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주더(왼쪽 안경 쓴 사람)가 펑더화이와 장기를 두고 있다. 오른쪽 뒤에서 덩샤오핑이 관전하고 있다. 덩의 앞에 엉거주춤하게 선 소년은 주더의 손자 중 한 명. 김명호 제공 |
수많은 비밀결사와 범죄집단의 명멸을 들으며 성장한 나라의 국민이다 보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문혁을 거치며 폭력의 짜릿함을 맛본 경험들도 있었다. 흉악한 사람들은 법을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선량한 서민들은 이들을 두려워했다.
83년 5월 5일에는 선양을 출발한 중국민항 296기가 6명의 납치범에 의해 한국 춘천공항에 불시착했다. 탈취범들은 공산당 랴오닝성(省) 위원회 소속의 승용차를 타고 비행장까지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네이멍구(內蒙古)에서도 청년 8명이 27명의 부녀자를 폭행하고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
깡패·건달·치한·좀도둑·강도를 비롯해 남녀관계가 복잡한 공산당원이나 공직자 등 적용 범위가 한도 끝도 없었다. 여자화장실을 넘봐도 유맹이었다. 성이 왕(王)씨였던 한 여인은 10여 명의 남자와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생활방식’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톈진시 인민은행장 주궈화(朱國和)도 유맹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주궈화는 주더(朱德)의 친손자였다. 큰 키에 인물도 멀끔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사생활이 문란했다. 주더는 마오쩌둥과 나란히 초상화가 걸렸던 중국 홍군(紅軍)의 아버지였다.
10명의 원수 중 서열 1번이었다. 덩샤오핑의 허락이 필요했다. 덩은 집행을 비준하지 않았다. “캉커칭(康克淸)이 결정하게 해라. 모든 문건을 갖다 드려라”고 지시했다. 캉커칭은 주더의 부인이었다. 19세에 중국혁명에 뛰어들어 장정을 거친 건국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주더의 얼굴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라며 분노한 캉이 손자를 구하기 위해 직접 톈진에 내려갔다는 소문이 나돌 때였다. “주더의 손자를 극형에 처하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캉커칭은 “왕자의 범법에 대한 형벌도 서민과 같아야 한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캉커칭의 급선무는 며느리에게 상황을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손자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회의에 참석했다. 주더는 생전에 “애들 중에 사람 구실 못 하는 놈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덩달아 화를 내서는 절대 안 된다. 신문에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고 발표해라. 당에는 당의 기율이 있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는 말을 캉에게 자주 했었다.
‘옌따’는 치안과 질서 확립에는 효과가 있었다.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3년간 시행된 한시적 정책이었지만 생활 습관 때문에 희생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민이 국법을 불신하는 계기가 됐다. 옌따 기간 중 서구에서는 인권문제를 거론했지만 중국 정부는 끄떡도 안 했다. 옌따는 96년에도 한 차례 있었다. 2000년부터 이듬해까지 실시된 ‘신세기 옌따’가 마지막 옌따였다.
청렴 부르짖던 ‘대만의 아들’이 ‘대만의 치욕’으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08>천수이볜(陳水扁)
| 제109호 | 20090412 입력
인권 변호사 시절인 1987년 무고죄로 8개월간 복역한 후 교도관들에게 둘러싸여 출옥하는 천수이볜(왼쪽 안경 쓴 사람). 김명호 제공 |
천은 신동이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69학번으로 대만대학 상학과에 합격했지만 후일 민진당 창당 주역의 한 사람이 된 황신제(黃信介)의 유세를 듣고 생각을 바꿨다. 자퇴한 후 다시 법학과에 입학해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다. 학부 3학년 때 수석으로 합격했다. 22세의 대만 최연소 변호사였다. 대학도 1등으로 졸업했다. 이듬해 봄, 중학교 동창생인 우수전(吳淑珍)과 결혼했다.
우수전의 부친은 지역에서 행세깨나 하던 부자 의사였다. 딸이 여섯 살 되던 해 외국에서 피아노를 수입해 딸에게 주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타이중(臺中)의 중싱(中興)대학 1학년 시절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린 중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천수이볜을 만났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남녀관계였다. 천을 본 다음부터 다른 사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모가 반대하건 말건 빈농의 아들 천수이볜과 결혼식을 올려 버렸다. 천은 법률사무소를 개업해 집안의 부채를 모두 처리했다.
1979년 12월 10일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高雄)에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세계인권선언일을 기념하기 위한 집회에서 시위자와 경찰들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49년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가장 격렬한 반정부 시위였다. 주동자 3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10년 전 천수이볜에게 감동을 줬던 황신제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황은 천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고생만 하고 수임료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천은 머뭇거렸다. 대형 선박회사의 고문변호사로 돈맛을 알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수전은 “이런 사건을 맡지 않을 거면 변호사를 뭐 하러 하느냐”며 남편을 닦아세웠다. 천은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변론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한 명의 청년 정치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천수이볜은 타이베이 시의원 선거에 나가 최고 득표로 당선됐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의원직을 포기하고 고향인 타이난(臺南)현의 현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패배했다. 그러나 유권자에게 인사를 다니던 우수전이 하반신이 마비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천은 평생을 써도 남을 정치적 자산을 확보했다. 사고를 낸 사람은 타이난의 평범한 화물차 기사였지만 천은 ‘비열한 정치테러’라며 울분을 토했다. 모든 책임을 정부 쪽에 떠넘겼다.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부부는 박해받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글과 말이 거칠었던 천은 무고죄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사이 우수전은 입법위원에 당선됐다. 동정표처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출옥한 천수이볜은 입법위원에 선출되기 전까지 우수전의 보좌관을 했다.
천의 의정활동은 민의의 대표자로 손색이 없었다. 대정부 질문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고 직위를 이용한 부정과 부패의 폭로에 앞장섰다. 국민당의 금권통치를 비판할 때마다 국민은 속이 후련했다.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도 국민당 후보를 눌렀다. 교통과 치안 방면에서 시민에게 점수를 얻었지만 각박하고 편협한 시책을 펼 때가 많았다. 장제스의 별장을 헐어 버리고 대만의 한 일간지에 시정(市政)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자 시에 예속된 모든 기관에 구독을 금지시켰다. 광고도 못 하게 했다. 청렴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행동이 뒤를 받쳐 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연임에는 실패했다. 우수전이 한마디 했다. “총통 하면 될 거 아냐.”
천수이볜은 총통 선거를 준비했다. 우수전의 휠체어를 밀며 대만 전역을 누볐다. 두 팔에 장애인 부인을 안고 나타나면 모두가 숙연해졌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천은 승리했다. 국민당의 분열 덕을 단단히 봤지만 최고의 공로자는 우수전이었다.
천은 대만의 아들(臺灣之子)임을 자처했다. 청렴과 도덕성을 견지하며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국민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다른 말들은 한 귀로 흘려들어도 좋았다. 취임 3개월 후 지지도가 79%였다.
천수이볜은 총통 시절에 온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합세해 행했던 뇌물 수수와 기밀비를 훔쳐 먹은 죄로 현재 수감 중이다. 대만의 아들이 대만의 치욕(臺灣之恥)으로 전락하는 날 천은 정치적 탄압 이라며 고래고래 “대만 만세”를 불러댔다. 그러나 민의를 강간당했던 대만인은 폭죽을 터뜨리며 “사법부 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