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권대섭 선생은 초등학생 때 미술의 신동으로 소문났다.
전국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기대처럼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3학년에 복학할 즈음이었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는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백자에 넋을 잃은 것이다.
몇 시간을 바라보던 그는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 나베시마요의 오가사와라 선생의 제자가 됐다.
나베시마요는 도자기로 굉장히 유명한 곳으로써,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들이 끌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도예를 가르치면서 발전했다.
선생의 스승인 오가사와라 선생이 이곳의 7대째인데, 굉장히 혹독하게 가르쳤다."
"첫 2년간은 청소만 했어요.
지도랄 것도 없고, 눈치껏 보고 배워야 합니다.
재료에 대한 소중함 같은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거지요”.
대기만성은 권대섭 선생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5년간의 일본 유학과, 그가 가마터로 자리잡은,
남종면 이석리에서의 10년 공부 후에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그는 돈 되는 일에 손대는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평생 백자항아리와 백자사발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주변에 조선 관요의 가마터만 200개가 넘어요.
한마디로 우리 도자 예술의 메카지요.
당시 딸이 세살배기였는데, 시간만 나면 아이 손잡고 사금파리 주우러 다녔어요.
그 파편 주워다가 공부를 했지요.
부서진 조각이지만 형태가 있고 이어보면 연결되기도 하거든요.
그 형태를 그려보기도 했고요.
포크레인이 나타나면 제가 강사로 나가던 선화예고도 안 나갔어요.”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단순, 소박, 무작위성만 말하는 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백자를 유백, 설백, 회백으로 나누지만,
실제 백자 색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거든요."
“즉 흰색과 백색은 다른겁니다.
동양화가들이 쓰는 먹색이 검은색과 다른 것과 같은 이치지요”
"항아리 형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18세기 조상들에 의해 이미 개성있는 모양이 만들어졌고,
전 현대에 적합하게 해석할 뿐이지요.”
“다만 사람의 손이 아닌 불이 형태를 만든다는 데 백자달항아리의 묘미가 있죠.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구우면서 형태가 뒤틀리거든요.
그렇다고 도예가가 대가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불의 온도와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해,
장작 한 개비를 더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게, 바로 도예가들이거든요."
“1978년부터 17년간 공부만 했어요.
오로지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첫 개인전을 연 게 1995년입니다”.
권대섭은 1995년 국내, 1997년부터는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기 시작했다.
큰 새는 쉬 날지 않지만, 한번 날개를 펴면 창공을 뒤덮는다.
현재 그의 작품은 멕시코, 러시아, 국립박물관과 우리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금까지 만든 것 중, 최고를 보여달라”고 하는 분들에게,
그럴 때 마다 전 이렇게 말해요,
“제 최고 작품은 다음 가마에서 나올 것”이라고요……”
선생의 마지막 말씀은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마도 예술인의 마음은 모두 한결 같으리라……
첫댓글 백자달항아리 도예가의 마지막 가야할 길과도 같은데 갈길이 험하네요...~~
예술의 길은 끝이없는것.....
두 글을 조합하자면 예술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결론적으로 예술은 ........현실적으로 배고픔이 있다는것....
라즈니쉬는 영적인 고양 상태를 일반인--예술가--수행자로 나누었는데
예술가는 거의 수행자같은 각오를 가져야 지대루 작품이 나오지않을까 혼자생각;;;;
요즘 예술가입네 하며 돈만 밝히는 부류와는 다른 분이시네요.
돈과 예술혼은 반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