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걱정없는세상 기자단 3기 – 열 번째 독서 모임 2023.08.24.(목) 최유미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 윤다옥 지음, 교양인 출판
네가 듣고 싶었던 말
회사 발령 문제로 한 번, 내가 원해 제주로 내려오면서 또 한 번, 그렇게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전학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도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잘 적응하며 지내주어 늘 고맙게 생각한다. 비록 미리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뭉그적대긴 하지만 학교나 학원 숙제도 알아서 하는 편이고, 친구들이 같이 학원 빠지자는 꾀임도 그럭저럭 잘 넘기는 편이다. 그런 첫째가 요즘 들어 종종 불만을 토로한다.
“엄마는 내가 얼마나 착한지 모르지? 동생들과도 이 정도면 정말 잘 놀아주는 거고, 방학 전 단원 평가들도 몇 개 빼곤 다 잘 봤잖아. 집에도 친구들보다 늘 내가 일등으로 가. 근데 엄만 왜 나한테 칭찬을 안 해줘?”
“아 그래, 네가 좀 착하긴 하지, 근데 뭐 엄마 아빠도 어릴 때 딱히 속 썩인 적이 없었다? 형제들끼리도 다투지 않았고. 시험도 뭐 그 정도는 기본 아냐 학원 쪽지 시험은 늘 보는 건데, 그거 잘 봤다고 친구는 부모님께 비싼 선물도 받았다고? 야, 그건 너무 오버 아냐?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것도 세상이 얼마나 험하니,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내 답을 듣고 난 딸은 입이 쑥 나와서는 “엄마는 원래 내 마음을 잘 이해해줬는데, 이젠 아닌 것 같아. 엄마는 늘 기준이 너무 높아, 엄마한테 칭찬받기 넘 힘들다고, 근데 나한텐 무엇보다 칭찬이 정말 중요하다고!” 라고 말하고는 원망스런 눈으로 날 바라본다.
사실 이런 비슷한 대화가 예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늘 비슷한 나의 답변을 예상하면서도 같은 얘길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싶다가도, 아마도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라는 생각도,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공감 제로인 대답이었다 싶어 더 뭐라고 하진 않았다.
사실 아이의 마음을 읽어 가며 공감해주고 천천히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게 내겐 너무 어렵다. 어른들의 대화보다 훨씬 더 충분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 인내심이 필요하다. 원래 내 성격이 너무 급한 탓인지, 일사불란하게 분초를 다투며 일해 오던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집안일에나 육아에서도 느긋하기란 쉽지 않다. 가끔 아이들 얘기를 차분히 들어주려 할 때면, 내 몸 어디에 사리가 쌓이는 느낌이다. 일하지 않고 온전히 아이들만 챙기고 있어 예전보다 훨씬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제주에선 어른이 나 혼자라는 생각에 아침, 저녁엔 해야 할 일들을 이것저것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일상적인 일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뭔가 더 요구하거나 고민거리를 늘어놓거나 하면,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귀찮은 마음이 앞선다. 그건 마치 회사에서 딱 이것만 하고 얼른 퇴근해야지 하는데, 퇴근 시간 임박해서 상사가 일거리 하나 더 던져주는 기분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종종 아이들의 말에 다정한 모습과 말투로 차분히 대화를 이어가기보다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해야 할 말 중심으로 쏟아내기 바빴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 / 윤다옥 저》를 읽으며, 또 전혀 그럴 것 같진 않았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는 호되게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도 아이도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나도 가슴이 덜컹한다. 자타공인 착한 아이인 우리 첫째도 머지않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느 날, 갑자기, 퇴사’ 를 꺼냈던 재작년 늦가을의 나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남들은 내 말에 모두 “왜? 갑자기?”라고 반응한 것과 달리 사실 나는 전혀 갑자기가 아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서서히 일과 육아에 지쳐갔지만,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나의 지친 내색을 알아보지도,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애시당초 ‘어느 날, 갑자기’ 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사고를 제외하고는 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의 호된 사춘기 역시,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른들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거나, 내색했지만 그 신호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눈치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그러는 동안 아이는 혼자서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보려다가 안간힘을 쓰다, 어느 순간 인내심의 꼭지를 놓아 버린지도 모른다. 대놓고 구시렁대는 아이보다는 어쩌면 착하고 속 깊은 아이일수록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내 맡은바 최선을 다해 보려던 내가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처럼.
지난 일 년 반 동안 쉬면서 느낀 건,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좀 쉬어가도 되는구나” 라는 거였다. 비록 통장 잔고와 내 마음의 여유는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고 있을지라도, 매일 저녁 해야 할 일을 빨리 마치고 쉬고 싶기만 한 마음에서 가끔 늦은 오후에도 번개 외출을 감행하는 여유가 차츰 생겼다. 조금 귀찮고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나가면 우리는 선물처럼 펼쳐진 예쁜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아 돌아올 수 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의 여유는 아이들에게 한 번 더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인다. 늘 해맑다고 생각하는 첫째가 어째 나처럼 부단히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를 곤란하게 하는 친구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쩌면 칭찬에 인색한 내 탓인가도 싶고, 그래서 며칠 전 동생들이 잠든 틈을 타 첫째와 조용히 얘기를 나눴다.
우선 나의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내려놓았다. 늘 생각하지만 표현하지는 못했던 고마움과 미안함도 전했다. 엄마로서 힘든 점도 솔직히 전했다. 가만히 듣던 아이는 예전에 속상했던 그 얘기들을 또 꺼낸다. 이쯤이면 아이에겐 그 일들은 정말 별것이 아닌 것이 맞다. 그래서 이번엔 이런 저런 핑계들은 다 집어치우고, 아이가 내게 듣고 싶어 했을 얘기들을 해줬다. “네 맘이 정말 그랬겠다. 엄마가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다음번엔 그러지 않도록 엄마가 노력할게, 엄마의 힘든 부분도 네가 이해하고 같이 좀 도와줄래” 라고. 듣고 싶은 들어서였을까 이제야 안심이 된 듯 금세 표정이 밝아지면서 “웅”이라고 대답한다. 역시 천성이 해맑은 우리 첫째다. 이젠 나보다 한 뼘 더 커 버린 딸내미를 사랑한다며 안아주고 궁둥이도 토닥여줬다. 그리고 그날 밤 흐뭇한 마음에 맥주 한잔하며 혼자 되뇌었던 이 말들도 조만간 전해야지 생각한다.
‘말하지 않는 마음은 누구도 쉬 알아차릴 수 없어. 엄마의 속마음도 너희들에게 자주 전해줄 테니, 너희도 지금처럼 너희의 마음을 내게 얘기해줘.”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대, 너희들은 엄마의 사랑을 짐작하고 애써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느끼도록 해 줄게.”
“엄마가 살아보니 인생 뭐 없더라. 너무 힘들면 쉬어가고 돌아가면 돼. 그러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너희들의 꿈같은 학창 시절을 즐기고 누리는 데 힘쓰자. 그래도 가끔 지친다고? 그럼 엄마에게 기대면 되니 너무 걱정마.” 라고.
쓰다보니 또 글이 기네요. 좀 더 나아질 수 있게 도와주세용~~~ㅠ
첫댓글 아, 샘 어뜨케요~
"아 그래, 네가 좀 착하긴 하지"-> 여기에서 1차 피식 웃음이 터졌는데 엄마의 말 3줄 다 웃겨요.
근데, 마지막 대화에선 눈물이 핑.
샘과 맥주 한 잔 하고 싶네요. cheers
. 가끔 아이들 얘기를 차분히 들어주려 할 때면, 내 몸 어디에 사리가 쌓이는 느낌이다.
미운 7살과도 사리가 쌓이는데, 그쯤되면 통달하지 않는가봐요 ^^;;
잘읽었습니다!
그 정도는 기본 아니야?는 저도 종종 속을 하는 말입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참 쉽지 않죠. ㅎㅎㅎㅎ 제주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의미있는 시간 보내시는 거 같아요.
오후 번개에서 예쁜 풍경을 선물 받는 다는 문장 읽으면서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지었어요.
분량을 줄이시려면 퇴사 부분 좀 간략하게 처리하면 어떨까 싶네요.
전 길다는 느낌 안 받았는데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6학년 쯤 되면 말귀도 알아듣고 대화할 만하죠. 저도 그맘때 아들과 단 둘이 했던 대화와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유미 샘, 사춘기 걱정 안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