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보일러를 켜고 잠들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너무나 길어 지나온 시간들이 숨 막히는 더위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비가 온 뒤 나뭇가지에는 어느덧 붉은 기운이 감돌고 시간은 한결 더 깊어져 억새의 날개를 더 하얗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8월의 행사에 보내 주신 뜨거운 성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이제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언덕, 9월은 결실을 위한 준비의 달입니다.
제 7 회째 맞이하는 따스한 만남 행사는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재출간한 시집 <항일민족시집>의 출간 기념회와 아울러 자유, 평화를 주제로 하여 행사를 갖습니다.
자유 평화를 소재로 노래한 시인 김석주, 김재홍, 오원량, 성수자, 김광자, 주순보, 전다희의 작품을 독자들이 낭독하는 순서를 갖습니다. 이와 함께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71년 민족학교가 편집하고 사상사에서 출간한 신채호, 안중근, 안창호, 이범석, 심훈, 신돌석, 이육사, 한용운, 김좌진, 윤동주 등 애국자들의 항일 시를 모은 시집으로 최근에 재 발간된 시집 『항일민족시집』에 대한 출간기념회와 더불어 그 시집의 의미와 정신을 되새겨 보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동안 따스한 만남의 자리에서 독자 시 낭독에 참여해준 분들의 낭독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가꾸는데 보탬이 되었을 줄 믿습니다. 저희 <따스한 만남>은 시를 사랑하는 독자와 부산 시인들이 생산하는 좋은 시와 함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 일시/ 2005. 9. 27 (화) 늦은 7시
• 장소/ 영광도서 4층 사랑방
• 프로그램
<열기> 사회 강영환
<독자 시 낭독 ․ 1> 김석주, 성수자, 오원량, 주순보, 김재홍, 전다희, 김광자 시인의 시
<음악과 함께> 실내악연주/ 을숙도교향악단 단원 실내악팀
<항일시집의 의의> 김희로 / 남송우(문학평론가, 부경대 교수)
<독자 시 낭독 ‧ 2> 안중근,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김좌진, 이범석, 심훈의 시
<독자와의 대화>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일민족시집
안 중 근/ 이 육 사/ 윤 동 주/ 한 용 운/ 심 훈
/충절가 3편
안 중 근
思君千里 以表寸誠
望眼欲穿 幸勿負情
나라를 걱정하며 천리밖에 나와
당신을 향해 바라보니 눈이 뚫어질 것 같으오
나의 이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나 이정을 버리지 마소서
五老奉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日出露消兮 正合運理
日盈必○兮 不覺其兆
해가 뜨면 이슬이 사라지나니
천지의 이치에 부합되도다.
해가차면 반드시 기우니
그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도다
/꽃
이 육 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길
윤 동 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 용 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 개골은 끼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이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독자와 함께하는 시
김 석 주
성 수 자
오 원 량
주 순 보
김 재 홍
김 다 희
김 광 자
/일본에 고함 6
김 석 주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들의 저 명산의 명당마다
너희들이 박아놓고 간 몸서리치는
쇠몽둥이를 뽑아내며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너희들의 잔학상을
근로대, 돈벌이가 잘된다는 달콤한 말에 속아
영영 불귀의 몸이 되고만 꽃다운 선남선녀들과
교회에서 기도하다 떼죽음을 당하고
보국대란 명목아래
개처럼 끌려간 내 형제와 이웃사촌들
그들의 통곡소리 그치지 않는
오, 산하여 바다여 구천의 하늘이여
알몸을 만들어
영하 30도의 유리병 속에 처넣었다
동상사를 시켜 끌어내 놓고는
비수로 찔러보고 살을 빚어 요리조리 잘라보고
배를 갈라 뒤져보고 찔러보는
아- 너무나도 몸서리치는 생체 실험
그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원혼들이
세월이 흘렀다고 어찌 눈을 감을 수가 있고
어찌 그냥 용서 할 수 있으며
어찌 무사 할 수 있으리
두 눈을 부릅뜨고서 시퍼런 하늘이
날마다 저렇게 노려보고 있는데도
요리조리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는 그대 일본
끝내 오리발만 내민다면
약력/ 김석주 시인은 86년 시의 길 1집으로 등단. 시집 『조선고추』,『아버지와 꿈』 외 3권
/허방다리골
성 수 자
달이 건넌다는 지리산 허공달골
허공에 걸린 달도 다리가 필요할까
허공다리골에서 달은 찾아도
길은 찾지 못해 허방을 짚고 헤매었네
마음의 오지를 찾아 떠난 그 곳
골 깊은 계곡 바위마다
달빛만 받아먹은 파란이끼의 나들이
달에게도 가끔은 쉴 곳이 필요하리라
아득한 허공에서 해드라이트로 허공달골 점 찍어두고
가끔씩 찾아와 머물다 가는 곳
마음 열어 두고 한 숨 쉬는 곳
비까지 뿌리는 그 계곡을 빠져나오니
환한 낮인데도 달이 걸려 있었네
/가을빛 속으로
성 수 자
옥빛 유리관 속에서
뜸 들여 발효된 언어들이
투명한 꼬리를 달고
한없이 쏟아진다
산마루에 고개 얹고
물감 푸는 미루나무 행렬
저 산의 혼들이 오솔길 내어놓고
가는 길 언저리마다 무리지어 손 흔드는
그대 몫의 가을 꽃 피워 놓았네
심장까지 튼튼한 내 몫의 자유를 다오
습기말린 가슴 펴고
나는 빠져 나가야 하리
가을빛 속으로
약력/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시인회의회원, 시집『안개 밭에서』,『잎맥처럼 선명한』
/핵
-무기의 반론
오 원 량
멀리 바라본다
복사꽃 군락을 이룬 파아란 하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촉촉한 미소로 새롭게 일어서는
넓고 넓은 지상 낙원
거기 꿈을 키우며 하나 둘 제 몫의 탑을 세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빌딩 속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이제 하나
만발의 웃음소리 한데 어울려 축배를 든다
돌아온 안식일
은은하게 퍼지는 예배당 종소리
종소리 따라 아득히 날아가는 새
새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모든 것이 희망이라 부르고 싶은 평화스런 세상
가끔씩 소리 없이 안개 덥혀도 세상은 더욱 그윽한 풍경으로 다가오고
꼭 한번 뜨겁게 사랑하고 싶은 이 황홀한 지구
가슴 깊숙이 앙금져 있는 미움 때문에 복수의 날(刃)을 세우는
한 야심 많은 영웅으로 인해 자폭하고 싶진 않아
약력/ 89년 월간 동양문학으로 시작활동, <갈매시> 동인으로 활동
/지워지지 않는 멍에
-정신대 문필기 할머니의 증언
오 원 량
긴 머리 단발머리로 강제로 잘린 채
건너온 적의 나라는 내 평생의 형무소
위안소에서의 내 이름은 미요코
‘미짱’이라고도 불렀지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나의 방은
왜 그렇게도 처절한 전쟁터였을까
낮에는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밤에는 끝없이 쳐들어오는
적보다 무서운 일본군의들
남들이 쉬는 일요일은 지옥 속의 지옥
일본에 충성하라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군가를 부르고
아침부터 닥치는 일본인 군인에 치를 떨고-
펑펑 울고 싶은 시간도 없는 끝없는 하루
삿쿠(콘돔)로 어지럽게 널려있는
혼돈의 세월 30년이
세월이 흘러도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내 앞을 딱 가로막고 있구나
/대마도 기행
주 순 보
덕혜옹주의 결혼 축하 비는
늙은 바람 속에서 는개를 맞으며
고독의 마지막 계단에 서 있었네
나는 기쁨과 슬픔의 갈래 길에서
현해탄 파도 위에 눈물 뿌리다가
눈물의 현해탄을 건넜네
세종대왕의 생채기로 돋아난 대마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 떼와
조선통신사의 행렬
그 위용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네
약력/ 1998년 월간 한국시로 등단. 부산문인협회, 시인협회회원. 시집 ;꽃씨는 겨울을 생각한다. 2005년 제12회 전국예술인대회 시 부문 최우수. 데리줄 동인
/안동 지례 예술촌 가는 길에
주 순 보
비포장도로가 하루를 끓어 당긴다
노을빛에 감겨든 산허리를 붙들고 선
흙먼지 속의 덜컹거리는 버스 안
막걸리 같은 사투리가 나를 먼저 반긴다
마을 모두를 삼키고도 할 말이 남은
임하댐 푸른 물은 연신 실죽거리고
가슴까지 수몰된 정수어미의 못 다한 말
아귀귀신이 되어 살아있다
고향은 임하댐에 수장된 채
그 뿌리는 지례 예술촌으로 다시 태어나
가지를 뻗어 잎을 키웠다
가끔은 복어의 농간처럼 아가미와 피와
알의 변수에 발목 잡혀 살아가도
나 오늘 여기 날지 못하는 한 마리 후조되어
깊은 강둑을 서성이며 낙곡을 쪼고 있다
/백색가루를 털면서
김 재 홍
어렸던 그 해 여름
숨죽인 발자국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팔을 걷어부쳤다
질펀한 시대를 향해
우리들이 걸어왔던 길 야물게 부숴다
아픔만큼 던졌다
한 군인을 지키는 초병들이 쏘아대는
세상에 아예 눈뜨지 말라 하는 백색가루들
멍든 가슴으로 울다가
살갗으로 조여오는 매운 공포에 놀라
나는 꿈꾸었다
한 발 짝 깊숙이 뒤로 물러나듯이
저들처럼 푸른 제복으로
도서관의 말없는 책들 속으로
차라리 고즈넉한 회색 빛 가사(袈裟)속으로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또 다른 백색가루를 오늘도 교단에서 털며
나는 꿈꾼다
빛나는 저 아이들의 눈망울
제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시는 눈물 같은 가루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그 날들을 위해
약력/ 69년 경남 마산 생, 03년 계간 <시의 나라> 신인상, 시집 <가야산 호랑이>
부산 작가회의 회원, 부산시인협회(사무차장),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교사
/녹슬지 못한 상처
김 다 희
강산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 놓은
세월이
힘없이 늘어진 아버지의 어깨위에 매달린다
주름 속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함성이
피울음이
늙은 아버지의 젖은 눈망울 속에서
되살아난다
민족의 가슴에 박혀있는 한 맺힌 탄흔들이
녹슨 세월 속에서
녹슬지 못하는 이유를
강산은 아는가
아버지의 가슴팍에 깊이 박혀
뽑을 수 없는 그 상처를
저 푸른 하늘은 알고 있는가
약력/ 부산시협회원, 부산수필문학협회 편집장, 계간 <문학도시> 편집차장 역임, 시의 날 한글백일장, 아랑 전국백일장 장원 외 다수 수상, 현 미술학원 운영, 대학원 재학 중
/기관장 수첩
김 광 자
기관장 수첩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바다는 없었을 걸
바다가 없다면
기관장 수첩도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 걸
소화昭和 15년 2월 재在 발행된 기관장 수첩
육십 육년 넘어 온 세월을 풀어 놓는다
주인을 떠나보내고 홀로서서 뱃길을 누비던
한 생애를 주술처럼 들려준다
난파선에서 용케 살아난 낡은 기적을 울리며
수만 마일, 수억만... 마일의 군도 群島를
침략 당한 아픔을 품고 태평양 전쟁에서
폭격으로 배는 난파되고
스크루에 발가락이 잘려 나간 사연을 푼다
못내 발가락을 찾지 못해 바다에 떠도는
영혼을 쫓아 소금물 배인 수첩은 아직도 잉크빛
스크루에 떨어져나간 발가락을 잃고
십사일 동안 태평양 바다를 표류하던
해양, 기관장 수첩과 아버지
스크루에 잘려나간 발가락 바다를 말한다.
* 스크루: 추진기(screw propeller 나선 추진기),
* 기관장 수첩 : 한국해양대학교 박물관에 기증.
* 약력/ 월간문학 등단, 한국시협중앙위원, 해양문학가협회이사, 해운대문인회 회장, 시집으로 『박하향 雪徑』, 『해운대 아리랑』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