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현대에 들어와서 스턴(Laurence Sterne)에 대한 비평은 주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포스트모던적 성향에 집중되어 왔다. 많은 비평가들은 스턴의 작품, 특히 그의 ꡔ트리스트람 섄디ꡕ(Tristram Shandy)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살펴보면서 종전의 비평이 간과하고 있었던 많은 점들을 새로이 조명하고 있다. 그들은 우선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의 메타픽션적 성격을 지적하며, 이 작품을 “서사에 대한 서사” 또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Williams, 1033)로 규정하고 있다. 즉, 소설을 쓰는 과정과 화자 트리스트람이 토로하는 “소설쓰기의 어려움”(Segal, 132)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턴 비평은 이 작품에 나타난 해체성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주로 이 작품에 나타난 언어의 불확정적인 사용, 이야기의 불연속성(Miller, 386), 열린 결말, 실체 재현의 불가능성(Voogd, 283), 트리스트람이 공언하는 모든 규범에 대한 거부에 주목하면서 스턴을 상대성을 받아들이고 절대적 기준, 나아가 모든 종류의 가치체계(hierarchy)의 해체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적 접근이 종전에는 단지 기이하고 일관성 없는 작품으로 여겨지던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일조 하고 있다. ꡔ스턴의 트리스트람 섄디ꡕ에 나타난 절대성의 부인과 모든 인위적인 기준에 대한 불신은 이 새로운 비평방법이 드러낸 스턴문학의 본질적인 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턴의 이러한 면모를 단지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영국 성공회의 신부이기도 한 스턴이 절대자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선자로 만들거나, 그를 상황적 모순에 빠트리게 되기 때문이다.
스턴 작품에 나타난 상대성의 인정과 절대성의 부인이 곧 절대자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부인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스턴의 절대성의 부인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가치체계나 인간사에 국한되는 것이고, 이는 절대자의 의도나 섭리를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종교인의 겸허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자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세계의 상대성과 인간 세계에서의 절대성의 부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스턴은 자신이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을 축소하거나 확대한다. 즉, 스턴은『트리스트람 섄디ꡕ에서 작은 것을 크게, 큰 것은 작게, 중요치 않은 것은 중요하게, 큰일은 대수롭지 않게 다룸으로써 인간세계의 한계성과 상대성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스턴이 사용한 축소와 확대의 서술방식은 18세기에 널리 퍼지게 된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660년에 영국 왕립학술원(Royal Society)이 공식적으로 인가된 이후에 영국에서는 과학적인 사고를 숭상하고 오랫동안 내려온 마녀재판을 법으로 금지하는 등 합리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합리주의와 과학적인 사고는 자연 세심한 관찰을 중시하고 나아가 망원경과 현미경을 유행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무엘 존슨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 할 정도로 이 당시에는 현미경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기는 단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도구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당대의 사람들은 이 기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의 사물을 멀리서 보기도하고 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대해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스턴처럼 축소와 확대의 서술방식을 사용한 작가는 스위프트(Jonathan Swift)다. 『걸리버 여행기ꡕ(Gulliver's Travels)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걸리버가 맨 먼저 방문하게 되는 소인국들의 나라 릴리프트(Lilliput)를 통해서 스위프트는 멀리서 바라본, 즉 축소된 인간들의 군상을 그려냈고, 대인들의 나라 브롭딩낵(Brobdingnag)에서는 12배의 확대경(magnifying glasses)으로 인간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스위프트가 인간 세상을 이처럼 축소하고, 확대한 것은 풍자를 그 목적으로 한다. 즉, 스위프트는 인간의 왜소함을 거인의 시각으로 본 다음, 인간의 결점을 12배의 확대경을 통해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턴이 사용한 축소와 확대는 스위프트의 그것처럼 단순한 풍자의 수단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다. 본 논고에서는 스턴의 축소와 확대의 서술이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에 어떻게 나타나며, 발전되는지, 또 이를 통해서 본 스턴의 세계관은 어떠한 것인지, 포스트모던적 세계관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여행도중 만나는 수많은 사회계층의 사람들을 다루는 필딩(Henry Fielding)의 소설과는 달리 스턴이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직경 4마일의 작은 세계”(TS, 10)이며, 트리스트람이 만나는 또는 만났던 사람들은 몇 명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극히 극소수다. 또한 그의 작품의 무대도 유럽 여행을 묘사하는 제 7권을 제외하고는 섄디 홀(Shandy Hall)의 서재, 응접실, 침실 등의 좁은 공간이며,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중요치 않은(?) 사소한 몇 가지 에피소드에 국한된다.
스턴이 그리는 이러한 축소된 세계는,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인 삼촌 토비(Toby)가 축소해 놓은 세계에 비하면 그래도 큰 편이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은퇴한 후 하인 트림(Trim)과 함께 자신의 집 잔디 볼링장에서 모형전쟁 놀이에 열중하는 토비의 세계는 땅 몇 평으로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충족되는 아주 작은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토비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따라 도시, 성채, 교회, 다리 등이 모형으로 축소되고 전쟁에 필요한 대호, 화약 등은 월터의 장화, 창문의 추, 트림의 모자와 담배 파이프로 대치된다. 또한 토비는 이 전쟁 놀이를 신문에 기록된 전쟁기사에 따라서 엄격하게 지시하고 트림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이 놀이를 진행시킨다.
나의 삼촌 토비와 상사(트림)는 평행호를 긋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이 그들의 평행호를 긋는 것과 같은 지점, 거리에서 그으며, 토비가 일간 신문에서 읽은 내용에 따라서 (적에 대한) 접근과 공격을 조절한다. 그들은 공격하는 동안 내내, 연합군과 똑같이 진행하고 있다. (TS, 536)
토비는 잔디 볼링장에서 실제의 전투를 똑같이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전쟁놀이는 실제의 전쟁에 의해서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만일 연합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말보로 공작(Duke of Marlborough)이 방어물을 만들면, 이 전쟁놀이의 조수인 트림도 역시 방어물을 만들고, 능보가 파괴되면 트림은 그의 곡괭이로 모형 능보를 부순다. 심지어 배달이 지연되어 신문을 받지 못하는 날에는 이 게임은 중단되고, 실제의 전쟁이 평화협정에 따라 끝이 났을 때 그들의 전쟁놀이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스턴이 토비의 이러한 전쟁 놀이를 묘사하는 것은 실제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정서적인 공허함”(New, 53)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스턴은 전쟁을 이처럼 축소시켜서 전쟁의 허황됨과 부조리함을 지적하고, 나아가 인간사의 일이 하나의 게임, 놀이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턴이 토비의 전쟁놀이를 토비의 하비홀스(hobbyhorse)라고 지칭하는 데서도 엿보인다. 하비홀스란 창녀, 인간을 지배하는 열정 등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머리가 달린 막대기로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쟁이란 죽음과 슬픔과 같은 인간 비극의 근원이지만, 하비홀스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실제 전쟁의 축소판인 토비의 모형 전쟁놀이는 분명 하나의 유치한 게임, 놀이임에 분명하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토비의 모형전쟁놀이를 통해서 축소하고 있는 스턴은 릴리프트에서의 걸리버의 시각을 갖고 있다. 축소된 인간을 대변하는 릴리프트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음모, 정쟁, 타국과의 전쟁은 걸리버에게는 한낮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고 그 동기는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를 축소하여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스턴의 이러한 태도는 아만다(Amanda)와 아만더스(Amandus)라는 두 연인의 인생에 대한 묘사에서도 나타난다.
잔인한 부모와 운명에 의해서 서로 헤어진 두명의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이야기 . . .
아만더스--그 남자
아만다-- 그녀
서로의 행방을 모르며
그는-- 동쪽
그녀는-- 서쪽
........................................
그들은 서로의 팔에 달려들며 너무 기뻐 죽었네. (TS, 627-28)
두 명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져서 서로를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해후를 하고 너무 기뻐서 죽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어찌 보면 전형적인 로맨스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로맨스로 받아들일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선 이 이야기에는 작가가 갖고 있을 법한 비극적인 두 주인공에 대한 동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스턴은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부모가 둘의 결합을 왜 반대하였는지, 그들에게 닥친 잔인한 운명이 무엇인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대폭 축소, 삭감하여 이야기의 개요만을 간략하게 구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축소의 결과 독자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그들의 처지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비극을 먼 거리에서 관조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인생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고 말한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의 말처럼, 축소되어 제시된 이들의 운명을 머리로 생각하는 독자는 이들의 운명에서 비극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희극적인 팬터마임을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스턴은 이처럼 커다란 사건을 축소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다루었던 반면, 사소한 사건은 확대하여 그 파급효과를 제시함으로써 사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월터의 의도와는 달리 지어진 트리스트람이란 이름을 바꿀 수 있는지 문의하고자 월터, 토비, 목사 요릭이 참석한 신학자들의 저녁 만찬 때의 벌어진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의 친척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한창 신학자들간에 토론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하인이 후식으로 식탁 위에 갖다 놓은 갓 구운밤이 굴러서 퓨타토리우스(Phutatorius)의 벌어진 바지 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퓨타토리우스는 사타구니부분에서 점차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남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쳐다 볼 수 없는 퓨타토리우스는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고자 그의 지식, 사고, 추론, 논리를 총 동원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도롱뇽이 그의 사타구니 부분에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미치자,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사타구니의 밤을 꺼내 집어던지게 된다. 이때 스턴은 아이러니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소한 사건이 정신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 사소한 사건이 인간과 사물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고 지배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 공기처럼 사소한 일들이 우리 마음에 신념을 불어 넣어주고 그것을 확고부동하게 심어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TS, 383)
밤이 야기한 뜨거운 통증의 원인을 몰라 점잖은 자리에서 소동을 일으킨 퓨타토리우스는 요릭이 의도적으로 밤을 자신의 바지 안에 넣었다고 믿게된다. 이 결과 그는 요릭과 철천지원수가 되고 요릭을 죽음으로 이끄는 중상모략꾼이 된다. 스턴이 이 사소한 사건을 이처럼 자세히 묘사한 이유는 이 사건의 결과가 미치는 파장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며, 인간의 지성이란 이처럼 단순한 사건의 원인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즉, 단순한 사건의 확대를 통해서 스턴은 이성적 존재라고 자부하는 인간이 실상 보잘 것 없는 존재이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공기처럼 사소한 사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소한 일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스러켄벌지우스의 이야기(Slawkerbergius’s tale)다. ꡔ트리스트람 섄디ꡕ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암시하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인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디에고(Diego)라는 사람이다. 그는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코를 가지고 있는데, 이 코를 본 스트라스버그(Strasburg)의 주민들은 이 코의 진위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급기야 신학자들은 디에고의 코를 신이 선사한 진짜 코라고 믿는 Nosarian파와 신도 자연의 법칙을 거슬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코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Anti-nosarian파로 나누어 지게된다. 심지어 그들은 다른 모든 스트라스버그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디에고가 돌아오는 날, 그의 코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게 위해서 도시를 비우고 디에고를 따라간다. 그 결과 프랑스는 텅 비어있는 스트라스버그를 손쉽게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즉, 스턴은 사소한 논쟁이 종파를 나누고 국가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에피소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에피소드와 ꡔ걸리버 여행기ꡕ의 릴리프트에서 벌어진 분쟁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릴리프트에서는 계란을 어느 쪽으로 깨는 것이 올바르냐 하는 문제로 계란은 큰 쪽으로 깨야한다고 주장하는 big-endian파와 작은 쪽으로 깨야한다는 small-endian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 두 종파의 싸움으로 한 명의 왕이 처형당하고 한 명의 왕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대립, 그리고 카톨릭을 옹호하다 목숨을 잃은 찰스(Charles) 1세, 명예혁명으로 왕좌에서 물러난 제임스(James) 2세의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나타낸 이 에피소드는 사소한 사건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스위프트와 스턴의 차이는 스위프트는 릴리프트의 에피소드를 통해 사소한 일이 종파간의 대립을 가져온 상황을 풍자하였지만, 스턴은 스러켄버지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사에서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일반 소설에서와는 달리 스턴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확대 제시한 것 중의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제스추어(gesture)다. 스턴은 등장인물의 몸짓 하나하나를 확대하여 세밀히 묘사하고 이 몸짓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트림이 요릭의 설교문을 읽을 때 그의 몸자세, 팔의 위치, 몸의 각도, 발의 위치와 양발에 실은 무게의 비율을 독자에게 자세히 알려주며, 트림의 이 자세가 청중을 가장 설득할 수 있는 자세임을 강조하고 이를 따르라고 충고까지 한다. 이러한 제스추어의 확대제시는 트리스트람의 코가 뭉개졌다는 소식을 듣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진 월터(Walter)의 묘사에서도 나타난다. 스턴은 월터의 오른손이 그의 양 눈의 대부분을 가리고 그의 코는 이불과 닿아 있다고 말하며, 침대 바깥에 쳐져있는 월터의 왼팔과 정강이뼈를 누르고 있는 그의 오른쪽 다리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한다. 스턴은 백마디 말보다 월터의 이러한 몸동작을 통해서 그의 좌절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스턴이 등장인물의 몸동작이나 자세를 이처럼 확대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몸동작은 “인간의 심리적, 육체적 교차점”(Mckillop, 187)이고, 따라서 어떠한 사건보다는 “인간 심리의 역사”(history of mind)를 쓰고자 하였던 스턴에게는 무엇보다도 몸동작 하나하나의 묘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턴은 육체와 정신의 긴밀한 관계를 다음과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옷의 겉감과 안감과도 같다. 전자를 구겨보아라. 당신은 후자도 구길 것이다”(TS, 189). 그러나 스턴은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소한 몸동작 하나가 당사자의 인품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행동할 때나 말 할 때의 몸의 태도나 움직임이 내면의 사람됨됨이를 보여줄 수 있다”(497). 따라서 우리는 미망인 워드맨(Wadman)이 옷을 입는 도중 발을 찰 때, 그녀가 사랑에 빠진 것을 알 수 있고, 식사시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파리를 죽이지 않고 창 밖으로 날려보내는 토비를 보고 우리는 그의 선한 인간성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턴이 등장인물의 몸동작을 확대하여 세밀히 묘사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월터를 살펴보자. 예외 없이 이 장면에서도 스턴은 월터가 가발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는 장면과 이때의 그의 표정을 세밀히 묘사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월터는 오른손으로 가발을 벗고 왼손으로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고 하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 결과 월터의 몸은 갈 짓자 모양이 되고 월터는 짜증이 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 장면은 육체적인 불편함이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지만,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스턴은 사소한 일이 커다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의 아버지가 그의 가발을 오른손으로 벗었는지 또는 왼손으로 벗었는지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 거대한 왕국을 분열시켰고 이 왕국을 통치하는 왕의 왕관이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지게 하였소. (TS, 187)
여기서 우리는 스턴의 문학이 기존의 가치체계의 전복을 의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턴은 커다란 사건을 축소 제시함으로써, 커다란 일이 실상 그리 중요치 않을 수 있고, 제스추어와 같은 사소한 사건이나 행동을 확대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인간사에서는 아주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축소판인 극미인(Homunculus)에 대한 스턴의 견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트리스트람은 자신이 처한 불행의 근원을 커다란 사건보다는, 극미인 시절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에서 찾는다. 오늘날 정자에 해당하는 극미인은 에니멀 스피리트(Animal Spirit)의 호송을 받으며 어머니의 자궁으로 여행을 하게 되어있지만, 아버지와의 잠자리도중 시계태엽을 감았느냐는 어머니의 엉뚱한 질문으로 혼비백산한 에니멀 스피리트가 도망가는 바람에 트리스트람은 극미인 시절 홀로 그 험난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정신적인 상처는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한 지금에도 트리스트람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인생을 살게 하였다는 것이 트리스트람의 주장이다. 어머니의 사소한 질문이 이러한 중대한 결과를 미쳤다고 주장하는 트리스트람은 극미인이 작지만, “똑같은 (신의)손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똑같은 자연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으며 . . . 인간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3)고 말하며 극미인을 작다고 대수롭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를 서슴치 않는다. 즉, 트리스트람은 중요성이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극미인 시절에 트리스트람이 겪었던 외로운 여행이 훗날 그를 인생의 외로운 여행자로 만들었듯이 크고 작은 것 사이에는 상호연관성이 있다. 스턴의 축소와 확대의 서술기법이 근본적으로 커다란 것과 작은 것은 서로 상응한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예는 작품전반에 걸쳐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도시로 가길 원하는 아내가 못마땅한 월터는 그녀의 소망이 잘못되었음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즉, 사람의 피가 머리로 너무 많이 몰리면 결국 뇌일혈로 죽듯이, 국가의 머리에 해당하는 수도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게 되면 국가가 뇌일혈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월터의 말이 일종의 궤변으로 들리지만, 우리는 월터의 비유를 통해서 신체의 구조와 국가의 구조가 서로 상응하듯이 모든 작은 것들과 큰 것 사이에 이러한 교감의 가능성이 있음을 스턴이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작은 개인적인 조직이나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커다란 조직에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는 믿는 월터는 집안의 작은 일과 우주의 운행사이에도 이러한 교감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디나(Dinah) 아주머니가 집안에서 고용한 마부와 결혼한 이유를 금성(Venus)이 퇴행한다는 사실에서 찾고있다. 월터는 금성이 퇴행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Corpernican system)에 따라서, 디나도 퇴행하여 신분이 낮은 마부와 결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섄디의 체계(Shandean system)라고 부른다. 별의 운행과 집안일이 이처럼 밀접하게 상응한다고 믿기 때문에 월터는 남자 산파 슬롭(Slop)이 부엌에 있다는 오바디아(Obadiah)의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퇴행하는 행성이 나의 이 불행한 집안 위에 머물어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어.”(TS, 241)
큰 것과 작은 것,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사이에는 이러한 상호 교감이 있음을 보여주는 철학을 스턴은 세르반테스적인 유머라고 부르며 이 유머의 본질을 어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세르반테스적인 유머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어리석고 사소한 사건과 중요한 사건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생겨난다”(Letters, 17). 그러나 이러한 교감은 큰 것과 작은 것 사이나,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사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스턴은 우리가 서로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나, 우월하고 열등한 것 사이에도 이러한 교감이 있음을 역설한다.
사랑과 전쟁과의 관계가 그 중의 하나다. 토비는 평화협정에 따라 더 이상의 전쟁놀이를 할 수 없게 되자, 또 하나의 전쟁놀이로 미망인 워드맨과의 사랑을 시작한다. 생명의 근원인 사랑과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듯이 사랑도 언제 빠져들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과 전쟁은 같은 것이라는 트림의 놀라운 발견(?)에 설득 당한 토비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러 워드맨의 집안으로 트림과 함께 행군하는 것이다.
서로 정반대 되는 것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며 이들을 결합하려는 스턴의 시도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구조에도 나타나 있다. 본 이야기의 진행(progress)과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여담(digression)의 병존이 그것이다. 여담이란 아트리지(Attridge)가 주장한 것처럼 그 용어 자체에 “종속과 중요치 않은 그리고 없어도 된다는 의미”(Attridge, 218)를 내포하고 있다. 즉, 여담은 이야기 전개상 중요치 않은 것이고 본 이야기만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식적인 개념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본 이야기를 압도하는 여담의 사용은 본 이야기와 대등하게 취급되고 있고 이 여담들은 이 작품에서 스턴이 말하고자하는 내용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제를 보완하고 이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브조이(Lovejoy)의 지적대로 18세기의 널리 퍼져있었던 세계관은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론이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도 「인간에 관한 에세이」(“Essay on Man”)에서 기술하였듯이 모든 존재간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존재의 하위 단계에 속하는 존재는 윗단계의 존재의 뜻을 이해 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즉, 인간은 천사나 신의 뜻을 이해 할 수 없고 동물은 인간의 뜻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턴은 존재의 대사슬의 높은 단계에 있는 인간과 낮은 단계에 있는 동물과의 유사성을 찾아내고 이 둘을 연결하고, 결합시키고자 한다. 그 결합의 대상의 하나가 이 작품의 화자 트리스트람 자신이다.
실연과 슬픔으로 실성한 마리아를 트리스트람이 만나는 장면에는 많은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스턴의 감상주의적인 면이 잘 드러난다. 마리아의 비극적인 운명과 그녀의 애틋한 처지는 트리스트람으로 하여금 동정의 눈물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주의적 분위기는 마리아가 자신의 염소와 트리스트람을 반복적으로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하면서 깨진다. 마리아는 욕정의 상징인 염소와 자신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트리스트람을 번갈아 쳐다봄으로써, 트리스트람과 염소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트리스트람도 이를 알아차리고 마리아에게 “어떠한 닮은 점을 발견하였는가?”(793)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에 내재된 동물성을 인정하고 있다.
존재의 단계(hierarchy)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들이 실은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말을 타고있는 목사 요릭을 통해서 스턴은 제시한다. 비쩍 여위고 잘 달리지 못하는 요릭의 말과 요릭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켄타우르스처럼 하나의 몸”(20)이다. 셔버트(Sherbert)는 “켄타우르스와 같은 목사가 메니피언 풍자의 이미지”(Sherbert, 125)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문체의 공존을 메니피언 풍자의 특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위프트도 걸리버 여행기에서 후이늠(Houyhnhnms)의 나라에 사는 탐욕스럽고 더러운 인간 야후(Yahoo)를 통해서 인간의 동물성을 보여주어 인간에 대한 가혹한 풍자를 한다. 그러나 스턴의 경우에 있어서 반인 반마인 켄티우르스는 어울리지 않는 것의 공존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상징이나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풍자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스턴은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 위에 탄 요릭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나아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말 위에 올라탄 켄타우르스와 같은 요릭은 이질적인 “모든 것을 통합하고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TS, 21)
이때 스턴의 통합은 펀(pun)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요릭은 말 위에서 설교문을 작성(compose)할 수도 있고, 기침을 가라앉힐 수(compose)도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마음을 편히 먹고(compose himself) 잠을 잘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천천히 달리는 이 말 위에서 설교문의 논지를 구상(draw up)하기도 하고, 바지에 난 구멍을 꿰매기(draw up)도 한다. 이러한 펀의 사용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만 있는 것이 아니다. 18세기의 에디슨(Addison)은 펀을 단어의 유사성을 통한 저차원적인 말장난, 또는 “거짓 위트”(Spectator, No. 61)라고 규정한다. 스턴을 메니피언 전통에서 파악하고 있는 셔버트도 펀을 “언어의 부수적인 것을 이용하는 위트의 저차원적인 언어적 산물로 스턴의 문학의 주요한 도구중의 하나”(Sherbert, 124)라고 말함으로써 스턴이 펀을 사용한 것은 언어간의 피상적 유사성을 이용한 결과라고 암시하고 있다.
셔버트가 말한 것처럼 스턴의 문학에서 펀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스턴의 펀은 단어의 외형적인 유사성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스턴은 단어의 외형적인 유사성뿐만 아니라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적인 면을 펀을 통해서 서로 연결, 통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리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는 펀을 통해 그 단어들간의 의미론적인 통합을 보여주는 예는 “문지름”(rub)과 “사랑”(love)의 펀이다.
요릭이 전쟁터에서 무릎부상을 입자 어느 베긴회(Beguine) 수녀는 그를 어느 농가에서 치료받도록 주선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여 그의 상처를 돌본다. 수녀가 방문한 어느 날에는 농부의 가족이 모두 외출하여 집을 비우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서 가려움증에 고통받고 있던 트림은 그녀에게 자신의 다리를 문질러 달라고 요청한다.
그녀가 문지르면(rub) 문지를수록, 그녀가 더 길게 문지를수록, 그녀는 나의 혈관에 더 많은 열정의 불을 지폈다. 마침내 전번보다 더 길게 두 세 번 문지르자 나의 열정은 최고조로 올라, 그녀의 손을 잡았다. (TS, 703)
수녀가 트림의 다리를 문질러(rub) 주었을 때, 사랑(love)의 불꽃이 타올랐다는 트림의 고백을 전한 후 스턴은 “이 이야기가 천지창조 이래로 쓰여진 모든 사랑과 로맨스의 핵심을 담고 있다”(704)고 말하여 사랑(love)의 본질을 문지름(rub)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펀은 rub와 love라는 단어의 발음에 유상성에만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본질적인 면을 rub와 love의 의미적 통합을 통해 스턴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스턴은 펀을 통해서 저급한(?) 육체와 고결한(?) 사랑이라는 정신적 현상을 연결,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턴은 개념을 지시하는 단어(word)나 추상적인 개념 자체에 물질성을 부여하고, 때에 따라서는 이것들을 관념의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을 오가게 끔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트리스트람은 자신의 “생각”(idea)을 공중으로 던졌다 받을 수 있으며, 그가 말하는 에니멀 스피리트는 “헤이고매드”(hey-go-mad)처럼 달릴 수 있고, 하비홀스는 실제의 말로, 아니마(anima)는 웅덩이에서 노닥거리는 올챙이로 변화되기도 한다. 이처럼 단어나 개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것은 스턴과 흔히 비교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불란서 작가 라블레(Rabelais)나 스위프트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라블레의 ꡔ가르강뛰아와 팡타그루엘ꡕ(Gargantua et Pantagruel)에서는 말(word)이 너무나 추워 얼었다가, 추위가 풀릴 때 녹기도 하고, 스위프트의 ꡔ통 이야기ꡕ(A Tale of a Tub)의 화자는 자신이 하는 말이 타인에게 더 많은 인상(impression)을 남기기 위해서는 높은데 올라가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word)이 높은데서 아래로 떨어지면 아래에서 그 말을 받는 사람의 몸에 그 자국(impression)이 더 크게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말에 물질성을 부여한 것은 높은 곳에서 말해야 사람들이 그 말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을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스턴처럼 개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통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스턴은 작은 것이나 사소한 것을 확대하고 큰 것이나 중요한 것을 축소하여,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나아가 전통적이 가치체계(hierarchy)안에서 높고 낮은 것, 고결하고 비천한 것, 또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 사이의 절대적 차별성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스턴의 이러한 세계관은 그가 쓴 「자두나무에 관한 명상」(“Meditation on a Plum Tree”)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떠한 관점이 당신의 상상력을 가장 많이 자극할지 말하기는 어렵다. 태양계나 물 한 방울 중 어느 것이 우리의 고귀한 명상의 주제를 제공할지 말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가 망원경이나 현미경중 무엇에 더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지 말이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한한 힘과 지혜가 대규모로, 후자의 경우에는 작은 세계를 통해서 보인다. (Stapter, xii)
사물을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과 사물을 가까이에서 확대하여 관찰하는 현미경적인 관점은, 뉴(New)도 지적한 것처럼, 스턴에게 크기란 단지 상대적인 문제이며 그 중요성을 결정하는 척도는 아니라(New, 598)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의 물방울도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작다고 해서 물방울의 세계가 대 우주의 세계보다 열등한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우리가 어느 세계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릴리프트의 걸리버가 될 수도 있고, 브롭딩낵의 걸리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크기가 다른 세상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곧 이 세상은 다중성을 갖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모든 것을 축소해서 보거나 확대해서 볼 수 있듯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월터가 토비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두 개의 손잡이를 갖고 있다”(118)고 한 점이나, 요릭의 절친한 친구 유제니우스(Eugenius)가 “(이 세상에는)깨끗한 길과 더러운 길 두가지 길이 있다”(258)라고 말한 것은 세계의 다양성으로 인한 한가지 절대적 해석의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스턴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수잔나의 절묘한 어법을 통해서 보여준다. 어린 트리스트람을 혼자 소변보게 하다가 그의 성기를 다치게 한 그녀는 공포에 질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nothing) 남아있지 않아. 수잔나는 외쳤다. 아무것도(nothing) 남아있지 않아. 내가 시골로 도망치는 것밖에는”(TS, 449-50). 여기서 수잔나가 말하는 아무것도(nothing)는 트리스트람의 성기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을 지칭하는지 애매모호하다. 자신의 성기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해 작품 내내 트리스트람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nothing”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독자도 끝내 알 길이 없다.
스턴이 이 작품에서 즐겨 사용하는 별표(asterisk)는--스턴은 어느 특정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을 때 그 단어대신 별표(*)를 사용한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자신의 아내가 남자산파를 원치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월터가 토비에게 불평하자, 토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형수는 남자가 그녀의 ****에 가까이 오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어요’라고 삼촌 토비가 말했다. (별표대신에) 대쉬(--)를 해보아라. 그러면 이것은 돈절법이 될 것이다. 대쉬를 없애고 엉덩이라고 써넣어 보라. 그러면 음란한 말이 될 것이다. 엉덩이란 단어를 지우고 ‘가려진 부분’(covered way)이라고 써넣어 보라. 그러면 은유가 될 것이다”(TS, 116). 트리스트람의 이 말은 별표를 해석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을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트람이 별표를 사용한 것은 독자를 혼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언명하였듯이 별표는 그가 “한낮의 태양이 가져다주는 빛에도 불구하고 세상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두운 골목에 걸어 놓은 것”(TS, 558)이다. 스턴은 밝은 태양빛 속에서 사물의 의미를 한가지만 보는 눈먼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알리는 방편으로 별표를 사용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를 당황케하는 그의 별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빛인 것이다.
사물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의 수용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할 때 사물의 의미는 올바로 파악되지 못하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불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트리스트람은 제니(Jenny)와의 싸움이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기인함을 고백한다. “우리 이외에 다른 모든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하는 제니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끊임없이 싸운다. 그녀는 자신의 외부를 보려하고 나는 그녀의 내부를 보려한다. 그녀의 가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456-57). 사물을 축소해서 보기도 하고 확대해서 보아야 하는 것처럼, 한 가지 사물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모두 보는 것이 가장 사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위에서 트리스트람은 제니와 의견의 불일치를 보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트리스트람이 소개하는 고트(Goth)족들의 일화는 상반되는 관점의 수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고 있다. 트리스트람에 따르면 고트족은 현명하게도 국가의 중대사를 반듯이 두 번 논한다. 먼저 술을 마시면서 논하고, 다음에는 맑은 정신상태에서 논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들의 논의에 열정이 담겨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리분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트리스트람도 이들의 방식대로 두 가지 대조적인 상태에서 집필한다고 고백한다. “나는 배부른 상태에서 글의 반을 쓰고 나머지 반은 배고픈 상태에서 쓴다. 또는 배부른 상태에서 글을 다 쓰고, 배고픈 상태에서 글을 고친다. 또는 배고픈 상태에서 글을 다 쓰고, 배부른 상태에서 고친다”(TS,524). 겉으로 보기에는 사뭇 우스꽝스러운 트리스트람의 이러한 진술은 육체가 정신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본다면, 단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스턴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배부름과 배고픔이라는 육체의 두 극단적인 상태를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의 동시적 수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의 다양성과 관점의 다양성의 수용은 확실성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스턴은 모든 것을 극단적인 두 축을 중심으로 살피지만,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독자가 위의 에피소드에 소개된 수잔나나 토비의 말의 의미를 어느 한가지로 확정지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턴이 확실성을 거부하고 모든 것의 불확정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기존의 규범이나 규칙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고, 이러한 거부는 글쓰기 작업에 통용되었던 문학적인 관례나 룰의 거부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트리스트람이 문학상의 모든 룰을 거부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때로는 자신의 변덕대로 글쓰기를 고집한 결과, 이 작품에서는 장(chapter)이 뒤바뀌거나, 서문이 작품의 중간에 배치되거나, 빠진 쪽이 나타나거나, 그림, 검은 쪽, 마블링한 쪽, 백지 등이 나온다. 스턴을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라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스턴의 이러한 문체적인 실험이다. 그들은 확실성을 거부하는 스턴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문학상의 룰을 의도적으로 전복하여 소설임을 거부하는 소설, 즉, 반소설(anti-novel)을 썼다고 말한다.
램(Lamb)도 스턴의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요인에 주목하면서 스턴의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스턴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할 때, 양극단을 오고 간다”(Lamb, 10). 램의 지적대로 어느 한가지 명확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고 양극단을 오고가며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스턴의 모습은 회의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스턴의 회의주의는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진리의 부재에 절망하는 회의주의, 더더욱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스턴의 회의주의는 진리에 접근하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고, 또한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간이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턴의 회의주의는 진리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인식론적 도구다. 인간의 이성이란 자연의 작은 현상하나 제대로 설명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한 트리스트람의 고백은 인간의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수수께끼와 알수 없는 것들 가운데서 살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아주 명백한 것에도 뛰어난 통찰력 있는 자들도 알아차릴 수 없는 어두운 면이 있다.”(TS, 350)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하는 스턴의 철학은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신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는 신앙주의(fideism)의 전통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일종의 “완화된 형태의 회의주의”(Parnell, 226)인 신앙주의는 모든 판단을 신에 의거하고 모든 종류의 확실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베르스(Wehrs)의 지적대로 회의주의야말로 스턴의 종교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성에 대한 갈망 자체가 신의 속성을 취하려는 시도로서 잠재적으로 이단적인 성향”(Wehrs, 137)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III
스턴은 ꡔ트리스트람 섄디ꡕ에서 하찮은 것을 확대경으로 확대하여 제시하고, 크거나 중요한 것은 멀리서 바라보듯이 축소하여 제시하였다. 그 결과 스턴은 사소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오히려 중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가 중시하던 일들은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스턴은 전통적인 가치체계(hierarchy)안에서 높고 낮은 것, 서로 상반되는 것 사이에는 실상 근본적 차이가 없고 오히려 상호 대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이들간이 근본적인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들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통합의 근저에는 신이라는 무한자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고, 오직 상대적인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스턴의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절대자, 절대적 가치의 부재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인간이 만든 가치나 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스턴의 문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스턴은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가 부정한 것은 인간이 만든 교리(dogma), 구별, 차이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인용 문헌
Attridge, Derek. Peculiar Language: Literature as Difference from the Renaissance to James Joyce. New York: Cornell Univ. Press, 1988.
Lamb, Jonathan. Sterne’s Fiction and the Double Principl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9.
McKillop, A. D. The Early Masters of English Fiction. Lawrence: Univ. of Kansas Press, 1956.
Miller, Hillis. “Narrative Middles.” Genre 11(1978): 375-87.
New, Melvyn. Laurence Sterne as Satirist. Gainsville: Univ. of Florida Press, 1969.
_______. “Laurence Sterne and Henry Baker’s The Microscope Made Easy.” Studies in English Literature 10(1970): 591-604.
Parnell, J. T. “Swift, Sterne, and the Skeptical Tradition.” Studies in Eighteenth-Century Culture 23(1994): 221-42.
Segal, Ora. “On the Difficulties of Novel-Writing.” Hebrew Univ. Studies in Literature 1(1973): 132-58.
Sherbert, Garry. Mennipean Satire and the Poetics of Wit. New York: Peter Lang, 1996.
Stapter, Paul. Laurence Sterne--sa Personne et ses Ouvrages. Paris, 1870.
Steele, Richard and Addison, Steele. Selections from the Tatler and the Spectator. Penguin Books, 1982.
Sterne, Laurence. The Letters of Laurence Sterne. Ed. Lewis Perry Curtis. Oxford: Clarendon Press, 1935.
______. 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Eds. Melvyn New and Joan New. 3 Vols. Gainsville: Univ. Press of Florida, 1978-1984.
Voogd, Peter. “Laurence Sterne, the Marbled Page, and the Use of Accidents.” Word and Image 1(1985): 279-87.
Wehrs, Donald. “Sterne, Cervantes, Montaigne: Fideistic Skepticism and the Rhetoric of Desire.” in New Casebook. Ed. Melvyn New.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2.
Williams, Jeffrey. “Narrative of Narrative.” MLN 105(1990): 1032-45.
The Aesthetics of Reduction and Enlargement in Laurence Sterne
Abstract Il-Yeong Kim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veal Sterne’s world-view and his religious basis by analyzing Sterne’s reduction and enlargement of his materials in Tristram Shandy, Sterne’s masterpiece. Sterne employed a telescopic vision as well as a microscopic one, which led him to present his materials in a reduced or an enlarged condition: he reduced the great or important things, while enlarging the trivial or unimportant ones.
As a result of this reduction and enlargement, Sterne reveals the importance of the trivial, while proving the triviality of the great, thus making our hierarchism or value system collapse. In Sternean world, nothing is great or trivial; everything is equal, and there is no essential difference between the great and the trivial.
This Sternean principle can apply to the seemingly contrastive values such as love and war, man and beast, body and soul, and so on, which are one and the same; if there is any difference, it is only relative one.
The fact that there is no real difference between things in this world led Sterne to reject the absoluteness of man-made value systems, while making him deconstruct and subvert them. Owing to Sterne’s denial of the absolute, modern critics tend to regard Sterne as one of postmodern writers. Sterne’s denial of the absolute, however, is confined to the sublunary world; it does not include the Absolute Being, the Christian God. In short, contrary to the opinion of postmodern critics, Sternean rejection of the absolute was derived from his fideistic skepticism, which was characterized by its doubt of everything except the existence of God.