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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 고대사] ①'문화공동체'한반도와 만주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는 압록강과 두만강은 오늘날 한국과 중국 영토를 가르는 국경선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국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두 강의 양쪽이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쪽에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지리적으로도 압록강과 두만강은 단절의 선이 되기 어렵다. 강 폭이 좁은 곳은 작은 배 한 척으로도 쉽게 건널 수 있고, 가뭄이 들거나 얼음이 얼면 걸어서도 오고 갈 수가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그렇게 선사시대부터 정치적·문화적 장벽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의 교류 통로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에 살았던 첫 번째 사람들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약 17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해서 100만년 전에는 동아시아에 도착했고, 라요닝 성의 발해(渤海) 연안 지역을 경유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 뒤이어 오늘날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역시 아프리카에서 시베리아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출했다. 이들이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선사시대 ‘주민(住民)’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좀돌날과 같은 소형 석기와 이것을 만드는 데 이용된 쐐기 모양의 몸돌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돼 두 지역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만주와 한반도가 선사시대에 하나의 문화공동체였음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를 보면 표면에 문양을 눌러 새긴 것들이 주류다. 만주 지방의 토기들과 매우 닮았다. 특히 한반도 북부 지역의 토기는 요동반도 및 지린성 동남부 지역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새김무늬 토기는 황하 중류 유역 양샤오(仰韶) 문화의 채색토기 전통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주 지방에서 청동 야금술(冶金術)이 출현하게 된 것은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를 따라 형성된 북방 청동문화의 독자적인 발전 결과였으며, 한반도의 청동야금술 역시 이러한 북방 지역 청동기 문화 전통의 일부이다. 북방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은 곡선의 칼날을 가진 청동 단검으로 ‘비파형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이라고 불리며 예맥(濊貊) 문화권 또는 고조선 문화권의 대표적 유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 중원 지역의 직선형 날을 가진 동검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공통성은 또한 언어와 형질(形質)적 특성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언어 계통상 중국어는 중국·티베트어족(Sino-Tibetan languages)에 속하고,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 가운데 알타이어계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한국어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에서 사용한 부여계어(夫餘系語)와 마한·변한·진한 등에서 사용한 한계어(韓系語)가 변화 발전한 것으로, 늦어도 기원 전후의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공통의 언어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만주 지방이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첫 계기는 언제부터일까? 기원전 3세기 초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의 정치 세력이 허베이(河北) 북부의 연산(燕山) 지역을 넘어 확대되면서 만주 지역에 연나라의 군현(郡縣)이 설치된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연나라의 철기 문화, 밀폐 가마와 물레 사용에 의한 토기제작 기술, 목관(木棺)을 사용하는 매장 풍속 등이 만주 지역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며 한반도에도 유입된다. 이런 중국 문화의 보급은 한무제(漢武帝)의 고조선 정복과 한사군(漢四郡) 설치를 계기로 더욱 확산된다. 그러나 이는 주로 발해 연안 및 서(西)북한 지역에 집중됐을 뿐, 만주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토착적 문화 전통이 지속됐다. 그리고 중국과의 접촉이 오히려 각 지역 사회의 발전을 촉발하여 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의 정치적 발전을 초래하였다.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만주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독자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선사시대의 한반도와 만주는 이처럼 문화적·언어적·형질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만주를 한국고대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며 또 필요한 일이다. (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미국 하바드대학 석사·박사
"만주지역은 동북아닌 북방" 중국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3개 성(省)으로 이루어진 만주는 전체 넓이가 123만㎢에 이르는 방대한 땅이다. 한반도의 5배가 넘는 이 지역은 지금은 중국 영토지만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선사시대에는 유라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한반도에 이르렀던 유목 민족의 기착지였고, 이들 중 일부가 한민족의 조상이 됐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들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지금은 서로 별개의 지역으로 생각되는 한반도와 만주는 오랫동안 하나의 문화권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한족(漢族)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역사·문화 공간이었고, 그 상당 부분의 주역이 훗날 우리 민족으로 이어졌다. 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갈등은 한국인의 고대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드러냈다. 20세기의 남북분단과 지역주의는 역사 인식의 폭마저 제한했고, 고대사 연구와 교육도 주로 한반도 남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변경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북방고대사(北方古代史), 특히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만주 지역의 우리 역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제 우리는 만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선 이곳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시작하자. 한반도의 북쪽에 놓인 이곳을 우리는 북방(北方)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만주는 지리적 개념을 넘지 못하고, ‘동북(東北)’은 중국 쪽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옛 땅을 회복하자”는 시대착오의 국수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이 중국 정부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21세기 동북아 역사의 전개 속에서 경제-문화적으로 다시 한반도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만주에서 펼쳐졌던 우리 북방고대사에 대한 재인식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일보는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는 이 중요한 작업을 학계를 대표하는 소장·중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할 것이다. 이하 2004. 2. 3. 부터 조선일보 연재물 (2)화려했던 신석기시대 만주 지역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훙산(紅山) 문화의 주요 유적 중 니우허량(牛河梁)에서 발견된 돌무지무덤(적석총)의 모습.
압록강 유역인 평안북도 미송리에서 나온 토기(土器)는 밑이 납작한 원통형 그릇에 지(之)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청천강 유역의 세죽리에서 나온 그릇들도 같은 종류다. 이런 그릇들이 또 나오는 곳이 있다. 압록강 청천강에서 멀지 않은 중국 요동반도, 특히 단둥(丹東)과 다롄(大連) 지구에서 주로 발굴되는 토기가 바로 그렇다. 북한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미송리-샤오주산(小珠山) 유형’이라고 하여 북한과 만주에 걸쳐 동일한 문화를 가진 지역 단위를 설정하고 있다. 샤오주산은 요동반도 남쪽의 광루다오(廣鹿島)에 있는 곳으로 신석기 시대의 토기들이 대량 발견된 곳이다. 만주와 한반도는 신석기 중기가 되면 점차 새김무늬로, 그리고 후기로 가면서 무늬가 생략되는 토기무늬 변천의 흐름도 같다. 그리고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용연리 유적의 문화 양상은 만주의 샤오주산(小珠山)·솽퉈즈(雙陀子)·단퉈즈(單陀子) 유적들과 대부분 일치한다. 이처럼 두만강·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가 같은 문화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 만주 신석기 문화를 만든 사람들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만주에 무슨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을까 생각하기 쉽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책 역시 동아시아에서 처음 문명이 시작된 곳은 중국 황허(黃河) 유역의 중원(中原) 지역이라고 적고 있다.
니우허량에서 출토된 여신 소조상.
기원전 7000년 무렵 시작된 만주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중원 지역의 문화와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양과 질 모두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주 지방의 신석기 문화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심양 부근 훙산(紅山)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 무렵의 ‘훙산(紅山) 문화’다. 훙산 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용 모양 옥기
훙산 문화 유적 중 가장 이름난 동산주이 유적의 제단(祭壇)은 중국 신석기 시대의 발굴 가운데 처음 발견된 대형 제사 건축물로, 길이 60m, 너비 40m의 대형 유적이다. 제단 안에서는 각종 옥기들과 흙으로 빚은 사람 모양 20여점, 대형 인물상 등이 출토되었다. 뉴허량 유적에서는 여신묘와 돌무지무덤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 두상(頭像)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과 정확한 비례, 그리고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유명하다. 이렇게 화려했던 만주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만들었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디로 이동하였을까? 자우바오고우에서 나온 새김무늬 그림 토기.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물·유적이 만주의 샤오주산 유적들과 대부분 일치하는 데서 보듯,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한반도는 유사한 문화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 연해주도 민주문화권…연구 폭 넓혀야"
만주 지역의 선사시대 문화는 한반도뿐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는 만주가 북동쪽으로 흑룡강과 우수리강을 경계로 연해주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의 앙앙시(昻昻溪) 문화와 미산(密山)의 신카이류(新開流) 문화는 각각 러시아에서는 노보뻬트로프카(Novopetrovka) 문화, 꼰돈(Kondon) 문화 또는 말리쉐보(Malyshevo) 문화로 불린다. 1930년대부터 만주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러시아 학자들이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연해주 지방의 신석기 문화인 보이즈만(Boysman)·글랏까야(Gladkaia)·자이싸노프카(Zaisanovka) 문화 등은 거의 그대로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문화나 중국 지린성(吉林省) 용정(龍井) 지역의 금곡(金谷) 유적과 거의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경에 구애받지 말고 시야를 유연하고 넓게 가져야 한다. 만주는…
‘만주’(滿洲·Manchuria)란 지명은 원래 오랫동안 이곳을 삶의 근거지로 하던 만주족에서 왔다. 만주족은 남방 퉁구스계 민족으로 역사적으로는 숙신(肅愼)·읍루( 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 등으로 불려왔다. 12세기 금(金) 나라를 세워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다시 후금(後金)을 세운 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중국을 300년 가까이 지배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족 외에 몽골족·조선족·회족(回族) 등이 살고 있지만 한족이 90%가 넘는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한족은 대부분 청 왕조 시기, 그 중에서도 19세기 말 이후 만주로 이주했다. 중국 정부는 만주 대신 ‘둥베이(東北)’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는 만주라는 이름이 이 지역이 독자성을 가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만주는 실제로 오랫동안 독자성을 유지했으며 20세기에도 군벌(軍閥·장작림), 일본의 괴뢰국(만주국)으로 베이징 정부의 통제 밖에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통치권을 장악한 1949년 이후에도 ‘둥베이 인민정부’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던 만주는 1953년 중앙정부가 이를 폐지하고 랴오닝·지린·헤이룽장의 3개 성으로 분할함으로써 중국의 정치구조 속으로 완전히 편입됐다.
북한과 중국의 '同床異夢'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과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각각 17명씩 참가한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고, 내몽골·랴오닝·지린·헤이룽장 지역의 청동기시대 및 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하고 시굴과 발굴 조사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양쪽이 출토 유물의 해석에서 현저한 시각 차이를 노출하여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북한은 1966년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라는 단행본을 독자적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연구를 계속하여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대하고, 다롄(大連)의 강상(崗上)과 러우상(樓上) 무덤을 고조선 지배층의 순장(殉葬) 무덤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등으로 자료 정리가 늦어진 중국은 30년 후인 1996년 ‘쌍타자와 강상(雙 子與崗上)’, 1997년 ‘육정산과 발해진(六頂山與渤海鎭)’을 각각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중국 학자들은 만주지방의 유적들이 국가 단계에 도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며 강상과 러우상의 무덤은 혈연관계의 씨족 공동묘지였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한·중 역사 분쟁의 단초는 이미 30여년 전에 시작된 셈이다.
(3) 청동기 문명과 고대국가의 출현
한민족이 세운 첫 번째 고대국가가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러나 단군신화(檀君神話)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 고조선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조선에 관한 자료가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나오는 짧은 기록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고조선의 영역과 성립시기 등은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만주지방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 한반도 안에서 맴돌던 고조선에 대한 논의는 만주로 확대되었다. 고조선은 만주지방의 청동기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립됐다.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늦어도 기원전 2000년 무렵 시작됐고 그 위치와 주체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내몽골 동남부·랴오닝(遼寧) 서부의 동호(東胡) 집단, 랴오닝 중부·요동반도(遼東半島)·지린(吉林) 중부 및 남부지역의 예맥(濊貊) 집단, 지린 북부 및 헤이룽장지역의 숙신(肅愼) 집단이다.
이와 같이 중심지를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중국의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의 팽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북한 학자들은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를 현재의 만리장성 남쪽의 난하( 河)로 해석함으로써 두 나라의 접경을 현재의 허베이(河北) 북부지역까지 확대하는 혁신적인 주장을 제기했고,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다. 한편 동호 집단은 한(漢)나라 때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로 나뉘었는데 훗날 거란족으로 이어진다. 숙신은 한나라 때는 읍루( 婁),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勿吉), 수당(隋唐) 시기에는 말갈(靺鞨)로 불렸고 뒤의 만주족이다.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지배체제를 형성했으며, 법률 집행을 위한 강제력을 보유하였다. 돌무지 무덤, 돌널무덤, 고인돌 등 석재를 이용한 무덤들이 그 같은 사회체제의 유산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요동반도의 구릉지대와 지린성 동남부에서 120기 이상 발견된 북방식 탁자 모양의 고인돌은 한반도 안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거의 같은 형태로, 이 지역 문화와 집단이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고조선은 또 수십만명으로 추정되는 인구를 지배하고 중국과 한반도 남부지역 사이의 장거리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획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에 이어 만주지방에 세워진 예맥 집단의 두 번째 고대국가는 부여(夫餘)로서 고구려(高句麗)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부여는 현재의 지린성 지린시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기원후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수백년간 지속됐다. 유화부인과 주몽설화에서 보듯 고구려는 부여와 같은 종족이 세운 나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압록강 중류의 만주지역에 성립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 유역에는 옥저(沃沮),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東濊) 등의 예맥 집단이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은 처음에는 고조선의 영향 아래 있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구려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됐다.
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은 북방의 예맥족(濊貊族)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합쳐서 형성된 것이다. 만주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된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한족은 독자적인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마한·진한·변한 등 3개 집단으로 분립(分立)한 한족은 결국 백제와 신라로 양분된다. 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 나라를 빼았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후에는 두 집단이 뒤섞이게 됐다. 그리고 이 같은 혼합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1차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민족의 가장 뚜렷한 지표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의 뿌리는 예맥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하던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로 이것이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된 후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집결된다.
100년 넘은 4강구도, 6세기 들어 변화
만주 지역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중국과는 별개의 질서를 형성했던 상황은 6세기 중엽 정세가 바뀌면서 도전을 받게 된다. 100년 넘게 지속되었던 동북아의 4강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한반도 내에서도 역학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먼저 신라와 백제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략하면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고 한반도 안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어 수(隋)와 당(唐)이 250여년 동안 계속된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 중국의 시대를 다시 열자 고구려는 그 압박을 받게 된다.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文帝)와 양제(煬帝)가 잇달아 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의 지략으로 고구려는 수를 물리쳤지만, 국력의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북방 유목 민족 돌궐마저 무너뜨리자 마지막 남은 고구려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한동안 유화 정책을 펴던 당은 고구려에서 대당(對唐)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자 태종(太宗)이 수십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세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양만춘(楊萬春) 등의 분전으로 이번에도 나라를 지켰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서기 668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아시아는 결국 중국 중심의 단일 질서로 재편됐다. 그리고 이런 틀은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1000년이 훨씬 넘게 계속됐다.
四神圖 '주작 현무 청룡 백호' 당나라 벽화선 찾아볼 수 없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패권 국가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자성과 보편성을 띤 고구려 문화를 만들어 세력권 안의 크고 작은 나라들에 전파했다. 고구려 문화의 높은 완성도는 7세기 전반 고구려의 화가들이 그린 고분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안남도 강서대묘의 주작과 현무, 강서중묘의 청룡과 백호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였던 중국 당나라의 고분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신수(神獸)’라고 불린다. 그리고 ‘범(汎)고구려 문화권’의 힘은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는 물론 동아시아를 넘어 멀리까지 미쳤다. 만주 지안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 벽화에서는 고구려와 중앙아시아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종교 및 문화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 하늘세계를 지탱하는 존재로 그려진 우주(宇宙) 역사(力士)는 이목구비를 비롯하여 몸의 생김새 전체가 서역인(西域人)의 모습 그대로이다. 연꽃 잎을 뿌리며 여래의 덕을 기리고 있는 비천(飛天)들의 모습도 중앙아시아 불교회화의 전통과 맞닿는 존재이다.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삼실총 벽화에서도 서역인의 모습을 한 역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4> 동북아의 최강국 “폐하, 고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 직접 문상하지는 못하나, 이곳에서라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하니 동교(東郊)에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라.” 서기 494년 12월, 재위 79년 만에 세상을 뜬 고구려 장수왕의 부음을 듣고 중국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보인 반응이다. 이에 앞서 414년,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영락대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이 민(民)을 어여삐 여김과 같이 넓고, 그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쳐’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해란 천하(天下), 곧 온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고구려는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이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에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약했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이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것도 5세기의 고구려인이 지니고 있던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기원전 37년 시작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 압록강 중류 지대를 건국의 터로 삼았던 까닭에 주변에 대한 정복과 확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소멸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좌식자(坐食者·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불리는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 존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진 5호16국 시대 북(北)중국에서 명멸했던 왕국들은 중원의 패권을 잡고자 황하 중류 지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기에 앞서 반드시 동방의 강국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중국 지안의 삼실총 벽화 중 ‘공성도(攻城圖)’의 한 부분인 기마전 장면. 그림에 보이는 기병은 말까지 갑옷과 투구로 무장시킨 고구려의 정예병으로‘철기(鐵騎)’라고 불렸다. 고구려는 서기 4세기 전반 중국 군현의 후신인 낙랑과 대방을 역사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만주와 한반도의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북중국이나 남중국의 왕조들,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들은 동북아시아의 강대한 세력 고구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국제외교를 펼쳐나가야 했다.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 그릇.
서기 439년 북위가 북중국 통일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유목세계의 유연(柔然), 동방의 고구려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4강체제가 수립된다. 고구려는 내외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수도 평양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미 서기 397년 백제의 아신왕은 왕성을 둘러싼 고구려군의 압박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광개토왕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100년 넘은 4강구도, 6세기 들어 변화 만주 지역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중국과는 별개의 질서를 형성했던 상황은 6세기 중엽 정세가 바뀌면서 도전을 받게 된다. 100년 넘게 지속되었던 동북아의 4강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한반도 내에서도 역학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먼저 신라와 백제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략하면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잃고 한반도 안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어 수(隋)와 당(唐)이 250여년 동안 계속된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 중국의 시대를 다시 열자 고구려는 그 압박을 받게 된다.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文帝)와 양제(煬帝)가 잇달아 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의 지략으로 고구려는 수를 물리쳤지만, 국력의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북방 유목 민족 돌궐마저 무너뜨리자 마지막 남은 고구려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한동안 유화 정책을 펴던 당은 고구려에서 대당(對唐)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자 태종(太宗)이 수십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세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양만춘(楊萬春) 등의 분전으로 이번에도 나라를 지켰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서기 668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아시아는 결국 중국 중심의 단일 질서로 재편됐다. 그리고 이런 틀은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1000년이 훨씬 넘게 계속됐다. [한민족의북방고대사/⑤] 문명·종족 다양했던 고구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북방을 향해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부터 100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북쪽으로는 농안(農安) 또는 그 이북,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 유역과 연해주 일부, 남쪽으로는 경기만~소백산맥 이남~삼척을 잇는 지역으로 팽창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 너머 유목 지역에 대한 간접지배 방식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영향권은 더욱 확대됐을 것이다.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해양 활동도 활발하였으니,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영토가 커지면서 고구려란 나라는 폭넓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갖게 됐다. 송화강·두만강·혼하·요하·눈강 등 길고 수량이 많은 큰 강이 있었고, 산악 지형도 처음 나라를 세웠던 길림과 집안 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지역과 연해주 지역, 흥안령의 대삼림 등으로 확대됐다. 요동의 넓은 평원, 북방의 초원, 호수 등을 골고루 가졌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비옥한 농토를 얻었다. 건조한 초원, 겨울에 몹시 추운 아한대 삼림지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온대 등 기후에 따른 식생대도 아주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자연환경은 경제양식의 차이는 물론 생활방식, 집단의 세계관과 신앙 등 문화의 형태와 성격에 다양성을 불러왔다. 농경문화가 무엇보다 굳건한 토대를 이루었다. 요동반도의 남단과 황해도·한강 유역의 경기만 지역에서 농사가 발전했다. 부여의 옛땅인 송요평원 역시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 정복전쟁지/ 내몽골 대흥안령 부근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여러 차례 이 지역에서 대규모 정복 전투를 벌였다.
북방과 서북방으로는 유목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북류(北流) 송화강 하류와 눈강 하류 및 동류(東流) 송화강이 만나는 지역은 끝없는 초원지대로서 일찍부터 유목문화가 발달했다. 거기다가 거란(契丹)을 거쳐 유연(柔然) 돌궐(突厥) 등과 충돌하면서 유목 문화의 성격을 흡수해들였다. 고구려가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기마문화를 중시하며, 고분 벽화에 별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유목문화의 영향이다. 이 지역의 산물인 명마(名馬)는 고구려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구려는 흥안령 산록에 사는 실위(室韋) 집단과 철을 팔고 말을 사는 마철(馬鐵) 교역을 추진하였고, 남쪽인 송(宋)에 800필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동북쪽에서는 삼림·수렵문화가 발전했다. 동옥저로부터는 담비 가죽을 조세로 받았다. 담비 가죽은 북옥저와 접한 읍루(?婁)에서도 명산품으로 취급됐다. 동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은 동류 송화강의 일부와 우수리강이 흐르고 삼림이 무성한 지역으로 지금도 주변 종족은 어렵과 수렵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구려의 해양 문화는 일찍부터 동해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고래를 잡는 등 다양하게 발전했다. 태조왕 때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지금의 단동 지역)을 공격한 이후 계속 황해로 진출을 시도한 고구려는 미천왕에 이르러 드디어 숙원을 풀었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요동반도를 영토화한 이후에는 황해 중부 이북은 물론 요동만도 고구려의 내해(內海)가 됐다. 이처럼 성장한 해양 능력을 토대로 양자강 유역의 송나라 등 남조(南朝)의 여러 국가들과 빈번하게 교섭하면서 남방 해양문화가 들어왔다. 일본 열도와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고구려는 거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자연환경과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국가였다. 대륙과 해양, 반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가졌던 것은 우리 역사상 고구려가 유일하다. <5> 漢族·거란·말갈족등 흡수 고구려는 다종족(多種族) 국가였다. 예맥족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다양한 종족들이 고구려의 정치체제 안에 흡수됐다. 같은 예맥족인 동부여·북부여와 동예·옥저 외에 한(漢)군현의 잔재였던 낙랑과 대방 지역에 있던 주민과 화북(華北)의 유이민 등 일부 한족(漢族)도 들어왔다. 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동몽골에 가까운 시라무렌 강 유역의 거란계 북방 종족들과 요하 유역에 있던 연(燕)의 선비족(鮮卑族)을 흡수하였으며, 동몽골 지역의 지두우족(地豆于族)도 일부 편입시켰다. 그리고 동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말갈계는 고구려의 강력한 구성원이 되었다. 고구려는 이처럼 광대해진 영역과 다양한 종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영토의 핵심 부분에는 욕살·태수 등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통치를 했지만, 먼 거리에 있는 유목 및 수렵 종족들은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과 영역을 보장해 주는 대신 조세와 군사력 등을 제공받는 간접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중원(中原)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형제국’이라고 부르며 독립을 인정해주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다층적(多層的)인 영향력 행사 방식을 갖고 있었다. <5> 多종족·多문명 갈등 해결위해 中고급문명 적극 받아들여 거대한 영토를 가진 다종족·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는 종족 간의 갈등과 문화적 혼란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천손(天孫) 의식과 단군 신화를 중심으로 하는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중국의 고급 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문화적 통일을 시도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朱蒙)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로 묘사됐다. 또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점도 강조됐다. 하늘과 땅의 결합, 하늘과 물의 결합이라는 단군신화적 요소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주요 소재의 하나이다. 한편 고구려는 유교·불교·도교 등 고급 사상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수도에 유교 고등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어 지방에도 경당(?堂)을 세웠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과 역사서, 문학서를 가르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고 했다. 불교 역시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에 의해 고구려에 전해졌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선이 많이 등장하고 도교의 기본 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이 널리 읽혔다는 사실에서 도교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 고구려 부흥을 꿈꿨던 발해 서기 926년 1월 14일은 발해가 거란족에게 굴복한 날이다.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만주 동쪽 땅에 나라를 세운 지 228년 만이고, 고구려 멸망으로부터는 258년 만이다. 이날은 단지 한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날일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의 활동 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비운의 날이기도 하다.
발해가 시작된 동모산 발해의 첫 번째 도읍이었던 길림성 돈화시 부근 동모산의 모습. 발해는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이끌고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중부지방까지 오르내렸다. 고구려와 부여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점차 다가오는 중국 세력에 밀리면서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동강 이남 땅만 통일신라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 이렇게 쪼그라든 무대를 다시 넓혀주었던 나라가 발해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만주 동부와 중부를 모두 차지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그 영토는 대략 고구려의 1.5~2배, 통일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 정도였다.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도성 정문 유적 비록 만주를 잃었지만 요동 지방만은 고려 말까지도 우리 땅으로 인식됐다. 성종 12년(993) 거란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서희(徐熙) 장군은 “우리 나라는 고구려 후계국이다. 경계로 말하면 압록강 안팎이 우리 영토로서 오히려 당신의 동경(지금의 요양)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한다”고 꾸짖었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방문(榜文)을 붙여서 요양과 심양 사람에게 “그곳은 본시 우리 나라 땅이고, 그 백성은 우리 백성이다”라고 선포하였다. 고려 말의 요동 정벌도 이런 의식이 배경이 되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그런 인식마저 잘라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 땅의 경계가 되었고, 만주에서 일어났던 우리 역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세종 9년(1427)에 예조판서 신상(申商)은 “삼국의 시조 사당을 마땅히 도읍지에 세워야 하는데,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아뢰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거란 사신을 거부한 만부교 사건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라고 하여 발해는 우리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 땅을 잃어버린 데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역사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발해 시대의 절터. 석등과 석사자상 등이 남아 있다
발해는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4강 구도를 구축하였고, 때로는 황제국으로 자처할 정도로 기개가 있던 나라였다. 9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송을 듣게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3년 뒤에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핵심지에 있던 발해인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발해의 수도는 불에 타버린 채 인적이 끊겨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요동 지방에 끌려온 발해인도 금(金)나라 초기까지 역사 기록에 그 종적을 보이다가 점차 중국인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발해가 사라진 빈 자리를 차지한 종족이 거란족과 여진족이었다. 멀리 요령성 서쪽에서 유목을 하던 거란족은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영도 아래 갑자기 세력을 키워 중국 북부와 만주를 호령하였다. 이것이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버린 요나라이다. 그 뒤에는 금·원·명·청나라가 이어가며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웠고 청나라는 그 후신인 만주족이 세웠다. 이들의 조상은 고구려 때의 숙신족이요, 발해 때의 말갈족이다. 지금 하얼빈 부근에는 금나라 발상지가 있고, 심양에는 만주족의 옛 궁전이 남아 있다. 원나라는 몽골족의 정권이었다. 이렇게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만주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됐고, 단지 과거의 역사로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韓民族이 만주 농경지 개척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를 잃어버리고 조선시대 들어 만주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역사의 기억마저 잊어버렸던 한민족이 다시 만주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1860년대 기근에 고통받던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의 농민들이 농사지을 기름진 땅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다. 말갈족의 후신인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창바이(長白) 산맥 일대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삼고 다른 민족의 거주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주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1881년 봉금이 해제되면서 한민족은 합법적으로 대거 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이주해 논농사를 시작했다. 이 지역의 농경지는 대부분 한민족의 손에 의해 개척됐다. 만주 지역의 한민족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였다. 일제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농민과 항일운동가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했다. 또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설에 따른 ‘만주 붐’으로 또 한 차례 한민족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을 되찾은 뒤에도 만주에 그대로 남은 한민족은 ‘조선족(朝鮮族)’으로 중국 내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 지역은 ‘간도(間島)’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지역이었다. 양국 정부는 1712년(숙종 38년) 함께 현지조사를 한 뒤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동쪽으로 압록강, 서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정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과 중국은 토문강을 각각 송화강과 두만강으로 달리 해석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일본 제국주의는 1909년 간도 지방의 영유권을 청에 넘기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했다. <7>오늘날의 만주 지금부터 100년 전 만주는 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말부터 풍부한 인적자원과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 정책을 폈고, 일본은 곡물 및 지하자원의 보고인 만주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조선족에 한족(漢族)까지 몰려들면서 20세기의 만주는 원주민인 만주족과 몽골족 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복합민족구성체’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날 무렵 만주지역의 인구는 1841만명으로 중국 전체 인구 3억6815만명의 5%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만주 이주로 현재 지린·랴오닝·헤이룽장을 합친 동북 3성의 인구 비중은 1952년에는 전체 인구의 7.2%, 1985년에는 8.78%로 높아졌다가 2002년 말 현재는 8.34%(1억815만명)으로 약간 낮아졌다. 2000년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92만3400명. 이 가운데 120만명 정도가 지린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72만명 정도가 헤이룽장(30만명), 랴오닝(35만명), 그리고 기타 지역(7만명)에 흩어져 살고 있다. 조선족의 거주 집중도가 특히 높은 곳은 옌볜(延邊)자치주인데, 2000년도 조사결과 약 85만4000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한족의 이주와 조선족의 한국 이주로 현재 조선족은 자치주 인구의 39.7%밖에 안 되며 한족이 57.4%를 차지해 ‘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쑥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의 아파트 공사 현장.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낙후 지역이었던 만주에서는 최근 정부의 주도 아래 대규모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후 만주 지역은 ‘동북(東北) 3성(省)으로 개칭됐다. 지린성의 창춘 제1자동차·지린 화학, 랴오닝성의 안산 철강·번시 제철·금주 석유화학단지,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군수기지 등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속속 들어서며 중화학공업이 중심을 이룬 이 지역은 70년대 말까지 중국 경제의 엔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홍콩과 가까운 동남쪽 지역의 경제특구들에 화교의 투자가 몰리고, 80년대 중반부터는 14개 연해도시가 대외 개방 혜택을 받는 와중에서도 동북지역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북지역과 화동·화남지역 간의 격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경쟁력이 없고 시장의 수요와 동떨어진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던 동북 3성의 국영기업들은 결국 국유기업 구조조정 조치를 맞게 된다. 근로자들은 철밥그릇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체불임금 지급과 새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동베이현상’(東北現象)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한마디로 옛 만주지역은 중국의 고(高)성장의 축에서 소외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도부는 동북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잊지 않고 않았다. 21세기 중국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동북지역의 산업구조를 현대적인 것으로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동북지역 대개발사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2001년에 기안되어 2002년 9월 후진타오 신체제가 탄생한 공산당 제16기 대회에서 확정됐다. 이 사업은 그동안 침체됐던 랴오닝·헤이룽장·지린 등 옛 중화학공업기지를 재건함으로써 지나치게 경공업과 IT 위주로 치닫는 중국의 산업구조 왜곡을 시정하겠다는 것이 목표이다. 중국 정부는 2003년 10월 말 100대 프로젝트에 1차 투자자금 총 610억위안(약 9조원)을 투입했다. 물론 여기에는 비경제적 요인도 고려되었다. 한반도 장래가 불확실한 상황 아래서 어느날 북한이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만주족과 조선족이 많고 낙후된 동북지역의 정치적 위험이 커질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한국을 등에 업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하고 ▲원기를 회복한 러시아가 미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한다는 구실로 개입하고 ▲만주 지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본이 엔 차관과 경협 프로젝트를 구실로 만주 접근을 강화하는 상황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인식과 관련, 중국 정부의 ‘동베이 꿍청’(東北工程)은 21세기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걸맞은 만주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동북아지역 개발사업’이 옛 만주 경제의 영화를 재현시키려는 노력이라면 ‘동베이꿍청’은 홍콩 주권 환수와 마카오 주권 회복에 이어 마지막 남은 치욕의 역사적 잔재를 지우려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北·中·러학자와 공동조사 연구해야 북방사 연구를 한층 활성화하고 심화시키는 것은 또한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반도를 우리의 활동 무대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민족의 활동 공간은 훨씬 넓어질 것이고, 그 일차적 대상은 만주를 비롯한 북방이 될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영토는 아니더라도, 경제·문화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사 연구와 교육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을 포함한 북방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북방 지역의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문물 교류를 하였고, 때로는 항쟁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고자 할 때 북방사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의 북방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몹시 부족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분단이 됐고, 북방 지역이 공산화되면서 냉전체제하에서 북방 연구는 금기시됐다. 그렇다 보니 북방사 연구도 자연히 다른 분야에 비해 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제 출범식을 가진 고구려 연구재단은 앞으로 북방사를 연구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문제가 된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북방 지역의 신석기 문화, 고조선사, 부여사, 발해사 등도 연구해야 한다. 또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북방 지역과의 관계사, 그리고 근현대 시기의 북방지역사까지도 두루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선 북방 지역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국내에 있는 것들부터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이어 북한·중국·일본 등 외국에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사와 관련된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북방사, 북방관계사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방 지역에 대한 현장조사가 중요하므로 북한·중국·러시아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함께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공동의 역사인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먼저 학자들의 견해 차이를 좁혀야 장기적으로 관련 국가 국민들이 공통의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평양에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 이 문제에 대해 협의했는데 그들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공동으로 이 문제에 대해 대처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과 정부가 북방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우리 민족의 현재·미래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의식을 제대로 갖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우리 국민이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를 학교 교육에서 독립 교과로 편성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사회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가 지키고 가꾸지 않는다면 누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⑧김지하 ‘생명과 평화의 길’ 평화! 삶 자체로부터 오는 참다운 평화가 아니라면 전쟁뿐이다. 거짓 평화란 없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지극히 평화를 기리면서도 현실에 있어 아슬아슬한 목전의 전쟁에 부딪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예감이나 담론 자체가 전쟁이요, 매일매일의 전쟁 논리가 곧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제에 있어 매일 매시간 전쟁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관련된 것이거나 일본에 대한 것이었고, 흔히는 북한에 관한 얘기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국이다.
중국! 먼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국과 얼추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서로 다른 그 중국이 단순한 예감의 차원을 넘어 전쟁의 확실한 가능성의 한계 안으로 다가들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상식화된 우리의 논리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너와 나는 언제나 싸우는 것이니, 너와 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김으로써 상대를 흡수 통합한다.” 이미 이렇게 우리는 마음 안에서, 이야기 속에서, 사유 속에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먼저 이 내면과 상식의 영역에서 평화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현실의 ‘악무한’(惡無限)인 전쟁으로부터 결코 탈출하지 못한다. 분명히 말한다.
탈출하지 못한다! 왜? 우선 동아시아는 그 자체의 독특한 문명적 ‘반대일치(反對一致)’ 안에 있다. 아직까지도 확실한 지역적인 경제공동체나 ‘시장합석(市場合席)’, 그리고 ‘호혜(互惠)의 망(網)’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儒)·불(佛)·선(仙) 등의 청천백일 같은 전통가치는 뚜렷이 공유하고 있다. 어쩌면 ‘반대일치’가 아니라 ‘일치된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문명 후반의 지리멸렬이 아니라 오히려 새 문명의 새파랗고 확실한 가능성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진화론은 ‘군집(群集)의 개별화(個別化)’가 아니라 ‘개별성들 안에서의 얼룩덜룩한 군집화’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에서부터 제 길을 제대로 가지 않고 있음이다. 그 가장 명백한 국제적 오류는 중국에서부터 나온다. 민족적 패권주의나 중국제일주의가 곧 자기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문화대국으로서의 큰 포부, 큰 경륜을 애써 깨뜨리고 있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자신의 소명과 경륜을 스스로 더럽히고 짓밟고 있으니―왈,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공정(工程)’에 대응하는 주변 민족들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얼마 전에 만난 베트남 작가동맹 서기장 휴틴은 가라사대 “베트남은 작은 나라고, 중국은 큰 나라다. 양자 사이엔 프렌드십이 있을 뿐이다. 허허허.” 이 말을 반복하며 계속 웃고 있는 그 웃음에서 중국 민족이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 가한 상흔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의 그런 전술적 태도가 아닌 한국인의 눈시리도록 명백한 대응으로서의 네 가지 얘기를 한편 한숨, 또 한편 실소(失笑)로 낮게, 느리게 띄엄띄엄 말해주던 일이 생각난다. “첫째, 중국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이 다 참여하는 고대 아시아 문예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둘째, 미래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관료주의에 대해 전 세계인이 참가하는 평화적인 문화대개벽이 일어나야 한다. 셋째, 우주 또는 지구생명학을 학제적(學際的) 차원에서 탐색하면서 전 세계가 참가하는 인간과 비인간 전부의 생명 공동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넷째, 이 세 가지 문화운동을 위해 문(文)·사(史)·철(哲)을 종합하는 새로운 문화이론이 불붙어야 한다. 우선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이 선두에 서자.” 나는 지금 이 네 가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해진다. 혼자서 아시아 고대 문예부흥 역할에 핏대를 올리던 때의 그 가슴시린 외로움 곁에,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민족들과 함께 우리 고대를 살펴봤으면 한다. 긴급한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동아시아 나름의 숙제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호혜망 등등. 나는 이 글을 다음의 말로 끝맺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동아시아가 한데 손잡고 위급한 세계사상사에 기여해야 할 부분은 역시 사상이다. 그러나 사상 문제가 바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대의 특징인 것을 어쩌랴. 긴급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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