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사람인 성이성이 이곳에 살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가 처가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부용당은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백암 김륵의 손서가 된다.
성안의는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에서 곽재우·정인홍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면서 가족을 처가가 있는 영주 이산면으로 피신시켰다.
성안의는 이를 계기로 하여 창녕에서 처의 고향인 이곳으로 자연스레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용당의 3남인 성이성도 자연히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종손 성기호는 성이성이 우복 정경세의 문인이라고 알려주었다.
권두인이 지은 행장을 보면 성이성이 13세 때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가다가 상주를 지나며 우복 정경세를 찾아보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경세의 문인이 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성안의가 5년 동안 남원 부사를 지냈으므로 성이성이 아버지 임기 내내 함께 남원에 있었다면 그는 13세에서 18세까지 남원에 있었을 것이다. 이를 하나의 근거로 삼아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주장이 계속돼왔다.
그 대략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이다.
그는 남원 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이러한 주장을 한 대표적 인물이 설성경 교수인데, 그는 성이성 본인의 글을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다른 여러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그러한 결론은 내렸다. 다음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 두어 가지이다.
첫째는 『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는 「호남암행록」의 한 대목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 길에 길을 나서서 십 리가 채 안 되어 남원 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 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성경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
’는 성이성의 진술은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한다.
또 옛 연인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옛 연인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관기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필원산어』에 실려 있는 성이성의 암행어사 행적이다.
이 행적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되었다.
성이성의 4대손인 성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하였다.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금동이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또한 높더라.’ 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 들어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이 시를 성이성 자신이 지었는지, 아니면 항간에 전해오던 시를 옮겨 적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이성과 남원과의 관계가 춘향전의 모태가 된 것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부용당이 바로 성이성 아버지 성안의의 호인 것과 함께 말이다.
봉화물야,가평리에대하여..
세 개의 물길, 세 개의 산이 만나는 곳, 가평리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은 봉화읍의 북쪽에 있는 면이다.
이곳은 영주시 부석면과 경계를 같이 한다.
봉화읍에서 915번 국지도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길은 내성천의 본류와 3번 좌·우를 뒤바꾼다.
북지리의 아래쪽 끝 부분에서 도로는 물길을 넘어 서편으로 넘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동편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가평리에 들어서면서 도로는 다시 물길을 넘어 서편으로 나아가고, 그런 위치를 유지하면서 물야면소재지를 향하여 나아간다.
물야면소재지를 넘으면 물길과 도로는 또 자리를 바꾼다. 가평은 너른 들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적어도 3곳의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고, 적어도 3개의 큰 산들이 흘러내려 만나는 지점이다.
문수산은 가평의 동북쪽에 있다.
해발 1200m가 넘는 이 산자락의 한 끝은 가평 쪽으로 흘러내리고, 그 산록이 품어 기른 물길은 가평 앞으로 나와서 내성천의 본류와 합류한다.
만석산은 가평 북쪽에 위치한다.
이 산은 해발 492m 정도이고, 가평과 물야면 소재지 사이에서 내성천 서쪽 영역을 양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응방산은 가평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585m의 이 산은 두문쯤에서 수식 쪽과 가평 쪽으로 나뉜다. 가평 쪽의 산록은 수식 쪽에 비해 짧다.
그러나 이쪽의 물길은 가평 쪽으로 흘러내려 저수지에 모이고, 가평 들을 적시며, 결국은 내성천으로 합류한다.
가평 들은 만석산의 남쪽 산록과 응방산의 북동쪽 산록 사이에 펼쳐져 있다.
그 사이를 가평 두문 사이의 봉화군 1번 군도가 나누어 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만석산 쪽으로는 계서당이 위치하고, 응방산 쪽으로는 구만서당이 위치한다.
구만서당 쪽이 가평 마을 본동이다.
계서당 쪽에서 보면 앞쪽의 응방산 끝자락은 누에머리처럼 꿈틀거리며 두문 쪽에서 기어 내려와 가평 들을 향하여 머리를 드리우고 있다.
계서당의 시선 방향은 그 누에머리의 끝점쯤을 향하고 있다.
계서당에서 서쪽 영역은 좁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산촌의 모습이고, 동쪽 영역은 너른 들로 이루어진 농촌 영역이다
******
계서당의考부용당선생은.나의(네이버남양홍씨중랑장파카폐지기,홍왕식)고조비
이신,창령성씨의8대조고이시며,.계서당선생은,내고조비의7대조시다.
즉.부용당선생님이나,계서당선생은,창령성씨검교공파15세.16세시고.
진사,성언극의직계선조어른들이시다..
진사성언극선생님은내고조비,창령성씨의증조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