譬喩品 第三
6. 비유에서 법을 밝히다 (2)
어제도 누차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이 불교에는 비유의 말씀이 상당히 많고,
또 어제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중에도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유가 불교 이야기 속에는 상당히 많습니다.
또 이 법화경이 특히 유명한 비유들이 일곱 가지나 있지요.
그 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삼계화택의 비유는
아주 비유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 공부하는 불자들은 그런 것을 아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불 난 집에다 비유를 했구나!
이러한 것을 평소에 익혀두시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또 이것은 본래 비유를 들 때 경전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마는,
비유를 말하기 전에 법을 이야기 할 때가 있어요.
그 다음 비유를 말하고, 그 다음에 법과 비유를 합해서 말하고,
그렇게 세 번에 걸쳐서 이야기를 해야
그것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말하고 비유를 말하고 법과 비유를 합해서 말하는 그런 형식이지요.
지금 여기서는 ‘비유에서 법을 밝히다’라고 했는데,
법과 비유를 합해서 이야기 하는 그런 형식이 되겠습니다.
모든 중생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불에 타며,
이런 것들이 불이라는 것이지요.
실지로 우리가 생활에 쓰고 있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 하고,
이런 고통이 바로 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섯 가지 욕망과 재물을 위하여
여기서 다섯 가지 욕망이라는 것은
오근(五根)이 서로서로 좋은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욕망을
다섯 가지 욕망 그럽니다.
보통 우리가 세속적으로 이야기할 때 오욕(五欲)하면
재(財)·색(色)·식(食)·명(名)·수(睡) 이렇게 이제 다섯 가지를 치지요.
경전에서는 오욕이 서로서로 좋은 것을 탐하는 것을 다섯 가지 욕망,
눈은 눈대로 좋은 것을 보려고 하고.
귀는 귀대로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고.
혀는 혀대로 좋은 것만 맛을 보려고 하는 이런 등등의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또
(재물을 위하여)
가지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았느니라.
전부 사실은 탐·진·치 삼독,
그리고 그 삼독을 우리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한껏 누리려고 하는
거기에서 결국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 이야기지요.
또 탐욕과 집착으로 추구하므로 현세에서 온갖 고통을 받다가
나중에 지옥·축생·아귀의 괴로움을 받기도 하고,
어쩌다가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빈궁하며 피곤하고 괴로우니라.
우리의 삶을 이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괴로움,
미운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등등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으면서도,
중생들이 그 가운데 빠져서 기쁘게 놀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또 싫어할 줄도 모르고 벗어날 것을 구하지도 않느니라.
여기 보통 우리가 말하는 사고(四苦), 팔고(八苦) 그런 고통에 대해서도
그런 표현을 법수상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사고(四苦)는 생(生)·노(老)·병(病)·사(死) 이것이 기본인 네 가지 고통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거기서 또 네 가지를 더하면 여덟 가지 고통이 된다고 해서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괴로움, 이것을 이제 애별리고(愛別離苦),
그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하지요.
미운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이것은 원증회고(怨憎會苦)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은 안 떠났으면 좋겠고 미운사람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사바세계의 세상사고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과 만나야 되고
만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또 더불어 살기도 하지요.
사랑 하는 사람을 두고 한 번도 제대로 못 만나고
언제나 떠나 있어야 하는 그런 경우도 있고,
또 그와 구부득고(求不得苦),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구해지지 않을 때
이것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뜻대로 안됐을 때,
이것도 구부득고예요.
내가 바라는바, 구하는 바가 채워지지 않는 것.
그 다음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해서 우리 육신이 있음으로 해서
기본적으로 육신에 따르는 그런 병고를 오음성고라 그렇게 합니다.
육신에 따르는 병이 참 많지요.
애별리고라든지, 원증회고라든지, 구부득고라든지 하는 것은 육신과 관계없습니다.
육신은 육신대로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외 인간의 어떤 마음들 때문에 부당하게,
또는 자기 분도 아니고 자기 인연도 아닌데 구하려고 하고 얻으려고 하고
찾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 때문에 받는 고통이 그렇게 많습니다.
불교를 우리가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인연 따라서 또 자기 분 따라서 수용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물질도 마찬가지예요.
물질이나 사람에 대해서 사람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
물질 아니면 사람, 사람 아니면 물질입니다.
따지고 보면 두 가지 뿐이 예요.
물질이든 사람이든 간에 자기 인연을 따르고 분을 따르고 자기 역량을 따르고,
그래서 조작 없이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없이 그렇게 살 줄 아는
그런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경구 중에서 수련무작((隨緣無作)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어려서 보고 지금까지 아주 참 변함없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그런 성향 때문에 내가 남들처럼 크게 이루지 못한 것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연 따라서 내 힘 따라서 또 내 어떤 분 따라서
크게 억지 쓰지 않고 아주 분도 아니고 인연도 아닌데 아등바등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어떤 노력은 안 한다는 것이지요.
저절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서 돌아오면 하는 것이고
인연이 안돼서 안 돌아오면 인연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여태까지 주지 한번 못한 이유가 아마 그래서 못했는지도
모르긴 하겠습니다마는, 어쨌든 그렇게 아둥바둥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쟁취를 해가면서 하는 그런 것은 도저히 못하는 사람이지요.
일찍이 그런 마음 때문인지 수련무작 인연 따라서
조작 없이 억지로 하지 않고 산다 하는 이것이 내 어떤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여기 경전에서 가르친 바와 같이
이런 여러 가지 분에 넘는 것을 구한다든지,
또 자기 인연이 아닌 것을 억지로 인연을 만들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 때문에 굳이 고통스러워 할 까닭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공부가 인연이라는 이야기지요.
연기라는 표현도 하고 하는데 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상당한 소득입니다.
불교공부에서 인연의 이치 깨닫는 것 대단한 소득 이예요. 사실은…
깨닫는다고 하는 말속에는
정말 그것이 어떤 생활로 표현 되어져야 한다고 하는 단계이겠습니다.
인연에 대해서 알았다. 또 인연을 따른다. 인연을 깨달았다.
나는 인연을 안다. 최소한도 인연이 자기 생활화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분에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서 괴로움을 자초하는
그런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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