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후기)의 여권은 기호(경기/호남)지방의 서인이라고?
그럼 DJ집권이 왕건이후의 첫 권력교체라는 논리는 틀린말?
아는분의 글에서 그해답을 찾아봅시다!
<다음은 지인의 글에서 퍼온글임>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이 당을 나가 친박연대를 구성하더니,
남은 세력도 ‘형님계’와 ‘재오계’가 사생결단을 벌리면서 복잡한 합종연형이 일어난다.
이제 조선 시대 붕당(朋黨)을 생각하며 몇 자 써 본다.
사림파(士林派)
조선 왕조 개창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대립이 시작 된다.
훈구파(勳舊派)는 요즈음 말로 하면 기득권 세력이요,
사림파(士林派) 란 도전세력으로 재야에서 학문을 닦아 커온
신진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그렇다고 하여 훈구파(勳舊派)가 성리학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개국의 이념적 기반이 주자학(朱子學)인 만큼, 조선조 사대부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주자학자(朱子學者)-성리학자 (性理學者) 였다.
다만 훈구파(勳舊派)는 정권을 담당자로서 실용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사림파(士林派)는 보다 도전세력으로 이상적 성향이 강했던 것 뿐이다.
기득권의 벽은 높고도 두터워, 훈구파에게 사림파는
참혹하게 그것도 거듭해서 당한 것이 4대사화(士禍)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사림파 선비들은 이런 상황에서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였으니,
퇴계(退溪)가 벼슬을 멀리 하고 명종(明宗)의 거듭된 부름도 사양한 것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 사후 명종(明宗) 친정(親政)할 때
사림파의 숨통이 트이다가, 다음 대 선조는 먼 촌수 양자로 들어가
임금이 되니 정통성(正統性)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이 있었는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다.
선조 대왕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어 오늘 우리는 이 시기를 밝게
기억하지 않지만, 조선 선비들은 목릉의 성세 (穆陵盛世)로 불렀다.
이렇게 사림파(士林派)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 같더니
동인 서인으로 바로 갈라 선다.
동인(東人) 서인(西人)
동인(東人) 서인(西人)의 출현과정에 대하여는 교과서에도 설명이 나오니
다들 잘 알 것이다. 성향을 보면 동인(東人)은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조식
(曺植: 1501-1572), 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문인(門人) 연합체
비슷했고, 서인(西人)은 기득권 출신을 중심으로 하다가 나중 이론적 지주를
율곡(栗谷 1536-1584)이 맡게 된다.
동서 분열 직후 일시 서인이 우세하여, 1589년 전주 일대를 역향(逆鄕)으로
몰아 넣은 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 사건) 당시 서인 송강(松江) 정철이
위관(委官) 을 맡아, 동인(東人)을 대규모로 숙청하기도 했지만, 동인(東人)의
더듬수에 걸렸는지, 서인(西人)이 너무 커짐을 경계한 선조의 고의였는지,
세자(世子)를 정하는 문제로 서인은 실각하고, 정국 주도권은 동인(東人)에게 넘어간다.
집권 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으로
정권을 쥔 동인(東人)은 곧 대(對) 서인(西人) 온건론을 주장한 남인(南人) 과
강경론(强硬論)의 북인(北人)으로 갈린다.
대략 남인(南人)은 퇴계(退溪) 문인(門人)에 경상좌도(慶尙左道)-낙동강 동쪽
북인(北人)은 남명(南冥) 문인(門人) 경상우도(右道)-낙동강 서쪽 선비들이
주축이 되고, 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德) 제자 중 일부가 섞인 형태였다.
북인(北人)의 집권과 몰락
남인(南人) 북인(北人)이 갈라진 뒤 정국의 주도권은 북인(北人)에게 있었다.
그러자 북인(北人)은 다시 대북 (大北) 소북(小北)으로 갈라지니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무리가 소북(小北), 광해군파가 대북 (大北)이다.
역사에서 익히 알다시피 광해군이 즉위하니 대북(大北)의 승리다.
대북 (大北)은 남명(南冥)학문을 이어 받아, 실천적 성격이 강하여
임란(壬亂)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성정이 너무나 급하여 집권당으로서 포용력이 부족했고
정권을 굳건히 받쳐 주기에는 시쳇말로 쪽수가 부족했다.
오늘 날 다시 평가할 정권이지만, 당시 정치역학적으로 볼 때
과격한 정책을 쪽수도 부족한 집단이 연합세력도 구하지 않고
밀어 붙이다 기어코 역풍을 맞아 침몰하니 바로 쿠데타 즉 인조반정
(仁祖反正) 이다. (1623년)
반정(反正) 후 대북(大北) 세력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고
그 뒤 조선이 망할 때 까지 정권을 담당한 서인(西人)은
역사에서 대북(大北)의 자취를 철저히 지운다.
북인(北人) 의 남은 세력 인 소북(小北)은 원래 숫자가 작아
이후 정파로서 살아 남지 못하고 남인과 서인에 흡수되어
북인은 그 흔적 마저 사라지니 그 본거지였던 경상우도(慶尙右道)는
한 동안 선비의 맥이 희미해 진다.
한편 남인(南人)은 대북(大北) 정권 때 야당이고 반정(反正)에도 협력했으니,
멸문지화 당한 대북(大北)보다야 낫지만, 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누지
못하는 것이니 서인(西人) 정권 아래서 재미 보기는 틀린 일이었다.
그래도 남인(南人)은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중심이 되어 서인(西人)정권에
여러 차례 도전 하나 판판히 패한다..
이상 조선조 붕당을 간략히 살폈으며, 그 과정에서 법칙(?)..이라기 보다
하나의 경향이 있어 적어 본다.
집권당은 갈라진다 !
어느 역사학자가 퇴계(退溪)의 설(說) 중 분열을 조장하는 면이 있어
남인(南人)이 정권투쟁에서 판판히 지고, 율곡(栗谷) 의 이론은 단결을 시키는
면이 있어 조선 후기 내내 서인(西人)이 정권을 쥘 수 있었다는 글을 썼다.
퇴계와 율곡의 글이 만만하게 읽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분석하자면
대충 훑어 될 일이 아닐 것이고 공부를 해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곡을 잃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필자(筆者)는 퇴계와 율곡의 글을 줄줄 읽어 내릴 형편이 되지 않지만
힘들게 두 선생을 분석하지 아니하여도 요 몇 년 신문 정치면을 읽으면
대강 답이 보이는 것 같다.
필자(筆者)가 매스컴에서 한국 현대 정치사의 특징으로 잡은 것은 ;
‘집권당은 갈라진다 !’ 는 현상이다.
YS 집권 전 상도동계가 얼마나 단결이 좋았나?
과연 경상도 사나이들답게 의리가 좋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는 ?
최형우계, 서석재계, 김덕룡계, 현철이 직계 등등
복잡하게 갈라져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당시 신문에 났던 동교동계 어느 인사의 발언 !
“동교동은 상도동과 다르다” 를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과연 DJ 집권 후 달라졌을까 ?
구주류, 신주류에 ‘노갑이’ , 김중권, 연청 등등.
상도동과 다르긴 뭐가 달라?
노무현 정권 당시는 아직 기억이 생생할 것이고, 이명박 정권의 친박, 반박,
형님계와 재오계의 분열은 지금 진행형이다.
야당은 원래 찬밥을 먹으니 싸우고 자시고 할 일이 없다.
어둡던 시절 공작차원에서 ‘사꾸라’ 심으려고 자금을 뿌리면
그를 둘러 싼 싸움이 심각했고 그 아니면 싸워 봐야 찻잔 속 태풍이다.
그러나 여당은…
정권 잡았다고 다 더운 밥 먹을 수 없으니 같이 굶던 동지 사이에
한쪽은 고관대작이 되어 떵떵 거리는 데,
자기는 여전히 춥고 배 고프면 싸움이 나지 않겠는가?
자고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우애는 좋은 법이고
재벌집치고 형제 쌈 나지 않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
이 ‘집권당은 갈라진다’ 는 공식 아닌 공식을 가지고
조선왕조시대 정파의 전개과정을 살펴 본다.
훈구파에 밀려 참혹한 사화를 겪을 때 사림파의 분열은 없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사림파가 정국을 장악하자 동인 서인이 갈라진다.
동인이 집권하니 남인 북인이 갈라지고,
남인을 누르고 북인이 집권하니 대북, 소북 !
대북이 집권하니 골북(骨北) 피북(皮北) 육북(肉北)으로 갈린다.
율곡(栗谷)의 어느 점 때문에 단결이 된다는 서인(西人)은 ?
야당시절엔 뭉쳤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권을 쥔 뒤는 ?
바로 청서(淸西) 공서(功西)가 갈린다.
청서(淸西)가 집권하니 노론 (老論) 소론(小論) 이 갈리고
노론 (老論)이 집권하니 낙파(駱派), 호파(湖派)
그 뒤 시파(時派) 벽파(僻派) 가 갈리다가,
영조(英祖)대왕 이후는 노론(老論) 벽파의 장기집권이다.
그에 반하여 분열 요소가 있다는 퇴계(退溪)의 맥을 이은
남인(南人)은 선조 때 동인에서 북인(北人)과 갈라 선 이래
300 년 동안 정파(政派)가 통일 된 채 내려 왔다.
경상도 사람들이 의리가 좋아서 그럴까 ?
남인(南人)은 싸워 보아야 득이 없으니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길항관계만 간단히 정리하면 되는 데 비하여, 기호지방 집권 세력은
상대방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고스톱 법칙-제로썸 게임의 법칙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웠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아닐까 ?
아.. 재오계와 형님계의 싸움은 앞으로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일어날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참고로 조선조 붕당 발생의 원인에 대한 정리를 아래 붙인다.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본 붕당론(朋黨論)
일제는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한 후 합리화가 필요했다. 멀쩡한 나라를
다만 자기들 왕성한 식욕 때문에 먹어 치웠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
그래서 19세기 서구 열강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일본식으로 변용한 것이
일제 식민사관이다. 파고 들면 긴 이야기가 되겠으나 간단히 약(略)해 본다.;
“조선은 역사 출발부터 남의 식민지 (북은 한사군, 남은 임나 일본부) 였다.
그 이전 단군조선이 있다고 하나 한낱 신화가 아닌가? 그 뒤 치사하게
외세(=당) 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반도 남쪽을 통일하는가 하더니만
내내 집안싸움을 하면서 걸핏하면 침략을 당했다.
이제 서구열강이 동양침략을 하는 비상한 국면을 맞아 대일본제국 천황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조선인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은혜로 적자(赤子)로 맞아 들이니,
이제야 비로서 조선은 그 역사의 정당한 발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상 표현이 거칠지만 식민사관의 대충 줄기는 될 것이다. 위 요약을
오늘 날 들으면 웃기는 것 같지만 일제 당시 상당수 아니 대다수 지식인이
일본을 통하여 조선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사실이다.
당쟁(黨爭)
식민사관(植民史觀) 입장에서 조선 중/후기 사색당쟁은 아주 좋은 소재였다.
“보아라 ! 지식분자-선비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역사를 통해 내내
제사 지내는 방법 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죽기살기로 싸웠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는가? 너희 조선은 자치능력이 없는 것이야 !”
사실 조선후기 사색당쟁(四色黨爭)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눈으로 보면
도대체 왜? 그것도 목숨 걸고 싸웠는지 ?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성호(星湖) 의 ‘배고픈 개’ 이론
조선후기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이 설파(說破)한 것 보다
더 간단하고 명쾌(明快)한 것은 없기에 이를 요약한다.
“배고픈 개가 여러 마리인데 밥이 한 그릇이면 싸움은 나게 되어 있다.
조선이 개국이래 선비를 길러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양반의 숫자는 엄청나다. 그럼에도 조정 관원(官員)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도 중인들이 하는
서리를 빼고, 사대부가 바라는 청요직(淸要職)은 불과 몇 자리다.
배고픈 개는 바로 물어 뜯고 싸우겠지만, 사대부는 체면상 밥그릇 때문에
싸운다고 할 수는 없으니, 다른 구실을 대지만 결국은 밥그릇 싸움이다.’
조선시대 당쟁(黨爭)을 표면만 놓고 보면 그것이 어째서 싸울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밥그릇 싸움이라면 이해가 쉽지 않은가 ?
당쟁(黨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한된 밥그릇을 놓고 박 터지게
싸우는 것은 지구상 어디나 공통으로 어쩌면 인류의 원죄나 마찬가지니
조선의 자치능력 하고는 상관이 없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가 밥그릇 가지고 싸우지 않았는가 ?
정치적 환경이 다르니 싸움의 형태가 우리와 달랐을 뿐이었다.
조선조 당쟁(黨爭)에 단골로 등장한 소재인 예론(禮論)도 고전-동양사상에
이해가 없는 오늘날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것 뿐이지,
당시 선비들에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