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신약에 있는 우리 사람의 영(5)/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
<지혜와 계시의 영>
에베소서 1장 17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시고”(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려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지혜는 우리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위한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영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휘장을 여시어 우리에게 이상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능력인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영적인 일들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영께서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 우리가 깨닫게 된다.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께서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지혜와 계시를 가지고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알게 하신다.
<영 안에>
에베소서에는 “영 안에”라는 말이 있는 네 구절이 있다. 2장 22절의 “영 안에”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3장 5절에 있는 “영 안에”는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계시를 보기 위한 것이다.
5장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영 안에 충만함을 받으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우리 영 안에 내주하는 영의 채워짐이 있다. 곧 우리가 영 안에서 충만하다는 것은 감정의 말이나 외적 채워짐이 아닌,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성령의 내적 채워짐이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의 몸이 술로 충만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들의 몸이 술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하고 영적인 술이다(요2:10; 마9:17; 시104:15).
우리는 우리의 영에 이 술을 담금으로 영 안에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에베소서 6장 18절은 우리에게 “무시로 영 안에서” 기도할 것을 명한다. 교회 생활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는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에베소서 2장 21-22절을 보라! “21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꼭 맞게 함께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고 22 그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처소로 함께 세워져 있느니라(너희도 또한 그분 안에서 함께 건축되어,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 원문 참조)”고 말한다.
”성전으로 자라가고(원문 참조)“, 하나님의 처소인 교회의 실재적인 건축은 믿는 이들이 생명 안에서 성장함으로 말미암는다. 성전인 이 건축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라난다(벧전2:5).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 거처는 믿는 이들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처는 우리 영 안에 있다. 21절에서는 성전이 주님 안에 있다고 말하고, 22절에서는 하나님의 거처가 우리 영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하나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이 주님과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다(고전6:17).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가 건축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비밀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을 보는 것은 영 안에서이다. 교회 생활은 절대적으로 우리 영 안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영 안에 있기를 배워야 한다. 교회의 특징은 당신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각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전이요, 단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고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장소는 예배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예배 장소를 메고 다닌다.
<영 안에서의 하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을 관심한다면 우리는 따지지 않을 것이며 교회 안에서 하나 될 것이다. 만일 다섯 형제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이 그들의 영을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즉시 다툴 것이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과 다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갈 곳이 있다. 우리는 사용할 기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될 것이다. 합일은 우리 영 안에 있다. 교회 생활은 절대적으로 우리 영 안에 있다.
<새롭게 하는 영>
에베소서 4장 23절은 “오직 심령(영)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함을 말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대개가 그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 23절은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함을 말한다. 곧 영이 혼의 생각과 하나이며, 생각의 영이 된다.
우리의 영이 생각과 하나일 때, 생각이 우리의 영에 복종하게 될 때, 우리의 영은 새롭게 하는 영이 된다. 우리는 생각과 하나 된 그러한 영 안에서 매일 매일 새로워진다.
<영적인 이해>
골로새서 1장 9-10절은 “9 이런 까닭에 우리도 그것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또 너희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며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에서 자라나고”(원문 참조) 라고 말하다.
영적 지혜와 총명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이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총명은 성령으로 새롭게 된 우리의 생각 안에 있으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영 안에서 인식한 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9).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안 결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목적, 곧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것이다(엡1:5, 9, 11). 우리가 이렇게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며 행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며”는 각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며,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번식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선한 일의 참된 본질이다.
“온전히 안다”는 것은 생각 안에서 문자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서 하나님을 생생하게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앎으로써 우리는 생명 안에서 자란다.
이해는 생각의 기능이다. 우리의 이해는 영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이 영의 지배를 받을 때만이 영적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 영으로부터 독립되고 분리된다면, 영적 이해를 갖기가 불가능하다. 당신의 생각이 영에 복종하고 영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즉시 생각의 이해는 영적 이해가 되기 위하여 새로워질 것이다.
“너희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며(골1:9)”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1:10)”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이해를 소유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영적 이해에 속한 것이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 영에 연결되지 않고 여전히 세상적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당신의 영에 계시되기 때문이다.
두 눈이 없으면 물질적인 영역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영적인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오늘날 주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속에서부터 활력화 시키신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이는 그분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과 강화시키심이 나의 영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5장 22-27절을 보면, 한 여인이 주님께 다가와서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주님은 즉시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주님은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6-28)”고 말한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 곧 신성한 분으로 여겼고, 다윗의 자손, 곧 위대하고 높은 통치를 하시는 왕가의 후손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분 자신은 상 밑의 작은 떡 부스러기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의 아들은 저주받은 가나안 여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은 하나의 상(床)인데, 하늘의 떡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의 몫으로 그 상위에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상 밑으로, 곧 이방 땅으로 던져 버렸으므로, 그분은 이방인에게 주어진 몫인 부서진 떡 부스러기가 되셨다.
이것은 또한 하늘의 왕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자신을 떡으로 먹이심으로써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 또한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질책과 무응답과 분명한 거부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윗의 아들”은 타고난 천연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만일 당신의 행위가 선하고, 당신의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을 기꺼이 낮추고 개의 위치에 선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