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들의 삶의 흔적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그 역사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의견은 모두 제각각일 수 있다. 그런 탓에 우리는 아직도 역사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역사를 보는 시각은 이념에 매몰되어 버린 탓에 마침내 종교적 신념처럼 되어 버린 감이 짙다. 나만이 옳고 정의롭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념에 매몰되면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 해석이 달라도 역사는 분명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친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6.25에 대한 의견 또한 분분하다. 지난 정권은 북한에 구걸하다시피 매달리더니 급기야 개정 교육과정 시안에서는 남침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 누구에 의해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유성룡의 혜안은 놀랐다. 그는 다시는 전쟁의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징비록’을 남겨 후세에 참고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그의 ‘징비록’은 의도적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꼬박꼬박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난중일기’다. 얼마 전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은 탓에 내친 김에 이순신의 ‘난중일기’까지 펼쳐들었다.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된다. 일기는 그저 일상의 업무를 보고 성을 보수하고 해자를 고치고 하는 소소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전란 중에도 꼬박꼬박 일상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그 일기가 전쟁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순신을 이해하고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귀한 보물 같은 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일기는 철저히 개인의 그날그날의 사사로운 기록이다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전모를 읽어내기는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영화로도 성공을 거둔 명량해전의 경우도 그저 한쪽 분량 정도로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개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전쟁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며,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사람됨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그는 매사가 분명했으며 피난민을 보면 마음 아파하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백전백승의 용장인데다 백성들의 신망 또한 높으니 자연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중에도 원균의 시기가 특히 심했던 모양이다. 일기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악평은 한 줄도 없지만 유독 원균의 사람됨에 대해 여러 곳에서 적어 놓았다.
이순신은 거의 매일을 남해바다를 오가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진지를 보수하거나 구축했다. 전쟁 물자를 마련하는 일에도 빈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나는 곳마다 고을 현감 같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그는 군율을 중시했다. 군의 기강 헤이는 전쟁에서 치명적인 부실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예를 들면, 맡은 일을 충실히 하지 않을 경우 그 우두머리를 불러다 곤장을 치거나 처벌을 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의 용맹함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다. 일기의 곳곳에 어머니의 안부가 등장한다.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나 그래도 진중에서 부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나라 사랑 못지않게 효심 또한 지극한 장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만큼이나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또한 대단했다. 진중에서 셋째 아들 면의 죽음을 접하고는 부모로서의 절절한 아픔을 적은 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일기는 무술년(1598) 그의 나이 55세였던 11월 17일 끝나고 있다. 8월 18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이 퇴각을 하던 시점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왜적이 안전하게 퇴로를 확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들을 궤멸시키고자 한판 싸움을 벌였다. 그것이 노량해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해전에서 전사를 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