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한 장을 살짝 넘기니 시나브로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지난 여름의 가마솥 찜통 더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만치 물러나 버렸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변의 비키니도 이제 추억으로 간직될 뿐이다.
사상 유례없는 무더위로 한동안 발길을 끊은 산꾼들도 이쯤 되면 슬슬 산등성이가 그러워질 때다.
가을을 찾아 남한땅 정중앙에 위치한 충북 영동의 백화산 주행봉으로 떠나보자.
울울창창한 신록이 무성한 활엽수림과 하산길의 시원한 계곡수가 기다리고 있는 이 산의 자랑은 뭐니뭐니해도 암팡진 암릉. 조물주의 의도적인 조탁이 가해진 듯한 이 암릉을 오르내리다 보면 지난 여름 내내 왜 지팡이를 접었을까 하는 후회가 앞설 듯 싶다.
백화산 주행봉의 암릉길은 좌우 모두 낭떠러지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 |
주변의 풍광도 기가 막히다. 산행 중 발 아래로는 전형적인 사행천인 석천(石川)이란 이름의 굵직한 계곡이 구절양장으로 흐르고, 석천 인근에는 천년고찰 반야사가 연꽃처럼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산행은 반야교~황간산림욕장~855봉~주행봉(874m)~반야교 갈림길~안부(한성봉·반야교 갈림길)~계곡~반야교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 50분 정도. 들머리만 잘 찾으면 산길 대부분이 외길이라 별 문제가 없다.
비록 부산서는 약간 멀지만 적당히 걷고 적당히 암릉을 탄 후 계곡에서 깔끔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초가을 산행지다.
반야사 경내 | |
산행은 반야교를 건너 왼쪽 포장로로 오르면서 시작된다. 반대편인 오른쪽은 하산길이다. 6분 뒤 갈림길서 오른쪽 산림욕장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50m쯤 오르면 포장로가 끝나고 한눈에 봐도 들머리로 보이는 산길이 열려 있다. 돌계단길이다.
산림욕장답게 초입엔 나무이름이 적힌 팻말이 걸려 있고 등로 좌우로 쉴만한 벤치와 평상 그리고 체력단련기구가 잇따라 놓여 있다.
만경대 위 문수전. | |
본격 고된 된비알은 이장한 무덤터를 지나면서 시작된다. 참나무 시들음병 방제를 위해 훈증처리한 곳도 지난다. 희귀한 사철란도 눈에 띈다. 제주도와 울릉도에 주로 분포한다는데 이곳 내륙에서까지 자생하고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45분쯤 힘겹게 한바탕 땀을 쏟으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지능선에 올라선다. 지도상으로 640m쯤 된다. 정면 발 아래로 태극무늬 물줄기의 석천과 반야사의 풍광이 기가 막히다. 이 모습은 고도를 높일수록 더 넓은 화면으로 다가온다.
이때부터 본격 암릉길로 접어든다. 위압감을 주는 우람한 암릉이 아니라 촘촘하며 앙증맞아 그리 어렵지 않다.
이끼 낀 집채만한 바위를 연이어 오르면 암봉의 정점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855봉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정상에선 직진한다. 7m쯤 뒤 갈림길. 오른쪽은 반야교로 이어지는 탈출로, 산행팀은 왼쪽으로 내려선다. 이내 잠시 잊었던 암릉길이 기다린다. 좌우 모두 낭떠러지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발 밑에는 파란 닭의장풀 군락지가 유난히 자주 눈에 띈다.
한 굽이 넘으니 정면에 향후 넘어야 할 크고 작은 암봉들이 도열해 있고 그 우측 뒤로 백화산의 주봉인 한성봉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이어지는 산길. 이번엔 보기만 해도 아찔한 급내리막길을 밧줄에 의지해 내려선다. 이어 바위틈새가 만들어 놓은 길을 지나 집채만한 바위군을 우회하면 이번엔 비스듬히 누운 농짝만한 바위를 힘겹게 올라선다. 한마디로 우리네 산에서 볼 수 있는 각양각색의 바위길과 암릉길은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45분 정도 정신없이 암릉길을 지나면 일순간 시야가 트인다. 여전히 넘어야 할 작은 봉우리가 얼핏 2, 3개는 될 듯싶다. 참고로 왼쪽은 상주, 오른쪽은 영동땅이다.
다시 숲길로 7분쯤 가면 시야가 트인다. 이후 암릉길이 약간 이어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평온한 오솔길을 20분쯤 걸으면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안부에 닿는다.
직진하면 종주코스인 한성봉으로 이어진다. 산행팀은 원점회귀를 위해 우측으로 내려선다. 6분이면 무덤을 지나고 10분 뒤 물이 거의 없는 계곡 상류에 다다른다. 20분쯤 계곡과 나란히 걷다 보면 유량이 풍부한 지점에 닿는다. 잠시 땀을 씻고 목을 축인 후 계류와 산길을 수차례 이리저리 건넌다. 13분쯤 뒤 유난히 주변 경관이 빼어나 발걸음을 늦추고 쉬엄쉬엄 가다 보면 이내 계곡을 벗어나며 도로로 올라선다. 도로 옆 유량이 풍부한 계곡은 여러 명이 동시에 발을 담그고 씻을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다. 이곳에서 들머리인 반야교까지는 4분 걸린다.
# 떠나기전에
인근 반야사 세조 치병설화 전해내려와
백화산의 주봉은 영동과 상주의 경계를 가르는 한성봉(933m). 국립지리정보원 지형도에는 백화산맥이라고 표기될 정도로 산세가 웅장하고 날카롭다.
백화산은 원래 한성봉~주행봉 코스가 보편적이지만 부산서는 시간적 제약으로 종주가 사실상 불가능해 두 번에 걸쳐 나눠 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년 전 산행팀은 한성봉을 상주 모동면에서 올라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옛 잠수교 쪽으로 하산한 적이 있다.
한성봉에는 각각 '백화산' '포성봉'이라 적힌 정상석이 둘 있지만 마을사람들은 한성봉이라 부른다.
사연은 이렇다. 고려 때 몽고군이 침입, 백화산에서 고려군에게 대패한 후 한탄한 데서 한성봉(恨城峰)이라 불리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성봉(漢城峰)으로 변했다. 포성봉(捕城峰)은 일제가 우리 국운을 꺾을 목적으로 정상 아래 금돌성을 포획한다는 의미에서 명명했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립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아직도 포성봉으로 표기돼 있다.
신라 천년고찰 반야사는 반야교에서 차로 3, 4분이면 닿는다. 입구에 조그만 못이 있어 첫인상은 포항 운제산 기슭의 오어사를 연상시킨다. 경내 극락전 앞에는 수령 500년 된 배롱나무 두 그루가 꽃을 활짝 피워 보물인 삼층석탑을 감싸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반야사는 세조의 치병 설화가 전해온다. 조카 단종을 폐한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반야사에 들러 참배 중 문수동자의 인도로 절 뒤의 영천(靈泉)에서 목욕한 다음 병이 나았다 한다. 현재 망경대라 불리는 일명 문수바위에 문수전이 자리잡고 있다. 절에서 200m 거리에 있다.
맛집 한 곳 소개한다. 황간 특산물인 올갱이(다슬기)국밥집 황간식당(043-742-4327)이다. 집에서 담근 된장을 푼 후 부추 근대 애기배추 등과 갖은 양념을 넣어, 먹는 사람들마다 별미라고 감탄한다. 5000원. 황간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2분, 황간IC에선 차로 5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