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103위 순교성인들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계의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라파엘호의 구조를 확인하고 150여 년 전의 선형을 복원하였다(길이 13.5, 폭 4.8, 깊이 2.1미터). 그리고 그 해 9월 상해를 출발해 제주에 도착하는 해상 성지순례를 계획하였으나 중국 정부의 비협조로 상해에 배를 내리지 못해 공해상에서부터 제주까지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한 후 9월 19일 김대건 신부가 표착했던 용수리 포구에 입항했다. 제주교구 김창렬 주교는 이날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하고 성지 조성에 신자들의 동참을 당부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인근의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되다가 2006년 11월 1일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용수리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2층 콘크리트 구조로 세워진 기념관 외형은 라파엘호의 형태를 본떠 건립되었고, 내부에는 성 김대건 신부 유해 공경실과 영상실,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2008년 9월 20일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의 정면은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을 재현했으며, 지붕은 거센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했다. 또 등대 모양의 종탑은 어둠속에서 빛을 비춰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가톨릭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선교의지를 상징하고 있다. 라파엘호 옆에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상을 세웠다.
2009년 10월 31일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에서 용수 공소 설립 60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었다. 1949년 9월 1일 제주 본당(현 중앙 주교좌본당) 소속으로 설립된 용수 공소는 1952년 6월 29일 신창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2008년 용수 성지 내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주교구는 2010년 9월 25일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165주년을 기념하여 잔디광장에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출처 : 관련 기사 참조(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 라파엘호 해상 성지순례
성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르는 상해 제주간 해상성지순례가 9월 19일 오후 2시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에서 제주교구 순교자 현양미사 및 성지선포식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제주교구와 가톨릭신문사가 공동사업으로 추진한 이번 해상성지순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복원한데 이어 처음이자 마지막 해상성지순례이자 김대건 신부의 표착지인 용수리 성지 조성의 출발점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8일 역사적 순례의 첫발을 내디딘 이번 순례는 12일까지 금가항 성당, 횡당 성당 등 중국 내 김대건 신부의 유적지를 순례하고 13일부터 라파엘호의 단독항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해시 정부의 비협조로 라파엘호를 상해 현지에서 하역하지 못하고 제주항으로 되돌아와 하역 후 다시 예인해 공해상으로 나가 라파엘호의 항해를 시작하고 도중 태풍을 만나 라파엘호의 단독항해 일정을 축소하는 등 일정의 차질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순례가 상해 - 제주간 항로 탐사가 아니라 당시 한국교회를 위해 몸바친 선조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라파엘호를 이용한 해상성지순례는 그 자체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라파엘호는 1845년 항해 당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 3대교구장 페레올 주교, 후에 5대 조선교구장이 된 다블뤼 신부와 현석문 가롤로를 비롯한 신자들을 태우고 온 배로 가히 한국교회를 태우고 온 한국교회의 방주라 할 수 있다.
일정의 변경으로 14일 오후 5시 제주항에 도착한 순례단은 라파엘호 하역을 마치자 라파엘호에 제주교구 현승보 신부와 서울대교구 이종남 신부 등 7명을 태우고 바로 출항해 공해상까지 나아갔으나 또다시 태풍 앤의 영향으로 15일 새벽 3시경 제주도 쪽으로 회항한 다음 비양도 앞바다에 해상 정박했다.
이 과정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있던 순례자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위험에 처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 여정을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15일부터 순례자들은 조별로 라파엘호를 타고 150년전 당시 신앙선조들이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고뇌하고 고통받았을 모습을 묵상하기도 했다.
16일 점심식사 후 더욱 거세진 풍랑으로 순례단은 라파엘호 순례에 참가한 7명의 사제들만 태우고 비양도로 피항시키고 나머지 순례단은 일단 이날 오후 5시 40분 제주항에서 임시 해산한 뒤 19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라파엘호와 함께 비양도에서 숙식하던 7명의 사제들은 19일 오전 라파엘호를 타고 순례단과 만나기로 한 용수리 포구로 운항해 순례단을 다시 태운 다음 오후 2시 순교자현양미사가 거행되는 용수리 포구에 입항해 신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49명의 순례단 입장과 함께 이번 순례의 대미를 장식한 제주교구 순교자 현양미사 및 성지 선포식에는 2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순례단을 환영하고 순교신심을 통한 신앙 재무장을 다짐했다. 순교자 현양미사는 라파엘호 입항 환영식, 미사, 성지 선포식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미사에서 서울대교구 이종남 신부는 강론을 통해 이번 순례의 체험을 이야기 하면서 "선조들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기본으로 알았다"고 말하고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라며 참석자들에게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했다.
미사에 이어 진행된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를 성지로 선포하는 성지 선포식에서는 제주교구 관리국장 현상보 신부가 김대건 신부 생애와 라파엘호를 소개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교회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용수리 성지는 한국교회에 봉헌하는 것인 만큼 한국교회 전체의 동참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성지 선포에 앞서 제주도에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밝히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섭리를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 용수리를 성지로 선포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 성지조성에 모든 신자들이 동참하기를 당부했다.
성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용수리를 성지로 선포한다는 김창렬 주교의 선포가 있자 하늘에는 오색 풍선이 날아올랐고 신자들은 뜨거운 환호로 이를 축하했다. 제주교구는 앞으로 용수리에 표착성지를 조성하고 라파엘호를 이용한 신자 및 사제들의 신앙체험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출처 :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3일, 김상재 기자]
라파엘호 복원의 의미
"우리 라파엘호는 돛도 없고 키도 없이 성난 바다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배와 우리가 얼마나 흔들렸는지는 상상에 맡겨 드립니다. 벌써 배에는 물이 가득 찼습니다…"(조선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나바위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 제주도에 표착하기 직전 상황의 한 구절)
154년 전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5대 교구장이 될 다블뤼 신부 그리고 우리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평신도 현석문 등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운명을 걸머지고 죽음의 항해를 했던 그 배가 복원됐다. 제주교구가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해오던 라파엘호 복원이 마무리돼 8월 12일 김대건 신부님께서 표착했던 제주도 용수리 앞바다에 다시 떴다. 라파엘호의 복원은 단순한 고대 한선의 복원이 아니다. 한국교회 방주의 복원이자 또 하나의 신앙의 유산을 되찾은 것이다. 더욱이 순교 보혈을 최고의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교회상 재건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조국 복음화의 열정만으로 라파엘호를 타고 격랑의 바다를 건넜다. 돛이 찢어지고 키도 없이 성난 파도 속에서도 고국에서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양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만으로 죽음을 넘어 바다를 건넜다. 대희년을 목전에 둔 우리교회에도 수많은 위험과 도전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모범을 따라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항해해야 한다. 희년이 희년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야할 길을 가고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한다. 미소한 이들의 힘이 되고 정의를 위해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페레올 주교는 당신의 편지에서 라파엘호에 타고 있던 선원들 중에는 신앙의 증거자도 있고, 순교자들의 아버지, 아들, 형제들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신앙의 증거자가 되고 나의 형제들을 순교자의 형제로 만들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이미 김대건 신부님께서 보여 주셨다. 김대건 신부님을 따라 새로운 라파엘호를 타야 할 때이다. 본사와 제주교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복원된 라파엘호를 타고 김대건 신부님이 오셨던 길을 따르는 해상성지순례를 준비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님을 따르는 해상성지순례에 많은 이들의 동참을 기다리며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새출발을 기원하며 기도와 성금으로도 후성원을 부탁한다. [출처 : 가톨릭신문, 1999년 8월 22일, 사설]
상해 - 제주간 라파엘호 해상성지순례를 마치고
1.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상해 - 제주간 해상성지순례(라파엘호와 함께)의 가톨릭신문 광고 중 "금가항 성당, 횡당 성당에서의 미사"라는 글을 보는 순간 섬광과 같은 것이 내 머리를 관통하였다. 8월 23일 아무하고도 의논 없이 제주교구로 참가비를 송금한 나는 아내에게 해상순례에 대해 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넌지시 얘기해 보았더니 일언지하에 반대였다. 아들 딸 며느리 사촌 동생들도 "육상에 성지도 많은데 태풍의 계절인 9월에 무슨 해상 순례냐"는 것이다.
갑론을박(?) 끝에 아들딸이 엄마를 달래서 우린 기도할 터이니 몸성히 다녀오시라는 결론이 나자 나는 김대건 신부님과 신학교 재학 중 세상을 떠난 세 분의 형님에 대한 얘기를 섞어 가면서 신나게 얘기하였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내심 나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영세 대자 두 분이 나와 함께 가기로 돼 있었으나 부인들의 반대로 나 혼자 가게 되었으니 더욱 불안할 수밖에.
나는 결심을 굳히기 위해 출항 1주일 전에 서울 - 제주간 왕복 항공권을 아예 사버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에 관한 몇 권의 책에서 참고 자료를 간추렸더니 한 권의 책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김대건 신부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자발적 교회 창립의 정신과 순교의 얼, 그리고 신앙 공동체로서의 삶의 길을 되새겨 볼 것이다.
2. 금가항 성당과 횡당 성당
금가항 성당! 이곳이 어딘가? 1836년 12월 2일 동료와 함께 성서에 손을 얹어 서약을 하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주님의 기특한 종의 영광을 안은 곳이 아닌가. 우리 교회 사상 처음인 해상순례단이 부르는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 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목메어 떨리는 우리들의 마음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김대건 성인을 찬양하는 한편 후예인 한국의 신부 일곱 분과 그를 극진히 따르는 평신도들이 드리는 한없는 흠모의 자리였다. 성당 옆의 조그마한 경당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와 작은 동상이 모셔져 있어 경배하고 욕심(?)이 생겨 황송하지만 작은 제대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었다. "안드레아 성인이시여, 이제 저희는 당신께서 이겨내신 그 격랑의 바다를 건너가겠나이다."
교우촌인 금가항 성당과 신학교 성당인 이곳에서의 첫 미사. 신부님은 두 곳에서 강론을 하셨을텐데. 성인께서는 그 때 박해 속에 자라는 조국의 교회 실정을 말씀하시며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이젠 우리가 이곳에 "공번되고 보편적"인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어 주도록 주님께 기도하였다.
3. 새벽 3시의 라파엘호
상해에서부터 라파엘호에 3개조로 분승하여 표착 예정지인 용수리로 가는 계획이 변경되어 제주로 귀항한 라파엘호는 돛을 달고 키를 갖춘 다음 일용할 양식과 물을 실었다. 젊은 사제들이 선원인 양 힘에 겨운 무거운 장비를 운반하며 말 한마디 없다. 물과 같이 흐르는 땀, 씻을 틈도 없다. 45자의 라파엘호가 바다에 내려질 때 모두의 손에는 묵주가 쥐어졌다.
상해로 갈 때 그리고 올 때 나는 무엇을 느낄 것인가. 우리가 중국 땅에 가는 것은 김 신부님께서 계셨던 상해의 어딘가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며 또한 보이지 않는 그분의 모습이지만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저 검푸른 바다를 향해 떠난다. 밤 10시가 지나 제주 외항에서 아라호가 라파엘호를 예인한다.
자정을 넘긴 새벽 3시, 나는 교체 승선하기 위하여 갑판의 선미 쪽으로 갔다. 사방은 어두움에 싸여 컴컴하여 보이는 건 라파엘호의 선수와 선미에 있는 촛불 같은 빛을 내는 두 개의 선등뿐이다. 이게 웬일인가? 두 개의 빛이 하나만 보이다가 둘 다 안 보인다. 쥐어짜는 소리로 나는 "주님이시여! 성모님이여! 자비로우신 성모님이여! 저 라파엘호를 보호해 주소서. 저 라파엘호 거친 풍랑에 잠기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권능을 믿습니다. 저 라파엘호에는 우리의 목자 두 사제와 평신도가 타고 있습니다. 154년전 조선의 수선탁덕이 목숨바쳐 목자를 인도하던 지극한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저희는 여기 왔나이다. 지금 저에겐 아무 힘도 없고 할 일도 없습니다." 나는 가지고 간 '김대건 성인의 영성' 9일기도와 한국 성인 호칭 기도, 묵주신공 그리고 정지용, 이해인, 홍윤숙, 최민순 신부 등이 쓴 김대건 성인과의 만남의 시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읽었다. 동트는 황해의 새벽바람 더욱 거세지고 검푸른 파도를 이리 저리 올라타고 내리는 라파엘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님! 살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주님. 망망대해를 순례하는 저희는 그 옛날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두 개의 돛이 찢어지고 28일 동안의 정처 없는 표류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느꼈습니다. 해가 머리를 내밀 무렵 라파엘호의 선상에서 힘차게 두 손을 번쩍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오히려 힘이 쑥 빠졌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안드레아를 극진히 사랑하셨나 봅니다. 그를 따르는 제주교구 순교 후예들의 정성을 들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얼굴 씻어 흘린 눈물자국 지우겠습니다. 빛은 생명이며 사랑인가 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 겨본 적이 없다. 요한 1,5)
4. 창파에 뜬 일엽주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은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현석문 등 모두 13명이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9월 11일의 항해일지는 "강한 바람과 폭풍우로 큰 선박에 연결된 굵은 밧줄이 절단되어 외로운 항해가 시작되었고, 돛도 없고 키도 일부분은 파손되었고, 승선한 사람은 보두 뱃멀미로 피곤하여 라파엘호를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없어 해류와 바람에 의해 표류가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9월 11일은 만 68세가 되는 나의 생일이다. 주님은 저에게 특은을 주시어 어제는 금가항 성당에서의 미사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감당키 어렵습니다.
순례를 통해서 나는 25세의 짧은 인생을 조국성화와 겨레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애국청년 김대건을 발견하였다. 그분의 신심과 웅대한 생애를 그저 흠모할 뿐이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한 해상순례는 제주교구의 행사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의 한 장에 기록될 일이다. 성지순례는 보고 듣고 행(見聞感=知行)하는 것이나 해상순례에서는 154년 전 김대건 신부님이 몸소 겪은 일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직접 체험하며 기도하는 것이기에 더욱 큰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10일, 송윤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