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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문집보유 제1권 / 비지류(碑誌類)
유명(有明) 조선국 정충출기적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공신(精忠出氣敵愾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증시(贈諡) 정정공(丁靖公) 김공(金公) 신도비명
전하 치세(治世) 12년(1481) 겨울 11월 정해일(17일)에 좌의정 김공이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졸하였다. 상이 크게 슬퍼하여 부의를 더 많이 내렸다. 이듬해 2월에 유사가 의장(儀仗)과 호위(護衛)를 갖추고, 고자(孤子) 극뉴(克忸) 등이 영구를 모시고서 연산현(連山縣) 동촌(東村) 왕대(王臺)의 언덕에 장례 지내니, 중씨(仲氏) 광성(光城)이 고자들의 뜻으로 나에게 비석의 명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국광(國光)이고, 자는 관경(觀卿)이다. 김씨는 본래 광산(光山)의 명망 있는 가문이니, 휘 정(鼎)이 고려에서 벼슬하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약채(若采), 약항(若恒), 약시(若時)이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예전부터 내려오던 관례에 따라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모부인에게 작위를 봉하고, 동시에 높은 벼슬에 제수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약채는 고려 말에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는데, 이때에 조반(趙胖)의 옥사가 일어났다.
공이 합좌소(合坐所)에 참여하여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데 있어 몹시 분개하여 격렬하고 절실하게 해서 마침내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꺾고 조반을 도우니, 여론이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대사헌이 되어 탁류(濁流)를 치고 청류(淸流)를 옹호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여 헌신(憲臣)의 체모가 있었다. 관직은 관찰사에 이르렀다.
약채가 휘 문(問)을 낳으니,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문이 휘 철산(鉄山)을 낳으니, 평생 근후(謹厚)한 성품으로 자신의 뜻을 지켜 명환(名宦)을 구하지 않았다. 관직이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검열 부자가 대덕(大德)을 지니고도 크게 베풀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후손에게 복이 미쳐 자손이 흥성할 것이다.”하였다.
감찰은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니, 공의 훈공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황비(皇妣)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인 성천 부사(成川府使) 휘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영락(永樂) 을미년(1415, 태종 15) 5월 12일 무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골격이 남달랐는데, 장성해서는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온화하고 공손하여 성품이 화락하였다. 교제를 함부로 하지 않았고, 남에게 실수나 실언을 하지 않았다.
서책을 읽으면 대의(大義)를 통달하고 대체(大體)를 알아 동년배들의 추앙을 받았다. 성균관 생원에 뽑혀 보임되니, 이때 영상(領相)인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한 번 보고 큰 그릇으로 여겨 자신의 아들인 한성 소윤(漢城少尹) 황보신(黃保身)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해 주었다. 익성이 항상 말하기를, “김생(金生)은 작게 성취할 사람이 아니다.”하면서 그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겨 갓을 쓰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다.
공은 무오년(1438, 세종20) 사마과(司馬科)에 급제하고, 신유년(1441) 문과에 제7명(名)으로 선발되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고, 전보(轉補)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1445)에 의흥고 부사(義興庫副使)에 제수되고, 얼마 안 있어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447)에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는데, 무과를 주관하여 이양재(李樑材) 등을 뽑았다.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로 옮겼다가 무진년(1448, 세종30)에 다시 감찰에 제수되고,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기사년(1449)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고, 경오년(1450)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임신년(1452, 문종2)에 상을 마치고 나서 승문원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으로 옮겼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조모상을 당하여 대복(代服)하였다.
이해에 세조가 즉위하였는데, 병자년(1456)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상이 갑자기 묻기를, “김국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하였다. 정원에서 조모상을 대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니, 다시 묻기를, “대복을 입은 지 지금 몇 개월 되었는가?”하였다.
정원에서 다시 아뢰기를, “대상(大祥)은 이미 지났고 담제(禫祭)를 아직 지내지 않았을 뿐입니다.”하니, 상이 특명으로 사헌부 지평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 관직이 올랐다.
무인년(1458)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아버지를 시해한 옥사가 일어났다. 본도에서 죄인을 심문하여 처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뢰었는데, 상이 옥사(獄辭)가 구비되지 않은 것을 보고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시역(弑逆)은 인륜의 큰 변고인 만큼 죄주는 것을 반드시 옳게 적용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혹 속인 것이 있다면 도리어 명교(名敎)를 손상하게 될 것이다.”하고, 공을 보내 다시 국문하게 하였다. 과연 억울한 상황을 밝혀내니, 상이 놀라 말하기를, “만약 김국광이 아니었다면 자칫 무고한 사람을 죽일 뻔하였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이 심히 공을 큰 그릇으로 여겼다.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되었다가 성균관 사예로 전보되었는데, 이때에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한때의 신하들을 모아 조종(祖宗)의 옛 법전을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덜고 보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들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선발에 들어 의론에 부쳐진 모든 것을 세밀히 분석하고 주대(奏對)하는 것을 상의 뜻에 맞게 하였다.
상정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두 공훈이 있고 능력이 있는 대신들이었으나 상이 편전(便殿)으로 공만을 불러 일을 논의하였으며, 심지어 말하기를, “내가 국광에게 힘입어 배운 바가 매우 많다.”하기까지 하였다.
기묘년(1459, 세조 5)에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전보되었는데, 이때에 모린위(毛隣衛)의 야인(野人) 낭보아한(浪甫兒罕)이 몰래 다른 계책을 품고 국경에서 다툼을 일으켰다. 상이 오랑캐는 마음이 교활하고 속임수가 많아 헤아리기 어렵다고 여기고 실정을 탐지한 다음 처치하고자 하였다.
파견할 사신으로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자 상이 말하기를, “아무리 생각해도 김국광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하고, 드디어 공을 보냈다. 마침내 배반한 상황을 알아내니, 상이 노하여 신숙주(申叔舟) 등을 보내 적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소탕하고 평정하게 하였는데, 공의 계책이 많았다.
경진년(1460)에 상이 이르기를, “김국광을 호조 참의로 삼았으면 한다.”하니, 대개 호조는 나라의 회계를 전담하는 곳이라 공이 치밀하고 명철하기 때문에 제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전조(銓曹)에서 품계가 낮다는 이유로 반박하여 아뢰자 위용장군(威勇將軍)에 특별히 가자하고 또 중훈대부(中訓大夫)에 특별히 가자하여 사섬시 윤(司贍寺尹)에 제수하여 시험하고, 얼마 안 되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하니,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전보되어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부주(敷奏)를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였으며,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였다.
신사년(1461, 세조7)에 병조 참판에 오르니,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상이 한창 마음을 가다듬어 치세(治世)를 도모하면서 공에게 군사에 관한 정치를 위임하였다. 감독하고 다스리는 것이 법도가 있고 취재(取才)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 정밀하고 자세하니, 상이 매번 국광과 같은 자는 참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아끼고 돌아보는 정성이 나날이 융숭하여 일찍이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서 주어 총애하였다. 하루는 편전에 거둥하여 손수 어반(御飯)을 떠서 공이 먹도록 내려 주고, 얼굴을 기울여 공의 얼굴 가까이 대면서 늙은 환관 안로(安璐)에게 말하기를, “조종조의 서로 뜻이 맞았던 임금과 신하 중에 또한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하니, 안로가 대답하기를,“제가 네 조정을 죽 섬겼지만 오늘과 같은 경우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임오년(1462)에 무과를 주관하여 조영달(趙穎達) 등을 뽑았다. 갑신년(1464)에 호조 판서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올랐으며, 을유년(1465)에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자리를 옮기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병술년(1466)에 병조 판서가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정해년(1467)에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고, 판병조 오위도총관(判兵曹五衛都摠管)을 겸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좌찬성에 올랐다. 이때에 정원에 일이 많아 공을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삼고 기밀을 전적으로 담당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용렬한 자질로 성상의 지우(知遇)를 잘못 입어 이미 이공(貳公)의 자리에 오르고 또 병조 및 도총관을 겸하고 있습니다.
분수에 넘쳐 직분이 걸맞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지금 다시 도승지를 겸한다면, 기무(機務)가 지극히 중하여 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하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여름에 길주(吉州)의 역적 이시애(李施愛)가 몰래 딴마음을 품고 백성을 선동하여 한 도의 감사, 절도사, 수령을 모조리 죽이고 반역하니, 상이 북쪽 지방을 근심하였다. 공이 군정을 총괄하여 막부(幕府)에서 계책을 내니, 일 처리가 합당하였다.
일찍이 조용히 아뢰기를, “성상의 덕이 신무(神武)하신데, 저 하찮은 반역의 무리를 어찌 족히 입에 담을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웃었다.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이만주(李滿住)가 오랫동안 성인(聖人)의 교화를 거부하고 또 상국(上國)을 침범하자 황상(皇上)이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면서 본국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유시하였다.
두 지역에 군사를 쓸 일이 창졸간에 생겼으나 공이 계책을 운영하고 방책을 결정하며, 좌로 수응하고 우로 응답하여 시행에 불가한 것이 없었으니, 상이 대단히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이시애가 처형되고 장수들이 건주위의 정벌에서 이기고 돌아오니, 상이 이르기를, “북쪽 지방의 역적 토벌과 서쪽 건주위 정벌에 군사를 출동하여 조금도 허술함이 없이 완전하게 된 것은 오직 공의 힘이다.”하니, 사양하여 말하기를, “성상의 계책과 꾀를 받든 것이니,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책훈(策勳)하여 ‘정충출기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를 내렸다. 얼마 후에 숭록대부에 올라 좌찬성에 제수되었는데,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유언비어를 만들어 중상모략하고자 하고 간관(諫官) 역시 간쟁하니, 상이 진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김국광은 반드시 이런 일이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안다. 하물며 지금 나라에 일이 많은데 김국광이 아니면 누구와 대사를 논의하겠는가. 나랏일을 그르치는 자는 반드시 이들 무리이다.”하고, 간관을 죄주었다.
무자년(1468, 세조14) 설날에 상이 정전에 거둥하여 회례연(會禮宴)을 열었다. 예전의 관례에서는 수상(首相)이 반열의 위차를 정하여 정돈하고 잔을 올렸는데, 특별히 명하여 공이 먼저 하도록 하니, 대개 공을 총애해서이다. 창릉(昌陵 예종)이 이어 즉위하여 세묘(世廟)의 고사(故事)를 따라 일찍이 의정을 거친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훈상(勳相)에게 정원에 앉아 국정을 논의하게 하면서 원상(院相)이라고 이르고 날마다 정원에 출사하여 기밀 정사를 협조하여 돕도록 하였는데, 공 역시 이에 참여하니 시론(時論)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기축년(1469, 예종1)에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로 발탁되어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금상(今上 성종)이 즉위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에게 맡기고자 하여 영경연을 인해 날마다 고문(顧問)하니, 존숭하고 예우함이 더욱 중하였다. 경인년(1470, 성종1)에 좌의정으로 오르고, 여름에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다녀왔다. 신묘년(1471)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계사년(1473)에 부친상을 당하여 을미년(1475)에 복을 벗으니, 불러들여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겸 영경연사에 제수하였다. 과거를 관장하여 신계거(辛季琚) 등을 뽑았고, 무술년(1478)에 시석(試席)을 주관하여 권경희(權景禧) 등을 뽑았으며, 경자년(1480)에는 신종호(申從濩) 등을 뽑았다.
겨울에 병이 위독하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주고 좋은 약제를 하사하여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마침내 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원근을 막론하고 부음을 들은 자들은 모두 애통해 마지않았다. 공은 성품이 단정하고 후중하여 관직에 몸담고 일을 담당할 때에 순정하고 결백한 일심으로 공(公)을 받들고 정(正)을 지켰으며, 갑자기 성정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남다르게 별난 언행을 한 적도 없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온화하니 화기애애하여 평생 말을 급하게 하거나 갑자기 낯빛을 바꾸는 일이 없었고, 또한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공은 덕이 있는 사람이요 군자였음을 알겠다. 일찍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를 자부하여 우리 세조의 인정을 받았다.
긴밀하고 중요한 직위를 홀로 맡아 올리는 말마다 들어주고 내는 계책마다 시행되었으니, 귀하고 드문 태평성대의 다스림에 있어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기투합한 것은 근래에 없는 일이다.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는 대체(大體)를 힘써 따르고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대신의 면모를 얻었다.
만년에 집안이 너무 번성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여 문에는 머무르는 객이 없었다. 더러는 상이 명소(命召)하여 자문하기도 하고, 더러는 신하를 보내 의견을 묻기도 하였는데, 공은 또한 아는 것이면 다 말하여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는 것만을 생각하였으니, 충성스럽고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공은 승지로서 병조 참판에 제수되고 광성은 동부승지가 되어 형제가 서로 이어 후설(喉舌)에 몸담았고, 몇 년 안 되어 일시에 군(君)으로 봉해졌다. 모부인(母夫人)이 살아 계셔 건강하고 무탈하였는데, 공과 여러 아우들이 규(珪)를 연결하고 벽(璧)을 포개 놓은 듯 모두 훌륭한 데다 모부인의 안색을 살피고 기거(起居)를 적절하게 보살펴 마음을 다해 봉양하니, 효도와 우애를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이상이 공의 일생에 대한 대략이다.
공의 배필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황씨(黃氏) 역시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가정생활에 규범이 있었다. 4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극뉴(克忸)로 무자년(1468, 세조14)의 식년과에 급제하고 일찍이 장례원(掌隷院)을 맡았는데, 판결이 정밀하고 분명하여 사람들이 아버지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공조 참의로 전직하여 자자한 명성이 있었다. 극니(克怩)는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이고, 극수(克羞)는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이고, 극괴(克愧)는 의영고 영(義盈庫令)이다. 장녀는 정랑(正郞) 이한(李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직장(直長) 이혜(李譓)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종사랑(從仕郞) 송여림(宋汝霖)에게 시집갔다.
참의는 감찰 박이지(朴肄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윤(宗胤)이고, 차남은 소윤(昭胤)이다. 딸은 참봉 진수윤(陳首胤)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부정은 직강(直講) 박계금(朴繼金)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맹윤(孟胤)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력은 절도사 황수정(黃守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장남은 귀윤(貴胤)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고 영(庫令)은 상호군(上護軍) 한충의(韓忠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다. 모두 어리다.
아, 공의 성대한 덕과 성대한 공훈으로 살아서는 복록을 누리고 죽어서는 은총의 예전(禮典)을 받았으니, 살아서는 세상이 다 존숭하고 죽어서는 세상이 다 슬퍼하였다는 것에 유감이 없다 하겠다. 여러 아들도 가문을 잘 받들어 전대의 공렬을 빛내고자 빗돌에 새겨 영원히 전해지기를 도모하니, 참으로 훌륭하다.
나는 공과 무오년(1438, 세종20) 과거의 동년(同年)이고, 이어 관각(館閣)과 정부에서 재차 동료로서 몸담아 시종 배종(陪從)한 세월이 43년이다. 공을 가장 깊이 알고 있으니, 명(銘) 짓는 것을 어찌 거절하겠는가. 다만 다시는 대인군자(大人君子)를 볼 수가 없으니, 아아, 가슴 아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넓고 넓은 광산 땅에 / 光山磅礴
대대로 영웅호걸 있었으니 / 世有豪英
공이 바로 문명 날려 / 公乃飛英
그 명성 크게 떨쳤도다 / 大振厥聲
광묘와의 조우야말로 / 遭遇光廟
천 년에 한 번 있을 기묘한 만남 / 千載一奇
바로 은대에 발탁되고 / 乃擢銀臺
바로 사마의 장이 되었지 / 乃長司馬
공은 경세제민의 뜻 품고 / 公薀經濟
공은 세상에 실현하길 원하여 / 公欲設施
계책을 임금에게 고하는 것을 / 謀猷入告
옛 현인 군진을 벗 삼았다네 / 尙友君陳
시행하고 조처함이 마땅하니 / 施措而宜
어디를 간들 안 될 것 있으리오 / 何適不可
저 빛나는 초상화는 / 有炳丹靑
띠와 홀이 엄연한데 / 有儼紳笏
장막 안에 앉아 계책을 운용함은 / 運籌帷幄
바로 자방 그 사람이었다오 / 子房其人
상부에선 깊고 넓은 인품이요 / 潭潭相府
기린각에선 우뚝한 기상이라 / 屹屹麟閣
그 충성과 그 부지런함 / 曰忠曰勤
그 공훈과 그 덕이여 / 以勳以德
백성은 생각하길 복서(卜筮)같이 하고 / 民思龜筮
나라는 의지하길 주춧돌처럼 하였네 / 國倚柱石
어찌 하늘은 공을 남겨 두지 않아 / 何天不憖
이토록 갑자기 불행을 당하게 하였는지 / 遽爾不淑
공신의 맹세 비록 남아 있으나 / 漢礪雖在
거울삼을 신하 이젠 없나니 / 魏鑑已亡
상감께서 비통해하시어 / 當宁興悲
부의 내리니 빛나도다 / 賻贈有章
웅강은 희디희고 / 熊江白白
계악은 푸르디푸른데 / 鷄岳蒼蒼
연산의 언덕이여 / 連山之原
바로 공의 무덤이니 / 是公玄堂
웅장한 빗돌 있어 / 有豐其碑
영원토록 전해지리 / 不朽者存
나의 명은 아첨이 아니니 / 我銘不諛
너희 후손에게 알리노라 / 詔爾後昆
홍치(弘治) 3년(1490, 성종 21) 8월 일에 쓰다.
<끝>
[註解]
[주01] 12년 : 《성종실록》 11년 11월 11일 기사에 실린 김국광(金國光)의 졸기(卒記)와 《문과방목》에는 모두 김광국의 졸년이 성종 11
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종 11년 11월 11일이 간지로 정해일이고 보면 12년은 오류인 듯도 한데,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어 대본
대로 번역하였다.
[주02] 중씨(仲氏) 광성(光城) : 김국광의 동생 김겸광(金謙光, 1419~1490)으로, 자는 위경(撝卿)이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광성은
봉호이다.
[주03] 조반(趙胖)의 옥사 : 조반(1341~1401)은 고려 말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 공신(開國功臣) 2등에 녹훈되고 복흥군(復
興君)에 봉해진 사람이다. 옥사란 조반이 고려 우왕 때 권력을 부리던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을 죽이고 역적으
로 몰려 투옥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도리어 권력을 전횡한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
역 고려사절요 권32 정묘년, 권33 무진년》
[주04] 대복(代服) : 손자가 아버지 대신 복을 입고 상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주05] 위용장군(威勇將軍)에 …… 가자하여 :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기사에 실린 문무백관의 관제에 의하면 위용장군은 무반(武班)
의 정4품 품계이고, 중훈대부(中訓大夫)는 문반(文班)의 종3품 품계이다.
[주06] 살아서는 세상이 …… 것 : 생전과 사후에 모두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에 대한 칭송으로, 《논어》 〈자장(子張)〉에서 자공(子貢)
이 공자(孔子)에 대해 “살아서는 세상이 다 그를 존경하고, 죽어서는 세상이 다 그를 슬퍼하나니, 어떻게 그분에게 미칠 수 있으리
오.[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7] 계책을 …… 삼았다네 : 〈군진(君陳)〉은 《서경》의 편명이자 주 성왕(周成王)의 신하 이름이다. 《서경》 〈군진〉에 성왕이 군진에
게 동교(東郊)를 맡기면서 이르기를, “네가 착한 꾀와 착한 도가 있거든 돌아와서 임금에게 고하라.”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주08] 장막 …… 사람이었다오 : 자방(子房)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에 기여한 장량(張良)의 자(字)이다. 한 고
조가 장량을 평하여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자방만 못하다.[夫運籌策帷幄之中 決勝
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09] 어찌 …… 않아 : 대본의 불은(不憖)은 불은유(不憖遺)와 같은 뜻으로,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에 “한 원로를 남겨 두어, 우
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고[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은(憖)’ 자에 대해 주자는 ‘마음은 하고자 하지 않으
면서도 스스로 억지로 함을 이르는 말[心不欲而自强之詞]’이라고 하였다. 주로 대신(大臣)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로 쓰인다.
[주10] 공신의 …… 있으나 : 대본의 한려(漢礪)는 ‘한나라의 대려(帶礪)’라는 말인 듯하다. 대려는 산하대려(山河帶礪)의 준말로 태산
(泰山)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黃河)가 말라 띠가 된다는 뜻인데, 한 고조가 공신(功臣)들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면서 맹세한 말
에 “황하가 말라 띠만큼 좁아지고, 태산이 닳아 숫돌만큼 작아지도록 나라를 길이 보존하여 먼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자.[使黃河
如帶 太山如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
[주11] 거울삼을 …… 없나니 : 거울삼을 신하는 당나라 때의 재상인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라는 말이다. 위징이 죽자 당 태종(唐太宗)이
한탄하기를 “구리를 거울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옛 사적을 거울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삼으면 잘잘못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 거울을 보전하여 안으로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
졌구나.” 하였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주12] 웅강(熊江)은 …… 푸르디푸른데 : 웅강은 충청도 부여현(扶餘縣)에 있는 백마강(白馬江)을 말하고 계악(鷄岳)은 충청도 연산현(連山縣)에 있는 계룡산(鷄龍山)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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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精忠出氣敵愾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光山府院君。贈諡丁靖公金公神道碑銘。
殿下之十二年冬十有一月丁亥。左議政金公。以病卒于正寢。上震悼。賻贈有加。明年二月。有司具儀衛。其孤克忸等奉靈柩。厝于連山縣東村王臺之原。仲氏光城。以諸孤之意。請居正銘其碑。謹按。公諱國光。字觀卿。金本光之望族。有諱鼎。仕高麗。封光山君。有三子。曰若采。曰若恒。曰若時。登第。舊例。三子登科。封母夫人爵。同時拜顯秩。世榮之。若采在麗季。爲諫大夫。時趙胖獄起。公在合坐所。言論奮揚。慷慨激切。竟坐林,廉。而右胖。物論多之。入本朝。爲大司憲。激濁揚淸。謇諤有憲臣體。官至觀察使。若采生諱問。登第。拜藝文檢閱。早沒。問生諱鐵山。平生諄謹自守。不求名宦。官至司憲監察。人皆曰。檢閱父子有大德。不大厥施。必委祉於後。子孫其興乎。監察卽公皇考也。以公勳。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光城府院君。皇妣金氏。安東大姓。成川府使諱明理之女。永樂乙未五月十二日戊申。生公。公生而骨法異常。及長。聦敏好學。溫恭愷悌。不妄交遊。不失色失言於人。讀書。通大義。識大體。爲儕輩所推。選補成均生員。時領相黃翼成公喜。一見大器之。以其子漢城少尹保身之女妻之。翼成常曰。金生。非小成者。敬重之。不冠不見。公中戊午司馬科。擢辛酉文科第七名。選補承文正字。轉至博士。乙丑。授義興庫副使。尋除黃海道都事。丁卯。授司憲監察。掌武擧。取李樑材等。移成均主簿。戊辰。復拜監察。赴京師。己巳。出爲全羅道都事。庚午。丁內艱。壬申。服闋。除承文校理。遷奉常判官。乙亥。代服祖母喪。是年。世祖卽位。丙子。賜原從功臣之號。上忽問金國光今在何處。政院以祖母代服對。數月。又問遭服今幾月。政院又啓已經大祥。但未禫耳。上特除司憲持平。尋陞副知承文院事。戊寅。咸安人崔玉山弑父起獄。本道推劾以啓。法當坐。上見獄辭不具備。語左右曰。弑逆。人倫之大變。罪之必當其可。小或誣枉。反傷名敎。遣公更鞫。果得冤狀。上驚曰。若非金國光。幾殺無辜矣。由是。上深器公。擢司憲掌令。轉成均司藝。時命開詳定局。聚一時之臣。參酌祖宗舊典。損益時宜。爲經國大典。公在選。凡所擬議。毫分縷析。奏對稱旨。掌詳定者。皆勳賢大臣。而上於便殿。獨召公議事。至曰。予資於國光。所學甚多。己卯。轉宗親府典籤。時。毛隣衛野人浪甫兒罕。潛懷異謀。搆邊 釁。上以虜情狙詐難測。欲探其實而處置。遣使難其人。上曰。思之無踰金國光。遂遣。意得反狀。上赫然。遣申叔舟等。往擣賊所。蕩平之。公策居多。庚辰。上曰。金國光須爲戶曹參議。盖戶曹。專掌一國會計。以公精明。欲授之也。銓曹以秩微駁啓。特加威勇。又特加中訓。試司贍寺尹。俄擢承政院同副承旨。階通政。轉至左副。敷奏詳明。出納惟允。辛巳。陞兵曹參判。階嘉善。上方銳意圖治。委公戎政。董理有法。講畫精到。上每稱。如國光者。眞文武全才也。眷注日隆。常親札事知第一四字。寵之。一日。御便殿。手匙御飯。賜公食。傾日角襯公面。謂老宦安璐曰。祖宗朝君臣相得。亦有如是者 乎。璐對曰。亞歷事四朝。未嘗見如今日者。壬午。掌武擧。取趙穎達等。甲申。陞戶曹判書。超階資憲。乙酉。移中樞府事。陞正憲。丙戌。兵曹判書。陞崇政。丁亥。拜議政府右贊成。兼判兵曹,五衛都揔管。尋陞左贊成。時政院多事。命公爲假都承旨。專掌宥密。公辭曰。以臣庸劣。謬蒙聖知。旣忝貳公。又兼兵曹及都揔管。於分卽踰。懼不稱職。今又兼都承旨。機務至重。非臣所堪。恐累殿下知人之明。牢讓不獲。夏。吉州賊李施愛。陰懷異心。煽動人民。盡殺一道監司,節度,守令以叛。上有北顧之憂。公揔戎政。謀猷帷幄。處置得宜。嘗從容啓曰。以聖德神武。而潢池弄兵。何足置牙齒間耶。上笑之。建州衛野人李滿住。久梗聖化。又犯上國。皇上命將徂征。諭本國赴救。兩地用兵。事出蒼黃。公運籌決策。左酬右答。無施不可。上甚倚重之。施愛旣伏誅。諸將征建州凱還。上謂曰。北伐西征。出師萬全。惟公是賴。謝曰。奉聖筭睿謀。臣何功焉。策勳賜精忠出氣敵愾功臣之號。尋陞崇祿,左贊成。有忌功者。造飛語欲中傷之。諫官亦諫。上震怒曰。予深知金國光必無此事。况今國家多故。非金國光。誰與議大事。誤國事者。必此輩也。抵諫官罪。戊子元日。上御正殿。開會禮宴。舊例。首相押班進爵。特命公先。盖寵之也。昌陵嗣位。遵世廟故事。以曾經議政如申叔舟,韓明澮等二三勳相。 坐政院。議國政。謂之院相。日仕政院。參贊機政。而公亦與焉。時論榮之。己丑。陞輔國崇祿。又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冬。今上卽祚。圖任老成。因領經筵。日賜顧問。尊禮尤重。庚寅。進左議政。夏。以謝恩使赴京。辛卯。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之號。癸巳。丁外憂。乙未。服闋。召拜光山府院君。兼領經筵事。掌文闈。取辛季琚等。戊戌。主試席。取權景禧等。庚子。取申從濩等。冬。疾篤。上遣內醫。賜良劑治療。不效。遂卒。享年六十六。遠近聞者。莫不痛悼。公性資端重。居官蒞事。精白一心。奉公守正。未嘗表襮。亦不崖異。與人語。溫溫一團和氣。平生無疾言遽色。亦不言人過 失。知其爲德人君子也。早負經濟之才。知遇我 世祖。獨典機衡。言聽計從。賁飾太平之治。君臣相得。近代所無。其在相府。務遵大體。不喜紛更。得大臣體。晚年。以盛滿自戒。門無停客。或命召咨訪。或遣使就問。公亦知無不言。以輔君澤民爲心。其忠勤若此。初。公以承旨。拜兵曹參判。光城爲同副承旨。兄弟相繼居喉舌。不數年。一時封君。母夫人在堂。康強無恙。公與諸弟。聯珪疊璧。承候其顏色。順適其起居。盡心奉養。孝友無間。人皆嘖嘖稱美之。此公終始大略也。公之配貞敬夫人黃氏。亦有淑德懿行。居家有範。生四男三女。男長曰克忸。登戊子科。嘗判掌隷院。剖決精明。人稱有父風。轉工曹參議。籍甚有名聲。曰克怩。司僕副正。曰克羞。忠勳經歷。曰克愧。義盈庫令。女長適正郞李悍。次適直長李譓。次適從仕郞宋汝霖。參議娶監察朴肄之女。生二男二女。男長宗胤。次昭胤。女適參奉陳首胤。餘幼。副正娶直講朴繼金之女。生一男三女。男長曰孟胤。餘幼。經歷娶節度使黃守正之女。生三男。長曰貴胤。餘幼。庫令娶上護軍韓忠義之女。生二男。皆幼。嗚呼。以公之德之勳之盛。生享福祿。沒膺寵典。哀榮終始。盖無憾矣。諸孤亦克承家。欲光前烈。刻貞珉以圖不朽。其賢矣哉。居正與公。忝同戊午榜。繼而於館閣政府。再叨僚貳。終始陪從四十有三年。知公最深。銘於何辭。第不復見大人君子。嗚呼痛哉。銘曰。
光山磅礴。世有豪英。公乃飛英。大振厥聲。遭遇光廟。千載一奇。乃擢銀臺。乃長司馬。公薀經濟。公欲設施。謀猷入告。
尙友君陳。施措而宜。何適不可。有炳丹靑。有儼紳笏。運籌帷幄。子房其人。潭潭相府。屹屹麟閣。曰忠曰勤。以勳以德。
民思龜筮。國倚柱石。何天不憖。遽爾不淑。漢礪雖在。魏鑑已亡。當宁興悲。賻贈有章。熊江白白。鷄岳蒼蒼。連山之原。
是公玄堂。有豐其碑。不朽者存。我銘不諛。詔爾後昆。弘治三年八月日。
四佳文集補遺一 / 碑誌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