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리고 이별의 길다란 굴레
글쓴이 : 대구 서구청 독거노인돌보미 안정숙
아직 겨울의 찬바람이 소매를 스쳐가는 어느 이른봄 오후...
전수조사에 한창인 저는 경상도 말이 아닌 낯선 서울 말씨의 어느 어르신을 만나게 됩니다.
방문을 안내하는 전화를 드렸을 때 어르신은 작고 세련된 서울말씨로 안와도 된다며, 괜찮다는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방문한 어르신 집은 여느집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방문이유를 설명하고 하나하나 카드를 작성하던중 저도 모르게 소리없는 한숨들을 내쉬었습니다. 어르신의 상황이 제 입을 떡 벌어지게 하고 말았거든요.
그 순간 자꾸만 목메인 목소리로 바뀌는 어르신의 이상한 변화에 살짝 고개를 들어 어르신을 쳐다봤을 때....어르신의 두눈은 살짝 젖어있었습니다.
애써 모른척 태연히 하나하나 지원카드를 써내려 갔지만 참으로 어르신의 형편이 힘들고 기가 막히다는걸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아들의 사업빚으로 사채업자에게 호된 협박을 당하고 할 수 없이 야반도주해 무작정 내려온 곳이 연고하나 없는 이곳...대구였답니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서울에서 먼 곳을 찾아 부산으로 가던중 대구의 야경을 보고 기차에서 내려 월세방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10여년...
10년이란 세월동안 변한건 숨어지낸 대구에서마저 지명수배자로 경찰에게 쫓기자 가족에게조차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린 아들과 연락없는 며느리...
그리고 몇 년을 밀려 빚이 되어버린 어르신의 집 월세......
다행히 좋은 집주인을 만나 겨우겨우 인정에 못이겨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막막한 앞날의 두려움은 어쩔수 없다고 암흑..그 자체라고 말하셨습니다.
또 하나..산너머 산...
심한 당뇨를 앓고 계신 어르신께는 200만원의 밀린 건강보험료도 한몫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치료도 못받고 계시다 얼마전 사촌동생의 건강보험증을 빌려 겨우 약처방만 받으시고 계시다 했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란걸 알면서도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하십니다.
사채업자가 쫓아오는게 무서워 주소도 제대로 못두고, 만65세가 훨씬 넘었는데도 노령연금조차 수령하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사촌동생이 보내준 얼마의 돈으로 겨우 생활하시며 두문불출하며 하루를 겨우겨우 보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의 이 눈물의 의미는 이 모든 형편때문도 아니고, 주민등록 말소까지 된 자식때문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디 얘기조차 할 수 없이 혼자 보낸 세월이 서러워서라 하셨습니다.
그리곤 참았던 눈물을 막을새도, 닦을새도 없이 주루룩 흘려 버리셨습니다.
제 눈가조차 촉촉히 젖어오는걸 애써 감추려 고개를 숙여 버렸습니다.
이분은 힘없는 노약자이십니다.
이제는 어느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호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행복은 누릴 수 있는
아니 꼭 누려야하는 노인이십니다.
하지만 한끼의 식사와 하루밤을 걱정해야 하는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시는 집안의 노숙자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사연의 주인공 이시기도 하시구요.
눈물섞인 사연들의 어르신을 잊지 못하고 지낸 얼마후...
어르신은 노인돌봄기본서비스 대상자로 선정되셨고, 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긴 한숨한번 쉬고 무얼 어떻게 먼저 해 드려야하나 고민고민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우선 급한건 국가로부터 경제적도움을 받는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주소지를 옮기고 주민센터에서 기초생활 수급자 혜택을 받고자 방문을 권해 드렸으나 항상 됐다고...거절을 하셨습니다.
괜히 자존심을 상하게 했나 걱정을 했는데 그 자존심조차도 버리게 만드는 생활고 앞에서도
여전히 사채업자의 보복이 두려워 무척이나 망설이고 계셨습니다.
계속된 저의 설득에 힘들게 찾아온 주민센터에서 어르신은 저와의 첫 만남때처럼 또다시 눈물 주머니를 풀어 놓으셨습니다. 아마 북받쳐온 설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어렵게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면서 커다란 하나의 숙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에 노출이 되어서인지 어르신은 그때부터 더 심하게 사채업자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뀐 주소지로 날아오는 신용정보의 가압류서류들, 체납세금고지서 등.....
누가 볼까 몰래몰래 우편함을 뒤져 찾아낸 반갑지 않은 우편물 때문에 어르신은 늘 불안에 싸여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수급비도 가압류될까 걱정에 잠조차 못주무시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소액의 생계비는 압류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말씀드리고 날아온 불청객들은 신경쓰지 마시라 언제나 방문때마다 안심을 시켜 드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얼마뒤부턴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어르신의 일상생활에 어느정도 정착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처럼 우편물에 민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우편물은 우편물로 받아 방안 구석에 있는 작은 상자에 모아둘 뿐이었습니다.
소식 끊긴 아들을 마냥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안정을 찾는 어르신께서 저에게 조금씩 의지를 하시며 밝아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편하게 말씀하시고, 어르신의 일상을 하나하나 잘도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과 저는 정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2년여를 함께 지내며 아침마다 나눈 대화들로 어느새 편안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렸지요.
엄마와 딸의 대화처럼 편안하고 숨김없는 보통의 대화들만 오고 가는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이 깊이 든 어느날 ...
어르신께서 걱정섞인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애기엄마가 다른동네로 가면 어떡하지?’
뭔가를 직감한 듯 전화기너머 어르신의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습니다.
근무지 이동을 얼마 앞둔 저였기에 저 또한 그 말씀에 잠깐동안 할말을 잃었습니다.
어르신 역시 저와 보낸 시간동안 이 같은 걱정을 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르신이 서운한 만큼 저 또한 막막함에 싸여 젤 먼저 어르신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럴리 있겠냐고....걱정하지 마시라고 어르신을 안심시켰지만...
제 마음은 안심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 후...어르신과 저의 걱정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2010년 연말.....다른 동네로 근무이동을 하는 사실을 알릴 시간....
감히 어르신 얼굴을 보면서는 도저히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벼르고 별러 전화통화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르신은 예상이라도 한 듯 받아들이셨지만 목소리만은 평소답지가 않으셨습니다.
어르신을 처음 만나 힘든 생활을 얘기하며 울먹이시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으니까요...
말을 이을수도 없는 얼마의 적막이 흐른후 어르신의 한마디...
“잘 됐네.....근데 자주 못봐 어떡해~~~~~”
겨우 목소리를 추슬러 한마디 해주신게 전부였습니다.
어르신도 저도 그 서운함과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르신과 저는 가깝지만 먼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전화해~~”하시는 어르신의 당부가 있었지만 얼마간은 안부전화 한통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하는 전화지만....수화기만 잡으면 손가락이 저절로 눌러지는 전화번호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면 자꾸만 주책스런 눈물이 날까봐........
다잡았던 어르신마음을 뒤흔들어 놓을까봐 .....
감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어르신도, 저도 이제는 현실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었을 때 한통의 안부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낯선 번호에 잠깐 당황해 하시더니 금새 목소리를 알아들으시곤 반색을 하셨습니다.
힘드실까봐...혼란스러우실까봐...미루고 미뤘던 전화였는데....
어르신은 그 전화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셨다 합니다.
그때..전 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걱정하며, 한번쯤은 연락하겠단 용기를 놓쳤던 저만 생각했었지. 다시 만날 설레임을 가진 어르신의 작은 기다림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저였다는것을요......
어떻게 지내는지...잘 지내는지...몸은 괜찮은지...아이들은 잘 크는지...일은 힘들지 않는지...
물어볼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바쁠까봐, 불편할까봐 전화한통 못하셨다 합니다.
순간..어르신의 크나큰 배려에 저 또한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가슴속 깊이 새겨둔 어르신의 사랑 때문에 저와 어르신은 긴 이별로 끝날뻔 했던 두사람의 인연을 마음으로 연결해 주는 든든한 끈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지금껏 한번 놀러 가겠다는 약속 한번 지키질 못했지만 말 안해도 언제나 든든하게 제 뒤에 계실거란걸 알기에 제 마음은 오늘도 흐뭇합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우리 어르신의 마음에 제가 들어가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하고,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저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하고, 말 안 해도 통하는 신통방통이 좋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안부전화를 드릴때면 어느때나 반갑고, 어느때나 제 걱정을 먼저 하십니다.
언제부턴가 세상밖으로의 외출에 당당해지고 자연스러워진 어르신의 모습에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긴 외톨이 생활에 힘들어 하셨지만 작은 용기로 이제는 완전한 홀로서기를 하십니다.
이제는 손자,손녀를 만나러 학교앞도 찾아가시고, 건강이 안좋은 며느리를 찾아가 위로도 하실 만큼 마음의 여유도 가지셨습니다.
이제 하나........그냥 건강하시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좋은날, 기쁜날만 있을테니 말입니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살짝살짝 뒷꿈치를 들어올리면 어르신의 모습이 보일것같은 마음입니다.
어르신!!!
정말...이 가을이 가기전에 제가 꼭 한번 찾아 뵐께요.....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나겠지만 한없는 그리움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뵐때까지 건강하세요.....
2011년 가을 어르신을 향한 제 마음입니다.
첫댓글 세상에는 소리없이 좋은일 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시는 모든분들께 박수를 보내며
이사연속의 할머님의 건강과 안정된 생활을 간절히 바래 봅니다.
두분의 아름다운 인연이 영원하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