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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29)서문시장 1950년대 전국 최대 의류 도매시장 명성 | ||||||||||
서문시장은 1920년 천왕당지(天王堂池)를 매립하여 만든 시장이다. 서문 밖인 지금의 동산동과 시장북로 일대에 흩어져 있던 기존 시장을 옮겼는데, 그 이유로 도심에 거주지와 신작로 상권을 확장하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정치적인 배경도 한몫했다. 서문시장이 기미년 ‘3`8만세운동’ 집결지였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터라, 당시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대구부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1923년경 서문시장을 완전히 이전 조치했다. 그 규모는 8천284㎡(2만5천여평)였다. 처음에는 동산 앞에 옹기전이 있었다. 그리고 계성학교 담장을 따라 건어물 상점이 있었고, 서쪽 구석진 곳에서 말과 소를 거래하였으며, 그 가운데 난전은 5일(2, 7일)장이었다. 1950년대 들어 시장이 상설화, 상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6`25전쟁 이후 피란민으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고, 전통적인 섬유도시로서의 이점을 배경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포목 도매시장으로 성장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대구의 15개 시장 전체 거래량의 40%를 차지하는 호황을 누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상권을 움직이는 중심이었다. 섬유 거래량은 전국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시장은 전체가 6개 지구로 형성돼 있다. 포목`직물`의류 등 섬유 관련 품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청과물`건어물`신발 등 빠진 것이 없을 정도로 구색을 갖춘 시장이다. 그만큼 대구 경제의 중심에 있던 시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대구 섬유산업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덩달아 도매시장 기능도 쇠퇴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전국 도로망의 발달로 유통체계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서울과 부산의 세력에 밀린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도시 중심지역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 해서 기존의 터전이 협소해지고 시장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교통체증이 심각해서 이용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서문시장은 잦은 화재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지은 낡은 건물과 좁은 통로로 인해 화재에 무방비 상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서 1960년대에 들어 세 차례의 대형화재로 목조건물이 전부 소실됐고, 1970년대에 들어 또다시 두 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며, 2005년과 2007년에도 큰 불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화재와 관련된 뒷이야기가 숱한데, 예전에는 천왕당지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의 원혼 탓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해마다 비용을 거둬서 원혼을 달래기 위한 굿을 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 광경이 신비스러워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