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顯忠祠) 방문기
1. 현충사의 의미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정오의 시간은 화창한 날씨가 이어져서 여행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대평리 시장에서 점심을 기분 좋게 마친 지인과 나는 얼마 전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다녀갔다는 아산의 현충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현충사를 나는 불교의 절로 오해하고 있었다. 현충사는 한문으로 쓰면 顯忠祠로 씌어진다. 祠자는 「사당 사」자로 [제사,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의 절은 「절 사(寺)」자를 사용한다. 따라서 顯忠祠는 성웅 이순신 장군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제일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 해군의 원수(별이 다섯 개)였는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서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기리듯이 일본에서는 추앙되는 인물이다. 그는 1905년 5월에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동해 해전에서 예상을 깨고 일본이 기적적으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일본인은 그를 동양의 “넬슨 제독”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정작 본인은 동해 해전의 전날 간절한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기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아사히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쳤다는 기록이 있다.
- 도고 헤이하치로(일본 해군 제독)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적인 전쟁영웅 도고 제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 일본 해군 준장, 사토 데쓰타로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네델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 조선역(朝鮮役) 일본석학, 토쿠토미 테이이찌로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일화가 있지만 생략토록 한다.
2. 주차장 일대의 풍경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아산의 현충사에 도착하는데 도로에서 바로 주차장으로 연결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석비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하루 앞둔 1597.9.15.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 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명량해전의 앞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충무공은 53살인 1597.3.4. 모함과 당쟁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직위에서 해임되고 출옥 후 백의종군한다. 그해 1.14.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2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순신은 4.1. 감옥에서 나온다. 한편 이순신이 없는 조선 함대는 1597.7.18.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원균 등이 전사한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연합함대는 궤멸하였다.
위기에 처한 조정은 7.23.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는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라.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선조의 밀지에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수군의 존속과 가치, 효용론을 들어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동경 올림픽 때 우리나라 선수들이 묵었던 숙소에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일본이 올림픽위원회에 항의하여 제거하고 「범 내려온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명량해전 때 임금께 상소한 12척에 한척을 더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의 대함대를 맞이하여 물살이 빠르고 물길이 좁은 명량(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고 효과적으로 화력을 활용해 적선을 함몰 시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충무공에 심취해서 사설을 늘어놓다보니 사진보다 글이 많아졌지만 양해바랍니다. 우매한 선조와 석어빠진 간신배들 땜에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말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저기 위의 사진에서 보는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 한 잔 때렸습니다. 좌우를 둘러보니 널널한 주차장 공간입니다.
휴식처에 등나무 꽃이 환하여 올려본다.
이제 충무공의 유허가 있는 충무문 안으로 들어가 보자.
3. 충무문 안의 풍경
이 문 안에 사당과 고택, 기타 유허가 있다.
충무문 안쪽은 각 종 수목들과 연못, 고택, 산 바로 아래에 현충사가 있다. 그리고 충무문 들어가기 전, 바로 앞쪽에 기념관이 있다. 충무공이 1545년 4월 28일에 탄생하셨으니 일주일 전에 탄신 477주년을 맞이했던 것 같다.
5월의 화창한 날씨에 취해 비스듬히 서 있다.
속눈썹이 긴 산사나무꽃을 보는 것은 미인을 보는 것만큼 즐겁다.
몇 백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쉼터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일은 쌓였던 생활의 찌꺼기를 털어 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충무공은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국운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지 충무공 같은 충신이자 전쟁의 신을 내보내 도저히 감당할 것 같지 않은 전쟁을 이기도록 하늘은 배려한 것이다. 전쟁의 신이시여! 당신을 보러 온 날 날씨가 너무 화창하나이다.
다리 난간에 거북선 형상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이곳의 수목들은 이순신 장군의 기상을 닮아서인지 대체로 크고 굵어서 그 규모가 어마무시하다.
위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운명하는 순간까지 나라를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죽음조차도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니 이쯤 되면 숨이 컥 막혀 온다. 아마 삼국지에도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이겼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충무공의 경우도 제갈량과 같다.
4. 현충사
여기서부터는 현충사 입구이다.
기형의 소나무가 특색이 있어서 한 컷 올려본다.
이제 조금 더 가면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은 능·원·묘·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현충사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현충사는 방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특이한 소나무와 충무공 말씀이 걸린 그곳에서부터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 사진의 충의문도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현충사 본전에는 당연한 얘기지만 절의 대웅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상을 모셔 놓지 않고 충무공 초상이 걸려 있고 대웅전처럼 내부에 들어가 삼배를 올릴 수도 없다. 정면에 문이 열려 있고 바로 앞에 향불이 있어서 정면에서 초상을 향해 선 채 합장과 배례를 올릴 뿐이다.
충무공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어째 산사나무꽃과 닮았다. 모르는 나무와 화초들은 다음의 꽃 검색 앱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이 꽃도 다음 검색 앱에 넣으니 마가목이라 한다. 그런데 다음의 꽃 검색 앱이 정확하지 않다. 몇 번의 검색을 하면 다른 답이 나올 때도 많다.
화살나무도 자라니 나무둥치가 둥근 모양이 되고 다만 가지는 화살의 깃모양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큰 화살나무도 여기서 처음 본다. 나는 화살나무가 관목인 줄 알았다.
1부 마칩니다. 분량이 많아서 1,2부로 나눠 게재합니다.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