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올려 보는 순례길
내 인생은 지금 어느 길목에 와 있는 것일까? 태어나 지금까지 반백년을 살아온 지금 나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나그네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목적지를 알고 걸어가고 있음을 알기에 감사 할 뿐이다. 주님을 따라 걷는 길이기에 때로는 지치고 목마르지만 즐거운 순례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5년 12월 8일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라테란 성 요한 대성당의 성문을 열었다. 누구든지 그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문을 통과하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했다. 먼저 교황님이 그 문을 통과하셨고, 그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죄를 씻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베풀게 될 자비의 힘은 또 얼마나 넓고 클 것인지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을 굳건히 하고, 지은 죄를 속죄하고 회개를 통하여 ‘자비를 베푸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며 본당 순례길에 동참하였다. 1월부터 시작하여 11월까지 예순 일곱 곳을 방문하였다.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처음 방문했던 곰실공소를 시작으로 하여, 꽃잔치를 시작했던 봄날을 거치고, 무성한 푸름을 노래했던 여름도 지나고, 서서히 허울도, 욕심도 벗어버리는 늦가을 속에서 마지막 대진성당을 돌아 우리 본당 현리성당에서 마침표를 찍는 순례를 마감하였다.
물과 하늘만 보면서 살았던 우물 안 개구리가 어느 날, 밖으로 나와서 바라본 세상은 경이로웠다. 온갖 만물과 세상의 기운은 개구리에게 더 큰 놀람이었고 깨달음이었다. 우리 성당이 제일 좋다 여기며 살았던 나에게 순례길에서 만나게 된 많은 성당은 나에게 또 다른 설렘을 안겨주었다.
곳곳에서 만났던 주님의 여러 모습들, 그 성당에 깃든 역사, 가슴을 뜨겁게 울렸던 여러 성인들, 길 위에서 만났던 하늘과 산과 들판은 하느님이 지으신 찬란한 세상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만나게 되는 만상이었지만, 앙상한 가지였던 나무가 푸름을 입었다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치장하였다. 철따라 피어난 수많은 꽃들은 또 얼마나 황홀하였던가!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참으로 신비하였다.
그러나, 그 찬란함 속에서도 비워지는 마음이 있어 홀가분하였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이사 40,6-7) 그저 마음속에서 이는 욕심도, 명예도 시드는 풀과 같으니 잘 다스려야 할지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스치는 삼라만상을, 건너갈 세상의 강을 그분께서는 넉넉한 자비의 마음으로 보게 해 주셨다.
첫 순례지인 곰실 공소는, 생각보다 작고 아담하였다. 이웃집에 마실이라도 온 듯 정겨운 마당에 들어서니 작은 건물이 잠깐이었지만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우리 춘천교구의 신앙의 남상(濫觴)이 된 곰실 공소가 이렇게 작고 초라하였구나. 이렇게 시작은 미약하였구나. 그 시작이 큰 기쁨이기도 하였겠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신앙을 지켜온 선조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러나 우뚝 서 있는 종탑을 보는 순간, 넓은 동내면 들판을 깨웠을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경건함이 가득 차올랐다.
공소안도 정말 소박한 모습이어서 저절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게 하였다. 그 좁은 성전 안에서 스스로 깨우친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며 기쁨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였을 선조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불편한 몸으로 나오셔서 강복을 주시던 반백의 노사제의 모습은 또 다른 감사와 연민의 마음이 들어 울컥하였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의 길목에 서 계신 신부님의 모습이기에 그 은덕에 더욱 감사하였다.
또 다른 순례지인 금광리 공소에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이 공소안에도, 밖에도 배어있어 그 시절의 길목에 서 있는 듯하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줄 서 있었다는 옛 교우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빈 고해소 안을 기웃거리게 되고, 마당의 성모상 앞에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앞에서 잠깐 동안 두 손 모으고 머리 숙여 보았다. 바람도 맞고, 비도 맞고, 눈보라도 맞으며 세월을 묵묵히 견뎌 오신 성모님은 오늘 만나게 된 순례객들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으셨을까?
순교자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보면 늘 가슴이 뜨거워진다. 신앙선조들의 뜨거웠던 열정을 통하여 나태해지는 내 마음을 곧추 세울 수 있었기에 순례 길을 행복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나가네.”(시편 19,4-5)
곳곳에 서려있는 하느님의 숨결을 몸속으로 받아들인 순례 길이었다. 많은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그 문을 지나오며 나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느끼고 또 주님의 자비를 실천할 힘을 얻었다.
2016년 11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문을 닫았다. 자비의 희년 문은 닫혔지만 우리 마음속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리라.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내가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 햇살과 바람과 구름이 온 창공을 넘나들 듯 사랑과 자비가 자유로이 드나들도록 문을 열어 두어야 하리라.
하느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며,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로의 순례길을 가고 있는 지금, 나는 행복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