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1997. 12. 22일자 문화특집
표해록 연재를 마치며/전문가 좌담
"표해록은 문화,역사,정신사의 입체적 기록"
참석자: 고병익(高柄翊)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유영구(兪榮九) 명지학원 이사장
조영록(曺永祿) 동국대 사학과 교수
기행문학의 백미(白眉)이자 중국 명시대 역사와 사회상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최부의 표해록 시리즈가 지난 주 14회로 끝났다.
시리즈는 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사료적, 문학적, 정신사적 가치가 큰 표해록을 일반에 널리 알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자는 취지로 기획했다.
연재를 마치면서 학계의 권위자를 모시고 표해록의 의미를 짚어보는 한편 우리의 고전을 오늘에 되살리는 방안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에는 고병익(高柄翊)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조영록(曺永祿)동국대 교수, 유영구(兪榮九)명지학원 이사장을 초청했다.
고병익=
최부의 표해록은 희귀한 문헌자료인 동시에 흔치 않는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표해록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미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일보가 시리즈로 내보낸 최부의 명나라 표류기 표해록은 독자에게 그 내용과 가치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기술방법과 틀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조영록=
맞습니다.
바다를 표류하다 중국에 표착한 최부일행의 행적을 따르되 현재의 모습을 기행형식으로 다루고 표해록의 본문을 번역해 기사에 반영한 것은 시리즈를 딱딱하지 않게,그러면서도 표해록의 본질적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전달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유영구=
대중성을 지향하는 신문매체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표해록을 연재키로 결정한데서 한국일보의 높은 문화의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표해록은 고병익 박사님이 64년에 학계에서 처음으로「성종조 최부의 표류와 표해록」을 주제로 쓰신 논문을 통해 그 존재와
가치가 국내외에 처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표해록은 일반 국민 사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채 묻혀 있었습니다.
고=
한국일보는 매 토픽을 정해 해설과 기고문 등을 싣고 현지 사진까지 곁들이는 기획으로 시리즈의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표해록을 쉽고 풍부하게 설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조=
표해록은 최부일행이 닝보(寧波)에 도착한 뒤 중국 남부지방에서 베이징, 그리고 베이징에서 다시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루트는 전에 한국일보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최부선생의 후손과 함께 한 답사를 정리한 것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해 부분적인 답사에 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표해록을 연재하면서 대표집필을 맡았던 박태근(朴泰根·관동대 객원교수)선생은 중국 남부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답사를 했습니다.
현장을 누빈 답사가 시리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고 봅니다.
특히 존 메스킬 전 컬럼비아대 교수,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전 쿄토대 교수, 양퉁파(楊通方), 거쩐자(葛振家) 베이징대 교수 등 각국의 석학들이 연구결과와 논문, 기고문을 보내와 시리즈를 더욱 알차게 만들었습니다.
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표해록 관련 자료를 한군데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시리즈 성과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는 표해록 원본(1488년 발행),북한에서 출판된 기행문집 1(88년), 마키다 다이료 교수의 사쿠겐(策彦)입명기 연구(59년), 존 매스킬 교수의 최부 표해록 역주(64년), 고병익 박사의 성종조 최부의 표류와 표해록(64년), 거쩐자 교수의 표해록(92년) 등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출판된「기행문집 1」은 모두 400쪽 분량인데 이 중 300 쪽을 최부의 표해록에 할애하고 있어 북한학계도 표해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
수집된 자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중요합니다.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북한에서 펴낸「기행문집 1」등 일부자료는 완역이 아닌 초역이어서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보완할 부분이 많습니다.
유=
명지학원은 95년 부터 외국에서 출판된 한국고전 수집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상당한 성과를 거둬 세계 유일본 몇 점을 비롯해 7,000건의 문헌을 수집했습니다.
최근에는 역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진 한국 고전을 모으는 운동도 전개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부의 표해록 이야말로 외국에 알려진 한국고전의 백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조=
우리 선조의 여행기는 숫자상으로는 많으나 중국, 일본에 대한 여행에 집중돼 있습니다.
또 대부분 사행(使行)등 공식적 나들이의 기록이기 때문에 경로나 보고 들은 견문, 경험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수량에 비해 다양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미흡한 편입니다.
고=
그러나 표해록은 다릅니다.
표해록은 여행의 경위나 사건의 진행자체가 독특할 뿐 아니라 유식한 문장가가 정성껏 기록해 대단히 흥미롭고 사료적 가치도 뛰어납니다.
물론 신라의 스님 혜초의「왕오천축국전」처럼 중국, 일본 등 흔한 경로를 벗어난 기록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거의 전인미답에 가까운 중국의 남부 지역을 좋은 문장으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돼야 합니다.
또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표해록은 문학작품 이면서 역사기록인 동시에 정신사에 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자세와 몸가짐,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정신사적 관심에서도 의미가 깊습니다.
물론 그 정신의 요체는 유학입니다.
조=
정신사적 측면에서 표해록에 나타난 최부의 행동을 관찰해 보는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근세들어 동양 3국은 유교시대로 접어 들었고 최부가 표착했을 당시 중국(明)도 유교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유교국가는 역시 조선이었습니다.
최부가 표해록에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유교를 강조 했다는 일부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부의 중국에 대한 관찰은 비판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유교국가라고는 하지만 도교와 불교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전형적 유교국가 조선의 사대부로서 이같은 중국은 비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환관정치의 폐해가 심했던 명나라는 조선의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가 볼 때 유교 후진국이었고 혼탁한 사회였던 것입니다.
유=
좀 다른 이야기는 하지만 표해록의 현재적 의미와 교훈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연이겠지만 표해록 시리즈가 연재되는 기간 중 우리나라 국정도 심하게 표류하고 있습니다.
귀향에 성공하고 모든 일행을 구출하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지혜를 표해록의 최부로부터 얻는다면
오늘의 위기를 이겨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
표해록에서 볻바로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느슨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놀라움과 실망을 느낀다고 합시다.
반대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유럽의 사회주의를 보고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고 합시다.
최부가 중국에서 느낀 갈등과 실망은 주의, 주장은 다르지만 이들이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지만 최부는 조선의 선비이고 철저한 이데올로그였습니다.
행동 사상 논리 모두에 유학이라는 잣대가 작용했습니다.
고=
물론 최부는 포로와 같은 입장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부는 상중이라는 이유로 중국의 황제, 홍치를 알현했을 때, 중국 관리들을 만날 때, 해적을 만났을 때 상복을 벗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같은 점이 표해록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정신사적 산물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표해록에는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이 살아 넘치고 있습니다.
조=
중국에서 최부의 행동을 일본학자들은 어덯게 평가했을까요.
에도시대 학지 기오다 궁킨(淸田君錦역)이 당토행정기를(唐土行程記·1769년 발행)라는 제목으로 표해록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이 출간된지 300여년 뒤에 번역한 책입니다.
최부는 베이징 우먼(午門)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상복을 입을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충신은 효자의 몸에서 나니 충보다 효가 앞선다"고 설파했습니다.
이들은 최부의 행동이 거짓이나 위선은 아니지만 적절치 못한 대응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조선학자들의 효에 관한 의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고=
또 최부에게는 중국 남부지역이 전혀 새로운 곳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이미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일본은 중국에 10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쳤는데 조공을 바치는 길이 최부의 행로와 일치했습니다.
또 일본은 중국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등 접촉이 많아 이미 이 지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같은 차이는 일본과 한국의 중국 남부지역에 대한 기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일본의 경우 최부가 표해록을 집필한 지 50여년 뒤 사쿠겐( 彦)이란 승려가 중국 남부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그러나 기록방식이나 관심대상이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부는 유교 등 정신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사쿠겐의 기록들은 주로 중국의 도서자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
두 분 말씀을 종합해볼 때 최부의 표해록을 동아시아 각국의 관점에서 비교사적으로 연구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
동아시아 각국의 표해록에 관한 연구현황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학계는 근대사학의 방법론을 도입, 최부의 표해록을 세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후속 연구가 부진한 상태입니다.
몇 편의 논문과 최부 후손인 최기홍(崔基泓)씨의 세차례에 걸친 번역작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의 각종 문헌, 지지(地誌)와 표해록을 치밀하게 비교, 검토해 표해록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조=
반면 일본은 자국의 중국여행기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표해록을 비교사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미국은 제3국인의 중국여행기를 자국민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
민족문화추진회는 청소년, 아동용으로 최부의 표해록을 펴낸 바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직역방식을 탈피하되 정확히 내용을 전달하는 표해록 해설서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
일부학자들, 특히 중국의 거쩐자 교수는 세계3대 여행기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최부의 표해록을 들고, 이 중 표해록이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95년 6월 중국 베이징대에서 열린「최부표해록연구출판기념 학술좌담회」에서는 이같은 주장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검증되기도 했습니다.
조=
그런데도 막상 우리나라에는 표해록이 알려 있지 않고 나머지 두 작품은 널리 알려진 상태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표해록에 대해 대중적이면서도 학술적인 조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조금씩 손을 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처녀성, 신비성만 없어지니 일반인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유=
명지학원은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 한국 독자들이 읽기 편하고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표해록을 펴낼 예정입니다.
고=
명실록이나 중국의 지방 기록 등에서 최부에 관한 기록을 찾는 작업도 앞으로 학계가 해야 할 일입니다.
명실록은 자세한 기록이 아니어서 최부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지방 관헌이나 문필가 남긴 기록에는 최부의 자취가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