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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숭산(德崇山. 495.2m)을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4월27일 잔뜩 흐린 날씨에 곧바로 비가 올 것 같으다. 일기예보는 아침부터 2~3일간 비가 계속 올 것이라고 연일 방송을 해대니~ 간밤엔 잠까지 설쳤도다! 어제 낮부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불참을 통보 해 오시드니 55명 접수에 승차인원 36명이다. 그래도 출발 때 비가 안와서 그런 다행이 없슴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서 ‘김천휴게소’에서 준비해 온 조식(朝食)을 드시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세월호 침몰사건”의 영향인지 많이도 조용합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전교생”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진도 앞바다의 “맹골수도” 부근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여 476명(174명 생존)의 사상자가 있었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이야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과 청해진해운’에게 있겠지만,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성장과 치부(致富)에 급급한 나머지 그 과정을 소홀히 하여, 실적에만 매달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自畵像)이 아닐런지요! 온 몸에 입이 달린들 무슨 할말이 있겠슴니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탄식이 나올뿐입니다!
산천(山川)은 예나 지금이나 여여(如如)하여서 말이 없슴니다! 늦은 4월이라 꽃피고 새잎나니 천지(天地)는 녹색으로 덮여서 보기에도 시원하며, 영동 부근에서 부터는 보슬비가 사~락~ 사~락~ 차창을 때리시니 산행에는 무리가 없을지 염려가 됨니다.
얼마를 달렸을까? 대전광역시 회덕분기점에서 다시 “당진” 방향으로 줄곧 내달아서 ‘예산IC’에서 45번 지방도를 타고 “둔리1리”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10시 40분을 조금 지나있다.
비는 보~슬~ 보~슬~ 소리없이 나리고~ 소형 주차장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대신에 “잘오셨슈 & 반가와유”라는 목장승이 낯선 이방인(異邦人)을 반겨주신다.
그 뒤로는 여러개의 솟대를 세워서 하늘의 소식을 전해 주시고, 우측(동남쪽)으로는 소 두 마리와 다섯 개의 솟대를 세워 놓았다. 21세기 ‘설치미술(設置美術)’이요! 둔리의 ‘액막이 장승’이로다!
“잘오셨슈, 반가와유”라는 말에서~ 이 곳이 충청도라는 것을 일감(一感)으로 느끼면서... 정예부대(종주팀) A팀과 B팀(하산기점 역산행)으로 나뉘어서 빗속으로 출발합니다. 들논을 지나 마을 어귀에 이르니 예쁜 이정표가 반겨 주시고, 그 옆으로는 작은 연못과 화단을 만들어서 흐드러지게 핀 ‘연산홍’이 빗속에서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놓칠세라~ 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몇걸음을 더 오르니, 옹기단지에 ‘얼굴모습’을 새겨 놓았다. 주인장이 ‘조각가’이신가? ‘마을호수(戶數)’는 적어도 입구로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듬니다.
서울이 가까워서 인가? 산기슭에는 전원주택으로 보이는 집이 여러채가 있으며, 우중(雨中)이라 인기척은 없고 멍멍이만 나와서 목청껏 짖어댄다! 하기사 요즘은 “개를 모시고 사는 세상이니~” 개값은 해야제~!
마을을 지나 산으로 몇걸음을 더 오르니 꽤 큰바위에 산신제(山神祭)를 모시는 단(壇)에 “산왕대신 지위(山王大神 之位)”라고 새겨져 있다. 대개는 ‘신목(神木=당산목)’을 섬기는데 보기드문 일입니다.
앞서 오르시는 님들의 모습이 형형색색(形形色色)이라! 울긋~ 불긋~ 비옷에다 우산까지 들고 등산하는 모습이 재밋슴니다 그려! 30여 분을 올랐을까? ‘둔리고개’를 지나 가파른 언덕위에 자연석 ‘전망대’가 있는데...
천하(天下)는 운무(雲霧)로 덮여서~ 말 그대로 운해(雲海)로다! 이보다 더 좋은 경치가 또 있겠는가! 높고 낮은데도 없으며~ 울~긋~ 불~긋~ 서로 다른 모양도 없이 오로지 ‘절대평등(絶對平等)’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김해진님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오르면서 보니, 오늘은 ‘105mm포(큰사진기 별명)’ 대신에 조그마한 ‘디카’를 휴대하고 계신다. 그는 불교방송국에서 ‘입상(入賞)’의 경험과 현재 “신암동 경로사진작가”로 활약하고 계시며, 그 외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사진작가’이시다.
등산로는 비교적 순탄하고 주위에는 진달래(참꽃)과에 속하는 꽃들이 흰색, 보라색, 연분홍 등 형형색색으로 피어서 함초롬히 비에 젖어 배시시~ 웃고 있으니... 오늘따라 아름답기 보다는 소담스럽게 보입니다!
여러고개를 오르락 내리락 넘어서, 또 간식도 드셔 가면서~ 90여분을 등산하여 정상에 도착하니, 시계는 12시 20분을 조금 지나있다.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적당한 소나무 아래서 중식을 드심니다.
빗방울은 또~닥~ 또~닥~ 우의(雨衣)는 입어도 벗어도 좋을만치 오는데, 자리깔고 신발벗고 모두들 편안히 둘러앉아 식사를 하시니... 반찬도 가지 가지라! 미나리, 상추, 연근, 우엉김치, 배추김치, 파김치, 무말랭이, 마늘짱아치, 감자부침개, 고추무침, 풋고추 등 끝이 없슴니다 그려!
또 식후 디저트로 방울토마토, 사과, 밀감 까지 맛나게 드시고, 노익장(78) 서부장님은 손수 커피까지 타서 나누어 주시니, 인정이 따사롭고 정감이 철~ 철~ 넘쳐 남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늘 오늘만 같았으면...
이런 저런 얘기들로 얼마를 쉬노라니 역산행(수덕사에서 출발)으로 정상에 도착하신 김창수님, 이미자님, 김민정님, 김도연(내자)님 까지 합세 하시니, 뜻하지 않은 상봉(相逢)에 조용하던 산천이 시끌벅쩍 합니다.
기념으로 ‘단체촬영’을 하고는 깔아놓은 자리에서 네분이 식사를 하실동안 사방을 조망(眺望)하니, 천지는 운무(雲霧)로 덮여서 분별할 수 가 없슴니다.
이 곳 덕숭산(495.2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부근에서 서북으로 구룡산, 칠보산, 보현산을 거쳐 칠장산 부근에서 다시 서남으로 천안의 성거산, 흑성산, 고려산을 지나 보령시 부근의 백월산에서 또 서북으로 방향을 틀어서 덕숭산에 이르고, 이어서 그 잔여지맥은 가야산, 석문봉, 상왕산을 거쳐 지령산, 부근에서 서해바다에 그 지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금북정맥(錦北正脈)”이라 한다.
인하여 천리(千里)를 달려온 용맥(龍脈:산줄기)의 산기슭에는 오고 간 인걸도 많아서, 유자(儒者)와 불자(佛者)들의 수가 냇가의 모래알 보다도 많슴니다. 덕산면의 시량리에는 “윤봉길의사님”의 생가(生家)가 있고, 정혜사와 수덕사, 견성암에는 “경허(鏡虛), 만공(滿空), 혜암(惠庵), 원담(圓潭), 설정(雪靖), 일엽(一葉)스님” 등의 발자취가 있어 덕숭산(德崇山)은 말 그대로 덕(德)이 하늘같이 높슴니다.
시계(視界)가 멀지 않아서 두루~ 두루~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한채 ‘정혜사’ 방향으로 하산 합니다. 솔향기 꽃향기 그윽하여 온 몸에 즈며드니... 향물에 목욕한 듯 향기(香氣)도 좋을시고!
보슬~ 보슬~ 봄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하여서, 나무숲에는 은구슬 옥구슬이 방울 방울 맺혀있고, 스치는 바람에 후두~둑~ 후두~둑~ 얼굴을 간지려 주심니다. 호오이~ 호오이~ 발걸음도 가벼웁게 20여 분을 나려오니, 고즈넉하고 상(祥)스러운 길지(吉地)에 ‘정혜사’가 진좌(鎭坐)하고 있도다!
일광문(日光門)으로 들어서 여러계단을 내려가니, 도량(道場)은 밝고도 청정(淸靜)하며 영겁(永劫)의 침묵속에 찬란히 빛나고 있슴니다. 정원에는 붉은 연산홍이 만발하여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입니다.
전각(殿閣)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서 관음전을 비롯하여 능인선원, 요사채 등 비교적 단촐하다. 이 곳 정혜사 ‘금선대’는 만공(滿空)스님이 수도하시던 곳이며, 스님은 수덕사와 정혜사를 오가며 후학들을 지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근세 선불교(禪佛敎)사에 있어 경허(鏡虛)스님은 중흥조(中興祖)요, 만공(滿空)스님은 그의 법맥을 이은 사제(師弟)지간으로서 출생지(전북 전주)와 덕숭산 일대에서 수도한 공통점이 있다.
경허(鏡虛.1849~1912)는 전주 자동리에서 출생하여, 경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성우(惺牛), 속세의 성(姓)은 송(宋)씨였다.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한학과 불경을 공부하여 1871년 23세때 동학사 강사로 추대 되었다.
그 후 30살(1879) 때 어느마을의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속에서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새로 발심하였다. 그는 한손에는 칼을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세우고 졸음을 쫓으면서 피나는 정진을 하였으며, 그러던 어느날 한 사미승이 경허스님에게 “콧구멍 없는 소(無鼻孔牛.무비공우)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소리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오도송(悟道頌)을 남기고, 이후 계율(戒律)에 걸림이 없는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는데... 때로는 문둥병 걸린 여자와 몇 달간 동침을 하기도 하고, 또 술에 만취하여 법상에 오르기도 하는 등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마침내 그는 55세(1904) 때 사찰을 떠나 머리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는 서당에 훈장 노릇을 하며 살다가 1912년 4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름도 박란주(朴蘭洲)로 개명(改名) 하였다고 하며, 그의 제자로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만공스님(1871~1946)이 스승 경허스님을 만난 것이 14살 때 였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우리 불교계를 지킨이가 만공스님이다. 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아서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揭)를 받았으며,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중생교화에 힘을 쏟았다.
한번은 사제(師弟)간에 탁발(托鉢)을 나갔다가 만공이 시주물(바랑에 든쌀)이 무겁다고 투덜대자, 경허스님이 갑자기 물동이를 이고가는 예쁜 새악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마침 이광경을 본 농부들이 “저 중놈들 잡아라!”하며 쫓아오자, “걸음아 날살려라!”고 힘껏 내달아 산고개를 넘어서야 안도의 숨을 쉬며, 만공스님이 물었다. “아까는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질책을 하자 경허스님은 “아직도 무겁냐?” 하신다. 만공스님이 “덕분에 무거운줄 모르고 여기까지 잘 왔슴니다.”하시니... ‘모든 것이 한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1937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 주재로 전국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이 때 만공스님은 ‘마곡사’ 주지로 참석 하였는데, 미나미 총독은 전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의 업적을 지리하게 칭송(稱頌)하며 일본불교와 조선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본산 주지들의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이때 만공스님이 벌떡 일어나 ‘미나미’ 총독을 향해 벽력(霹靂)같은 소리를 질렀다. “청정(淸淨)이 본연(本然)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겨 나왔는고?” 회의장은 웅성 거렸다.
이어서 “전 총독 ‘데라우찌’야말로 우리 조선불교를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일본 승려를 본받아 계율을 파하게 하고 대처토록 한 장본인입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정치와 종교는 엄연히 분리돼야 합니다. 불교진흥은 정부가 불교를 간섭하지 않는 일이오.” 하고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한다.
연하여 일엽(一葉.1896~1971)스님을 제자로 두었는데 그는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날리던 이였다. 속성이 김씨요 본명은 원주(元周)였는데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까지 유학을 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성 사회활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 그는 1920년에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국내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간행하기도 했으며, 1962년 출가이후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 까지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이상 선원빈 저 큰스님 참조)
천하 절경이요,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정혜사’를 한바퀴 휘~ 돌아 몇계단을 내려오니, 언덕아래 고즈넉한 곳에 “만공탑(滿空塔)”이 팔각 기단석 위에 팔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몸돌로 모셔져있다. 이 탑은 스님의 제자인 동경미술학교 출신 박중은이 1947년에 세웠다고 한다.
정혜사에서 수덕사로 내려가는 등산로 주위에는 석불, 석탑이며, 또 수행처소로 보이는 여러채의 전각들이 높은 벼랑 끝에 아찔하게 자리하고 있도다! 그 중간에는 1924년에 만공스님이 세운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있는데, 7m가 넘는 몸체에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갓을 얹은 모양세가 논산의 반야산 “관촉사”의 미륵상과 많이도 닮아 있슴니다.
다시 10여 분을 더 나려오니 등산로 중간에 ‘사면석불(四面石佛)’이 모셔져 있는데, 근세에 조성된 것으로 그 역사성은 없으나 예술성은 뛰어나서 아름답고도 세련됀 작품이다. 안내문에 이 “사면석불”은 1983년에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방(四方)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조성한 것으로 “박태화 居士”님의 정성으로 2008년에 봉안했다고 적혀있다.
그럭저럭 수덕사 경내에 도착하니 맨 위쪽에 “승가대학”이 자리하고 그 옆을 돌아드니, 조그마한 석불(관음불)이 앙증스럽게 모셔져 있으며, 또 축대 위에도 한얀색의 “관음보살”님이 입상(立像)으로 모셔져 있어 성당의 “성모마리아상”인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도량(道場)내에는 울긋~ 불긋~ 오색연등(五色燃燈)이 찬란하고 오고가는 참배객들로 북적 북적 활기가 넘쳐 남니다. 연등아래 ‘3층석탑(유형문화재 제103호)’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되었으며,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고려초기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련됀 멋은 없으나 비교적 균형미를 갖춘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에는 보륜(寶輪)만 남아 있었으나 찰주(擦柱), 보개(寶蓋), 복발(覆鉢), 노반(露盤)을 새로 만들어서 얹어 놓았다. 천년의 세월동안 침묵속에 여여(如如)히 법신(法身)을 나투시니... 비에 젖은 몸돌에 역사가 찬란합니다!
‘우요삼잡(右遶三匝:세번 오른쪽 돌기)이라!’고 우측으로 탑을 세 번 돌고는 다시 여러계단을 올라 ‘대웅전(大雄殿:국보 제49호)’에 이르니,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건물에 정면3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안내문에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의 극락보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남 무위사의 극락보전 등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래 된 건축물이다. 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때 중수년대가 적힌 글씨가 발견되어 알게 되었다 한다. 또 기둥은 ‘배흘림’을 하고 있으며 들보가 11량이나 된다.
간단한 참배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주산은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백호(白虎)는 그만 그만하고 청룡(靑龍)은 잘 발달하여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으며, 다만 안산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국세가 커서 다소 허(虛)하게 느껴진다.
넓고 커다란 도량에 많은 전각(殿閣)들을 세우고, 비보숲(裨補林)을 가꾸어서 경사(傾斜)가 주는 공허(空虛)함을 최대한 보완(補完) 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하여 ‘황하정루(黃河精樓)’의 전각을 한층(현 2층) 더 올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강문(金剛門)을 나서니 우측으로 “수덕여관”이 초가지붕으로 단장되어 본채는 비어있고, 그 뒤로 별채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들머리 우측 ‘자연바위’에는 고암 이응로(顧菴 李應魯.1905~1992)가 새긴 “문자추상화”가 있으며, 그는 근현대사에 가장 빼어난 화가 중의 한사람이다.
이 바위그림들은 이응로가 ‘동백림 공작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요양하면서 새긴것이라 하며, 19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당시 유럽에 있던 이응로와 윤이상 등 문화예술인이 양아들을 만나는 등의 이유로 북한에 다녀 온 것을 빌미로 공작원으로 몰아 만든 사건이라 한다.
이응로는 이때 이미 재혼하여 전처(前妻) 박귀희씨가 운영하는 수덕여관에 요양차 머물며 이 바위그림들을 남긴채 다시 파리로 떠났으며, 1992년에 ‘회고전’이 열리기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회고전이 열리던 도중 파리에서 죽었다.
부슬~ 부슬~ 봄비는 진종일 나리는데... 허허(虛虛)로운 맘으로 일주문을 나서니, 도로 양변(兩邊)에는 코밐한 조각품들이 많이도 전시돼 있도다! 개중에는 어릴적 오줌싸고 키를 덮어쓰고 소금 꾸러가던 작품이 있어 고소(苦笑)를 금(禁)치 못합니다.
후미에서 많이도 늦었는가 보다! 능선님과 벽송님의 전화가 빗발침니다! 간단히 하산주를 마치고 귀가길에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답사하기로 하여 차는 신나게 달림니다.
20여 분을 달려 “윤봉길 의사 사적지”에 도착하니 넓은 주차장에 답방객(踏訪客)은 거의 보이지 않고 수암산의 산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슴니다. 충의문(忠義門)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여러계단을 올라 충의사(忠義祠)에 모두들 분향(焚香)후 묵념(黙念)을 합니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1908년 6월 21일 이 곳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梁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증조부 윤재가 정착한 곳으로 풍수가들은 이 터에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했다 한다.
가야산의 원효봉을 주산으로 삼아 마주한 자리로서 “금북정맥”의 지산(支山)인 용봉산, 수암산으로 이어져 내린 끝자락에서 용봉산을 다시 되돌아보는 형세인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양택지에 지어진 집이라 한다. 또 오른쪽에는 덕숭산의 세 봉우리가 붓끝모양으로 “삼태필봉(三台筆峰)”의 형세여서 유학자나 지사가 나올 자리라 한다.
게다가 가야산과 덕숭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合水)되어서 ‘윤의사님’의 생가인 목바리 앞에서 작은 ‘삼각주(島中島)’를 만들었다가 다시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서 내려오는 개울물과 만나는 지점에 있으니, 득수(得水)도 제대로 이룬자리라고 한다.
그는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했으나 그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 곧 바로 자퇴하였고,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웠다고 한다. 1926년에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농민독본]이라는 책도 짓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23세 되던 1930년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만주를 거쳐 1931년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선생 휘하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드디어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일본천황 생일축하일)행사’를 하던 “상해 홍구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 사령관이 즉석에서 폭사하고 행사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윤의사님’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1월에 일본으로 끌려가 12월 19일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총살형을 당했다.
당시 중국의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중국군 백만 대군이 못 하는 일을 해냈다.”면서 칭송했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홍구공원에서 의거할 때 지니고 있던 소지품과 생전에 쓰시던 유품, 서책, 글씨 등이 전시돼 있으며, 이 모두(13종 68점)를 일괄하여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생가 내부에는 “저한당(抯韓堂: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고 쓴 윤의사의 친필(親筆)이 걸려있으며, 대문입구에는 “야학방(夜學房)”이 있는데, 이곳은 윤의사가 ‘오치서숙(烏峙書塾)’을 마치고 돌아와 ‘문맹(文盲)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야학회(夜學會)”와 “농촌부흥운동(農村復興運動)”을 처음으로 시작한 방이다. 세 채가 다 조촐한 초가(草家)이며 “광현당(光顯堂)”이라는 당호도 붙어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님이시여!
우리들은 님에게 무엇으로 보답 했던가
살아 백년이 어려운데...
죽어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아~슬프고 애닯도다! 통일로 보답하세!
단기 4347년(서기 2014년) 4월 27일
충남 예산군 덕숭산(495.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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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일 피일 바쁘다는 이유로 산행후기가 많이 늦었슴니다.
이해를 바라오며, 산행당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동참해 주신
모든분들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림니다.
아울러 진행에 수고하신 벽송대장님을 비롯하여 구운영위원장님,
능선님, 광열님, 박총무님 등 에게도 감사를 드리오며, 무엇보다
새로 가입하신 세분(여울목님, 이미자님, 이상희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림니다. 모든님들! 내내 건강하시고 5월에는 더욱 행복하세요!
회장님
빗속 산행도 즐겁게 잘다녀오셨네요~
이핑계~
저핑계~ 자꾸 못가게되어 송구하옵니다
산행후기 잘보고갑니다~♪♪
즐거운 연휴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구슬님! 열심히 출책해 주시는 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산행은 조여사님과 시간 되실 때 오세요~
남산은 언제나 열려 있슴니다! 우리 모두 기다릴 것 입니다~
가랑비 맞으며 덕숭산을 오르고 운해가 가득한 등산길....
많은 추억을 한아름 안고 왔지요.
항상 수고 하시고 역사 문화...윤의사님 사적지까지 답사를 하고 오니 감회가 깊습니다.
황고문님! 늘 고맙슴니다.
어려운 가운데 회원님들의 협조로 많은 발전이 있슴니다~
항상 보이지 않게 많은 협조를 해 주셔서 감사하오며,
내내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빌겠슴니다~
그날의 산행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며칠안되었지만 또 멋진추억이 되네요 ~ ~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
여울목님! 넘~ 고맙슴니다~
우리 힘을합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갑시다~
정회원 가입을 진심으로 추카~ 추카~ 드림니다~
긴장문의 기행문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먼후날 남산의 산행의 좋은 자료가 될것같습니다.
늘 남산을 사랑하는 고회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벽송님이 다녀 가셨군요~
당일 궂은 날씨에도 산행 진행에 수고 많으셨으며,
남산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심에 감사 드림니다.
졸문의 후기를 감상해 주셔 감사드리며, 내내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