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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양승목·양정산악회 회원>
여자의 몸으로 젊은 시절의 山 열정을 중년의 나이까지 끌고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정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야 하는 주부에게는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연희씨(李燕姬·48)는 마흔 넘어 다시 산을 찾은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무릇 남자 산악인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위해 젊은 날 산을 떠났듯이 그녀에게도 공백기가 있었다. 86년 26살 나이에 전국암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88년 결혼 직후 한국 최초의 여성 해외원정대 대원으로서 북미 최고봉 매킨리 정상을 밟은 그녀는 이후 10여 년간 가족과 또 자신의 또 다른 꿈을 가꾸기 위해 산을 접었다.
86년 전국암벽대회에서 우승 차지
산은 그녀를 속세에 그냥 머물게 놔두지 않고 품 안으로 불러들였다. 열정은 한층 더 뜨거워졌다. 엄마 품을 떠난 10여년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다. 산은 그녀가 응석을 부리는 대로 다 받아주고 달래는 것을 다 주었다. 산은 그녀에게 고향이자 엄마였다. 이렇게 그녀 자신이 젊은 날과 중년의 나이에 겪은 산 얘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엄마의 산>이 그 책이다.
“오랫동안 등반을 쉬다가 다시 돌아온 내가 책을 내게 된 것은 나의 산사랑 그리고 산에서 얻은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예요. 30년간 써온 일기를 토대로 과거의 등반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했어요. 책제목처럼 아이들에게 엄마의 산을 알려주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산에만 가면 엄마의 품에 폭 안긴 것처럼 포근했어요. 엄마 같은 산이란 의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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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산이 현재와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젊은 날 산에 빠져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산을 찾은 것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80년 5월, 당시 시골 분위기가 남아 있던 송파구 거여동의 꽃집 맏딸이던 그녀는 조용히 앉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도봉산행의 기회가 왔다. 여자친구를 기웃대던 핸섬보이는 느닷없이 도봉산 산행을 원했다.
“그 핸섬보이는 도봉산을 무대로 암벽등반을 하는 월계수산악회 회원이었는데, 기회가 되면 산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사두었던 클레터슈즈를 신고 갔어요. 그랬더니 월계수산악회 회원들이 ‘쟤는 클레터도 신었네’ 하면서 느닷없이 바위를 하자고 하는 거예요. 친구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지만 저는 해보겠다고 했죠.”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간 곳이 선인봉 허리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바위에 첫발을 디딜 때 찾는 코스 중 하나지만, 수직의 벽에서 로프를 붙잡고 반동을 주어 한참 떨어진 지점까지 뛰어가야 하는 펜듈럼을 하고, 레이백 크랙을 오를 때면 고도감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아찔한 기억을 남기는 루트다.
“그래도 앞서 절절매며 올라간 대학산악부 새내기보다 잘 해야겠다 다짐했어요. 펜듈럼은 그런 대로 했는데 레이백 크랙을 오르는데 매듭이 잘못 되었다 하여 원위치했다가 테라스에 올라서니까 다리가 통나무처럼 빳빳해져 있더군요. 태어나서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모르고 지냈던 제3의 세상이 있구나 싶었으니까요. 그 다음주 모임에 나가니까, ‘와, 정말 왔다’ 하면서 선배들이 합창을 하는 거예요. 허리길 등반에 질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모습을 보이니까 모두들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던 거죠.”
이연희씨의 산은 이렇게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열심히 다녔다. 대중목욕탕에 들어서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어린이집 교사를 했어요. 그러다 산에 다니면서 고압가스 냉동기술을 배웠어요. 시간이 많이 나는 특수업종이란 이유 때문이었죠. 쉬는 시간이 많아 산에 더 자주 갈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이론 시험은 패스했는데, 아쉽게도 실기에서는 떨어졌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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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인봉 허리길 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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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남자들은 같은 크럭스를 만나도 순탄하게 오르곤 했다. 어느 날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 회원들은 홀드를 잡아당기는 순간 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힘이었다. 그 날 하산길에 악력기와 15kg 무게의 바벨도 샀다. 그리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한산성을 뛰어 오르내리고, 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 2단 줄넘기 등으로 이어지는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다졌다. 출퇴근 버스 안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 손은 한두 마디로 손잡이를 잡고 버티면서 다른 한 손으론 악력기를 쥐었다 폈다 했다.
“어렸을 적에 묘목을 넘어다닌 적이 있어요. 매일 매일 그렇게 하다 보면 나무가 아무리 크게 자라더라도 넘을 수 있으리라는 어린 마음에서였죠. 아무튼 그렇게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하다보니까 멍도 덜 들고 산에 가면 날아다니듯 몸이 가벼워졌어요.”
월계수산악회 선배들은 보수적이었다. 때문에 신형 장비를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선배들이 산에 제대로 못 나오고, 동기들은 군복무로 산을 못 다니게 되자 빤빤이 암벽화며 초크 같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었고, 기량은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클라이밍을 하는 회원들이 한 명씩 줄어들면서 파트너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졌고, 외로움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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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월계수산악회 운길산 산제를 마치고 선후배 회원들과 말타기 시합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맨 우측).(우)매킨리 등반중 빙하크림을 바르고. 88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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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자유등반 붐이 일던 당시 도봉산 선인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산악회들의 대표급들로 구성된 산당회 회원들이 그나마 어울릴 수 있는 클라이머들이었으나, 이들은 여자에게는 회원 자격을 줄 수 없다며 준회원 취급을 했다. 그래도 좋았다. 하루에 기본 세 코스였다.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즈음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클라이머들과 어울리다보니 스피디해지고, 기량도 한층 나아졌다.
그렇게 등반기량이 일취월장한 이연희씨는 86년 북한산 인수봉 하늘길과 코끼리크랙에서 열린 전국암벽대회에서 여자부 우승을 차지, 산악계의 이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거의 선인만 다녔어요. 그러다 대회를 치르고 나니까 도봉에서 센 여자가 왔다는 소문이 인수파 사이에서 퍼졌어요. 물론 그러다 말았지만요.”
86년 여성산악인들은 조용히 모임을 가졌다. 남자들의 등에 가려 지내지 말고 여자들끼리 등반도 하고, 히말라야 원정도 나가자는 게 목적이었다. 첫 번째로 성사된 해외원정이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원정이었다. 그 등반에서 이연희씨는 선배인 김은숙, 후배인 지현옥씨(99년 사망)와 함께 한국 여성 최초의 매킨리 등정에 성공한다.
“매킨리 원정 가기 전해 가을에 산악회 동기와 결혼했어요. 그래서 매킨리 원정을 계획해놓고도 다른 대원들은 합숙훈련을 하는데 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제대로 훈련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훈련량이 부족해 등반 도중 엄청 고생했어요. 60kg이나 나가는 배낭과 썰매를 올리자니 좀 힘들었겠어요, 코피를 쏟고, 고소증에 헤매고…. 그때 쓴 등반기를 보면 하루하루 ‘오늘도 죽을 지경이었다’로 시작되었으니까요. 다행히 정상에 오르는 날 컨디션이 좋아졌던 거죠.”
첫댓글 제게는 여러가지로 공감이 많이 가는 글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픈 것 하면서 살려면 현재 상황이 허락 되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다시 산에 다닐 수 있다는것 만으로도 정말 행복한거지요? 더군다나 내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용기 백배 얻을수 있는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