈 : 군대 생활할 때 말년 휴가를 나와서 제7집 앨범 작업을 한 것으로 기억해요.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앨범이 나왔어요. 그 이후 다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곡을 많이 만들고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했어요. 동요집도 여러 개 만들었어요. 정말 놀랄 정도로, 놀랄 정도로 했어요. 그리고 1982년 말에 직장 생활을 시작해요.
맹문재 : 제10집 이후 산울림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지요. 왜 음악 활동을 접고 직장 생활로 들어섰는지요? 음반 판매가 많이 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요.
김창훈 : 그 당시 졸업하면 몇 년 안에 취업을 해야 되는 사회 제도 내지 문화가 있었어요. 대기업의 경우 나이 제한이 있었어요. 군 제대 후 4년인가 그랬어요. 그 기간이 넘으면 취업 자체가 안 되었어요. 그 제한이 1982년이었던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때 취업을 안 하면 모든 것이 굉장한 불확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제대해서 1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해 보았는데,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었어요. 경제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없어 여유가 없었어요. 또한 전문화된 것이 아니니까 우리 삼 형제가 모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어요. 가령 방송 출연할 때 방송사에 악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악기를 다 가져가야 했어요. 악기를 싣고 갈 수 있는 차가 없으니 길거리에서 용달차를 잡아야 하는 등 아주 힘들었어요. 또한 음악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가 있었어요. 학생 신분일 때는 그래도 학생이고 취미로 하는 것이니까 봐주는 편이었지만, 졸업해서 밴드를 하니 사회에서의 멸시감을 체험했어요. 또한 그동안 집단에 소속되어 살아왔기에 정신적으로 안정되었는데, 프리랜서 자유업이라는 음악 활동이 오히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 느낌을 받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점점 커졌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고, 자존심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어요. 20대 후반의 나이에 갖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다가왔어요. 그리고 취업을 한다고 해서 음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어요. 대학 생활을 하듯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맹문재 :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데 왜 경제적인 보상이 없는지요?
김창훈 :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지요. 그 당시는 산울림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음악인이 대접을 못 받았어요. 당시에는 가수와 레코드 회사의 공생관계가 지금과는 다르게 형성되어 있었어요. 레코드 회사가 가수에게 투자하는데, 성공 여부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가수가 인세나 저작권료 같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구조였어요. 그 대신 히트곡으로 인지도를 높임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올려 밤무대 출연 등으로 수익을 올렸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직장 생활을 하게 된 상황이 이해되네요. 그러면 어디에 취직을 하셨는지요?
김창훈 : 저는 해태그룹에 입사했어요. 동생은 기계공학이 전공이니 대우자동차에 들어갔어요. 형은 취직하지 않고 레코드 회사에서 무슨 직을 맡아 음반 기획이나 앨범 제작을 거들고 가수도 발굴하고 곡도 써주고 등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어요. 그 당시는 군사 정권 시절이어서 기업 문화에도 거의 군사 문화가 팽배해 있었어요. 토요일까지 근무했고, 음악 활동의 경력은 깡그리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해 회사에서 역량을 인정받기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직장 생활을 힘들게 하다 보니 음악 활동과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어요. 사실 음악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제11집 <슬픈 장남감>(1986년 9월 10일), 제12집 <꿈꾸는 공원>(1991년 7월)이 발매되는데, 김창완 혼자 활동하지요. 전체적으로 음악이 쓸쓸한 분위기를 주고 있어요. 그 무렵 두 분은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셨지요. 1997년에 들어 산울림이 재결성되어 제13집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1997년 1월)를 발매해요. 음악 활동을 다시 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김창훈 : 제13집 앨범은 삼 형제가 다시 컴백한 산물이지요. 산울림 20주년이 되어 콘서트 요청이 있었고, 다시 활동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요청도 있었어요. 그리고 저나 동생이 직장 생활에 어느 정도 연륜이 쌓여 시간을 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미국에서 휴가를 내고 들어와 1주일 동안 녹음하고 다시 나갔어요. 동생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제14집 앨범도 내려고 준비했어요.
맹문재 : 2006년 제14집을 준비하던 중 산울림의 막내이자 드러머였던 김창익이 이민 가서 살던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게 되지요. 그 일로 산울림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김창훈 : 팬들의 요청이 크고 우리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 산울림 30주년 공연을 하게 되었어요. 미주 투어도 하고, 서울에서도 공연했어요. 세종문화회관에서 큰 행사로 했어요. 이러한 상황이어서 제14집 앨범 제작은 자연스레 요청되었던 것이지요.
동생의 소식은 뉴욕 출장을 갔다가 들었어요. 캐나다 밴쿠버에 제가 식품사업을 창업했는데, 동생이 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동생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별 관심이 없어 동생의 고용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친구한테 매각했어요. 그러던 차에 지게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사고를 당했어요. 밴쿠버에는 눈이 많이 오잖아요.
맹문재 :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서 산울림 활동을 지속시키는 것이 팬들이 바람이었을 것 같은데, 왜 밴드를 해체했는지요?
김창훈 : 팬들의 경우 그런 의견이 많았지요. 동생의 아들이 드럼을 했기 때문에 그를 드러머로 내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도 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우리의 리더는 형이기에 형의 의지가 중요했지요. 형이 막냇동생이 없는 산울림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해체되었어요. 거기에 어머니가 형의 뜻에 힘을 실어주셨지요. 그래서 형은 김창완밴드를 결성해서 형의 음악을 하게 된 것이고, 저는 김창훈과 블랙스톤즈를 결성했어요. 그렇지만 저의 팀은 지속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활동해요. 주로 콘텐츠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산울림 50주년 기념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지요.
맹문재 : 요즘 시 노래 작업을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올해 5월 29일 벨로주 홍대점에서 시노래 500곡 완성 기념 공연도 가졌지요. 저도 공연에 참여해 응원했듯이, 이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시노래 작업을 하시게 된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네요.
김창훈 : 작곡을 하면서 작사의 어려움이 있어 시를 발견하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다시 말해 작곡의 열망을 담아낼 소재가 필요한데, 그것을 생각하다가 시라는 거대한 대양을 만난 것이지요. 무궁무진한 금광을 찾은 것이에요. 처음에는 이렇게 나올 수 있을지 몰랐는데, 파면 팔수록 금광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다작을 한 적이 없어요. 곡을 하나 만들고 가사를 쓰는데 한 달에 한 편 쓰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에요. 지난 5월에 500곡을 만들고 더이상 안 나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시를 찾아 필사하다 보니 또 곡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8월부터 다시 시작해 600곡이 되었어요. 이렇게 나가면 1천 곡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의 일생일대의 하나의 큰 목표가 되었어요. 그래서 좋은 시를 계속 찾고 있어요. 아직 찾지 못한 중요하고도 멋진 시인이 많이 있겠지요. 그래서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시노래 중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제대로 된 음원을 만들 생각이에요. 그래서 영상과 함께 만들어 한국의 음악과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활용되길 기대하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K-POP)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문학과 문화가 밑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이지요.
맹문재 : 시노래 작업을 기꺼이 응원해요. 전무후무한 작업이기에 분명 큰 의미를 갖게 되고 평가를 받을 것이에요. 이제 대담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산울림이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훈 : 후배 음악인들에게 발상의 전환으로 창의력에 대한 용기를 불어넣는 데 기여한 점을 들고 싶어요. 기성을 쫓지 않고 항상 의문과 호기심을 갖고 새로움을 추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데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지요. 가령 가사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하는 식으로 규칙화된 틀을 깨고 자유롭게 구사한 면을 들 수 있겠네요.
맹문재 : 요즘 산울림 50주년 기념행사로 후배 밴드들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있지요. 산울림도 축복이고, 후배들도 축복인 것 같아요. 이렇게 노래가 다시 불리는 것은 분명 노래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산울림 노래가 생명력을 가지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창훈 :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고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일반적으로 노래가 히트곡이 되려면 곡 자체가 좋아야 하고, 좋은 가수가 불러야 하고, 운도 따라줘야 하지요. 노래가 리메이크되는 것은 클래식이 되는 것인데, 클래식은 어떻게 탄생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면 좋겠네요. 산울림의 곡이 50년이 되는데 소멸하지 않고 클래식이 되는 이유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중들이 추억할 수 있는 사회성과 시대성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곡의 창의성에는 시대성 같은 것들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맹문재 :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좀 더 덧붙인다면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곡의 생명력을 갖는 토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네요.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만들 때 수익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좋은 곡을 만드는 데만 관심을 두셨다고 했잖아요. 그와 같은 창작에 대한 깊은 열정이 좋은 곡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해요. 저는 모든 예술 영역에는 고수가 있는데, 자기 예술에 혼신을 다해야 가능하다고 믿어요. 가령 이중섭 화가가 소를 그린 것이 돈을 벌려고 하거나 이름을 알리려고 하기보다는 소의 생명력 자체를 탐구한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 그 이전에도 없고 그 이후에도 없는 이중섭만의 소를 그린 것이지요. 산울림의 노래 역시 그와 같은 면으로 해석하고 싶네요.
김창훈 : 굉장한 통찰력인 것 같아요. 산울림 곡의 생명력을 관통하는 이해일 수 있겠네요.
맹문재 : 산울림 팬클럽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김창훈 : 2005년에 산울림 팬클럽이 생겨 우리가 음악을 다시 하는 데 동력을 주었어요. 그전에 ‘산울림 개구쟁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는데, 구성원을 더 넓혀 ‘산울림 매니아’로 통합되었어요. 현재 5,00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술취한 늑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김봉진 씨가 회장을 맡고 있어요. 수지타산을 따지거나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모임이에요. 아름답고 고마운 모임이지요.
맹문재 : 저도 산울림 매니아에 등록해야겠네요.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내내 건강하세요.
■ 김창훈 :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했다. 김창완, 김창익과 함께 형제 밴드 산울림을 구성해 베이시스트 겸 세컨드 보컬로 활동했다. <나 어떡해> <내 마음은 황무자> <회상> <독백> <초야> <산할아버지>, 김완선의 <오늘 밤> <지난 이야기> <나홀로 뜰앞에서>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작곡했다. 2021년부터 한국 현대시에 곡을 붙인 시노래를 600곡 넘게 작곡하여 유튜브를 통해 발표하였고, 2025년까지 1,000곡을 완성하여 대중음악과 시문학을 융합하려는데 힘쓰고 있다. 2027년 산울림 50주년을 기념하는 ‘산울림 50주년 프로젝트’를 주도하여 2023년 9월부터 50팀의 후배 뮤지션들과 함께 50곡의 리메이크 싱글을 발표하는 사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 맹문재 :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평론집 『시와 정치』『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
【김창훈 대표 작사 15편】
그 얼굴 그 모습
그 얼굴 그 모습
그 웃음 그 눈동자
그리워 못 잊어 울먹이는 나
하늘이 푸르러도
예쁜 꽃이 피어도
밤같이 어두운 나의 마음
그 얼굴 그 모습
그 웃음 그 눈동자
그리워 못 잊어 울먹이는 나
하늘이 푸르러도
예쁜 꽃이 피어도
밤같이 어두운 나의 마음
그 얼굴 그 모습
그 웃음 그 눈동자
그리워 못 잊어 울먹이는 나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나를 두고 떠나가면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누구 몰래 다짐했던
비밀이 있었나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이 기쁨
마음속에 핀
아름다운 이 꽃은
밤하늘에 핀 별을
잡은 기분이야
어떠한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어떠한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아
마음속에 핀
아름다운 이 꽃은
밤하늘에 핀 별을
잡은 기분이야
어떠한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어떠한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아
내 마음은 황무지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논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논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솜구름 구름
푸른 하늘을 날으는 새들 새들
그대는 저 넓은 들판을 수놓은
들판을 수놓은 어여쁜 꽃들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논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나의 마음은 솜구름 구름
푸른 하늘을 날으는 새들 새들
그대는 저 넓은 들판을 수놓은
들판을 수놓은 어여쁜 꽃들
아무도 없는 밤에
아무도 없는 밤에
창 열고 밖을 봐요
거리의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요
나는 이렇게 있는데
모두들 잠을 자네
별과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너무나 멀어요
혼자서 보내는 밤
가만히 밖을 봐요
어둠이 모두를
숨겨서 가져가요
나는 이렇게 있는데
모두들 사라지네
달과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너무나 멀어요
그대는 이미 나
구름이 한 점도 없는
푸른 하늘과 그대 마음
수줍게 피어나는
한 떨기 꽃과 그대 얼굴
가슴에 스미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은은히 밀려오는
호수의 물결과 그대 미소
춤추며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와 나의 마음
감아도 보이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구름이 한 점도 없는
푸른 하늘과 그대 마음
수줍게 피어나는
한 떨기 꽃과 그대 얼굴
가슴에 스미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은은히 밀려오는
호수의 물결과 그대 미소
춤추며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와 나의 마음
감아도 보이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예쁜 옷자락에
꽃바람 싣고
고운 머릿결엔 네 잎 크로바
하얀 새 하얀 가슴에 별 안고
오색 무지개 타고 오네
구름이 한 점도 없는
푸른 하늘과 그대 마음
수줍게 피어나는
한 떨기 꽃과 그대 얼굴
가슴에 스미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은은히 밀려오는
호수의 물결과 그대 미소
춤추며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와 나의 마음
감아도 보이는 그대는
아무 말 안 해도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이미 나
특급열차
쏜살같이 달려가는
특급열차 속에서
우연히 보았던
하얗게 팬 밀꽃 같은
아름다운 여인 해맑은 웃음소리
들 지나고 강 건너는
특급열차 속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 여인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잊혀지질 않네
우연히 만나 말없이 헤어져도
내 마음에 남았네
아름다운 여인
쏜살같이 달려가는
특급열차 속에서
우연히 보았던
하얗게 팬 밀꽃 같은
아름다운 여인 해맑은 웃음소리
들 지나고 강 건너는
특급열차 속에서
우연히 보았던
그 여인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잊혀지질 않네
우연히 만나 말없이 헤어져도
내 마음에 남았네
아름다운 여인
오솔길
안개에 쌓인 오솔길에
뽀오얀 햇살이 비칠 때
아롱진 이슬이 무지개
피어나는 길목에
추억이 떨어져 낙엽이 되어
발길에 차이네
나무 사이로 바람 불어와
흩날린 머리
그 숲속에 사랑이
하늘거리는 그녀 옷자락
이슬에 젖어
그 숲속에 사랑이
안개에 쌓인 오솔길에
뽀오얀 햇살이 비칠 때
아롱진 이슬이 무지개
피어나는 길목에
추억이 떨어져 낙엽이 되어
발길에 차이네
봄
하늘엔 꽃구름이
두둥실 떠가
땅 위엔 아지랑이
실 같이 피어올라
강아지풀 입에 물고
노랑나비 따라
닫힌 맘 활짝 열고
산 너머로 가고파
냇물에 발 담그고
새들 불러 모아
지나간 겨울 얘기
함께 나누고파
마음껏 두 팔 벌려
하늘을 마시고
저 넓은 들로
달음질을 치고파
포도밭으로 가요
어여쁜 꽃들이 피어 있는
작은 길을 지나
그대의 손목을 꼭 잡고
포도밭으로 가요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 활짝 열려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달려도 봐요
얼굴을 스치는 바람
그대 향기일까
가슴에 와닿는 바람은
꽃향기일까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포도 한 알 두 알
정겨운 얘기 오가며
알알이 영그는 사랑
어느덧 서산에 기울어
아쉬운 듯 일어나
포도밭 뒤로하고 나오면
지저귀는 새소리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내 팔엔 그대 손이
별빛 하얗게 내리면
알알이 영그는 사랑
독백
어두운 거리를 나 홀로 걷다가 밤하늘 바라보았소
어제처럼 별이 하얗게 빛나고 달도 밝은데
오늘은 그 어느 누가 태어나고 어느 누가 잠들었소
거리에 나무를 바라보아도 아무 말도 하질 않네
어둠이 개이고 아침이 오면은 눈부신 햇살이 머리를 비추고
해밝은 웃음과 활기찬 걸음이 거리를 가득 메우리
하지만 밤이 다시 찾아오면 노을 속에 뿔뿔이 흩어지고
하릴없이 이리저리 헤매다 나 홀로 되어 남으리
야윈 어깨 너머로 무슨 소리 들려 돌아다보니 아무거도 없고
차가운 바람만 얼굴을 부딪고 밤이슬 두 눈 적시네
나 혼자 눈 감는 건 두렵지 않으나 헤어짐이 헤어짐이 서러워
쓸쓸한 비라도 내리게 되면은 금방 울어 버리겠네
하얀 달
하얀 달 되어야 그대 모습 볼까
너무나 멀리 있는 그대
잡을 수 없는 곳에
그대가 있어
꿈속에 만나면 무슨 소용 있나
깨어나 허무한 것을
견디기 힘들게 외로운 것을
이렇게 금방 비워두고
어데로 가오
이삭이 피기 전에
누가 삭을 밟아요
낮지는 가을이 되고 돌아오면
서글픈 이 내 마음
어느 누가 달래요
거치른 주위를 둘러보아도
낯설은 바람뿐이요
즐거운 일이 생겨도
그대는 없소
하얀 달 되어야 그대 모습 볼까
너무나 멀리 있는 그대
잡을 수 없는 곳에
그대가 있어
꿈속에 만나면 무슨 소용 있어
깨어나 허무한 것을
견디기 힘들게 외로운 것을
이렇게 금방 비워두고
어데로 가오
이삭이 피기 전에
누가 삭을 밟아요
낮지는 가을이 되고 돌아오면
서글픈 이 내 마음
어느 누가 달래요
거치른 주위를 둘러보아도
낯설은 바람뿐이요
즐거운 일이 생겨도
그대는 없소
회상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지네
마음은 얼고
나는 그곳에 서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
마치 얼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놀라 서 있던 거지
달빛이 숨어 흐느끼고 있네
우 떠나버린 그 사람
우 생각나네
우 돌아선 그 사람
우 생각나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 건 오히려 나였어
우 떠나버린 그 사람
우 생각나네
우 돌아선 그 사람
우 생각나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 건 오히려 나였어
돌아오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어서 내게 돌아오려무나
모두 내 탓이니
돌아오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누가 네게 거기 가자 했니
섭한 마음 모두 떨쳐버리고
돌아오려무나
꽃이 피면은
아름다운데
아름다운데 네가 없구나
떠나간 사람아
이제 그만 돌아서려무나
작은 이내 얼굴 바라보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누가 네게 거기 가자 했니
어느 누가 마음 돌렸니
돌아오려무나
밤이 오면은 자야 하는데
자야 하는데 잘 수 없구나
떠나간 사람아
어서 내게 돌아오려무나
모두 내 탓이니
돌아오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누가 네게 거기 가자 했니
섭한 마음 모두 떨쳐버리고
돌아오려무나
꽃이 피면은
아름다운데
아름다운데 네가 없구나
떠나간 사람아
이제 그만 돌아서려무나
작은 이내 얼굴 바라보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누가 네게 거기 가자 했니
어느 누가 마음 돌렸니
돌아오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떠나간 사람아
어서 내게 돌아오려무나
떠나간 사람아
사랑하니까
날이 가면 가까와지겠지
조바심을 내지는 말아요
작은 마음이나 키워야지
서두르지는 말아요
언젠가는 그대 내게
마음 열을 거예요
언젠가는 그대
내 손 잡을 거예요
밤이 오면 잠을 자야겠지
괜히 마음 졸이지 말아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날이 가면 가까와지겠지
조바심을 내지는 말아요
작은 마음이나 키워야지
서두르지는 말아요
언젠가는 그대 내게
마음 열을 거예요
언젠가는 그대
내 손 잡을 거예요
밤이 오면 잠을 자야겠지
괜히 마음 졸이지 말아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날이 가면 가까와지겠지
조바심을 내지는 말아요
작은 마음이나 키워야지
서두르지는 말아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