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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소리 스크랩 소리는 에너지다
지어지선 추천 0 조회 49 12.01.18 1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주문수행 1

소리는 에너지다

문자(언어)는 소리의 질서

삼라만상(森羅萬象)에는 온갖 법음(法音, Dharma sound)들로 가득 차 있다. 즉, 법상(法像)에서 발산되는 소리 그 자체가 곧 생명의 소리요 존재의 소리인 법음(法音)이라는 것이다. 사념을 접어두고 귀를 기울여 한 번쯤 그 소리를 들어 보라. 아마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는 ‘소리에 눈 뜬 자’, ‘귀 밝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엔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이 서려 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존재 안에 확립시킬 수 있다.

인간은 참으로 뛰어난 영물(靈物)이어서 일찍부터 그런 대자연의 힘들을 삶속에 투영시켜 왔다. 자신 속에 내재된 진정한 힘을 일깨워 보다 근원적인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 때로는 마음보가 안 좋은 사람들이 그것을 곡해시켜 방자 형태로 사용해 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순리(順理)를 쫓는 자에게만 그 무한한 원력을 제공해 줄 뿐 역리(逆理)를 쫓는 자에겐 응당 그 과보의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이런 법음들을 독특한 형태의 문자들로 정형화 시켰다. 그것은 일종의 ‘소리의 장정’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소리의 힘과 에너지를 문자(언어)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우스(Zeus)가 판도라(Pandora)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모든 신들의 권능을 집어넣었듯 인간은 문자(언어)속에 모든 대자연의 에너지와 신들의 에너지를 응축시켰다. 그 결과 문자(언어)는 특이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힘을 이용해 대자연의 분산력(分散力)을 극복하기 위해 싸웠다. 또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와 변화를 꾀했다. 인간의 이성이 더 이상 ‘소리의 카오스(Chaos, 혼돈)’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젠 소리를 보고 느끼고 쓰는 구체적인 형태의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매우 유효했다. 일정한 질서의 형태를 갖춘 정형화된 소리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거침없이 해냈다. 그리고 급속도로 삶 속에 투입됐다. 어떤 부류는 그 힘을 신과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교두보로 사용했다. 옛 수메르인들은 이런 문자를 ‘신통력이 깃든 단어들’이라 말했고 또 이런 단어들은 인간들 속에 일어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철저히 주관해 나갔으며 종교형식의 ‘자이언트’로 군림 하였다. (예로 이집트 파피루스에 기록된 「死者의 書」에선 문자(주문)가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어 死者의 환생을 보장한다고 믿었는데, 기원전 2,500년경 사하라의 피라미드에서, 죽은 파라오가 내세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장례서, 즉 주문, 찬송, 제문이 적힌 상형문자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들도 문자를 대단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언어의 개벽과 새로운 깨달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힘의 단어’들은 점차 퇴색해 갔다. 왜냐 하면 인간의 정신이 물질의 왕국(王國)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물질의 메카니즘들이 더 이상 ‘힘의 성언(聖言)’이 아닌 먼 기억 속 저편에 ‘잃어버린 말씀’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많은 정신적 창의와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제까지 ‘신의 단어’에만 종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즉 ‘신의 단어’에서 ‘인간의 언어’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언어의 개벽’이었다.

하지만, 그 중엔 ‘힘의 단어’들을 저 깊숙한 산중 어디엔가 묻어두고 비밀리에 전수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언어와 단어 속에 이미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우화(羽化)하여 예전의 그 광영을 재건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신들의 ‘힘의 언어’에 대한 총합(總合)이 우리가 보고, 쓰고, 소리 내어 말하는 언어들 속에 그래픽 기호로 점점 집결(集結)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 징조로 인간은 단어와 말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매우 작고 미세한 소리라 할지라도 그 안에 분명한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구태여 마이크로(micro)세계를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나 매크로(macro)세계를 볼 수 있는 허블 망원경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만이 절대적이란 사고는 이미 고루한 상식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80년대 들어 신과학운동이 일어났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의 일환으로 뉴 에이지 엑스포(New Age EXPO)와 그 부속인 훌 라이프 엑스포(Whole Life EXPO)행사가 세계 각국에서 개최 중이다. 결국 동양의 심오한 정신문화, 즉 명상(Meditation)이나 기공(氣功), 요가(Yoga) 그리고 금세기 최대 미스 테리인 UFO와 외계 우주인들에 대한 정보 들을 인정하고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우리가 눈으로 검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세계, 무형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관심도나 정보 보유 면에서 뒤떨어져 있지만 서구에선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대체이념으로 정신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INSIDE EDITION에서 뉴 에이지 회원들이 이집트 대 피라밋을 방문하는 장면이 방영 되었는데, 거대한 돌에 기대거나 눕고 쓸어안는 등 마치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처럼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와 교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 같았으면 사진 찍느라 카메라에 불이 났겠지만, 그들은 눈요기 보다는 느낌과 교감을 더 중요시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모진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 흉한 몰골로 남아있는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느끼고 찾으려는 것일까? 아마 보이진 않지만 사방에 충만해 있는 에너지의 흐름, 즉 고대인의 숨결을 느끼고 감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뉴 에이지 회원들은 생명체건 무생물체건 모든 것은 생명 자장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파동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파동은 아무렇게나 주름진 웨이브(weve)가 아니라, 인격성과 틀을 갖춘 형성체의 웨이브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삼라만상은 살아 숨 쉬는 존재의 파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흉측한 돌이나 체내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파동의 신성을 부여한다. 그 파동은 굽이치고 에너지와 상호 연결되어 나름대로 생명을 존속시키고 있으므로 교감을 통해 얼마든지 그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별한 소리, 만트라

현재 서구에서는 파동이나 사운드(sound)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연구를 기울이고 있다. 현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동 경영, 파동 건강, 파동 음악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소리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디팍 쵸프라(Deepak Chopra)박사는『양자 치료법(Quantum Healing)』이란 책에서 어떤 특별한 소리가 병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의학적 소견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시험관에 암세포와 보통 세포를 넣고 ‘훔(HUM)’이란 소리를 쏘아 준 결과 암세포는 죽어 버렸으나, 보통 세포는 더욱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 이런 특별한 소리들을 Invocation(주문, 만트라)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은 생명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율하는 종합적 권능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영적 처방약으로 탈바꿈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주문 속에 내장된 금선(琴線)을 울리기만 하면 ‘파동의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문(呪文)은 ‘소리의 혁명’을 주도하는 매우 민감한 파동체이기 때문이다.

주문은 고집적, 고효율의 파동들의 집합체이자 첨병(尖兵)이며 소리의 고갱이다. 단순한 글자 배열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과학에서 규명하고 싶었던 소리와 파동에 대한 해답이 고스란히 주문 속에 잠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기술(Technology, 기교를 뜻하는 그리스어 ‘Techne’와 말씀・언어를 뜻하는 ‘Logos’의 합성어임)의 출발은 소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리의 힘

소리가 사람이나 어떤 대상물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미 과학적으로 확인 검증되고 있다. 소리의 파장은 하나의 에너지 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일정한 진동을 주는 것만으로도 돌이나 다리가 무너지고 소리의 종류에 따라 뇌의 혈액순환, 신진대사, 내장활동 등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아더 재뇹이란 심리학자는 ‘고함요법’을 만들어 스님들이 고성염불을 하듯 소리를 크게 지속적으로 지를 경우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치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를 통해 스트레스가 해소됐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가 체내의 불완전한 유해물질을 순화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소에 따르면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만트라(주문)수행을 시켰더니, 83%에 이르는 사람들이 약물사용을 포기했다고 한다.

왜, 소리가 혈당이나 혈압을 정상화하고 암세포를 파괴하고 약물사용을 근절케 하는 것일까? 이것은 소리가 육체나 어떤 대상물에 새로운 형태의 질서와 창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의외의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군대의 행렬이 아주 긴 다리를 건너갈 때는 행진곡이나 군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군가나 행진곡, 일률적인 발걸음 등에서 야기되는 규칙적인 소리가 어떤 특수한 소리를 형성시켜 다리를 무너지게 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인들의 집단적인 무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다리가 갖고 있는 고유한 진동이 행진곡, 군가, 발걸음 등의 진동음과 일치하면서 발생하는 공명(共鳴, Resonance)현상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구약의 여호수아 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리고(Jericho)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한 가지 계책을 알려준다. 군사들로 하여금 성 주위를 6일 동안 매일 돌게 하고 제사장 7명에겐 각기 양각나팔을 지정된 곳에서 크게 불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양각나팔 소리가 들릴 때 백성들이 일시에 큰 소리로 고함(鼓喊)치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여리고 성벽은 소리로 무너져 내렸다.

왜,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을까? 멀쩡한 성(城)이 운 좋게 때 맞춰 무너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백성들의 집단적인 소리가 성벽의 고유한 진동수와 공명(共鳴)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집단적인 소리에서 발생하는 진동수와 성벽에서 발생되는 고유한 진동수가 리듬편승에 의해 같아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강하고 단위가 높은 진동수가 다른 진동을 선도하게 된다. 일단 공명하면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단일 파장을 형성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식이 개입되었다. 즉 성을 무너뜨리게 하려는 백성들의 강한 의식이 주입되고 가속화되어 그대로 붕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리가 무너졌던 원인이 비의지적인데 비해 성벽의 붕괴는 다분히 의지적이다. 그래서 그 파워가 더욱 막강했던 것이다.

이처럼 소리가 물리적인 외형에 막대한 영향을 행세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소리와 인체와의 관계도 거의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나 스텐포드 대학에선 소리가 인체의 질병치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동안 보이는 것만 연구했던 과학자들이 이젠 들리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리는 에너지다

『초월명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현대과학은 소리가 생체에 심오한 효과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박테리아는 어떤 악보가 연주되면 번식하나 다른 악보가 연주되면 죽는다. 그리고 식물들도 록(Rock)음악보다는 브란덴브르크 협주곡이 연주될 때 더욱 잘 자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떤 해초의 경우 대장간의 큰 망치 소리를 들려주면 그것의 유전인자가 변하며 이 특정한 망치소리를 내는 진동이 그런 효과를 준다는 사실도 증명되었다. 어떤 특수한 소리가 사람들에게 특수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무리한 주장이 아니다.

우리의 청각은 보통 3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 사이에 대해서만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너무 높거나 낮은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데, 예를 들어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나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만약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즉시 고막이 터져버릴 것이다. 또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청각이 예민해지면 균형 감각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의 범위는 2%뿐, 나머지 98%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소리가 80데시벨이 넘으면 소음이고, 100데시벨이 넘으면 인체에 물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 공항 주변 사람들은 항상 120~140데시벨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데, 임산부의 경우 미숙아 출산률이나 유산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 밖에 난청이나 정서불안, 우울증에 많이 시달린다고 한다.

이처럼 소리는 그 정도에 따라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Nazis)는 음향병기(音響兵器)라는 인명살상용 무기를 연구, 실험했을 정도다. 또한 히틀러는 대중 선동전략의 일환으로 연설할 때는 음향을 크게 하였다고 한다. 요즘의 록이나 헤비메탈같은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거의 무아지경까지 몰고 가 열광케 만드는데, 이도 음향이 100데시벨이 훨씬 넘어 균형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볼 때, 특정한 소리가 건강과 생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물이라도 뱀 혀끝에 닿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 그렇듯이 같은 소리라도 좋게 사용하면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조화시키는 축복의 소리가 된다. 즉, 소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毒)이 될 수도 있고 약(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심(正心), 정음(正音), 정송(正誦)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소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문수행 2

주문이란 무엇인가?

태을주(太乙呪)는 심령(心靈)과 혼백(魂魄)을 안정케 하여 성령(聖靈)을 접하게 하고 신도(神道)를 통하게 하며 천하창생을 건지는 주문이니라” -도전 11편 180장

태을주에는 이런 권능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주문을 고루한 미신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이 많이 있다. 이에 주문의 참뜻을 바로 밝히고자 한다.

주문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완성문

주문이란 무엇일까? 영화 ‘천녀유혼’에 등장하는 영환도사처럼 악령을 물리치고 술법을 부릴 때 쓰는 주술(呪術)일까? 아니면 모 개그맨이 도포입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외우는 ‘숭구리당당 숭당당’같은 신주(神呪)일까? 아니면 우리 귀에도 익숙한 ‘수리수리 마하수리’같은 비밀스런 밀주(密呪)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멕베드’에 등장하는 세 마녀가 남에게 재앙을 끼치기 위해 외우는 저주(咀呪)같은 것일까? 또 샤먼들이 신과의 대화에서 쓰는 무주(巫呪)라는 것일까? 도대체 주문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음양가(陰陽家)나 술가(術家)에서 술법을 부릴 때 외우는 글귀 또는 일정한 절차(節次)에 따라 외우면 자연력(自然力)또는 신이나 인간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통어(通御)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주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글귀’로 나와 있다. 또 백과 대사전에는 ‘무당들의 신직자(神職者)가 힘이나 또는 재액을 물리치려고 비는 법’으로 나와 있다. 말하자면 주문은 샤먼들이 신과의 통어(通語)를 통해 신탁(信託)을 받거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파동문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에게 비춰졌던 주문의 이미지는 거의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주문을 대단히 나쁜 걸로 이해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이는 서양의 문물만을 세련된 것으로 존중하고 동양의 정신문화를 미신정도로밖에 치부하지 않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주문이 구전(口傳)이나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다시피 하여 주문의 참된 면목을 오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좀 더 객관적으로 진지하게 주문의 참뜻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주문이 단순히 잡술이나 부리고 악귀나 쫓는 술법 따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기 위해 깨달음과 완성을 추구하는 ‘수련법’이자 ‘완성문’임을 밝혀 보고자 한다.

주문의 어원(語原)

주문은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Mantra)라고 한다. 글자를 파자(跛者)해 보면 마음을 뜻하는 ‘만(man)’과 보호, 도구의 의미가 담겨있는 ‘트라(tra)’로 이루어져 있다. 즉, 만트라는 ‘마음이 그릇된 망상에 빠지는 것을 보호해 주는 도구, 수단’이란 뜻으로 한역(漢譯)하면 주(呪)가 된다.

보통은 만트라라고 하지만, 총지(摠持)나 능차(能遮)를 뜻하는 ‘다라니(dharani)’와 명주(明呪)를 뜻하는 ‘비트야(Vitya)’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비밀어(秘密語)이자 진실어(眞實語)의 동어(同語)로 언어수행을 통해 본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언어 수행이란 시의 명호(名號)나 어떤 에너지가 응축된 글귀를 연속적으로 반복해 부름으로써 차크라를 각성시키거나 영(靈)적인 개발을 하여 쿤다리니, 즉 완성자가 되려는 도법(道法)을 말한다. (나중에 이것이 종교적으로 확대되면서 불보살이 등장함과 함께 신앙의 형태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팔상록에 보면 석가모니와 관음보살 사이에 대비주가 재생되는 대목이 나온다.)

한자 속에 나타난 주문(呪文)의 뜻을 살펴보면 주(呪)자는 ‘빨 주’자이다. 빨 주(呪)자를 파자(破者)해 보면 ‘입 구(口)’자에 ‘부르다’, ‘크다’라는 뜻을 지닌 ‘황(兄)’자로 이루어져 있다. 즉 주(呪)란 글자 속에는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과 신의 가호를 부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문(呪文)이라 함은 ‘우주의 생명력(生命力)을 빨아들이는 글’, ‘신의 권능과 영성과 힘을 빨아들이는 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주문을 읽다’라는 말을 영어로는 ‘invoke’라고 한다. 이 말은 ‘간구하다(Invoke)’, ‘간절히 구하다(request earnestly)’, ‘소원을 빌다(call down from heaven)’, 그리고 ‘주문을 읽다’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원래 invoke라는 단어는 라틴어 ‘invokara’에서 나온 말이다. 즉, in과 vokara라는 두 낱말이 합성돼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in은 on과 같은 뜻의 접두사(接頭辭)이고 vokara는 ‘부른다’, ‘간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서양의 언어 속에 나타난 주문(呪文)의 뜻은 ‘어떤 신이나 우주의 절대자에게 소원(所願)을 간구하며 그 힘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반복 기도행위’이며 ‘신(神)의 권능과 영성을 자기 영혼 속에 받아들여 조화와 생명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이 밖에 철자(綴字)를 뜻하는 speling의 ‘spell’도 원래는 주문(呪文)을 뜻하고 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이나 카톨릭의 성모송, 대영광송, 불교의 반야심경, 천수경, 능엄경, 천도교의 시천주 등 그 밖에 도교나 탄트라에서 송주하는 수많은 주문들은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수행법의 일종이다.

따라서 주문이란 의미 속엔 ‘신의 권능과 영성을 받아들여 깨달음과 완성을 추구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동서양의 공통된 인식이다. 동양과 서양 모두, 주문의 쓰임새 또한 언어나 생활 속에 광범위하게 배어 있으며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주문은 곧 진리의 말씀(眞言)

진언은 곧 진리의 말씀이며 진리로부터 온 성구(聖句)이다. 또 신들이 인간에게 들려준 생명의 언어이자 깨달음의 언어이다. 신비주의적인 술어(術語)가 아니라 진리와 지혜가 농축된 모든 소리에 대한 총지(總持)이다. 주문은 진언의 두루 갖춤을 의미하며 지혜(智慧)를 얻기 위한 총지문(總持門)이기도 하다.

주문엔 크게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일체 악(惡)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 둘째, 선(善)을 잡아 일체의 악(惡)을 없애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문은 진리의 세계를 열어내는 ‘참된 말’이자 ‘도언(道言)’인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佛家)의 팔만사천법문이 진언으로 되어 있어 부처님의 본심을 드러내듯 진언(呪文)은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의 백미(白米)이다. 왜냐하면 소리 그것은 ‘진리의 음성(voice of Truth)’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해줄 수 있듯 진언(呪文)은 완전한 언어이며 우리를 모순 없는 세계로 안내해 주는 훌륭한 반려자(伴侶者)이다.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주문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미묘한 글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특별한 언어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는 그런 언어들을 ‘신성한 글자’라 말했으며 옛 수메르인이나 바빌로니아인들은 주문을 ‘신통력을 가지 단어들’이라 칭했다. 또 고대 신비주의학파들은 ‘잃어버린 말씀’, ‘잃어버린 화음’이라 했으며 베다에선 ‘Holy Nad’, 이슬람 현자들은 ‘카르마(Karma)’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정의는 주문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꾼 매우 특별한 힘을 보유한 ‘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비물질계)을 형이하학(물질계)으로 끌어내린 중간자라 할 수 있다. 신들의 성언(聖言)을 인간의 성언(聖言)으로 정립시킨 것이다.

주문은 위대한 성자들에 의해 깊은 명상 상태에서 발견된 음절이나 단어 도는 단어들의 집합체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언어들이 아니다. 깊은 초의식 상태에서 내부로부터 수신된 만트라의 음(音)들은 구도자들을 점점 더 깊이 이끌어 완전한 고요의 상태에 도달하게 만든다.(『히말라야 성자들』中)

이렇게 초의식 상태에서 재건된 주문은 특별한 힘을 보유하게 된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갇힌 요정처럼 신(神)은 주문에 응감하며 누군가가 마음을 한데 모아 부르기만 하면 그 즉시 모습을 현실계에 드러내 보인다. 단순히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현화(現化)할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쉽게 신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일찍이 없었다.

신과의 만남은 곧 자기 자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언어는 자기 자신 안에 또 다른 신의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포박자(抱朴子)에 ‘밤길을 걷지 않고선 밤길을 걷는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섣부르게 어림짐작하여 속단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주문수행 3

종교와 과학이 전하는

주문수행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주문을 가지고 있다

주문(呪文)을 읽는다는 것은 우주의 절대자께 소원을 간구하여 그 힘을 받아들이고자하는 반복적 기도 행위이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주문을 가지고 있다. 각 종교마다 어떠한 주문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불 교 ]

불교는 주문의 백화점을 이룰 정도로 주문이 많다. 그 중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능엄경은 그 대표적인 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핵심교리를 모아놓은 경전인데 불교 신도들은 이것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하고 복(福)을 구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정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는 ‘가는 이여, 가는 이여, 깨달아지리다.’ 또는 ‘닿았노라. 닿았노라. 피안에 닿았노라. 깨달음에 이르러 기쁘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천수주(千手呪)는 관세음보살에게 드리는 계청(啓請)형식으로 된 긴 주문으로 이 주문을 읽으면 천수관음의 자비와 공덕으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죄업이 소멸되고 소원 성취한다고 한다.

능엄주(愣嚴呪)는 천수주에 못지않은 427구로 된 긴 주문으로 정성껏 읽으면 금강장왕보살의 여러 공덕으로 최고의 정변 지각을 이룬다고 한다.

그 밖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옴마니반메훔’ 등의 수많은 진언(眞言)들도 수천 년간 읽혀져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힘을 받아들여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기독교, 천주교 ]

기독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도 역시 주문이다. 기도문이 무슨 주문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문이란 기도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며, 정형화된 기도문은 모두 주문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주문은 매우 짧고 간결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느님을 찾고, 찬양하고, 진리의 실현을 바라고, 일상의 행복을 빌고,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할렐루야’, ‘아멘’ 등을 여러 번 반복해 부르거나 특정한 성경 구절을 소리 내어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성령의 감응을 받아 하나님의 이념을 실천하려는 명백한 주문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 천주교(天主敎)에서 읽는 성모송(聖母頌), 대영광송(大榮光頌) 등의 기도문들도 소원을 간구하고 절대적인 힘의 도움을 바라는 주문이다.

[ 유 교 ]

사서삼경(四書三經) 역시 주문이다. 그 가운데 주역(周易)은 무상하게 변하는 우주변화의 이치가 담긴 경전이다. 경전이면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인데 주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할 사실은 어떤 교리나 성구도 반복하면 주문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유교에선 경전 자체를 크게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 아예 외어버리는 것을 공부의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주문을 읽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경전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깊고도 심오한 뜻이 정신에 각인이 되고 그러면 마음이 밝아져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기 때문이다. 수 천 년 동안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경전이 갖고 있는 깊은 뜻을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활연관통(豁然貫通)했던 것이다.

[ 도 교 ]

도교에서는 ‘주문의 바다’라 지칭할 만큼 주문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형화되어 수천 년 동안 전해 왔다. 그래서 수많은 구도자들이 궁극적인 도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주문을 사용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교는 수행방법과 지역에 따라 크게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졌다. 좌도는 주문이나 부적을 사용하여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수련법이고 우도는 호흡을 통해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수련법을 말한다.

이처럼 주문은 소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궁극적인 도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종교적인 원리를 갖고 유불선을 통틀어 널리 사용되어 왔다.

알파파의 공명 현상

그럼 이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주문에 접근해 보도록 하자.

긴 복도를 걸어가면 확 트인 공간에서 보다 유난히 발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것은 복도의 통로를 따라 발자국 소리의 음파가 진동하며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를 옆에 놓고 목소리를 내보면 어느 특정한 음(音)높이에서 기타의 몸통이 울리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음보다 낮은 소리나 높은 소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 울림통 진동수에 맞는 소리에서는 신기하게 ‘웅~’하고 따라서 울리는 것이다. 이를 과학에서는 마주 울림 즉, ‘공명현상(共鳴現象)’이라 한다.

그럼 공명과 주문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여기에 관한 고무적인 과학적 자료를 제공해 주는 곳이 마하리쉬(Maharishi)의 TM명상요법 단체이다. TM(Transcendental Meditation)은 초월명상으로, 그 중 만트라 명상이 주문(眞言) 수행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다.

1993년 7월 워싱턴에서 전 세계 4000명이 모여 TM(Transcendental Meditation) 명상 즉, 만트라를 하였다. 그랬더니 놀랍게 도시 전체에 지극히 평화롭고 상서로운 기운(氣運)이 감돌았으며 범죄율도 평소에 비해 25%나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큰 눈이 내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치라고 한다. 무엇이 이토록 워싱턴 전 경찰이 동원돼도 해낼 수 없는 수치를 만들어 냈을까?

이유는 이렇다. 한사람이 만트라 수행을 해서 뇌파가 알파파가 되면 주위를 진동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이것이 점점 주위에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의 뇌파를 알파파로 만들어 주는 공명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첫 시원점으로부터 사방으로 물결이 번져가는 현상과 같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온화하고 인자한 사람 옆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자신도 차분해지고 따뜻한 기분을 느낀다. 반대로 살기(殺氣)가 등등한 사람 옆에 있으면 등골이 오싹하고 불안하며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식물도 호의를 갖고 접근하면 생기발랄해지지만 적의(敵意)를 품고 다가가면 부르르 떨며 생기를 잃게 된다고 한다. 이는 모두 파장(氣運)이 부지불식간에 전달된 것이다.

그러면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하는 원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주문수행을 통해 일정한 단일(單一)파장이 조직화된 에너지로 규합되면 주위에 강력한 동조성(同調性)을 이끌어 내게 된다. 또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집단적인 원력을 형성하여 파장(진동)은 더욱 강해져 물결처럼 주위에 번져나간다. 그러면서 불완전한 에너지를 안정시킴은 물론 흡수, 통합, 정화시키는 작업을 급속도로 진전시켜 같은 공조를 이루게 만든다. 즉 같은 파장으로 ‘에너지 편승’을 시켜주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 편승으로 얻어진 공명파장은 더욱 막강한 존재의 파동이 되어 전 공간에 굽이치게 된다.

시공을 초원한 공명 현상

우리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 들리거나 들리지 않는 모든 것은 파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입으로 소리를 내면 음파(音波)가 발생하고, 두뇌에서는 그 활동 상태에 따라 몇 가지 뇌파(腦波)가 발생하는데 이 우주 어느 곳엔가는 거기에 상응하는 파장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실제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라는 거대한 생명체는 실로 엄청난 생명력(生命力)으로 꽉 차 있고 그 생명력은 동일한 성질의 힘끼리 동조되어 더 큰 힘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그 예로 일본 큐우슈우의 행도(幸島)에 서식하는 마칵 원숭이는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는 버릇이 있는데, 이 행위가 멀리 바다 건너 다른 섬의 원숭이에게까지 전이 되었다고 한다. 또 서부 유럽에 서식하는 푸른 박새(Parus Caeruleus)는 우유병에 은박 뚜껑을 열고 그 위에 떠있는 크림을 먹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런 행동양식이 급속도로 전 대륙의 다른 새들에게 퍼졌다고 한다. 이는 알파파가 주위에 전이된 것처럼 생각과 습관이 시공을 초월하여 파장으로 전이된 것이다. 이것을 마주 울림 즉, ‘공명 현상(共鳴現象)’이라고 한다.

주문수행도 이와 같다. 주문수행은 안테나, 동조회로, 증폭회로의 기능을 가동시키는 것과 같다. 주문을 읽어 형성된 파장은 우주 깊숙한 곳에 있는 기운(氣運)을 끌어들여 대우주의 생명력을 체험하게 하며 시공으로 확산시키는 특이성을 갖고 있다.

주기도문처럼 내용이 알기 쉽거나 심오한 단어들의 배합으로 이루어져 그 뜻을 잘 알기 어려운 문장이거나, 부른다는 그 하나만으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과 수행을 두루 포함한다는 점에서 주문이라는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부르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옛 고사성어의 말을 빌리면 ‘마중지봉(麻中之蓬)’이라고 할까? 즉,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영향을 받아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도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주문수행 4

기적을 이루는

전뇌(全腦)적인 수행법,

주문수행

서파(徐波)의 기적

알파(𝛂)파는 뇌파의 일종으로 주파수가 낮은 쎄타(𝛳)파나 주파수가 높은 베타(𝛃)파 사이의 중속파를 일컫는다. 즉, 8~17헤르츠(Hz) 사이의 뇌파다. 여기서 뇌파는 뇌세포에서 생긴 전자기장파를 말한다. 알파파는 보통 수면상태에선 9~10헤르츠(Hz)의 뇌파가 나오고 최면(催眠), 명상(瞑想), 정신통일의 상태에선 이보다 진폭이 더 크고 느린 뇌파가 나온다고 한다.

파장이 느린 서파(徐波)가 나올수록 상대적으로 염파는 올라간다. 이에 따라 염력이나 텔레파시, 미래 예지 등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즉, 뇌파는 떨어져 10헤르츠(𝛂파)를 가리키고, 염파는 올라가 500~3000헤르츠를 가리킬 때 초자연적인 힘이 발생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능력자 유리겔라가 스푼벤딩(spoon bending, 숟가락을 구부림)을 할 때 그의 염파 지수는 2000헤르츠 이상이 된다고 한다. 이를 볼 때, 결국 알파파의 비밀은 뇌파의 진폭을 떨어뜨리고 염파를 올리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TM 연구가인 하버드대학의 지안 폴 방께 박사는 알파파가 나올 경우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서로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후두부(後頭部), 두정부(頭頂部), 전두부(前頭部), 뇌전체로 확대되는 동조화(synchronization)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뇌의 좌반구는 분석력과 이성, 언어능력을 주관하고 우반구는 직관력과 공간 인식능력, 심미적 감상을 주관한다. 이런 생체적 뇌파지수와 알파파를 통한 공명현상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벤토프는 뇌의 자장과 공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자장은 머리에서 방사되는 것으로 안테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전기장, 자장과 상호 작용한다. 머리는 동시에 수신과 송신을 하는 안테나와 같은 것이며, 두뇌에서 발생하는 몇 개의 공진하는 주파수 중에 특별한 어느 하나의 파장에 맞춘다.

파장의 동조화

우선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유럽 마하리쉬 연구대학(M.E.R.U)에 있는 폴레빈 연구진은 여러 사람과 함께 TM(만트라수행)을 했을 때 같은 파장이 나오는지에 관한 알파파 동조화 실험을 했다. 우선 매우 미세한 주파수도 감지할 수 있는 정밀한 기계를 설치한 후 본인은 물론 그의 동료들도 모드 TM 수련에 들어갔다. 얼마 후 모두에게서 알파파를 그리는 EEG(뇌파기록 장치)의 그래프가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개인차가 났다면 같은 주파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뇌파는 베타파에서 델타파까지 골고루 나오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수치의 뇌파가 나타난 것일까? 이 실험은 알파파 공명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다. 즉 폴레빈과 그의 연구진들이 TM에 들어갔을 때, 각기 따로 따로 알파파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이 알파파에 도달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뇌파가 이에 동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방께 박사 말대로 동조화(同調和)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동조화란 말은 낯설 테니 ‘공명’이란 말로 바꿔보자. 공명은 서두에서도 말했듯 발음체가 외부의 음파에 자극을 받아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알파파가 전염되는 원리를 살펴보자. 일단 파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뇌파가 겹쳐지면 ‘맥놀이 주파수’가 발생한다. 그러면 강한 파장이 상대적으로 약한 파장을 흡수하게 되고 ‘리듬편승’에 의해 같은 파장으로 진동한다. 큰 파도(波濤)가 치면 작은 파랑(波浪)은 병합되는 원리이다.

병균이 공기에 의해 전염되듯 파장이 진동에 의해 전염된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무엇엔가 전염 당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지난봄에 눈병으로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누구도 전염 당하고 싶어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전염된다. 파장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염을 통해 감염시킨다. 여기서 전염이란 위에서도 얘기한 ‘맥놀이 현상’을 통한 리듬편승을 말한다. 감염은 공명으로 비교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하는 주문수행

주문수행을 하면 알파파나 기타 느린 서파(徐波)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좌반구와 우반구를 동시에 사용하는 전뇌(全腦)적인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TM 자료에 따르면 만트라(呪文)를 할 경우 주의력을 우반구의 활동으로 이동시킨다고 한다. 우반구는 직관력을 주장하고 있다. 수행자에게 있어 직관력은 곧 생명이다. 이처럼 주문수행은 소리와 직관력을 병행하기 때문에 우반구를 쓴다는 것은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좌반구는 언어능력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상대적으로 좌반구의 뇌를 많이 사용한다는 증거다. 주문수행은 소리를 내는 수행법이다. 그러니 당연히 좌반구 활동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언어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무미건조한 언어가 아닌 매우 특별한 파장을 지닌 언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뇌장(腦漿, 머리 골속의 점액)에 진동하는 전류가 형성되면 자극이 활성화되고 일종의 극성을 갖게 되어 두뇌의 각 반구에 진동하는 자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뇌파를 알파파나 기타 서파로 만드는 첩경은 좌우반구의 동조성(同調性)과 균형상태(homeostatic balance)에 있다. 그런데 주문수행은 좌우반구를 통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조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는 좌우반구가 주관하는 해당기관은 물론 세포 하나하나, 신경계 하나하나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동조성을 이끌어 내고 같은 파장으로 굽이치도록 만든다. 그래서 로보트 온 슈타인은 만트라 실천은 좌우반구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말했다.

인도의 디팍 쵸프락(Deepak Chopra)박사는 ‘만트라는 신경계에 삽입되는 매우 특별한 메시지다’라고 했다. 왜냐 하면, 주문이 혈압, 호흡, 맥박 수 등의 이완효과(弛緩效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미 수행하는 그 순간부터 알파파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알파파뿐이겠는가? 조금만 주의력을 키우면 훨씬 느린 서파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마하리쉬(Maharishi)는 만트라를 통해 얻어진 알파파나 기타 서파를 이용하여 범죄율을 떨어뜨리고 지구를 정화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문은 이처럼 무력을 쓰지 않고 전 영토를 항복 받는 전륜성왕(轉輪聖王, 몸에 32상을 갖추고 하늘로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輪寶)를 얻어서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하게 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인도 신화속의 임금)의 법력을 지니고 있다.

염파(念波)는 곧 영파(靈波)

뿐만 아니라 주문은 뇌파를 떨어뜨리고 염파는 올라가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은 물론 우리가 불가능 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일수대일수닉(一手擡一手溺)이라는 말처럼 한 손을 올리면 다른 한 손을 내려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처럼 염파가 올라가면 뇌파가 떨어지는 것 또한 진리요, 이치인 것이다.

염파란 단순한 생각의 파장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염파(念波)는 곧 영파(靈波)이기 때문이다. 신은 신끼리 통하고 영은 영끼리 통하듯 영파는 푸뉴마(바람, 영靈)처럼 꽉 차 있는 영들과 접속하여 그들의 힘과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무수한 정보를 얻어내는 채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영적인 힘들을 환상이나 불가사의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종교처럼 신봉(信奉)하는 현대인들에게, 최근 과학계에서 이해를 돕는 연구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는 일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문수행 5

주문의 6가지 특성

마음(mind)

자세

소리 호흡

(sound) (breath)

<그림 1> 만트라의 3가지 구성요소

주문은 외형적인 조건에 종속되는 피동법(被動法)이 아니라 깨달음과 완성을 추구하는 자동법(自動法)인 것이다. 일부 술사들이 주문을 피동적 의미로 사용하였기에 그 뜻이 왜곡된 것뿐이다.

이제 주문의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서 주문과의 새로운 조우(遭遇)가 이루어질 수 있다. 주문은 아직도 많은 부문에서 베일에 싸여있다. 양파껍질처럼 까고 또 까도 신비하기 그지없어 새로운 면모를 계속 드러내 보인다. 기존의 수행법은 호흡+마음+자세에 국한된 데 비해 주문수행은 여기에 소리를 추가한다. 즉, 호흡의 효과에 소리의 효과를 더한 것이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엔진에 터보를 장착했다고나 할까?

주문의 특성은 크게 6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에게 계시로 내려와 후세에 전수된 것이다. 둘째, 주문은 일정한 ‘운율(韻律)’을 갖는다. 셋째, 그와 함께 일정한 ‘주재신(主宰神)’을 갖는다. 넷째, 주문은 특수한 힘을 갖는 ‘씨앗’을 갖는다. 다섯째, 주문 안에는 ‘성스런 힘’이 존재한다. 여섯째, 순수의식이 열릴 때까지 부단히 반복해야만 열리는 ‘자물쇠’를 갖고 있다.

비전(秘傳)되는 진리

주문의 특성 중 첫 번째는 연원(淵源)이나 법통(法統)을 말한다. 주문은 바률라르의 말처럼 신에 의해 만들어져 우연히 인간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필연적인 당위성과 올바른 전승의 맥이 있다. 주문의 창조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마스타(Master)’만이 가능하다. 왜냐 하면 주문은 ‘깨달음의 소리’이며 ‘진리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도달하면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게 된다. 그것이 올바른 체형으로 갖춰지면 사자후(呪文)로 토해내어 제자에게 전수된다. 만약 전수되지 않는다면 그 주문은 단 한사람을 위해 존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인은 생멸하지만 주문은 구전심수되어 새로운 영적 챠크라의 개척과 처방약으로 쓰여진다.

이처럼 주문은 스승이 제자에게 내려준 최고의 법령(法令)이다. 스승의 도력과 심법이 코드화되어 주문 속에 담겨있다. 따라서 읽기만 하면 그 순간 스승과 전수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전수되지 않는 주문은 없다. 반드시 책으로 만들어지거나 제자에게 심수되어 백년이고 천년이고 전수된다. 그러므로 주문 속엔 전수된 역사의 과정이 응축돼 있다.

우리가 음송(吟誦)하는 태을주가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3천년이라는 긴 역사 과정을 겪었다. 원래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의 13자는 한어(韓語)가 아닌 범어(梵語)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3천 년 전 석가모니가 세상에 내어 놓은 주문이다. 그 후 전라도 함평에 살았던 도인(道人) 김경수 선생이 이 주문을 가지고 공부하다 신명의 계시로 주문 서두에 ‘태을천상원군’을 붙여 19자로 2차 완성하였다. 여기에 상제님께서 ‘훔치 훔치’를 덧붙여 읽게 하심으로써 23자의 태을주가 완성된 것이다.

하루는 성도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최수운의 시천주주에는 포교 50년 공부가 들어 있고 김경수는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나니 경수가 그 주문을 받을 때 신명이 이르기를 ‘이 주문으로 사람을 많이 살리게 되리리라.’ 하였느니라. 이제는 신명시대라. 같은 50년 공부에 어느 주문을 해원시킴이 옳으냐?” 하시니 광찬이 대답하기를 “당신님의 처분대로 하옵소서.”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으니 태을주를 쓰라.” 하시고 “나는 옛것을 고쳐서 쓰나니 훔치 훔치를 덧붙여 읽으라.” 하시며 술잎같이 ‘훔치’두 줄을 붙이시니 이러하니라. 훔치 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라 (道典 7:72)

만트라의 운율

주문의 두 번째 특성은 일정한 운율(韻律)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주문은 고유한 리듬, 곡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물결’이라 할 때, 그것이 물의 높낮이에서 생겨나는 수파의 모양을 의미하듯, 주문도 제각기 운(韻)과 율(律)에 따라 소리의 결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읽는 운율에 따라 열리는 에너지의 차원이 다르게 된다. 따라서 읽을 때는 반드시 정연한 ‘운율의 법칙’을 준수해야 그에 합당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율은 해당 주파수를 잡아내는 채널이나 안테나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채널이 어긋나면 잡음이 나거나 그 방송을 수신할 수가 없다. 그처럼 주송을 할 때 자칫 하모니가 깨지게 되면 일정 부분 에너지(氣運) 누수 현상이 벌어질 수가 있다.

주문을 만든 창주자(創呪者)나 전수 받은 마스터급의 스승에 의해서만 그 주문에 대한 올바른 정운(正韻), 정율(正律)이 규명될 수 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정확한 운율을 전수해 준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제 멋대로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주문은 우주의 율려음(律呂音)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생명의 소리요 해방의 소리다. 아무렇게나 읽어선 절대 안 된다. 따라서 스승으로부터 올바르게 전수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도수행(神道修行)

주문이 주재신(主宰神)을 갖는다는 것은 주문수행이 신도수행이라는 말이다. 모든 음절은 그 음을 주관하는 일정한 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음을 소리 내면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신력(神力)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진각종(密敎)이 본주로 주송하고 있는 ‘옴마니반메훔’의 경우 옴은 비로자나불, 마는 아축불, 니는 보생불, 반은 아미타불, 메는 불공성취불, 훔은 금강불로 각각의 글자에 주재신이 존재한다. 그 주문을 지속적으로 송주할 경우 그 공덕으로 육바라밀을 갖추어 야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주문 속에 담겨진 신력과 주력으로 불생불멸의 법신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문 각각의 글자에 맞는 주재신이 존재하기도 하며, 주문 전체가 하나의 주재신을 갖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문을 정성껏 지속적으로 읽을 경우 절대자나 그 밖의 신들의 구체적인 신성과 모습을 불러 일으켜 ‘합일의식(=正覺)’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뿌리소리, 비자만트라(Bija Mantra)

주문의 네 번째 특징은 특수한 힘을 갖는 씨앗(Bija)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神 또는 우주의 힘을 상징하는 뿌리소리(根本音)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자만트라(Bija Mantra)라고 한다. 우주엔 신성을 대변하는 ‘뿌리소리’가 존재한다. 일종의 ‘종자음절’이다. 예를 들어 우파니샤드에 보면 ‘옴’이라는 글자 안에 특수한 힘의 씨앗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옴(AUM:전지, 전능, 편재를 뜻하는 Omniscient나, Omnipotent 등이 모두 AUM에서 파생되었다)’을 모든 소리와 글자의 뿌리이자 모든 언어와 사고의 뿌리인 근원 만트라로 보고 있다.

‘훔(HUM)’이나 ‘치(CHI)’라는 불멸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HUM’은 깨달음의 본래자리를 뜻한다. 불가(佛家)에선 ‘훔’을 깨달음의 마음자리라고 한다. 종정님께서는 생명의 소리, 생명의 근원 에너지, 생명의 마음자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치’는 그 생명의 근원자리를 향해 입을 크게 열고 그 기운을 동력화시키는 소리라고 하셨다.

주문의 성스런 힘, 샥티(Shakti)

회교문학을 대표하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페르시아 어느 도성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 카심은 욕심쟁이라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무익하게 탕진하고 장인의 재산까지 가로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 알리바바는 가난하지만 순진하여 산에서 장작을 해다 시장에 팔아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라신의 축복이었을까? 알리바바는 우연히 산에서 ‘열려라 참깨’, ‘닫혀라 참깨’라는 매우 기묘한 주문을 알게 되었다. 이 주문은 도적의 괴수가 거대한 암벽 앞에서 외웠던 주문이었다. 이 주문을 힘차게 외웠을 때, 바위벽이 양쪽으로 쩍!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알리바바는 알 수 없는 주문의 성스런 힘의 결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형 카심은 알라신의 저주를 받았을까? 그만 ‘열려라 참깨’라는 신비한 주문을 잃어버리고 말아 동굴 속에 갇히는 바람에 도적떼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생략…)

이처럼 주문에는 성스런 힘이 존재한다. 만트라 안에는 우주의 충만해 있는 활동적인 음(音)에너지가 내장돼 있는 것이다. 이것을 힌두인들은 샥티(Shakti)라고 한다. 즉 모든 창조에 관여하는 힘, 초월적인 신성한 원리를 만들어 내는 근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옛 고대인들은 만트라 에너지를 다방면으로 사용해 왔다. 수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을 들어 올리는 건축용으로, 성을 무너뜨리는 전술용으로도 사용했고 사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의학용으로도 사용했다. 또한 신과의 조우를 위해 종교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지혜의 완성을 위해 철학용, 명상용으로도 사용했다. 그것은 많은 실효를 거두었다.

위에서 예화로 든 알리바바도 동화 같은 얘기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는 피라미드의 축조에 주문의 신령한 에너지가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든 소리를 소급해 들어가면 우주에는 하나의 소리(One Sound)만이 존재한다. 마치 모든 박자가 ONE BIT에서 시작하듯 역동하는 우주의 에너지는 오직 한 소리에서 파생된다.

우리 인체부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소리가 심장(心腸)박동 소리다. 心腸을 心場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心)이 있는 장소(場)란 뜻이다. 이것은 우주의 ONE SOUND와 일치하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오직 마음의 소리, 마음의 눈으로만 우주의 원음(原音)을 느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다차원적 시공간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무수한 音의 파편들을 만들어 낸다. 마치 우주가 빅뱅을 통하여 무수한 은하계라는 다양한 가능성의 파편들을 만들어 냈듯이 소리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밤하늘의 별처럼 신성을 안고 쏟아진 것이다.

<그림2> 태을주

태을주와 운장주엔 어떤 성스런 힘이 존재할까?

◐ 태을주는 역률(逆律)을 범했을 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느니라. 운장주는 살인죄에 걸렸을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느니라. (도전 9:199)

◐ 태을주는 심령(心靈)과 혼백(魂魄)을 안정케 하여 성령을 접하게 하고 신도(神道)를 통하게 하며 천하창생을 건지는 주문이니라. 관성주(關聖呪)는 삿됨을 제하고 모든 마(魔)를 끌러 안정케 하는 주문이니라. (도전 11:180)

성공의 열쇠, 부단(不斷)한 반복

“주문(呪文)은 무슨 주문이든지 믿고만 읽으면 좋으니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혼기를 잃어 한이 된 어떤 처녀가 도나 닦으려고 이웃에 수도하는 노부처(老夫妻)를 찾아가 주문을 물으니 때마침 노부부는 서로 다투던 뒤라서 심사가 불안하여 귀찮은 마음에서 ‘아무 것도 싫다’고 대답하였더니 처녀가 이를 주문으로 알고 앉으나 누우나 쉬지 않고 열성으로 읽으니 온 식구가 싫어하는지라. 하루는 그 말을 외우면서 물동이를 이고 오는데 그 아버지가 보리타작하던 도리깨로 이고 오는 물동이를 쳐서 돌 위에 넘어졌으나 동이도 성하고 물도 쏟아지지 않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9:201)

주문이라는 자물쇠(Lock)를 여는 Master key는 ‘반복(Loop)’에 있다. 순수의식,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선 부단히 반복의 반복을 거듭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아 일념으로 주문을 읽을 때 한순간 소리의 진동이 사고의 진동과 공명이 되어 에메랄드 같은 순수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시도로 자물쇠에 맞는 Key를 찾을 순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수 십 만개, 수 백 만개의 키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겠는가? 부단한 시도와 노력으로 일일이 맞춰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면적인 행위가 필요한데 그것이 노처녀의 예화에서처럼 주문을 반복해 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키는 결코 안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열어주는 것도 아니며 열어줄 필요도 없는 수동 문으로 오직 밖에서만 열리도록 되어 있다. 오직 그 Key를 쥐고 있는 자신만이 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헛된 의뢰심이나 기대심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Loop1 Loop2 Loop3

progress=turning

<그림3> 일회일진(一回一進)

고리(Loop)는 하나의 원(圓)을 완성하는 순환(Circulation)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단순한 반복(Repeat)의 의미가 아니다. 또한 순환은 그때그때 의식의 진보와 결합되어 선회(旋回, Turning)의 비약을 갖는다. 그러므로 순환은 변혁(Revolution)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순환은 새로운 질서와 창조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답보나 정체의 막다름(Stalemate)의 의미가 아니다.

상제님께서는 “태을주는 역률(逆律)을 범했을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고, 운장주는 살인죄에 걸렸을지라도 옥문이 스스로 열리느니라. (도전 9:199)”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지할 사실은 스스로 열린다는 말이다.

또,『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열릴 것이라고만 했지 열어 줄 것이라는 확언은 어디에도 없다.

즉, 스스로 열라는 말이지 열리길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내가 이 정도 읽었으면…’하면서 누군가 열어주길 기다리는 피동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과 너무 쉽게 타협해 버리고 적당히 해버리고 만다. 옛말에도 ‘신은 보이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존재 한다’고 했다.

별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진리를 믿고 확증할 때 내부로부터의 접속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道의 세계에서는 터럭만큼도 사정이 없다. 자신이 딛고 올라선 만큼 열리고 깨진 만큼 성숙한다.

『데마하트므얌비』란 책을 보면 여신에게 올리는 만트라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글자 하나하나에 신비스런 힘이 박혀있어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여 외우고 기구(祈求)하면 여신(女神)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 또한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신성의 발현일 것이다.

수행자는 문(Matra Gate:그래서 주문(呪文)을 주문(呪門)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주(呪)의 반복을 통해 문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문은 여러 단계의 코스로 존재한다.

공부세계는 끝이 없다. 밖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헛된 의타심이나 기대심도 버려야 한다. 오직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스스로 열어야 한다. 그것이 공부세계의 원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주문을 암기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조건이 없다. 무의식이나 꿈속에서조차도 아무 걸림 없이 술술 터져 나올 정도로 의식 속에 각인시켜 놔야 한다.

주문수행 6

주통법(呪通法)

하는 방법은 어려운데 있지 않나니

오직 하나를 지키는데 있다.

그 하나를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시작 없는 하나요, 다함이 없는 하나이니,

그 하나에서 가 나왔고 에서 이 생겼으니,

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직 一呪一心으로 一向하는 것이 그것이라!

그러므로 위 세 가지가 보태어 이 되는 것이니

이 되고 이 되는 이치를 안다면

이 세 가지 을 꼭 지킬 것이요,

그래야만 가 화육되어 마땅히 할지라.

주문 공부는 정성 공부

통(通)은 곧 체험이다. 체험만이 주문(呪文)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주통법(呪通法)이란 소리를 조화시켜 주(呪)에 통하는 방법을 말하며 주문을 지속하여 신력(神力)과 진리(眞理)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주통법(呪通法)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성송(誠誦):정성스럽게 읽는 방법,

둘째, 의송(義誦):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읽는 방법, 셋째, 성송(聲誦=呪通):소리 내어 읽는 방법이다.

특히 정성스런 마음을 가지고 읽는 성송(誠誦)은 주문수행의 골수(骨髓)라 할 만큼 중요하다.

적소성대(積小成大)라! 작은 것이 쌓여 크게 이루듯 순간순간이 뭉치고 뭉쳐서 마침내 큰 혜각(慧覺)이 열리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성송(誠誦)

그럼 성(誠)이란 무엇인가? 우선 정이천 선생은 “성이란 망령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無妄之謂誠).” 하였으며, 주희 선생도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일러 성(誠)이라 한다(眞實無妄之謂誠).” 했다.

중용(中庸)에선 “군자는 성(誠)하고자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女君子誠之爲實)”, “성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之者人之誠)”, “성이란 사물의 끝이자 처음이다(誠者物之終始)”, “성이 없으면 사물이 없다(不誠無物)”라고 했다.

또, 맹자(孟子)는 “성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도이다(謂誠思者 人之道)”라고 했다.

조금 딱딱하지만 성(誠)에 대해 감(感)은 잡았을 것이다. 성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마음의 표현이며, 그것이 사람의 도이자 군자의 도이다.

공부는 들인 정성만큼 이루어진다. 하나의 정성을 들이면 하나만큼 공부가 되고 열의 정성을 들이면 열만큼 공부가 된다. 더구나 정성도 그냥 정성이 아닌 지극할 지(至)를 붙여 지성(至誠)이 되면 상황은 확연히 달라진다. 성을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지성은 “그 진실함이 지극하여 조금도 삿되거나 허위가 없으며 미진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문공부=정성공부’가 된다.

그래서인지 성경신(誠敬信)중에 성(誠)이 첫 번째로 나오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성을 가짐으로써 체험을 통해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 바탕 위에 믿음(信)이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성 속에 이미 경(敬)과 신(信)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불화(佛畵)나 불상(佛像)을 만들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눈이다. 그래서 특별히 점안식(占眼式)이라는 예식을 갖는다. 왜냐하면 눈동자에 생명력(生命力)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성은 점안(占眼)과 같다. 주문에 인격성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점안이 곧 정성이다.

의송(義誦)

두 번째, 의송(義誦)이란 바른 뜻을 가지고 주문을 읽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생명을 많이 살리려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이다. 이것이 곧 주문의 구현이자 목적이며 실현해야 할 궁극자리라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의(義)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한 보배라고 하셨다.

천지간에 정의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은 없느니라. 하늘이 하지 못할 바가 없지마는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은 못하는 바가 있느니라. 사람이 의로운 말을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천지도 감동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천지의 모든 보배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의로움을 가장 으뜸가는 보배로 삼느니라. 나는 추상같은 절개와 태양같이 뜨거운 충의(忠義)를 사랑하노라. (도전 4:15)

그러므로 주문 읽는 사람은 언제나 도덕심이 투명한 백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성실(成實)할 수가 있다.

정의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慈悲)와 정의(正義)는 확실한 차이가 생긴다. 자비는 선악을 초월해 무조건적인 용서를 표방한다. 공자의 인(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仁)에 대하여 북계(北溪)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仁)은 그 마음의 생리(生理) 전체이며 항상 낳고 낳음을 쉬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인(仁)의 단서가 마음속으로부터 싹 터 나오면 저절로 측은(惻隱)해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측은해 하는 마음으로부터 확충하여 사물로 미루어 나간다면 드디어 사랑(愛)이 이루어진다. 인(仁)은 사랑의 뿌리이며 측은(惻隱)은 이 뿌리에서 싹튼다. 사랑은 그 싹이 자라서 무성하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정의는 선악을 뚜렷이 구분 짓는 공명정대(公明正大)함이다. 그럼 의(義)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북계선생의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만약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른다면 그것은 마음이 어리석어 아무런 자각이 없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알았으면 이제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든지 따라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義)다.”

그러므로 주문을 읽을 때는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마음이 생기고 큰 기운(氣運)을 받아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음호(陰護)와 감화(感化)를 받을 수 있다. 이(利)를 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절대 큰 기운을 받을 수 없다.

이(利)란 의(義)에서 벗어날 때 생기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것도 이(利)가 된다. 남을 해코지 한다든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주문을 남용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히말라야 성자(聖者)라 일컫는 티벳 불교의 귀두(貴頭) 밀라래빠(Milaraspa: 1040~1123)는 어렸을 때의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흑마주(黑魔呪)를 사용하여 친인척과 마을 사람 35명을 주살시키고 방포주를 사용하여 우박을 쏟아 부어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업(惡業)을 지었다. 그 대가로 스승 마르빠(Marpa)의 제자로 입문하기까지 6년이란 긴 세월 동안, 뼈를 깎는 아픔의 탑을 쌓았다가 허물었다가 하는 업장참회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처럼 주문은 오직 의(義)로운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정의(正義)로운 마음은 이 세상에 가장 귀중한 보배(寶配)이며 주문의 오메가 심(心)인 것이다.

성송(聲誦=呪誦)

세 번째 주송(呪誦)은 크든 작든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을 말한다. 합송이나 각송이 이에 해당한다. 주송을 악보라 한다면 주통은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주통은 사운드를 직접 구사해야 하는 실론(實論)이기 때문이다. 자안방예공(慈眼房叡空)은 칭명(稱名, 부처의 이름을 부름)이 관불(觀佛)보다 우수하다고 말한다. 이것과 같이 주송은 통령(通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주문수행 7

주문의 대의(大意)를 갖고 소리 내어 읽는다.

의역(意譯)과 음역(音譯)

주문의 세계에서 의역(意譯)은 불문율(不文律)로 음역(音譯)은 성문율(成文律)로 삼고 있다. 의(意)는 무엇이고 음(音)은 무엇인가? 북계(北溪)선생은 의(意)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意是心上發起一念 思量運用要賃地底

마음에서 발생한 한 가닥 생각으로 이러이러 하겠다고 생각하고 운용하는 것.

以意比心 則心大意小 小以全體言

意址是就全體上發起 一念慮處

意를 마음에 비교하면, 마음이 크고 意는 작다. 마음은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意는 전체에서 발생되는 ‘한가닥의 생각’이다.

이처럼 의(意)는 마음에서 발생한 한 가닥 분별의식으로 매우 지엽적이고 한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역(譯)을 붙이면 생각으로 뜻을 풀이한다는 의미가 된다(意譯). 그럼 음(音)은 무엇일까?『예기(禮記)』「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凡音者는 生人心者也니 情動於中故로 形於聲하나니 聲成文을 謂之音이니라. (무릇 音이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소리에 나타나게 되고 소리가 곡조(曲調)를 이루는 것을 音이라 한다)

여기서 소리가 나타나게 됐다는 것은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소리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 역(譯)을 붙이면 마음에서 우러난 소리를 밖으로 내어 뜻을 풀이한다는 얘기가 된다(音譯).

정리해서 다시 말하면 의역은 뜻으로 주문을 해석하는 것이고, 음역은 소리와 직관을 동원하여 주문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대한 차이점이 생긴다. 의역은 단순히 그 뜻을 안다는 지식(알음알이)적인 차원이지만 음역은 그 지식(소리수행)을 실천과 결부시켜 지혜를 얻어내는 차원이다. 다시 말해 음역은 지식의 완성(完成)을 꾀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학(東學)의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라는 시천주(侍天主)를 직역하면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영세토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옵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天主)님은 누구이며 조화(造化)를 정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은 도저히 의역으로 100% 풀어내기엔 불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인 소리의 공식(音譯)을 통해 정답을 알아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음역인 것이다.

따라서 대의(大意)란 전제하에 주문의 뜻은 더 이상 언급되지 말아야 한다.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역이 전혀 불필요한 과정인 것만은 아니다. 앞에서 시천주의 의역을 예로 들었지만 그러한 주문의 뜻을 모르면 정확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주력이 바로 설 수 없게 된다. 물론 주문은 무슨 주문이든 믿고만 읽으면 좋지만 대의적인 의를 알아두는 것이 수행하는 데 있어 훨씬 유익하다. 대의를 깊이 숙지하지 않은 소리는 마치 붕어가 입을 뻐끔~ 뻐끔~ 하는 것과 같다. 항상 주문의 뜻을 깊이 새기고 소리에 부합시켜 읽을 때 그 소리는 완전해질 수 있다.

이처럼 의역은 주문의 대의(大意)와 정의(正意)를 말하는 것이며, 음역은 직접 소리 내어 주문을 읽는 행위를 말한다.

지(知)는 각(覺)을 이끌어 낸다.

옛말에 ‘선지후각(先知後覺)’이란 말도 있듯 먼저 아는 것이 있어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아는 것이 없으면 깨달을 것도 통달할 것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의역으로 먼저 그 뜻을 지(知)하고 음역으로 각(覺)을 이끌어 낸다.

知 -----------→ 覺

(意) ↑ (完)

行(音)

주문의 대의(大意)와 정의(正意)

주문은 대의 즉, 큰 범위 안에서만 그 뜻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개인의 사견을 개입시키면 자칫 정도(正道)를 벗어나 사도(私道)에 빠질 수 있다. 또 그것이 관념이 되어 수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언덕 위에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고 하자. 화가(畵家)에게는 이 모습이 더없이 좋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풍경화의 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 부처님이 본다면 어떨까? 아마 그 소가 또다시 생사윤회의 바다를 헤맬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백정(白丁)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소가 소 같이 안 보일 것이다. 등심 따로 안심 따로 꼬리 따로, 소가 거의 해체되어 예술적 가치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기는커녕 부위별 근수와 고기만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문의 뜻을 지나치게 파고들거나 행하지 않고 알려고만 드는 것은 자칫 백정의 시야처럼 주문을 해체시키는 꼴 밖에 안 된다. 주문이 주문같이 안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메스도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화사첨족(畵蛇添足)’이란 옛 고사처럼 뱀을 그리는데 쓸데없이 발까지 그려 넣을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대의(大意)에 입각해 주문의 뜻을 알면 그것으로 족하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전자시스템을 이해하고 시청하는 사람은 없다. 기본적으로 리모컨만 사용할 수 있다. 주문이 텔레비전이라면 주문의 뜻은 리모컨이며 주문을 읽는 것은 리모컨을 누르는 실질적인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TV화면에 나오는 그림은 의(意)를 실행하여 돌출된 각(覺)으로 볼 수 있다. 체험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 할 수도 있다. 자칫 자세히 알겠다고 TV를 뜯거나 건드렸다간 고장 날 수도 있고 자신이 다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주문의 뜻을 바르고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정의(正意)로도 말할 수 있는데 주문의 뜻을 알더라도 정확히 알라는 의미다. 여기엔 정통성의 문제가 뒤따른다. 왜냐하면 주문의 뜻을 올바르게 명명할 수 있는 건 그 주문을 만든 창주자(創呪者)나 법통을 전수받은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건을 구입할 때 첨부되는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사용설명서는 그 물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써 놓은 것이므로 반드시 사용 전에 참조해야 하듯 주문의 뜻은 그 주문을 완전히 알아버린 사람이 정의한 것이므로 읽기 전에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것이다.

소리의 진행이 곧 마음

소리 내어 주문을 읽는 것은 음역(音譯)의 구체적인 행동이다. 병을 치유하기 위한 투약 행위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약을 먹지 않고선 병을 다스릴 수 없듯 주문을 읽지 않고선 주문을 다스릴 수도 없고 참뜻도 깨달을 수 없다.

음(音)이 완전히 의(意)로서 귀일(歸一)하기 위해선 심신(心身)의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다. 그것은 꾸준히 주문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음은 곧 성(聲)이 된다. 왜냐 하면 소리를 내어 주문의 음을 지속적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읊조려야 하기 때문이다.

음(音)을 파자하면 말씀 언(言)에 입 구(口)와 여기에 하나 일(一)을 더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입으로 부르거나 외우는 것을 의미하며 곡조나 운(韻)을 매긴다는 뜻에서 하나 일(一)을 입 가운데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音) 밑에 심(心)을 더하면 의(意)가 되는데 이것은 곧 ‘소리의 진행이 마음’이라는 뜻도 있고 ‘소리에 마음을 결합시킨다’는 뜻도 있다. 또 ‘소리의 밑바탕은 마음이 돼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소리는 소리이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의(意)의 참뜻을 마음으로 깊이 수지(受持)하고 읊조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의(意)의 진면목을 알 수 있지, 입(口)을 꽉 닫고 소리(音)을 내지 않으면 깜깜해져서 급기야 음(音)의 의의(意義)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음역(音譯)은 곧 행역(行譯)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입에 꽉 차게 읽어야 한다.

주문수행 8

주문의 발성법(發聲法)

만트라의 세계에 있어 발성법이 뚜렷하게 정형화된 것은 없다. ‘족적을 따라가다 보니 마굿간이더라’ 하는 것처럼 막연하면서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자료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만트라의 세계를 심도 깊게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았지만 더욱 더 막연한 신기루에 당착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여러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참고하여 몇 가지 발성법을 체계화 시켜 보았다.

우렁차게 읽는다

처음에 주문을 읽을 때는 힘차고 씩씩하게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좋다. 아랫배(하단전)에 힘을 주고 꾹! 꾹! 눌러 읽는데 약하게 하면 소리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특히 처음에 읽을 때는 소리를 박력(迫力)있게 내야 소리를 잡을 수 있다. 사운드가 미약하면 기운의 발산력도 미약하고 체내의 바이브레이션도 떨어진다. 큰소리로 읽어야 심층에 있는 에너지를 자극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울림통이다. 하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운드는 강력하게 심(心)과 성(性)을 자극, 그에 상응하는 기운을 촉발시킨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너무 낮고 작은 소리(低聲)로 주문을 읽어 여기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나중에 수행이 깊어지면 자연히 사운드가 안으로 향하게 되어 저성(低聲)이 나오게 되지만, 이건 고성(高聲)이 마스터된 다음의 얘기이다. 예를 들어 150W의 출력을 갖춘 스피커가 있는데 듣는 이가 조용한 음악만을 좋아 한다고 해서 줄곧 그 한 가지 음악만 들으면 스피커는 그 음에만 길들여져 150W의 제 출력을 상실할 것이다. 때로는 락,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스피커의 음폭을 확장시켜 줘야 원하는 선율의 감동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관해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를 크게 바깥으로 내뿜어야 한다. 소리를 크게 내어야 자신이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그 소리를 통해 자신의 몸이 진동하며 깊은 조화 속에서 재조정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소리를 영창하면 할수록 몸은 감미로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열심히 수도하다 보면 소리가 세 번 바뀐다는 통설이 있다. ‘몸의 각성(體通)’을 통해 소리를 느끼게 됨으로써 한 번 바뀌고, ‘귀의 각성(聰明)’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두 번 바뀌고, ‘눈의 각성(觀音)’을 통해 소리를 보게 됨으로써 세 번 바뀌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엔 음높이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불가에서 고성염불(高聲念佛:높은 소리로 하는 열 가지 공덕)을 원칙으로 하는 것도 큰소리로 ‘아미타불’ 등 기타 염불을 대성(大聲)하노라면 목청도 좋아지고 용맹스런 정진심이 나오며 삼매력이 깊어지는 등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문을 큰 소리로 읽게 되면 잡념을 떨쳐 버릴 수 있게 소리를 쭉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큰소리로 갑작스럽게 발성하면 목소리가 상하거나 성대가 상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 옥타브 한 옥타브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때 단전(丹田) 즉, 복성(腹聲)을 내면 목소리가 쉬거나 상하는걸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에선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정기훼손(精氣毁損)의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창이나 노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활력이 넘치고 대부분 장수한다는 통계도 있다.

문제는 소리의 높낮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운율의 준수와 단전 기운의 관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고함을 질러대거나 주문을 포악하게 읽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과 주위에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따로 개별적으로 발성을 연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장(悠長)하게 읽는다

목소리를 길게 빼면서 느리게 오래 읽는 것이다. 짧고 숨 가쁘게 읽는 것에 비해 진동이 길고 오래가기 때문에 소리의 효과를 빨리 볼 수 있다.

소리를 느리게 읽음으로써 심층으로 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슴은 너무나 예민하기 때문에 아주 느리고 리드미컬한 소리만이 가슴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가슴까지 소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한 만트라는 완성된 것이 아니다. 가슴속까지, 가장 깊은 중심부까지 소리가 들어가야 만트라는 완성된다. 만트라의 속도를 늦추고 그대는 더욱 더 깨어 있어야 한다.

느림은 빠름보다 그 감동이 한층 강하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부분을 느리게 처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느림을 통해 감정을 실을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낭랑(朗朗)하게 읽는다

밝고 맑게 읽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소리가 나오긴 힘들고 어느 정도 목소리가 다듬어져 곰삭아야한다. 배추를 다듬어 절여서 담근 김치가 일정기간 삭혀야 김치 맛이 살아나듯 소리 또한 일정기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 그래서 소리의 흐트러짐 없이 낭랑하게 읽노라면 옥구슬이 소반 위에 굴러가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구성지게 읽는다

맛좋은 음식이 비위를 당기듯 주문을 은근하면서도 구수하게 읽는다. 마치 산사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염불 소리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는 것이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읽는다

한 자 한 자 발음을 정확하고 또랑또랑하게 읽는 것이다. 글자 하나의 의미와 법력(法力)이 상호 다르고 기운도 다르기 때문에 악기의 음(音)처럼 제 발음, 제 소리로 또박또박 정확히 읽어야 한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따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리를 통해 해방된 에너지는 저절로 드러나 마음에 특수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만트라의 올바른 발음이 중요하다. 진지하게 수행하면 소리의 진동이 사과의 진동과 동조되어 순수의식에 이를 수 있다.

정확히 발음(發音)해야 주문 속에 내재된 에너지도 정확히 발음(發音)한다. 주문은 ‘완전한 음절(音節)’이기 때문에 ‘완전한 발음(發音)’을 해야 ‘완전한 기운(氣運)’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완전한 발음의 지름길은 ‘완전한 입모양’에 달려 있다. 특히 초심자나 소리가 부정확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정확한 입모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즐기는 마음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는다

온화한 마음으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는다. 소리가 운율을 거스르지 않고 소리에 편승해 가며 읽으라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주문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주문을 즐기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주문을 즐기려면 재미와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재미를 느끼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면 주문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주문 읽는 것이 지루하지도 않고 또 고루하게 주문을 읽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즐기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주문 수도는 같은 글귀를 반복 습득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인내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여유 있게 주문을 즐기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보다 쉽게 주문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을 물 흐르듯 읽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은 다툼이 없다. 그래서 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주문수행 9

주문은

마음(Mind)으로 읽는다

호흡은 주문의 숨결

어느 날 부처님이 어떤 사문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동안 있느냐?” 한 사문이 대답하기를 “며칠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너는 아직 도(道)를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사문에게 “사람의 목숨이 얼마동안 있느냐?”고 물었다. “호흡하는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때 “네가 바로 도(道)를 아는 자로구나!”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한마디로 생사(生死)가 코끝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호흡이 짧아지면 그 만큼 수명(壽命)도 짧아질 것이요, 호흡이 길어지면 그 만큼 수명도 길어질 것이다. 그래서 원상법요(原象法要)에서 호흡(呼吸)을 생사지지(生死之至)라 하여 죽고 사는 것의 지극함이라고 말한다.

주문수행 또한 호흡을 배제하고는 올바른 수행을 이룰 수 없다. 혹, 주문수행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호흡과는 무관하다고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주문을 읽다보면 저절로 호흡조절이 이루어진다. 일정하고 균형된 호흡만으로도 소리는 확고해지고 안정되며 깊어진다.

그러므로 주문수행에 있어서 호흡을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주문소리를 어떻게 내느냐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수문수행은 단전호흡처럼 호흡을 균일하고 면밀(綿密)하게 유지할 수가 없다. 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공룡이 불을 뿜듯 소리를 입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래서 나름의 호흡법(呼吸法)을 갖게 된다.

호흡은 하단전으로

그럼 어떤 호흡과 소리가 주문수행에 적합할까? 한마디로 복식호흡(腹息呼吸)과 복성(腹聲)이다. 즉 아랫배인 하단전(下丹田)으로 내는 소리를 말한다. 보통 소리를 목성이나 흉성(胸聲)으로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폐식(肺息)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하단전은 정・기・신(精・氣・神)중에 정(精)에 해당하는 곳으로 기해혈(氣海穴)이 자리 잡고 있다. 기해(氣海)는 기의 바다라는 뜻이다. 시냇물, 강물이 흘러흘러 종래엔 모두 바다로 모이듯이 무한한 대 생명의 에너지(氣=프라나)가 일차적으로 모여 쌓이는 곳이다. 기해(氣海)라는 말과 함께 따로이 음해(音海)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즉, 하단전은 ‘소리의 바다’라는 것이다.

하단전에서 나오는 복성(腹聲)은 소리가 우렁차고 절도가 있다. 숨이 깊어지므로 상대적으로 의식도 깊어진다. 또한, 소리가 아랫배에서 나오기 때문에 오장육부를 비롯하여 세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자극해 손끝까지 파동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병약한 사람은 상당한 치료효과를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소리의 고유한 리듬과 파동이 호흡과 맞아 떨어져 병약한 부위나 세포에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복식호흡을 통한 복선은 장시간 수행을 해도 목소리가 쉬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하루 종일 울어도 목소리가 쉬지 않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오히려 힘이 솟아나고 하면 할수록 다이내믹하고 심도 깊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에 반해 폐식을 통한 폐성이나 목성은 우선 어깨가 들썩여 횡경막을 자극하게 되므로 가슴이 뻐근하고 갑갑하다.

소리의 진동이 가슴부위만 타고 돌기 때문에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참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장시간 주문을 읽게 되면 목소리가 잠기거나 쉬어 버리는 단점도 있다. 그리고 허리가 자꾸 구부러지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폐성과 복성의 차이를 악기에 비유해 보면 그 차이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타악기의 경우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음색이나 음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 때 중앙부위를 칠 때 가장 고른 음이 나온다. 그리고 진동이 깊고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마찬가지로 신체 어느 부위에서 소리를 울려 주느냐에 따라 음폭이나 음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로 하단전(下丹田)이다. 그래서 소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치고 복성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초보자의 경우 대부분 복성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가 들뜨거나 인위적인 가성을 내기 십상이다.

이를 볼 때 수행의 첫 걸음은 복식호흡을 통해 단전에 소리의 중심을 잡는데서 시작한다. 일단 중심이 잡히면 그때부터 소리가 온몸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주송과 기운의 흔들림이 없게 된다.

소리의 리듬과 파동까지

단전호흡(丹田呼吸)의 요지는 대자연에 충만해 있는 기(氣)를 호흡을 통해 내 몸에 끌어들여, 인체의 기(氣)와 융합해 양기(陽氣)를 생산하여 운기(運氣)함으로써, 종래엔 천지와 합덕(合德)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문수도는 이런 호흡의 효과와 더불어 소리의 효과를 추가한다. 그러므로 수행의 효과가 호흡만 하는 것에 비해 월등하다. 여기서 소리의 효과란 ‘주문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힌 6가지 특성 중 2, 4번째 ‘일정한 운율(Rhythm)’에서 얻어지는 성스런 힘과 비밀스런 에너지를 말한다.

주문은 정연한 운율이 존재하며 그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해당되는 우주의 율려(律呂)와 공명(共鳴)하고, 그러면 순식간에 그 운율에 파동을 타고 에너지가 흡수된다. 즉 코드를 꽂으면 그 즉시 전기가 통하는 이치와 같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띠는 소리와 호흡에 관해 ‘만트라의 파동에 호흡과 집중된 마음을 실어 우주의 감미로운 리듬을 타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회전목마에 몸을 싣듯 우주의 숨결, 맥박에 주문(소리, 호흡, 마음)을 싣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수도의 삼요체를 호흡, 소리, 마음이라 한 것이다.

주문은 마음으로 읽는다

그 동안 8차례에 걸쳐 Mantra에 대한 다양한 개론(槪論)과 송주법(誦呪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Mind다. 니체의 말대로 창공으로 높이 솟으려면 반대로 그 만큼 대지 속으로 깊게 내려가야 하듯 Mantra를 읽는 Mind가 깊어야 하는 것이다.

Mantra는 단순히 Sound만의 수행법이 아니다. 또 氣만을 축적하려는 수행법도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소리 지르고 氣만 축적하면 모든 공부가 환히 열렸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여기서 핵심을 놓치는 우(偶)를 범하고 있다. Mantra는 모종의 所自出과 방향성(목적)을 갖고 역사 속에 그 이상을 성취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정신에 상응하는 역사정신과 인사체험(人事體驗)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태을주는 사람을 많이 살린다는 목적과 법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장에서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행위(布敎)와 Mind(相生精神)를 가졌을 때, 비로소 태을주라는 만트라의 정신과 부절과 같이 합쳐질 수 있다. 즉, 사람을 살리는 인사체험을 통해 그 Mind가 사무칠 때, 그에 상응한 깊이만큼 Mantra세계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주문만 읽는 것은 반쪽짜리 수도밖에 안 된다. 즉, 좌불(坐佛)이 아니라 유불(遊佛)이 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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