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4-
전문섭의 북한군 10사단이 남한으로 침투해서 들쑤시고 다니자 영향력 있던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중령은 국군에게 왜 보복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국군은 훈련소에서 3주만 훈련 받은 훈병들을 차출해서 647명의 특공대를 편성해서 북파했다. 이 엉성한 부대는 훗날 주원 부대 사령관 채명신 중령이 지휘했다. 백골병단이라는 부대 별칭을 가진 이 북파 특공대는1951년 2월 초에 북파되어 두 달간 동부 전선의 북한군 후방 30-50km 지역을 휘저으며 북한군들에 큰 피해를 주고 귀환하였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부대였지만 남파 공비 사령관 길원팔을 잡아 죽이고 북한군 부대 여러 개를 기습해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었다. 가혹한 유격 전투 상황에 대원 절반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어가면서 말이다. 백골병단 출정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정일권 총장 채명신 장군은 백골병단의 북파 작전등에서 경험을 쌓아 국군 최고의 게릴라 전 전문가가 되었고 그런 평가는 나중에 주월 한국군 부 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데 한 토대가 되었다. 을지 무공 훈장을 박경석 중령에게 수여하는 채명신 장군- 오른쪽은 중대장 이재택 대위 채명신 장군이나 박경석 장군은 결국 북한군 10사단이라는 직간접의 매개체를 공동으로 두고 월남에서 사령관과 대대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을 맺게 된다.
채명신 사령관이 대민사업을 강조했던 지휘 방침을 추진했지만 박경석 재구 대대장은 어느 주월 한국군 부대도 하지 시도하지 않았던 극빈 월남인 가정이나 배트콩 가족을 위한 재구촌을 세워 대민 사업을 더 강화했었다. 자기 경험에서 대민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경석 장군은 어린 나이에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서 포로 경험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역전의 용사다. 동족을 침략한 잔인한 김일성 일당에 대해서도 강한 적개심을 가진 투철한 반공 인사이기도 하다. 재구촌 건립후 월남 군수 록대위가 빈딘 성장의 감사장을 박경석 중령에게 전달하고 있다.왼쪽은 촌장 이런 강직한 분이 나와 대화를 나눌 때 북한군 10사단장 전문섭의 인간미있는 포용력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했었다. 나는 아래 전문섭의 사진을 보여드리며 혹시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았다. 80대의 박경석 장군이 70년 전의 인물을 기억하기는 사실 무리였다,
박장군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북한군 사단장 전문섭이 사람 좋은 인상이었고 또 대화 할 때 자주 미소를 지어서 상대방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인간미의 특성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전문섭이 바로 그런 인상을 주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 맞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북한군 10사단장 전문섭의 후년 모습 전문섭은 어리고 똑똑하게 생긴 박경석 소위가 마음에 들어 꼭 전향시켜서 북한군 군관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따뜻한 대접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소위 남조선군의 엘리트 장교가 인정에 감동해서 평생 그의 인간미를 가슴에 품게 만들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 사례를 소개하는 배경이 있다. 적의 마음을 잡아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기술, 즉 중국 고전에서 심정[心征]이라는 표현하는 고난도의 포용 기술에 대해서 우리 군도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 볼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희망이 있어서이다. 인간적인 대우로서 적의 마음을 얻어 아군으로 만드는 포용의 사례는 삼국지나 수호지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다. 사로 잡혀 꽁꽁 묶여 끌려온 적장을 이쪽의 장수가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좌우를 꾸짖어 물리친 다음 손수 결박을 풀어서 상좌에 모시는 외교술로서 적장을 감화시켜 아군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가 이런 포용의 기술을 정치에 도입한 왕도정치를 주장했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모택동은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포용의 기술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서 적인 장개석 군을 격파하는 한 주요 기술로 활용하였다. 이 모택동의 포용 기술이 어찌나 크게 위력을 발휘했는지 서구[西歐]에서는 모택동의 포용 기술을 뇌를 완전 세탁해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세뇌[洗腦]라고 불렸다.
모택동의 세뇌 전술 전략에 당했던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천도 후에 모택동군이 포로로 잡았다가 석방한 휘하 장군들의 타이완 귀국을 금지했었다. 모택동이 그들에게 전파력 강한 바이러스를 심어 일종의 정치적 좀비로 만들었다고 오해하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북한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중공군에게 세뇌 교육을 받고 있는 미군 포로들.이 세뇌 교육에 넘어간 21명의 미군들과 1명의 영국군이 중국으로 갔다. 이 포로 수용소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에 참전해서도 이 원칙을 지켜 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을 비교적 자제했었다. 동족인 국군 포로들이나 유엔군 포로들 학살을 밥 먹듯 해대던 북한군과 대조가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자세한 사례를 들어보겠다.
만주에서 공산당 간판을 걸고 비적 노릇을 하던 김일성도 일본군이 구사했던 심정, 즉 포용 기술에 당해서 소련으로 도망친 경우이기도 하다. 1939년 만주의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격화되어가자 후방의 후환거리를 없앤다는 목표로 노조에[野副 昌德] 소장을 사령관으로 한 노조에 작전을 발령하였다.
김일성 토벌의 총지휘를 한 노조에 쇼도쿠 소장 군경 7만명과 전투기까지 동원한 대 토벌전에 만주의 항일연군 사령관 양정우가 사살되고 김일성 부대를 비롯한 부대들은 가혹한 추격에 쫓기다가 섬멸되거나 소련으로 도망쳤다.
이 노조에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던 특수 부대가 나카지마 다마지로[長島 玉次郞]헌병 상사가 지휘하던 나카지마 공작반이다. 그는 항일연군에 침투해서 잡은 포로는 인정과 예우로서 처우해서 대부분을 모두 전향시켰다. 그의 공작은 특히 항일연군 수장 양정우의 형제같았던 정빈을 전향시켜 결국 양정우를 죽게 만들었다. 김일성의 유격대-- 후열 중앙이 김일성이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조선인 공비 두목 중에서도 박득범은 전향하여 모든 정보을 다 불고 만주국 경찰 경위로 변신하였다.오성륜이라는 거물도 전향시켜 만주 경찰 고문으로 할용하였다.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도 체포되었는데 나카지마가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가족과 지내며 지극 정성으로 대하자 김혜순도 전향해서 김일성에 관한 정보를 다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결혼하였다.
김일성 부대는 약 300명 정도 되었고 약 30명이 여성대원들이었다. 이중에 제일 예쁜 여자가 김혜순이었는데 당연히 김일성의 처가 되었다. 김혜순을 잃고 김일성은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흐르자 지순용이라는 대원과 연애중이던 김정숙을 가로채서 마누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탈북한 북한의 언론인에게 직접 들었었다. 왼 쪽이 김일성, 중앙이 최현, 오른 쪽이 안길. 이 사진은 후에 김일성을 중앙으로 배치된 사진으로 변조되었다. 나카지마 공작반의 사례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에서는 상당히 연구가 되었었다. 나카지마는 나중에 대위로 특진했다. 전후 소련에 끌려가서 고생하다가 일본에 돌아오자 동해의 사도 섬에서 농사를 짓다가 작고했다. 노조에 작전에서 발휘한 그의 수법은 국군 심리전 성과는 남한에서도 깊이 연구되어야 할 주제다.
이런 포용의 기술로 적을 감화시키던 기술이 6.25 전쟁 중에 국군은 잘 활용하지를 못했었다. 원체 전황이 나빴었고 북한군의 잔학 행위가 많았었기 때문에 그런 포용의 기술이 적용될만한 여유가 없었다.
포용의 기술이 적극적으로 구사된 것은 전투 경찰에서였다. 경찰은 공비 토벌 후반기에 공비들이 자수하거나 체포되고 살인등의 전과가 없다면 그들을 감화시켜서 전향시키는 전법을 적극 구사했었다. 이들 전향한 공비들은 경찰로 받아들여져 임용된 후 공비 토벌전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전과도 올렸을뿐더러 이 중에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경찰서장까지 진급한 사람도 있었다. 귀순자들로 편성한 위장 복장의 사찰유격대 사실 포용을 바탕으로 한 대민 사업은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전유물인 심리전으로서 큰 전과를 거두었었고 이라크 파견 자이툰 부대의 활동에서도 성과가 있어 미군이 그 교범을 빌려가서 참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싶다. 이제 북한이나 중국이 공세적으로 가하던 세뇌 공작을 방어적인 입장에서 대하던 우리 국군은 공세적으로 이 세뇌 공작을 연구하거나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군의 일선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런 포로 취급에 대한 제네바 협정의 단순한 교육 이상을 넘어 적극 포용과 전향의 기술에 대한 교육의 조심스런 접근이 있었으면 한다.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박경석 장군의 수기에서 남한으로 뚫고 들어왔던 10사단 사단장 전문섭이 평창 이북의 한 산촌 전체를 사단 사령부로 삼아 남으로 내려 보낸 부대들을 원격 지휘했다는 전쟁사적인 사실이 알려졌다. 놀란 것은 박경석 소위가 포로가 되어있는 동안 그는 전사 처리가 되어버렸었다. 그러나 박 소위는 계속되는 전투로 그 행정 기록을 정정할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바쁜 세월을 보낸 뒤에 1950년대에 국방부가 서울 동작동에 국군 묘지를 개설했을 때 그 묘소중의 하나가 박경석 소위의 것이었다. 박경석 장군의 묘소 유해도 없는 그 시절 무엇을 매장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엉망이었던 혼란기 군 행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표본이기도 했다. 박경석 장군은 그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으나 그 묘소를 없애지를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다. 가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자기의 허묘[虛墓]를 찾아가 술 한잔을 마시며 마음을 달랜 뒤에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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