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마르크스와의 조우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9년 박정희가 살해당한 직후인 그해 10월 광주교도소에서였다. 아니 나는 특사 1동에 있었고 선생님은 바로 옆 특사 2동에 계셨으니 엄격히 말하면 뵌 것은 아니고 그냥 한 공간에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맺은 선생님과의 인연을 말하려면 좀 긴 서두가 필요하다.
박정희가 살해되기 직전 나는 광주 서부 경찰서에서 서부서 조사계와 출장 온 치안본부 남영동 고문 기술자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해 9월에 발생한 전남대 학생지도관실 방화사건 배후에서 시작하여 5월 16일 충장로에 뿌린 유인물을 거친 심문은 남민전 조직원 자백을 요구하는 고문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이면 전기의자에 앉히겠다는 엄포를 듣고 깜박했다가 눈을 뜨자 희뿌옇게 밝아지는 조사실 창문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나는 다시 끌려나갔다. 책상이 하나 있고 의자에 형사 한 사람이 앉아 빈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왠지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형사의 오른 가슴에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형사는 말없이 엄지를 들었다가 아래로 돌려 내렸다.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내 고통은 그렇게 끝났다.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로 떡 진 머리와 한쪽 알이 깨진 안경을 쓰고 나는 검찰청 비둘기장으로 이송되었다. 검사는 내가 5월 충장로에 뿌린 유인물이 대통령 모욕죄에 해당한다며 안타까운 눈으로 심문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많이 다친 데는 없냐고 걱정까지 해주었다. 나는 통닭구이 고문을 당하면서 양쪽 손목이 수갑에 조여 끊어질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나의 두 손목은 푸르딩딩하게 부어있었다. 검사는 교도소에서 외부 의사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광주교도소는 1년 전과 진배없었다. 전년에 머물렀던 미결사 입구를 거쳐 사형집행장 앞을 지나 특사에 이르니 다시 철창문이 가로막았다. 철창문 안쪽에 교도관 한 사람과 수의(囚衣)를 입은 또 한 사람이 문을 따주었다. 나의 자백으로 사건에 얽힌 윤한봉 선배는 2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긴 복도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가는 윤 선배와 수의 입은 사람이 짧게 눈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이윽고 나를 향해 소곤댔다. “전대 철학과 박병기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김병곤 선배로 민청학련 관련자였다. 동일방직 사건으로 2년 넘게 복역하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가 검은 테 안경을 쓴 얼굴형이 무척 강인해 보였다.
김병곤 선배가 긴 복도 양편으로 늘어선 좁은 철문을 지나면서 손가락을 멀리 가리키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저 방은 인혁당 황현승 선생님이고 그 다다음 방은 이성재 선생님이오. 운동 나가면서 인사드리시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옆 동에는 리영희 선생님도 계시오.” 교도관이 내 방 앞에 서서 내 신원을 다시 확인하더니 방문을 따주고 먼저 갔다. 김병곤 선배가 몇 가지 생활 규칙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책은 어제까지 이 방 주인이었던 서경식 씨가 놓고 간 것들이오. 일본어 읽을 줄 아시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다소 사무적으로 말했다. “일어 문법책 넣어 달래서 공부하시오. 일주일이면 책을 읽게 될 거요.”
방 안에 들어가니 특사 방은 전년에 내가 있었던 미결사의 벌 방보다 넓어 보였다. 방구석에 쌓인 책 일곱 권 모두 일어본이었는데, 법학, 경제학, 세계사, 정치학 관련 서적이었다. 나는 다음 날 당장 면회 온 같은 과 후배 여학생에게 “일본어 사전”, “일본어 한자 읽기 사전”, “일본어 문법”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문법책을 3일 만에 독파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한자를 일본어로 읽는 법(요미가나)을 익힐 여유가 없어 뜻만 이해한 채 속도가 느려도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한자를 일본어로 읽는 데 매우 서투르다.
며칠 후 내게도 운동이 허락되자 나는 드디어 운동장 쪽으로 복도를 지나갈 기회를 얻었다. 황현승 선생님 방 앞에서 감시 통으로 인사드렸다. 교도관이 팔을 이끌어서 긴말을 나누지는 못했다. 이성재 선생님 방 앞에서 왜인지는 몰라도 교도관이 좀 거리를 두고 어슬렁거리는 듯했다. 감시 통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골판지로 만든 듯한 작은 탁자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푸른 수의의 이성재 선생님은 책을 읽고 계셨다. 높은 천장에 5촉 전등이 달려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않고 산다.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서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책장을 넘기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껏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오, 철학과 박군이로구만. 운동하러 가지? 운동 끝나면 황 선생님하고 말씀 좀 나누시게.” 운동이 끝나고 특사로 돌아올 때, 문을 따준 사람은 교도관이 아니라 김병곤 선배였다. 황 선생님과 제법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이고 철학 전공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시작한 일본어 공부를 격려해 주시고 읽고 있는 책 감상을 물어보셨다. 나는 좀 우물쭈물했던 것 같다. 운동시간을 조정하자고 하셨다.
다음 날부터 하루 2시간씩 매일 두 달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장을 산책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강의를 들었다. 선생님이 강좌를 시작하면서 건넸던 첫 물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박군, 세계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순간 당황했다. 철학과 3년을 다니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답했다. “역사 아닐까요?” 어찌 되었든 이런 방식의 강의는 일주일에 6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6~7주 계속되었다. 두 학기 강좌는 너끈히 수강한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선생님의 강의 내용은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철학교정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렇게 나는 마르크스와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