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힘 / 이훈
먼저, 질문부터 해 보자. 프랑스 아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 ‘왜?’라고 한다. 하기야 사람은 원래 호기심 덩어리로 태어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삶은 주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제대로 살자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아이라고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 부모는 어떻게 반응할까? 개별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차이가 많아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겠으나, 우리가 프랑스 부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귀찮아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부모는 심지어 그런 거 알 필요 없다고 윽박지르기조차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츰차츰 질문을 거둔다. 교육열에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부모는 겉보기와는 정반대로 반교육적인 태도를 실천하며 산다.
프랑스 부모들은 언뜻 보기에 엉뚱한 질문에도 꼭 대답을 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허구를 특징으로 삼는 문학은 이런 유형의 질문에 기대지 않고는 아예 나올 수가 없다. 문학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현실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디 문학뿐이랴! 감성을 중시하는 문학과는 달리 냉철한 이성의 작용을 바탕으로 삼는 과학의 발전에도 엉뚱한 발상이 꼭 필요하다. 기존의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의심의 눈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 교육도 사실은 우리 부모의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질문해서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선생의 말이나 책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도록 길들인다. 우리 학생들이 질문을 꺼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정답을 찾는 것을 위주로 하는 공부 방식 탓이다. 이른바 객관식 문제가 정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도록 세뇌시킨다. 내 생각은 필요 없다. 답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 정답만 필요하므로 학생 스스로도 질문하는 동료에게 시간 뺏는다고 눈을 흘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암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제 웬만한 정보는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들어 있다. 그런 걸 학교에서 외우고 시험까지 봐야 할까? 기계가 다 해결해 주는 세상에서 이런 일에 힘과 시간을 바치는 것은 괜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암기가 강조될수록 정답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따지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말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어와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보건대 터무니없는 악담은 아닌 것 같다. 수업하면서 질문하라고 수없이 요구하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보를 많이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알려고 묻게 된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모른다고 의식한 덕분에 받은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반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굴게 된다. 그래서 책도 질문도 필요 없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하러 눈과 머리 아프게 책을 읽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질문하지도 않거니와 질문 받는 것도 싫어한다.
제대로 알려면 물어야 한다. 정답을 아는 것은 쉽다.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을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질문은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존 답의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일수록 정답은 힘이 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금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창조적인 질문은 쉽지 않다.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그래서 상투적인 대답과 삶이 나온다. 일상의 늪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이렇게 금지와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묻지도 않은 채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도 가고 전공도 정한다. 결국 고정 관념과 관습, 유행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질문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자꾸 물어야 개인적인 성숙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낸 것만 참다운 지식이 된다. 질문 없이 그냥 얻은 답은 시험 보고 나면 다 잊힌다.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이유가 있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호기심을 품고 열심히 물으면 저절로 공부가 즐거워진다. 공부가 지겹게 된 것은 질문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몰아가는 우리 교육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2) 자기중심주의(지역주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사실 앞에 겸허하라, 차이를 인정하라, ‘틀리다’고 하지 말고 ‘다르다’고 말하자
* 참고 자료 1
호메로스는 그레시아인이었으나 그레시아군 지도자들의 치기 어린 다툼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적군의 대장 헥톨의 영웅됨을 아낌없이 칭찬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민족적 감정을 애써 억누른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사실 앞에 겸허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한 떼의 그레시아군이 불의의 습격을 당해 많은 동료를 잃고 도망하다가 안전한 곳에 이르러 우선 먹을 것을 실컷 먹고 쉬고 난 다음에야 죽은 동료들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적 선택주의의 전형인 감상주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상벽이 있는 아류는 아마도 “먹을 것도 있고 오래 굶주리기도 하였지만 죽은 동료들 생각에 울음만 나올 뿐 입맛이 통 없었다”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감상적 허위>이다. 호메로스의 이런 대목들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식적 통념―스스로 세련된 교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을 파괴하는 준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해대면서도 호메로스는 무척이나 덤덤하다.」(이상섭, 「사실의 준열함과 문학」, 말의 힘, 민음사, 1976, 20-1쪽)
* 참고 자료 2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
3) 복잡성을 존중하기―세상은 복잡하다, 일면적으로 보지 말자
공평하게 그리고 꼼꼼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두고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요소로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참고 자료
내 방 벽에는 일본의
악귀(惡鬼) 탈이 걸려 있다.
노랑칠을 한 것이다.
고약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마에 삐져나온 힘줄을
나는 알 듯한 기분으로 바라다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의 탈」
4)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다
위에서 생각하는 첫째 방법으로서 “늘 질문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묻자면 뭐가 있어야 할까? 그 답은 열정이거나 이 낱말과 연관된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열정을 지니면 세상은 온통 의문투성이가 된다. 그러니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라고 해야 한다.
* 참고 자료
‘사고력’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고력을 단지 사고의 기능, 생각의 도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사고력 관련 책들을 보면, ‘관찰, 추론, 분류, 비교, 사실과 의견 구분하기, 공통점 찾기 등’을 훈련시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고력’을 단지 ‘논리적 사고력’ 또는 ‘이성적 사고력’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 이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관심,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애정과 친절함,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에 대한 갈망 등은 과연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과연 이러한 삶의 요소들은 사고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모든 사고력을 인도하고 이끄는 것은 관심, 호기심, 신기함, 궁금함입니다. 이것은 ‘당당한 시선’ 즉 이 세계에 대한 응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사고 능력인 것입니다. 호기심과 세계에 대한 궁금함이 부족한 아이들은 동기가 형성되지 않으며 무기력합니다.
행복함과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성취할 때마다 자신이 성장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취는 자신감, 자신에 대한 긍정심, 자아 존중감을 넓혀줍니다. ‘감사’와 ‘성취’는 항상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라는 사고의 능력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행위 또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볼로흐는 ‘사유는 초월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바라는 것,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희망입니다. 나 혼자만의 희망, 친구와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지역사회의 희망, 자연과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세계의 희망, 그리고 우주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이토록 다양한 겹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력은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 또한 사고의 능력입니다. 희망은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합니다. 모든 희망은 변화에 대한 지향입니다. 새로운 실현에 대한 설렘입니다. 희망하는 능력에 비례해서 동기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행위를 지도합니다. 희망의 크기만큼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능입니다. 아이들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희망이며 새로운 시대, 열정적 성취의 주도자들입니다. 사고력 교육이 추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열정적 성취의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차오름, 「열정ㆍ호기심ㆍ희망은 사고력의 또 다른 이름」, 한겨레, 2006. 8. 20.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50455.html)
열정과 호기심은 물론이고 현실을 넘어서고자(초월ㆍ부정하고자) 하는 비판 정신으로 무장하여 끊임없이 묻자!
사족 하나. 위에서 밑줄을 그은 문장은 거슬린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글쓰기 지도를 하다 보면 “삶을 살면서”라는 투의 문장을 흔하게 만난다. 이런 상투적인 어구는 아예 빼거나 꼭 있어야 한다면 간단히 ‘살면서’나 ‘삶에서’라고 하면 된다. “하는 데 있어”도 아주 어색하다. “하는 데(서)”라고 바꾸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거나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고 하면 아주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