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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보성·장흥 78코스 제1부
율포솔밭해변-명교마을-회천천-평동들-군학마을-장흥 용곡해안
20220623
1.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남파랑길 77코스를 마친 뒤 바로 78코스를 출발하여 율포솔밭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다에는 득량도가 얌전하기도 당당하기도 한 모습으로 흰안개옷을 걸치고 있다. 그 뒤쪽에는 고흥반도가 희끄무레한 누에 모습으로 누워 있다. 율포솔밭해변의 느긋함이 지금도 그립다. 여름날의 백사청송에서 마음의 티끌 한 올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출발, 바삐 걸었다. 허겁지겁, 순식간에 사진을 남기면서 남부관광로를 축으로 하여, 해안길과 들녘길을 드나들면서 걸었다. 무엇이 남았는가?
보성은 이 길손과 운이 맞지 않았는지, 명품 풍경을 모두 숨기고서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남파랑길 보성 모든 구간에서 날씨는 운무에 덮여 있었다. 그래서 보성의 진면목을 대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번 구간도 마찬가지다. 득량만에서 멋지게 바라보아야 할 고흥만과 득량도, 다도해의 날아가는 섬들을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서는 투명하게 쾌청한 어느 날 보성을 다시 탐방해야 할 것이다.
보성이 내세우는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보성 녹차밭과 다향, 일림산의 자태, 조선수군재건로, 이들이 포함될 것이다. 보성 녹차밭은 거리가 멀어서 살필 수 없었고, 다향은 안내주최측이 정한 제한시간에 쫓겨 향유하지 못하였다. 일림산은 산행한 적이 있기에 멀리서 바라보는 일림산 풍경의 즐거움을 누리면 되는 것인데, 운무에 덮인 일림산 산줄기는 그 본연의 자태를 숨겨 놓아 이 역시 감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코스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재건로 탐방을 으뜸으로 꼽아야 할 것 같다.
조선수군재건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조선수군재건로 조형물이 세워진 군학해변이다. 군학해변의 조형물에 기록된, 보성과 관련한 이순신 장군의 행적 중 주요한 곳을 나열해 본다. 1.보성군 조양창(보성군 조양면 우천리 고내마을) 입성 2.득량 선소(득량면 비봉리)에서 쌀을 선적한다. 3.보성읍성 열선루(보성읍 보성리)에서 '상유십이(尙有十二)' 장계를 쓰다. 4.율포(회천면 율포리)에 이르다. 5.명교 백사정(회천면 벽교리)에서 말을 쉬게 하다. 6.군학 군영구미(회천면 전일리) 바다로 출항하다. 이들 중, 남파랑길 76코스에서 선소해변, 남파랑길 78코스에서 율포해변, 명교해변, 군학해변 등을 탐방하여 모두 4곳을 탐방하게 되었다. 조양창과 열선루는 탐방하지 못한 곳이다.
원균 장군이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여 조선수군이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9일 전쟁 중에도 군량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보성군 조양창에 입성하였다. 1597년 8월 15일 보성읍성에 머물 때, 조선수군이 붕괴된 상황에서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해 싸우라는 선조 임금의 유지를 받는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보성읍성 열선루에서 그 유명한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장계를 올렸다.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죽을 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今若全廢舟師(금약전폐주사) 是賊所以爲幸而由(이적소이위행이유) 湖右達於漢水(호우달어한수) 此臣之所恐也(차신지소공야)
지금 만일 수군을 전부 없애 버린다면, 이는 곧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호남을 거쳐 한강까지 곧바로 쳐들어갈 터인데,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미신불사) 則不敢侮我矣(즉불패모아의)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계를 올린 뒤 1597년 8월 17일 이순신 장군은 보성 열선루에서 출발하여 보성의 전선대기소가 있는 해안으로 향하였다. 율포는 이순신 장군이 병참물자를 운송하며 지나던 길이며, 율포해변은 이순신 장군이 해상 기동훈련을 하였던 곳이라 한다. 이순신 장군은 보성 회천면 벽교리 명교마을 백사장에 도착한다. 장군은 백사정(白沙汀)에서 말을 쉬게 하고 말먹이를 나누어 주었으며, 백사정(白沙汀) 해안에서 군사를 도열하고 군기를 점검하였는데, 이때 장군의 병사들은 120명이었다고 한다. 벽교리 명교마을 일원 해안가 백사정(白沙汀)은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도열하고 군사훈련을 하였던 곳의 일부이다. 1597년 8월 18일 조선수군을 재건한 이순신 장군은 군학마을에서 보성군민들과 바다로 출항하였다.
이번 남파랑길 78코스 보성 구간을 걸으며 조선수군재건로 안내판과 군학해변에 조성된 조선수군재건의 여정 조형물을 살피며 이순신 장군의 뜨거운 애국심,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절치부심의 끈기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난중일기의 '군영구미(軍營仇未)'가 과연 보성의 ‘군학群鶴'마을이 되느냐의 의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장흥에서는 '군영구미(軍營仇未)'가 군학마을이 아니라 남파랑길 78코스에서 거쳐가는 장흥군 안양면 해창리 해창마을이라고 주장한다. 장흥에서는 군학해변 조형물을 감수한 노기욱 박사의 '군영구미(軍營仇未)'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부족하다는 학계의 비판을 들어 정면으로 반박하여 '군영구미(軍營仇未)'는 군학마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노기욱, 이훈’ 등 논자들은 ‘안양 海倉’에 전적으로 무지했거나, 아니면 ‘안양 海倉’을 일부러 외면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조선재건로를 조성한 문화사업자측이 학계의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군영구미(軍營仇未)' 지역을 올바르게 밝혀야 할 것이다.
정유재란 때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와 조선수군재건로가 남파랑길 78코스 보성 구간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이번 코스에서 가장 빛나는 명품 풍경도 감상했다. 회천천과 그 지류가 감싸는 평동들을 돌아서 전일교를 건너 전일리 들녘으로 나가면 팽나무인 듯 후박나무인 듯 멋진 나무가 들녘에 또 붉은 지붕의 집 마당에 각각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물론 크기나 품새에서 들녘의 나무가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지만 각각의 특색을 인정하면서 두 나무의 대칭적 조화와 대비의 아름다움이 또다른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지류를 합수한 회천천이 폭넓게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하구의 방죽길 가로수도 아름다웠다. 해안쪽 가로수는 몸집이 마른데다 키가 작은 반면에, 들녘쪽 가로수는 몸집과 키가 큰데 이 다른 두 수종의 가로수가 방죽길 양쪽으로 늘어선 풍경 또한 대비적 조화의 풍경으로 길손의 마음에 여울져 흘렀다.
제2부로 이어짐
2.걸은 과정
코스 내 관광지와 코스 외 주변관광지가 소개되어 있는데, 코스 내 율포해수녹차센터도 들르지 못했다.
1597년 8월 17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출발하여 보성의 전선대기소가 있는 해안으로 향하였다. 이순신은 수군을 철폐하라는 유지를 받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한편으로 군사, 무기, 군량, 전선을 확보하여 조선수군 재건에 총력을 다하였다. 이곳 율포는 이순신이 병참물자를 운송하며 지나던 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율포해변은 이순신이 해상 기동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2022년 7월 9일~8월 28일, 51일 동안 개장한다고 적혀 있다.
‘율포해수녹차센터’는 지상 3층 연면적 4천424㎡ 규모로 2018년 9월 문을 열었다. 해수 노천욕을 즐길 수 있으며, 지하 120m 암반층에서 끌어올린 해수와 보성녹차를 이용한 힐링센터다. 1층에는 카페와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아트홀, 차 연관 제품과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특산품 판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2층은 남녀 해수녹차탕이 있어 670명 수용이 가능하다. 3층은 야외 노천탕과 테라피를 위한 아쿠아토닉풀 등 다양한 스파 시설을 갖췄다. 황옥방, 스톤테라피, 황토방 등 찜질도 즐길 수 있다.(22.6.6. 광주매일신문 임병언 기자의 기사에서 발췌)
우암길을 따라 율포리 중심가로 나가도 되지만, 남파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율포솔밭해수욕장 백사장으로 이어진다.
뒤쪽에 보이는 방파제는 동율항(신율포항)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방파제는 율포항이다.
득량도가 포토존에 들어온다.
다향길은 전 구간이 1~4코스인데 남파랑길과 동행한다. 1코스는 남파랑길 78코스, 2코스와 3코스는 남파랑길 77코스, 4코스는 남파랑길 76코스와 동행한다.
보성군 회천면 면소재지 율포리의 중심지가 된다.
앞쪽 주택 앞의 해송이 멋지다.
보성회천수산물위판장, 수협활선어회센터와 회천건어물판매장이 앞에 보인다.
회천면 율포리에서 벽교리로 넘어왔다. 남파랑길은 남부관광로에서 빠져 나와서 득량만 다향울림촌을 빙 돌아서 다시 남부관광로로 나간다.
차훈명상이란 뜨거운 찻물에서 발생하는 차의 훈기를 숨을 통해 들이마시고 얼굴에 쐬어 전신 기혈을 조절하고 몸 안의 차고 탁한 기운을 정화함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는 양생 효과를 얻는 명상이라고 한다.
바다에 득량도가 떠있다.
남부관광로 명교 다리를 건너 남부관광로를 따라 진행한다.
뒤쪽에 보이는 마을은 회천면 벽교리 명교마을이다. 천명선원은 명교마을에 위치해 있는 듯하다.
벽교리는 한때 장흥군 회령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당리, 명교리, 벽동리, 다남리, 이문리, 신리, 장변리 일부 지역을 벽동과 이곳에 있는 운교의 이름을 따서 벽교리라 하여 회천면에 편입되었다. 명교마을은 이천 이씨가 능주에서 살다가 임진왜으로 8세 때 가족을 잃고 이 마을로 피난하여 강씨의 재(材)에서 살다가 진주 강씨의 딸을 맞이하여 정착한 후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구전에 의하면 강릉 유씨 촌이었다고도 하나 문헌에는 없다. 마을의 이름은 인천 이씨가 족보 등을 보면 재(材) 이래 명교(鳴橋)로 불리어 온 듯하며 명교(明敎)로 개칭된 것은 조선 철종 때 이한고, 손봉구 씨 등의 제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뒤쪽에 득량만 다향울림촌 건물이 보인다.
남부관광로에서 해안길로 들어와 해안길을 잠시 따라가다가 다시 남부관광로로 나간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의 버스정류소가 부대앞, 그렇다면 이 근처에 부대가 있는 것 같다.
1597년 8월 17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보성 회천면 벽교리 명교마을 백사장에 도착한다. 백사장은 바닷가 모래 백사(白沙)와 강가의 흙(汀)이 만나 강둑을 이룬 곳을 의미한다. 회천면 벽교리 일원에는 영천강, 봉강천, 회령천 강물이 흘러드는 곳에 강둑인 칫등(모래톱)이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 일본이 만든 지도에는 명교에서 칫등까지 3~4km에 걸쳐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봉강천과 인접한 칫등 모래밭은 정부가 주도개발사업을 위해 모래를 채취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예부터 이곳은 강물과 바다가 만나 강둑길 주변이 푸른 초장을 이루어 말에게 먹일 꼴이 많았다. 인근에 회령산성 목마장이 있는 것도 군마에게 먹일 건초를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이유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백사정(白沙汀)에서 말을 쉬게 하고 말먹이를 나누어 주었다. 이순신은 백사정(白沙汀) 해안에 이르러 군사를 도열하고 군기를 점검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병사들은 120명이었다. 벽교리 명교마을 일원 해안가 백사정(白沙汀)은 이순신이 군사를 도열하고 군사훈련을 하였던 곳의 일부이다.
일림산과 사자산 능선이 구름에 덮여 있다. 일림산 아래의 마을은 회천면 전일리 외래마을, 그 오른쪽은 회령리 시장마을인 듯.
회천면 벽교리에서 운교를 건너 회령리로 넘어간다. 운교를 건너 바로 왼쪽으로 꺾어 회천천 둑방으로 진행한다.
운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회천천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남파랑길 78코스 전체 18.9km 중 이제 3km 지점을 통과한다. 남파랑길은 회천천과 오른쪽 회천천의 지류가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지류를 따라 거슬러 오른다. 회천천과 회천천 지류 사이의 들을 평동들이라 이르는 듯.
둑방길은 회천천의 지류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지류를 거슬러 오른다.
회천천의 지류가 회천천과 만나는 왼쪽에서 둑방길을 따라 평동들을 빙 돌아 이곳으로 왔다. 득량도와 고흥반도가 보인다.
오른쪽 앞의 회령사거리를 곧바로 올라가면 회령 시장을 비롯하여 회령리 중심 시가지인 회천면 회령리 시장마을이다. 일림산 능선은 구름에 덮여 있다. 남파랑길은 전일교를 건너 바로 왼쪽으로 꺾어 회천천의 지류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시장마을은 사방으로 길이 뚫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물물거래가 이루어져 여러 성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이 키의 뒷부분, 마을은 곡식이 모이는 키의 앞 평평한 부분이라 하여 1909년경부터 시장(市場)이라 불렀다 하며, 현재는 5일시장으로 지정되어 4일과 9일에 장이 서고 있다.
전일교를 건너 회천면 회령리에서 전일리로 넘어간다. 남파랑길은 전일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회천천의 지류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들녘과 오른쪽 붉은 지붕집의 나무 두 그루가 멋지다. 팽나무일까? 아니면 후박나무일까?
일림산 산줄기 능선은 구름에 덮여 있고 그 아래 회천면 전일리 내래와 외래 마을이 보인다. 들녘의 나무는 명품이다.
전일리는 한때 장흥군 회령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래리, 외래리, 평동리, 휘리를 병합하여 전일산 봉수(烽燧) 밑이 되므로 전일리라 해서 보성군 회천면에 편입되었다. 내래마을은 1603년경 영광인(靈光人) 정경준(丁景俊)씨가 장동에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미름은 이곳에 회령현을 다스리는 동헌(東軒)이 있었는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라 하여 내접(內接)이라 하였으며, 내접마을은 외내접(外來接)과 내내접(內內接)으로 불리우다 일제때부터 외래(外來), 내래(內來)라 했다 한다.
중앙 뒤쪽 회천천의 운교 다리를 건너 회천천 둑방을 따라와서 왼쪽 회천천의 지류를 따라 올라갔다.
회천천 지류의 오른쪽 둑방길을 거슬러 올라가 위쪽의 전일교 다리를 건너 둑방길을 따라 내려왔다.
남파랑길은 왕새우양식장을 빙 돌아서 오른쪽에 보이는 '득량만키조개' 사업체 건물 뒤쪽을 거쳐 남부관광로로 나간다.
둑방길 양쪽의 가로수는 수종이 다르다. 수종이 무엇일까?
일림산 산줄기는 여전히 구름에 덮여 있다. 왼쪽 마을은 회천면 전일리 외래마을과 내래마을, 맨 오른쪽 마을은 회천면 회령리 시장마을이다.
오른쪽에 득량도, 그 뒤쪽으로 고흥반도가 길게 누워 있다.
왼쪽 봉강천을 거슬러 남부관광로 봉강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회천면 전일리 봉강천의 봉강교를 건너 서쪽 전일리 군학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남부관광로는 일반국도 18번과 77번이 동행한다. 왼쪽 바다에 보이는 득량도는 계속 눈길을 끈다.
남파랑길은 남부관광로에서 왼쪽 군학해안으로 이어진다.
군학해안을 걷다가 남부관광로 군학마을 버스정류소로 나가 군학마을회관과 명품 느티나무를 보고 되돌아온다.
회천면 전일리 군학(群鶴)마을은 경주 김(金)씨 이전에도 여러 성씨가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사적(事跡)은 없고 경주 김(金)씨 낙향 선조이신 김명립(金明立)이 1558년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1457년(세종3년)에 이곳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개설됨으로써 군영구미(軍營仇未)라 불러오다 1554년 호남진지(湖南鎭誌) 중 회령포진지(會寧浦鎭誌)에 의하면 회령면 휘리포(揮里浦)라 부른 기록이 있고, 그후 구미영성(龜尾營城)이라 부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성군 회천면 군학(群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느티나무 뒤쪽에 군학마을회관이 보인다.
군학마을 명품 느티나무를 살핀 뒤 군학해안으로 나가기 위해 수산업체인 일림수산 방향으로 향한다.
*1597년 8월 18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바다로 출항한 곳이 보성 회천면 군학 군영구미이다. 조선시대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개설됨에, 구미라고 하는 마을에 군영을 설치하여 군영구미라 불렀다. 1554년 호남진지(湖南鎭誌) 중 회령포진지(會寧浦鎭誌)에 의하면 회령면 휘리포(揮里浦)라 하였다. 하번전선(下番戰船)이 항상 계류되어 있었던 군영이었다. 현재 마을 지명 중에 휘리재, 성머리, 성안, 성안우물, 진밖끝, 활터, 사장등터, 사장나무 등을 비롯하여 군사적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조선수군의 깃발을 휘날린 곳이라는 이유로 휘리라고 하였다. 그 뒤 흰 군사들의 깃발이 항시 게양되어 있었기에 군학이라 부르게 된다. 이곳의 지형은 전일산으로 이어져 그 모습이 거북과 같다 하여 구미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하번전선이 계류하는 이곳을 군영구미라고 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는 조선수군 함대가 군영구미 항구에 입항하기로 하였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배설은 장흥 회령포로 이미 돌아갔다.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배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보성과 장흥 일대의 해상의병의 협조를 구하였다. 이순신의 전령을 받은 김명립, 마하수, 백진남, 정경명, 정경영, 정명렬,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변홍원, 변홍제 등이 향선(어선)을 이끌고 왔다. 이곳 군영구미는 이순신이 병참물자를 선적하고 다시 바다로 출항한 곳이다.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1.벌교에 입성하다. 2.벌교에서 군사를 정렬하다. 3.이순신 조양창에서 군량을 구하다.
4.이순신 '양산항' 집에서 최대성과 만나다. 5.이순신의 군관 득량 선소에서 쌀을 선적하다.
6.이순신 굴암에 간 군관을 기다리다. 7.이순신 열선루에서 "상유십이" 장계를 쓰다.
8.이순신 군사를 이끌고 봇재를 넘다. 9.이순신 율포에 오시다. 10.이순신 명교 백사정에서 말을 쉬게 하다.
11.이순신 회령에서 군수물자를 조달 받다. 12.이순신 군학 군영구미 바다를 나가다.
*1597년 8월 18일 조선수군을 재건한 이순신 장군은 보성군민들과 바다로 출항하였다.
보성군은 이순신 장군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조선수군을 재건한 인연이 깊은 곳이다. 1597년 8월 9일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도 군량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보성군 조양창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보성군 열선루에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라고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썼다.
*보성군은 이순신 장군의 상주 방씨가 소녀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장인인 방진은 보성군수를 지냈다. 상주 방씨는 겨우 열두 살의 나이에도 영민하고 자태가 기품이 있어서 어른과 같았다.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상주 방씨는 정경부인이 되어 그 예의와 사랑을 다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방씨는 모두가 한 뿌리로 오늘날에 이르러 온양으로 일원화한 것이다.
*글·그림 감수, 전남대학교 문화재학박사 노기욱
군학해변에서 남부관광로로 나와 남부관광로를 따라간다.
남부관광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에서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로 들어간다.
남부관광로에서 왼쪽 수문용곡로를 따라 이어간다.
득량만이 수문해안을 거쳐 맨 끝으로 이어진다. 방파제가 있는 수문항 뒤에 장재도, 장재도 뒤 왼쪽의 작은 섬은 자라섬, 맨 뒤 왼쪽에 길게 누운 섬은 장환도이다.
스파리조트 안단테는 남파랑길 79코스를 걸을 때 표지가 되어 위치를 확인하는 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자동차로 수문해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부관광로에서 오른쪽 아래로 빠져 나가야 한다.
이 건물은 득량만 서남쪽 해안에서 위치 확인의 표지가 되어 준다.
도보로 수문해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부관광로에서 왼쪽 수문용곡로로 빠져 나간다.
남파랑길은 스파리조트 안단테 실내물놀이풀장 옆 용곡길로 이어진다.
남파랑길 장흥 78코스 안내도가 용곡길 전봇대 옆에 설치되어 있다.
남파랑길 78코스 장흥 구간에서 소개한 세 곳을 모두 탐방할 수 있다.
제2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