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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절시51:1-9절) 나의 죄를 씻기소서
사소한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의 전과 기록을 깨끗하게 지우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의 기록이 깨끗이 지워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죄인들의 기록을 말소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소한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곧바로 끌려들어가지만, 유명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나오고, 큰 글자로 그의 죄목(罪目)이 발표됩니다.
죄가 발표되면, 그 사람은 한순간에 모든 존경과 명성을 잃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수군거림의 대상이 됩니다. 그때부터는 치욕(恥辱)의 나날이 계속되며, 아무것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할 말도 없고, 또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유명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사회에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무서운 죄에 빠져 있어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만 가진 특권(特權)으로써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에 호소하는 이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뿐만 아니라, 지은 죄도 없는 것으로 지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들이 지옥 한 가운데 있다 해도 끌어 올릴 수 있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罪惡)에 빠졌다 하더라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잠수부가 몸에 밧줄을 감고, 깊은 물속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깊은 바다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밧줄만 몸에 감고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즉 그 줄을 당기기만 하면, 그를 끌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몸에 모두 밧줄을 하나씩 감고 있는데, 그 밧줄 이름이 곧‘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제(標題)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책망했을 때 지은 시’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이며, 그는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들고, 철저히 회개했으며, 그 결과 죄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직분(職分)을 받게 되었습니다.
Ⅰ.하나님의 인자하심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를 짓고 난 후에 그 죄를 무효(無效)로 해달라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그런 무서운 죄를 짓고도 죄가 없는 것으로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1-2절)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스캔들 중에는 최고의 스캔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죄에 빠졌을 때, 그는 이미 성도의 자격을 박탈당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왕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다윗이 지은 죄는 사울이 지은 죄보다 더욱 무서운 죄입니다.
사울은 아말렉의 소나 양을 죽이지 않고, 끌고 온 죄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했고, 또 그의 신하를 죽게 했습니다. 이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仁慈)에 호소하면서 자기 죄를 다 지워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인자(仁慈)’라는 것은 죄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냥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하나님의 책임 하에 멸망에서 건져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신 반드시 그 책임을 하나님이 지셔야 합니다. 왜냐면 죄에 대하여는 공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자(仁慈)는 마치 대통령의 사면권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면권과 좀 다른 면이 있다면, 사면권은 대통령이 그 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책임하에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첫째는, 다윗이 얼마나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가 불신자들도 저지르지 않는 유부녀와의 간통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죄를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그 여자의 남편인 신하를 적(敵)의 손에 죽게 하는 살인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로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은, 이런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이 죄가 다 들통 나게 되었는데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인자를 구하면서 죄를 없는 것으로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종이 이 정도로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것은 당장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다윗이 상당한 기간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여 비정상적인 궤도(軌道)를 달리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엄청난 죄는 이미 그의 신앙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유부녀와 간음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무서운 죄이며, 더욱이 그 남편까지 죽인다는 것은 이미 그의 이름이 지옥에 등록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저질러졌으며, 큰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자격을 가진 자가 하나님께 용서를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용서해 주셔야 하는 책임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끔찍한 죄에 빠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호소하면, 용서해 주시고, 다시 받아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인자(仁慈)’입니다.
왜냐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받아주실 때, 바로 그들이 장차 지을 죄 까지도 모두 책임지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한,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타락해서 인생 시궁창에 빠진다 해도 다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마치 몸에 굵은 동아줄을 매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인생 밑바닥에 떨어져 있고, 지옥 한복판에 떨어져 있어도 그 동아줄을 흔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반드시 끌어올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는 어떤 강철보다 강해서 아무리 무서운 죄라 하더라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지옥 한가운데 떨어져 있어도 하나님의 인자는 능히 우리를 끌어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자신을 하나님의 인자라는 밧줄에 잡아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모르든, 간에 몸에 밧줄을 다 하나씩 감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깊은 죄악의 웅덩이에 빠질 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당겨주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오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멸망으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죄인도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Ⅱ.내 죄를 도말(塗抹)하소서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의문은‘이런 무서운 죄가 과연‘도말(塗抹)’될 수 있을까?’입니다. 다윗의 죄는 이미 저질러진 죄이고,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다시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정말 이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문에 자신의 죄가 대문짝만하게 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곧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제발 내가 지었던 이 죄악들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떻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습니까?
대개 죄를 지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누가 알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 속에 먼저 빠지게 됩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곧바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길입니다.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변명하고,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난 후, 나단 선지자가 방문할 때까지는 거의 일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윗이 회개할 때, 간음으로 태어난 아기가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 년 동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는 몸만 이 땅에 있었지, 사실 지옥이 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눈만 속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이미 다윗의 양심은 지옥에 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때 다윗이 죽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지옥에 갈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기가 아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토(吐)하게 하시고,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회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할 수 있지, 혼자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죄를 지은 사람은 마음이 더욱 강퍅해지고, 완악해져서 자기 죄를 절대로 시인(是認)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자복(自服)하려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러면‘죄가 도말(塗抹)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입으로 단 한 번‘하나님, 죄를 지어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일까? 아닙니다.
우선 자기가 지은 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가 지은 죄의 가증한 성격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침상이 눈물로 훔뻑 적시도록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밧세바는 우리야의 사랑하는 아내였고, 우리야도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즉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야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야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다윗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야는 다윗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우리야는 다윗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臣下)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야는 다윗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으며,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그런 신하의 아내를 범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배신입니까? 다윗은 그것을 생각 할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가증스러우며, 사악한 자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배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을 삼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다윗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주셨으며, 그가 다른 것을 더 요구했더라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더 들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죄만 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얼마나 교만했으면, 그 한 가지 요구를 듣지 않았을까?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짓밟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너무나도 큰 상처를 안겨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다윗은 죄를 지었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가증스럽고,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지은 죄의 성질(性質)을 올바로 깨달아야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습니다. 즉 입에 발린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죄에 대하여 비통해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었던 사랑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습니다.그때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죄가 가지는 이 비통(悲痛)한 성격을 하나님께 눈물로 고백하고, 이 죄가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겨다준 상처를 아파하고, 이런 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꿔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곳으로 자신을 이동하는 것입니다. 즉 이탈했던 궤도에서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도말(塗抹)하시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책임 하에 모든 죄를 깨끗하게 지워주셔서 없었던 일로 해주십니다. 사실 다윗은 위험했습니다. 그는 여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로 뛰어갔어야 합니다.
비록 그가 눈이 뒤집어져서 범죄하고, 여자가 임신(姙娠)하게 되었을지라도 바로 그때나마 감추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 나아가서 몸부림치면서 회개를 했더라면, 살인죄까지는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는 감추고 있으면, 점점 더 곪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회개한 시점은 거의 막차를 탄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떠나가는 마지막 회개의 열차에 올라타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낸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거기서 조금 더 늦었더라면 용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나아오는 자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어떻게 책임을 지십니까? 십자가 위에서 한꺼번에 모두 책임을 지십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도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Ⅲ.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3-4절)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여기서 다윗은‘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죄가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죄가 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두렵고, 창피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해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빠졌을 때, 자꾸만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의 입을 막는다 해서 죄가 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한 번은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죄는 결코 도말(塗抹)되지 않습니다.
그 죄가 언젠가는 그 사람을 찾아낼 것이며, 또 똑같은 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면서 내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어떤 처벌도 다 받겠다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죄 용서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기도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십 년이나 이십 년 된 체증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죄책감에 억눌려 있다가 자유 함을 얻게 되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더 이상 쫓기는 생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며, 기도의 응답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들통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재발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것은 지은 죄를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용서받는 이것입니다.
6절)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리이다”하나님의 지혜는 지은 죄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면,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이것입니다. 죄를 감추고 사람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中心)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은 죄에 대하여 비통해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법적인 책임은 없어지고, 도의적인 책임은 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없었던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도 간음죄와 살인죄는 없는 것이 됩니다.‘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이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홍과 같이 붉은 죄가 깨끗하게 지워집니다. 인간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입니다.
그 앞에서는 이 세상의 웬만한 의인들도 모두 강도나 파렴치범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티끌 같은 죄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한 양심은 깨끗합니다. 하나님께서‘죄 없음’이라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천사나 어떤 사탄의 세력도 우리의 죄를 다시 들춰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신하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도의적(道義的)인 책임이 남게 됩니다. 아마 다윗의 범죄는 어느 정도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려 졌고, 그는 그 도의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압살롬과 그의 일당은 다윗을 폐위시키는 구실로 그의 죄를 들춰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 가담을 했던 것도 다윗이 신뢰를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신하(臣下)는 전쟁터에 나가서 죽어라고 싸우는데 그 신하의 아내를 범한 왕이라면, 누가 목숨을 바쳐서 충성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수치를 당하게는 하셨지만, 그를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를 다시 복권(復權)시킴으로써 그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종에게 수치와 욕은 당하게 하시지만, 다시 직분을 주셔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충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속에 양심의 상처가 남게 됩니다. 가끔씩 자신이 하나님께 무서운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나면서 영혼이 침체되려고 할 것입니다. 어느 때는 마귀가 우리를 참소(讒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평 생 죄의 흔적을 보면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고, 두고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충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아름답지 못한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죄들 중에는 남들이 알 만한 것도 있고, 또 모르고 넘어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철저하게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곧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목숨을 걸고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자꾸만 생각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오히려 잘못했던 것은 모두 지워져 있고 충성한 것 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하면서 자신을 믿었던 것을 철저하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5절)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은 다윗이 부정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죄악 중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는 데는 그렇게 빠를 수가 없고, 우리 마음속 근본(根本)에 죄의 세력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조심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 너무나도 귀하게 사용되고 있고, 주위의 사람들이 다윗이라고 하면 100% 믿어주니까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서 방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성인이고, 성자라 하더라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귀한 주님의 종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어떤 제도나 제약 아래에 두어서 절대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면 제약을 받지 않으면, 사람이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다윗을 너무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이 오히려 귀한 하나님의 종을 망하게 할 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래 오래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Ⅳ.우슬초로 정결케 하소서
7절)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죄를 지으면, 진(陣) 밖으로 추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서 성도의 교제를 박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는 중단되었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는 자에게는 정해진 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이 우슬초라는 풀에 물을 찍어서 뿌립니다.
그러면 그가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면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아마 다윗도 이 과정을 거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이지만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우슬초로 물을 뿌려서 다윗이 성도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공포한 것입니다.
우리는‘성도(聖徒)’라는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릅니다. 성도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입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도 성도가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지위를 빼앗기면,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선지자나 목사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망해서 포로로 끌려갔던 것은 바로 이 성도의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자격을 회복해서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드릴 때의 그 감격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천국을 이 지상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에서 쫓겨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8-9절)내가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이 세상에서 최고의 기쁨은 예배의 기쁨입니다.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뼈를 꺾으셨습니다. 그래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 용서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성도들에게 따뜻하게 영접 받게 하시고, 복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면서 체험하는 이 기쁨은 천국의 기쁨이요, 이 세상에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왕이기 이전에 제사장이기 이전에 성도라는 특권(特權)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떤 죄의 수렁에서도 우리를 건져낼 수 있고,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이미 다윗은 밧세바를 범했을 때, 한 번 죽은 것입니다. 그가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겼을 때, 사실 그는 폐위(廢位)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제 2의 인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중에 부끄러운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제 2의 인생을 주셨으니, 이제는 다시 죄짓지 말고 죽을 때까지 충성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찬송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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