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영평사 주지 환성 스님
풍한서습 견디며 무던히 큰 그늘 내어주는 ‘고목 신념’ 잃지 않을 터
중2때 서산 도비산 올라, 채소 가꾸는 풍경에 흠뻑
“대입학원 간다”며 간월암, 응담 스님 은사 삭발염의
흔한 석등 부재 하나 없는 폐사지 보고 걸망 내려놓아
사랑채 하나 얻어 정진 창건 2년만에 전각 세워
버스 한 대로 3개 초등학교 어린이들 실어 나르며 법회
창건 35년 대사회 활동에 20억원 지원하며 ‘상생’
3만평 대지 위 구절초 밤이면 은하수로 흘러
아름다운 ‘영평사 낙화’ 놀이 넘은 ‘불교 의식’
최근 경내 토지 완전 매입 제2 도약… 세종 대표사찰
영평사 주지 환성 스님은 “‘성불하십시오’는 본래마음을 회복하라는 축원의 말”이라며
“모든 존재와 화합하는 일체적인 삶, 공동체적인 삶을 살자는 다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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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는 99173㎡(3만평) 대지에 펼쳐져 있다.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 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홀로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 꽃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 (오세영 시 ‘구절초’ 전문)
음력 9월9일에 꺾어야 항염·진통 효과가 좋다는 구절초(九節草).
하얀 꽃잎에 노랑 봉오리의 구절초는
자기보다 키가 큰 나무 아래서는 피지 않는다.
습한 곳도 싫어한다. 볕 잘 드는 산등성이나 들판에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나니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이다.
안도현 시인은
‘흔들리는 몇 송이 구절초 옆에/ 쪼그리고 앉아본 적 있는가?/
흔들리기는 싫어, 싫어, 하다가/
아주 한없이 가늘어진 위쪽부터 떨리는 것/ 본 적 있는가?’
묻기도 했다.
만행 길에 나섰던 광원 환성(光源 幻惺) 스님은
그 시에 화답하듯 구절초 만날 때면 쪼그려 앉았다.
청초함에 끌려 한참을 바라보다 가을빛 머금은 꽃향기를
바랑에 한가득 담았더랬다. 만행 길에서 쉴 때마다
한 움큼 꺼내 음미하다 보면 바랑은 어느새 비워졌고,
그즈음이면 동안거 결제가 가까웠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형제가 “교회 가자!” 하면
“집 보겠다”며 홀로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아 벽을 마주했다.
대문 앞에서 논 하나 건너면 운동장. 뛰어노는 친구들
웃음소리 생생히 들려와도 애써 나가려 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엽토 채취하러 동네 뒷산인
서산의 도비산(島飛山)에 올랐다.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부석사 수도암에 닿았다.
밀짚모자 쓴 비구니 스님 세 명이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 낯선 풍경, 청년의 가슴속으로 단박에 들어찼다.
“그래. 바로 저거다!”
그날 이후 깊은 산속에서 도인과 수행하는 공상의 나래만 한껏 폈다.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학입학 시험 낙방은 예상된 결과였다.
고등학교 졸업식 직후인 3월 급히 찾아온 친구가 전했다.
“간월암에 도인이 계신다.”
책 두 권 들고 부모님께 “재수하러 학원 갑니다” 하고는 길을 떠났다.
여기저기 기운 승복을 입고 정좌한 스님은
상상 속에서 그려 보았던 그 도인이었다.
응담(應潭·조계종 전 원로회의 의원) 스님이다.
“출가하겠습니다!”
“왜 하려는가?”
“5년 동안 품어온 꿈입니다.”
훗날 사형되는 수경 스님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은사는 직접 제자의 머리를 삭발해 주었다.
20년 만행 길에 만난 고장 중에서도 유독 공주(현 세종)가 좋았다.
‘언젠가 내 걸망은 공주에 풀어 놓을 것’이라 다짐하곤 했는데
장군산(將軍山) 아래의 효제암 폐사지를 보자마자 결정했다.
“그래, 바로 여기다!”
동행한 지관(地官)은 만류했다.
“주인보다 객이 승(昇)하는 자리입니다.”
환성 스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절에서는 주인이 객이고, 객이 주인입니다.”
영평사 전경. [영평사]
창건 원력 2년 만에 설선당과 대웅전이 들어섰다.
전각 불사를 진행하며 산 아래의 구절초도 경내로 옮겨와 심었다.
처음 3305㎡(1000평)의 구절초 군락은 이내 9만9173㎡(3만평) 대지 위에 피어올랐다.
새벽 안개와 어우러지면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였고,
저녁 달빛 아래서는 은하수로 흘렀다.
그사이 심검당, 청운당, 향적당, 서상원, 극락전, 삼명선원 등이 세워지며
영평사(永平寺)는 세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우뚝 섰다.
은사인 응담 스님은 무소유·소욕지족을 실천했던 선지식이었다.
“수행자는 물 많이 흐르는 곳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평생 입으신 옷은 남들이 입다 버린 누더기 몇 벌이었습니다.
상좌들이 새 옷을 해 드리겠다고 하면
‘옷은 흉물스러운 송장 덩어리 가릴 정도면 충분하다’며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고무신이라도 몰래 닦아 놓으면 ‘내가 수족이 멀쩡한데 누구에게 수고를 끼치겠느냐?’며
다시 닦으셔서 무안을 주셨습니다. 아예 수발할 마음도 못 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웬만한 폐사지에서는 볼 수 있는 석등 부재 하나도 없었다.
당장 묵을 곳도 없어 남의 집 사랑채 하나 얻어 정진했으니
땅을 살 형편도 안 됐고 여건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대웅전 등의 전각이 들어설 공간 661㎡(200평)가 절실했는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이어서 당장은 매매할 수 없다고 해요.
그렇지만 필요한 만큼 쓰라고 하더군요. 참 고마웠습니다.
전각이 하나둘씩 늘어가며 결국 7272㎡(2200평)를 제가 모두 사용했습니다.”
구철초 축제의 산사음악회 [영평사]
장군산 바로 아래의 땅은 매입할 수 있어 은행 대출을 받아 확보해 가며 구절초 군락을 조성했다.
심어만 놓으면 알아서 잘 클 것 같아도 아니다.
4월 초부터 9월 말까지 매일 군락지를 매어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간다.
사하촌 할머니들에게 ‘용돈’ 드리며 부탁했다.
9만9173㎡(3만평) 군락지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인건비를 포함해 어림잡아도 매년 1억원이 투입됐다.
2000년부터 ‘장군산 영평사 구절초 축제’를 열었다. 이때 산사음악회도 연다.
정태춘, 이은미, 이루마 등 정상급 뮤지션이 무대에 올라 호평을 받아 왔다.
매년 7만~8만 명이 운집한다.
“가을의 서막을 알리는 코스모스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마음을 흩트려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코스모스 질 무렵 구절초가 피어나 어지러웠던 그 마음을 정갈하게 가라앉혀줍니다.
‘순수·어머니의 사랑’ 꽃말처럼 어머니 품 같은 꽃입니다.
구절초 한잔하신 사람들이 미소지으며 꽃길로 들어섭니다.
아이들의 함박웃음 소리가 가을바람 타고 도량을 휘감습니다.
다시마, 표고버섯 우린 육수에 말아 드린 국수를 장독대에 올려놓고도
‘꽃보다 국수’라며 맛있게 드십니다.
무대에서 흘러나온 선율에 근심도 날려 보낸 듯 남녀노소 모두 해맑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2년 동안 중단됐지만
올가을에는 규모를 축소해서라도 축제를 재개하려 한다.
영평사 낙화.
낙화(落火)가 민간에서의 단순 놀이와 달리 사찰에서는 불교의식으로 봉행 되었다는
학술적 실마리를 제공한 장본인이 환성 스님이다.
“평양에서 넘어오신 노인이라 하여 별명 붙은 ‘평양 노장’님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서산 부석사에서 만났을 때 저에게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을 주셨는데
공란에 낙화법이 상세하게 수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75년으로 기억합니다.
불꽃놀이에 수구다라니 신앙을 결합시켜
독창적인 불교 의례로 발전시켰다는 학계의 연구결과도 나왔습니다.
수구다라니 신앙에서는 큰 불덩어리를 부처님의 지혜 광명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 낙화를 관(觀)한다는 건, 부처님의 지혜로 재앙과 고난을 물리치려는 수행인 것입니다.”
현재 낙화와 관련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건
‘함안낙화놀이’ ‘무주안성낙화놀이’ 2건이다.
“불교 수행법으로도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의 한 종류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환성 스님은 무형문화재 지정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창건 2년 만에 어린이법회를 열 만큼 어린이 포교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었다.
봉고차 한 대 할부로 사서는 사찰 인근 3개 초등학교를 돌며 아이들을 실어날랐다.
그 결과 80∼100명이 법회에 참여했다.
슬래브 지붕의 임시 건물을 마련해 ‘어린이 법당’으로 명명할 정도였다.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학사 학인 스님들과 충남대 불교학생회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불자 인구 급감 현상을 보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린이 숲속 학교’에는 30여명이 참여해 왔습니다.”
장군산 계곡물을 담은 ‘웰빙 수영장’과 미끄럼틀을 설치하고,
전통무용·택견 배우기, 숲·사찰음식 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창안해 놓은 결과다.
영평사의 대사회활동은 교계에서도 정평 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소재 중·고·대학교 졸업생 장학금을 비롯해
지역 내 어려운 가정 60여 세대에 연간 1000만원 지원,
공주교도소 재소 자매자 지원과 위문품 전달,
공주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지원 등을 펼치고 있다.
창건 35년 동안 대사회 활동에 투입한 자금만도 20억원이 넘는다.
절로 들어오는 시주금이 많아서가 아니다.
사찰 빚 이자를 내기 위해 또다시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하는 영평사다.
“우리들의 인사말인 ‘성불하십시오’는 본래마음을 회복하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 개인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누고 사랑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와 화합하는 일체적인 삶, 공동체적인 삶을 살자는 다짐입니다.”
‘영원(永遠)히 평온(平穩)한 절’ 영평사(永平寺)의 지향점은
절을 넘어선 ‘세상의 평온’에 닿아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겠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하니 ‘지악행선(止惡行善)’을 들어 보였다.
“악행은 불행의 씨앗이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입이 아프도록 경계하셨고,
선행은 행복의 뿌리이므로 일체 불보살님들이 간곡히 권장하셨습니다.
악행은 행복을 불행으로 변화시키는 마력(魔力)이고,
선행은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는 불력(佛力)입니다.”
환성 스님의 저서 ‘참사람의 행복연습’의 한 구절이 스쳐간다.
‘스승님! 그립습니다’의 한 대목이다.
‘한 가지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도 있다.
출가본지(出家本志)를 한시도 망각한 일이 없다는 것이며,
나의 삶을 스승님과 부처님 삶에 비추어 채찍질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일이 그것이다.
한 가지 더 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게 변해도
나는 한 그루의 고목, 춘하추동과 풍한서습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무던히 주기만 하는 그런 고목(古木)이고자 하는 신념을 잃지 않음이다.’
비움의 즐거움을 터득한 나목(裸木)과
한여름 큰 그늘을 드리워 주는 거목(巨木)의 품격이 돋보이는 고목(古木)이다.
“지난 3월3일 절의 경내 토지 모두 매입했어요.
이제야 편히 불보살님 뵐 면목이 섰습니다. 하하하!”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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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성 스님은
1968년 수덕사서 사미계 수지.
1969∼1987 전국선원·토굴서 정진.
1987년 영평사 창건. 1998년 영평사 전통사찰 지정.
공주시 불교사암연합회 창립 초대·2대·5대 회장 역임.
공주청소년자원봉사센터 설립 소장에 추대.
대한민국 국민포장·국무총리 표창(2회),
조계종 총무원장·포교원장 표창.
저서로는 ‘참사람의 행복연습’이 있다.
2022년 4월 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