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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촌김자수기념사업회& 추사김정희기념사업회 원문보기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차의 기원
○ 차는 중국과 인도1)의 기원설 등이 있다. 중국의 기원설은 육우(陸羽)2)가 저술한 「다경(茶經)」에 의하면 BC2700여년 경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염제신농(炎帝神農)3)의 「식경(食經)」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농씨(神農氏)가 일찍이 백 가지 풀을 먹고 하루에 일흔 가지의 독을 만났으나, 차를 마시고 독을 해독시켰다”, “신농이 나무 밑에서 탕을 끓이며 쉬고 있는데, 우연히 나뭇잎이 탕 속으로 떨어졌다. 그 잎이 들어간 탕은 아주 좋은 향기와 맛으로 가득했다. 그 나무가 차나무였으며 그 때부터 차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원하고 있다. 즉, 차는 처음에 독을 푸는 약초로 사용되었던 점을 말하고 있다.
○ 「동다송(東茶頌)」에 의하면 “하늘 신선, 땅의 귀신이 모두 아끼고 사랑했나니 이 물건 됨됨이와 염제가 일찍이 맛보고 식경에 올린 기이함을 참으로 알겠다”라고 했는데, 여기 염제의 「식경」에 따르면 “차를 오랫동안 복용하면 사람이 힘이 생기고 뜻이 맑아진다”고 하였다.
○ 차의 해독작용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중금속과 담배, 식중독 등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식중독 세균이나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에 의한 배탈은 차잎 성분 중의 폴리페놀(탄닌)과 식중독 세균 또는 독소 성분이 결합되어 해독작용을 나타내므로 어느 정도 식중독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4)
□ 우리나라 차의 역사
○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보면 인도에서 허 왕후가 차 종자를 가져와 심었다는 설이 있지만 고증이 미미하고, 중국의 차를 신라의 선덕여왕이 마셔오다가 신라 흥덕왕 3년 서기 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당나라 강문종으로부터 차 종자를 얻어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5)
○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가서 차를 마시고 차를 배워온 최초의 사람은 원광법사였으며 의상대사, 원효대사, 원술랑 등이 불교문화 속에서 싹튼 차 애호가였다고 한다. 신라, 고려시대에는 음다풍습(飮茶風習)이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사원 중심이던 음다풍습이 사원 쇠퇴와 함께 위축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음다풍은 쇠퇴해가고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의 탓 등으로 차 문화는 점점 사라져 갔다.
○ 그러한 시기에도 다인(茶人)들은 배출되어 대표적으로 서산대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초의선사는 우리나라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 차의 지침서인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고 다성(茶聖)이라 불리어진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동국에서 나는 차 또한 원래 서로 같나니/ 색과 향기 기운과 맛을 논한다면 한 가지네/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이 되는데/ 우리 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겸했다고 옛 사람들은 높이 평했다”6)고 우리 차를 평가하고 있다.
□ 차에 관한 최초 저술 「東茶記」 원제목은 「記茶」
○ 「동다기(東茶記)」라는 기록이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 “동국에서 나는 차 또한 원래 서로 같나니/ 색과 향기, 기운과 맛을 논한다면 한 가지네/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이 되는데/ 옛사람들 높은 판단 이 둘 모두 가졌다네” 의 주석으로 “「동다기」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차는 색과 향, 기운과 맛에서 중국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중국의 육우나 이찬황 같은 사람도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라고 등장했으나 이제까지 누구의 어떤 저서인지 알 수가 없었고, 단지 다산 정약용의 저작으로만 추측하고 있었다.
○ 그러던 중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강심(江心)」이란 필사본을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의 이효천7) 선생 집에서 2006년에 발견하였는데 이 책자에 그간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동다기」의 전문이 모두 실려 있는 「기다(記茶)」라는 제목의 기록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우리가 「동다기」로 알고 있는 「기다(記茶)」는 차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술이며, 이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50년 뒤 초의의 「동다송」으로 이어졌고, 다산 정약용 또한 이 「동다기」를 통해 차를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저자는 이덕리(李德履, 1728 ~?)로, 1785년 전후에 저술했으며 그는 당시 전남 진도에 죄인의 신분으로 10여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이 책은 앞부분에서 차의 일반에 대해, 뒷부분에서는 차 무역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 초의의순선사의 생애8)
○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인 초의선사(1786 ~1866)의 성은 흥성장씨(興城張氏)요,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자는 중부자(中孚子)이다. 호는 초의 외에 해옹(海翁), 해사(海師), 자우(紫芋), 일지암(一枝庵) 등이며, 현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 스님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5세 때에 강가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으나 스님의 구조로 살아났고 15세 때에 전남 나주군 다도면 용덕산에 있는 운흥사에서 대덕 벽봉민성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 19세(1804) 되던 해 영암의 월출산에 혼자 올라갔다가 아름다운 절경에 심취해서 감탄하던 가운데 바닷속에서 떠오르던 달을 보고 개오했다. 그 후 해남 대흥사에 와서 완호 스님을 뵙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초의라는 호도 이때 받았다.
○ 24세(1809)에 강진에 와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과 처음 교류하였다. 정약용은 이보다 먼저 만덕사의 아암선사와 사귀면서 차 생활을 시작했다. 따라서 정약용은 초의에게서 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초의는 그로부터 주역과 시학을 배웠다.
○ 30세(1815)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와서 김정희, 김명희, 김상희 형제와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형제 등과 교유하였고, 39세(1824) 때에는 일지암을 중건했으며, 45세(1830) 되던 해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다.
□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6월 3일 충청도 예산 경주김씨 월성위9)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등 100여개의 호를 그때그때 바꿔 썼다. 그는 한국인으로 자기 분야에서 세계의 최정상을 차지한 몇 안 되는 위인 중 한 사람으로서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과 쌍벽을 이룬 실학자이며, 서화가, 금석학자는 물론 병조참판까지 이른 정치가였다.
○ 1840년(헌종 6년) 55세 되던 해 안동김씨들에 의한 조작적 정치극인 윤상도 옥사에 연좌되어 9년 동안 제주도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보내게 된다.
○ 추사와 초의선사는 동년배 친구로서 30세(1815년)에 만나 평생을 친근한 벗10)으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초의는 봄이면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냈는데 매년 잘 하다가 어떤 해 게으름을 피우면 추사는 신랄하게 다그치는 편지를 보내 초의더러 차를 보내주기를 수없이 요구11)할 정도로 그의 차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 추사는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고 자신의 서화(書畵)를 차와 바꾸기가 예사였을 정도였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는 차생활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갑자기 체편(遞便)으로부터 편지와 아울러 차포를 받았는데 차의 향기에 감촉되어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으니 편지의 있고 없음은 본래 계산하지도 않았더라네. 다만 이가 아리니 몹시 답답하지만 혼자서 좋은 차를 마시고 남과 더불어 같이 못하니 이는 감실(龕室, 불상을 모셔두는 방) 속의 부처도 자못 영검하여 율(律)을 시한 것이라 웃고 당할 밖에 없네. 이 몸은 차를 마시지 못해서 병이 든 것인데 지금 차를 보니 나아버렸네. 가소로운 일이로세”(제35신)12)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들이기 바라오. 비오기 전의 잎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부쳐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제36신)13)
“훈납(熏衲)이 따로 박생(朴生)에게 준 엽차는 아마도 파공(坡公)의 추차아(?茶芽)에 못지않게 향기로운 맛이 극히 아름다우니 행여 나를 위해 다시 한 포를 청하는 것이 어떠하오. 내 병이 웬만하면 특별히 졸서(拙書)로써 작환(雀環, 참새가 옥고리를 물고 와서 은혜를 갚은 한(漢) 양보(楊寶)의 고사임)의 보답을 할 것이니 아울러 이 뜻을 훈납에게 미치어 즉시 도모하도록 해주기 바라오”(제29신)14)
○ 추사와 초의가 차와 관련하여 그들의 사이가 각별했음을 알리는 증표로는 몇 가지가 있다. 차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반야심경」 한 질을 써서 보냈다는 일화가 있고, 초의가 거주한 일지암(一枝庵)의 차방(茶房) 이름인 「일로향실(一爐香室)」15)이란 액호도 추사의 작품이며, 또한 “차를 들면 선정에 든다”는 의미의 「명선(茗禪)」이란 글도 보낸 바 있다.
[茗禪]
<초의가 보내온 손수 만든 차는 몽산 정수리의 노아차도 마음에 차지 않기에 백석 신군비의 뜻에서 글씨로 이에 보답한다. 앓는 거사의 예서>
○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 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이 다선일미 사상은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畵)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다선일미의 정신은 송나라 때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 ~1135)선사로부터 나와서 조선시대 초의의순선사와 추사 김정희에 의해 명선(茗禪)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초의는 완당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제문을 바쳤는데 그들의 금란지교(金蘭之交)를 읽을 수 있다.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도 오랜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별로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그대의 얼굴을 대한 듯했고 그대와 만나 얘기할 때는 정녕 허물이 없었지요. 더구나 제주에서 반년을 함께 지냈고 용호(蓉湖, 서울)에서 두해를 같이 살았는데, 때로 도(道)에 대해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실로 봄바람이나 따사한 햇볕같았다오”16)
○ 이들의 우정 또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추사는 명문가의 후예이고 초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며, 추사는 빼어난 유림인데 반하여 초의는 독실한 불제자였고, 추사는 속세의 와중에 있었으나 초의는 산중에 은둔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이끌고 있었을까? 첫째는 동갑(1786년생)내기요. 둘째는 종교와 신분을 초월했으며, 셋째는 다(茶)의 진수를 서로 체득했다는데 의문은 없을 것이다.
□ 유배인 추사와 제주도
○ 추사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하는 동안 김구오라는 제주도 사람을 아꼈는데 그에게 전각기법과 함께 차 문화를 계승시키고 그의 아들 김우제가 정통을 잇고, 또 그의 아들 김의남이 가법을 따르면서 제주도 차 문화의 맥을 이어갔으며 이후 19세기말 20세기초 홍종시17) 등이 참여한 “귤원(橘園)” 시회(詩會)18)의 모임과 활동으로 계승되었다.
○ 추사가 전승한 차 문화는 조선후기 전라남도 강진(다산 정약용), 해남(초의선사), 진도(소치 허련)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품의 지적 예술적 다선일미의 문화로서 지리적 여건상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 선비들을 행복하게 하였다.
○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의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추사는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 직전(直前)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완당평전 첫머리를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는 그의 학문과 예술이 감히 논할 수 없을 만큼 오르기 힘든 거대한 산과 같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적 명성으로 본다면 분명 추사 김정희는 한류(韓流)의 원조이다.19)
○ 그런 그가 바람의 땅 제주도에서 8년3개월간 자신만의 ‘추사바람’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추사체’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추사체에 대하여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하나의 법(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용이 날아오르고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 그렇다. ‘추사체’는 그가 나이 서른하나에 지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서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 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라고 단호히 말한 것의 실천적 결과물이다. 그 실천의 전성기가 바로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었으며, 인고의 기간동안 썩지 않고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바로 그 힘은 차에 있었던 것이다.
○ 여기서 당대 금석학, 고증학은 물론 문(文)?사(史)?철(哲), 시(詩)?서(書)?화(畵)의 거두였던 그가 무슨 죄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는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1830년 4월에 대리청정을 보던 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전 대간 윤상도 부자가 호조판서 박종훈과 어영대장 유상량의 비위를 들어 논척(論斥)하고, 돌아가신 세자의 덕망까지 무시하는 상소를 사간원에 보내었다. 임금은 윤상도가 군신 사이를 이간시키고 신하의 도리를 어지럽힌다고 하여 그 부자를 추자도로 유배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가 승하하고 세손인 헌종이 즉위하였다. 1840년 8월 대사헌 김홍근은 다시 윤상도의 상소 사건을 거론하여 추자도에 유배되어 있던 윤상도 부자를 압송하여다가 대역죄로 목을 베었는데, 문초과정에서 전 부사 허성, 전 참판 김양순, 병조참판 김정희 등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김양순은 “나는 관련이 없으며 그 상소는 김정희가 초안하여 이화면을 시켜 남이익에게 주고 남이익은 허성에게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정희를 국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김양순, 이화면, 남이익 등은 국문하는 도중에 옥사하였으므로 대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김정희도 관련 죄인으로 사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나 우의정 조인영이 힘씀으로 구제되어 1840년 9월 27일 제주에 도착하고, 10월 1일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20)
2) 당나라 때 용개사 지적선사에 의해 양자로 들여져 성장한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다신(茶神) 또는 다성(茶聖)으로 불렸으며 중국의 모든 다서(茶書)와 다경(茶經)은 모두 그가 쓴 다경(茶經)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그의 이 저서는 세계 최초의 차에 대한 전문서적이다.
3)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제왕으로 사람들에게 농경술과 제약술을 처음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4) 유태종, 「차와 건강」, 도서출판 둥지, 1992, 32쪽
5) 삼국사기(이재호 譯, 광신출판사 刊), 신라본기(제10권), 흥덕왕 3년(828년),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조공하니 문종(文宗)은 인덕전(麟德殿)에서 불러 보고 연회를 베풀고 물품을 주었는데 차 등이 있었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의 씨를 가져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로부터 있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성했다”
6) 초의의순, 「초의선집(역주 임종욱)」, 동문선, 2006, 344쪽, “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
7) 이효천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시설 막내 제자인 자이당(自怡堂) 이시헌(李時憲)의 5대손이다.
8) 초의의순, 초의선집(임종욱 譯, 동문선 刊, 2006), 5 ~6쪽 참조
9) 추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이다. 김한신은 불과 39세의 한창 나이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남편을 잃은 화순옹주는 이내 열흘을 굶어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순옹주는 조선왕조 400년 역사 속에 처음 나온 왕실의 열녀하며 열녀정문(烈女旌門)을 세웠다.
10) 「완당선생전집」을 봐도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 권돈인(영의정)에게 보낸 편지(35통)보다 초의에게 보낸 편지(38통)가 더 많이 실려 있다.
11)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완당전집Ⅱ」, 1989, 189 ~193쪽 참조,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며 도무지 먼 사람 생각은 아니하는건가. 삼십 대의 봉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료”(제32신),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제34신),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들이기 바라오. 비오기 전의 잎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부쳐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제36신)
12)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완당전집Ⅱ」, 1989, 192쪽
13)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완당전집Ⅱ」, 1989, 192쪽
14)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완당전집Ⅱ」, 1989, 186쪽
15) 차를 끊이는 다로(茶爐)의 향(香)이 향기롭다는 의미이다.
16)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5, 152 ~153쪽
17) 김윤식, 「속음청사」, 제주문화원, 1996, 80쪽, “(1898년 5월) 27일(초8일 경인) : 흐림,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다. 귤원 여덟 번째 모임이다. 규원 정병조가 차리는데 규원이 사는 집에 모였다. 시축(그림의 여백에 그림에 맞는 한시(漢詩)를 쓴 두루마리)은 홍주사 종시가 썼다”
18) 운양 김윤식이 1898년 5월 22일 자신이 적거하던 김판관의 집에서 처음으로 이승오, 이용호, 한선회, 정병조, 황병욱, 정자은, 이희석, 오경림 등이 모여 결성한 시(詩) 모임이다.(김윤식 전게서, 75 ~76쪽)
19) 박병선, 교정(통권 367호), 2006, 122쪽
20)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세림, 2001, 166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